Silla > History Cheat Sheet > 地理志ꜛ > 0369 七國 > 南加羅
 
단군설화의 기원
ᐥ단군설화는 중국의 위만이 평양으로 건너와 세웠다는 위만조선의 건국설화에서 비롯되었다.ᐥ
 
-0033 日本書紀(720)
任那國遣蘇那曷叱知令朝貢也 임나국이 소나갈질지를 보내어 조공했다. 任那者去筑紫國二千餘里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리 북쪽에 있는데 (축자와는)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의 남서쪽에 있다. ▐ 일본서기에서 임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여기서의 임나는 축자 및 계림과의 상대적 위치로 보아 남가라를 뜻한다. 이것이 임나의 첫번째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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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8 日本書紀(720)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의부가라국왕(意富加羅國王)의 아들이다.” 활목천황이 듣고 도노아아라사등에게 “너의 본국의 이름을 고쳐서 어간성천황의 이름을 따라 국명으로 삼아라.”라고 말하였다. 그 국호를 미마나국(彌摩那國)이라 함은 이것이 연유가 된 것이다. ▐ 任那는 みまな라 발음한다. 따라서 彌摩那는 任那와 같은 말이다. 意富加羅國은 남가라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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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수로왕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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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三國史記(1145)
김유신은 왕경인이다. 12세조 수로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후한(後漢) 건무 18년 임인 구봉(龜峯)에 올라 가락(駕洛)의 9촌을 보고는 마침내 그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고 하였다가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자손들이 서로 이어져 9세손 구해에 이르렀는데, 혹 구차휴라고도 하며 유신에게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는 신라와 더불어 같은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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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석이정전(釋利貞傳)
伽倻山神正見母主 乃爲天神夷毗訶之所感 生大伽倻王惱窒朱日金官國王惱窒靑裔二人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곧 천신인 이비가지에게 감응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 두 사람을 낳았다. ▐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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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7 三國史記 가야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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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三國志 晉·陳壽)
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구야)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이 있어서, 弁韓과 辰韓의 합계가 24國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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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三國志 晉·陳壽)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依山島爲國邑 舊百餘國 漢時有朝見者 今使譯所通三十國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里 始度一海 千餘里至對馬國 (대방)군을 떠나 왜에 가려면 해안을 따라 한국(마한)을 지나 남쪽으로 간 뒤 다시 동쪽으로 7천여 리를 가면 북쪽 해안에 구야 한국이 있다. 여기서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에 이른다. ▐ 여기에 나오는 7천여리는 구야 한국에서 대마도까지 거리의 7배로 보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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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1~0309(<0209) 三國史記(1145)
浦上八國謀侵加羅 加羅王子来請救 포상의 여덟 나라가 가라를 침입하려고 하자 가라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 삼국사기에는 포상 8국의 침공을 받은 나라를 세 개의 국명으로 표기하였다. 신라본기에서는 加羅라 했고 물계자 열전에서는 阿羅國이라 했으며 이 사건과 연결된 것으로 보이는 볼모는 신라본기에서 加耶에서 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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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 왜의 7국 4읍 정복
0391 왜의 7국 4읍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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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03(<-249) 日本書紀(720)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남가라(南加羅)‧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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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1-03(<-249) 日本書紀(720)
일본서기의 南加羅는 삼국지의 狗邪에 대응된다. 삼국지는 南加羅를 南狗邪로 구별하지 않고 그냥 狗邪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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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0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414)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加羅)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 뒤에 安羅 관련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으므로 여기서의 加羅는 南加羅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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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이전 (<532) 三國史記(1145)
금관국(金官國)의 왕인 김구해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 아들인 노종, 둘째 아들인 무덕, 막내 아들인 무력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인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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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06 日本書紀(720)
근강모야신이 군사 6만을 이끌고 임나에 가서 신라에게 멸망당한 남가라(南加羅)·녹기탄을 다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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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06 日本書紀(720)
일본서기의 南加羅는 삼국사기의 金官國에 대응된다. 삼국사기는 金官國을 加耶, 駕洛, 南加耶 등으로도 칭했다. 삼국사기의 加耶나 駕洛은 삼국지의 狗邪처럼 두 개의 가라를 구별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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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03 日本書紀(720)
근강모야신을 안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명령을 내려 신라에게 남가라(南加羅)와 녹기탄을 다시 세우도록 권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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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04 일본서기
상신은 4개의 촌(금관·배벌·안다·위타 金官·背伐·安多·委陀가 4개 촌이다. 어떤 책에는 다다라·수나라·화다·비지 多多羅·須那羅·和多·費智를 4개 촌이라 하였다)을 노략질하여 빼앗고 사람과 물건을 다 가지고 본국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이 “다다라 등의 4개 촌을 노략질하게 한 것은 모야신의 잘못이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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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4 日本書紀(720)
남가라(南加羅)는 땅이 협소하여 불의의 습격에 방비할 수 없었고 의지할 바도 알지 못하여,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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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7 日本書紀(720)
신라에게 빼앗긴 나라인 남가라(南加羅)와 녹기탄 등을 취하여 본래대로 돌이켜 임나에 옮기고, 길이 부형의 나라가 되어 항상 일본을 섬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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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 ᑅ 三國史記(1145)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 하가라도(下加羅都), 둘째 상가라도, 셋째 보기, 넷째 달이, 다섯째 사물, 여섯째 물혜, 일곱째 하기물, 여덟째 사자기, 아홉째 거열, 열째 사팔혜, 열한째 이사, 열두째 상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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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 ᑅ 三國史記(1145)
양직공도에 상기문(上己文)이란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기문도 있었을 것이고 이 둘은 각각 삼국사기의 상기물과 하기물에 대응된다. 그러나 일본서기, 괄지지, 속일본기 등에 기문이라 되어 있으므로 기문으로 명칭을 통일한다. 또 삼국사기의 상가라와 하가라는 각각 일본서기의 가라와 남가라에 대응되는데 상가라와 하가라는 잘 쓰이지 않았고 삼국사기에도 남가야(南加耶)란 명칭이 나오므로 가라와 남가라로 명칭을 통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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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0 일본서기
이에 신라왕이 두려워하여 흰 기를 들고 장군의 깃발 아래에 이르러 서서 다다라·소나라·불지귀·위타·남가라·아라라 多多羅·素奈羅·弗知鬼·委陀·南迦羅·阿羅羅 6성을 떼어 주며 항복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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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황동에서 일본산 목재로 만든 배 출토
봉황동에서 3-4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배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재료는 남해안 일부·제주도 등에서 제한적으로 자라는 녹나무와 일본 고유수종으로 고대 일본 선박의 주요 재료인 삼나무로 드러났다. 부재의 길이가 약 4m이므로 실제 배의 길이는 최소 8~15m 이상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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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지도
김수로왕릉, 대성동 고분군 등이 분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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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 고분 - 고고학사전
구릉의 낮은 저지대로부터 널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하고 점차 구릉 위로 가까워지면서 덧널무덤으로 발전하여 마침내는 대규모의 주부곽식덧널무덤이 축조되었다. 덧널무덤들은 대개 3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에 걸치는 것들이다. 4세기대 대성동 고분군의 출토유물로서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은 왜계 유물인데, 대체로 4세기대 일본 전기고분에 부장되던 석제모조품, 파형동기, 통형동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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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 고분군 - 문화재청
발굴조사 결과 1∼5세기에 걸친 지배집단의 무덤 자리로 고인돌을 비롯하여 널무덤, 덧널무덤, 굴식돌방무덤 등 여러 형식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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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29호분의 청동솥과 기마민족설
2세기대의 무덤인 양동리 235호분에서도 청동솥이 발견되면서 기마민족설은 부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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