加耶가 아니라 加羅가 올바른 표기고, 加羅라는 나라는 고령과 김해에만 있었으며, 이 두 加羅는 뿌리가 서로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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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3 日本書紀(720)
任那國遣蘇那曷叱知令朝貢也
임나국이 소나갈질지를 보내어 조공했다.
任那者去筑紫國二千餘里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리 북쪽에 있는데 (축자와는)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의 남서쪽에 있다.
▐ 일본서기에서 임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여기서의 임나는 축자 및 계림과의 상대적 위치로 보아 남가라를 뜻한다.
이것이 임나의 첫번째 의미다.
7246#22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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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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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8 日本書紀(720)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意富加羅國王의 아들이다.”
활목천황이 듣고 도노아아라사등에게 “너의 본국의 이름을 고쳐서 어간성천황의 이름을 따라 국명으로 삼아라.”라고 말하였다. 그 국호를 彌摩那國이라 함은 이것이 연유가 된 것이다.
▐ 任那는 みまな라 발음한다. 따라서 彌摩那는 任那와 같은 말이다. 意富加羅國은 남가라인 듯하다.
7246#2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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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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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里 始度一海 千餘里至對馬國
군에서 왜까지는 해안을 따라 물길로 가서 한국을 거쳐 때로는 남쪽으로 때로는 동쪽으로 나아가면 그 북쪽 대안인 구야한국에 도착하는데 7천여 리이며 처음으로 바다 하나를 건너는데 1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에 도착한다.
❶ 삼국지(289)에는 弁辰狗邪國·狗邪韓國과 弁辰安邪國이 나오는데, 狗邪는 왜로 건너가는 바닷가다.
7246#30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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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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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0 廣開土王陵碑(414)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加羅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나는 加羅 표기다.
뒤에 安羅 관련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으므로 여기서의 加羅는 낙동강 하류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때까지도 加羅와 南加羅는 분리되어 표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246#4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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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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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08(<-285) 日本書紀(720)
평군목토숙니·적호전숙니를 加羅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군사를 주면서 조를 내려, “습진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틀림없이 신라가 막고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고 하였다. 이에 목토숙니 등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신라의 국경에 다다르자, 신라왕은 두려워하며 그 죄를 자복하였다. 그래서 궁월의 인부를 거느리고 습진언과 함께 돌아왔다.
7246#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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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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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1 宋書(488)
(왜왕에게)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加羅/진한/모한 육국제군사 벼슬을 더해 주었다.
▐ 왜가 요청한 6개 나라에서 백제를 빼고 加羅를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劉宋(420~479)이 加羅를 인식하게 된 것은 백제를 통해서일 듯하다.
백제가 유송에 사신을 보낸 기록은 424년,429년, 430년, 440년, 443년 그리고 450년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라는 없다.
7246#4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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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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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07 三國史記(1145)
백제 성왕이 加良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인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 삼국사기에서 加耶와 駕洛에 더하여 加良이란 표현이 등장하였다. 이때는 남가라가 신라에 병합된 이후이므로 여기에 나오는 가량은 가라를 말한다.
7246#39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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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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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 三國史記(1145)
干所製十二曲 一曰下加羅都 二曰上加羅都 三曰寳伎 四曰逹已 五曰思勿 六曰勿慧 七曰下竒物 八曰師子伎 九曰居烈 十曰沙八兮 十一曰爾赦 十二曰上竒物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 하가라도, 둘째 상가라도, 셋째 보기, 넷째 달이, 다섯째 사물, 여섯째 물혜, 일곱째 하기물, 여덟째 사자기, 아홉째 거열, 열째 사팔혜, 열한째 이사, 열두째 상기물이다.
7246#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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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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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 三國史記(1145)
▐ 양직공도에 上己文이란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기문도 있었을 것이고 이 둘은 각각 삼국사기의 상기물과 하기물에 대응된다. 그러나 일본서기, 괄지지, 속일본기 등에 기문이라 되어 있으므로 기문으로 명칭을 통일한다.
또 삼국사기의 상가라와 하가라는 각각 일본서기의 가라와 남가라에 대응되는데 상가라와 하가라는 잘 쓰이지 않았고 삼국사기에도 南加耶란 명칭이 나오므로 가라와 남가라로 명칭을 통일한다.
7246#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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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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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 三國史記(1145)
진흥왕이 이찬 이사부에게 명령하여 加羅國(加羅는 加耶로도 썼다)을 습격하게 하였다. 이때 사다함은 나이가 15~16세였는데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가 힘써 청하고 뜻이 확고하여 마침내 명령하여 귀당 비장으로 삼았다. 그의 낭도 중에서 따르는 자 또한 많았다.
▐ 삼국사기에서 加耶와 駕洛 그리고 加良에 더하여 加羅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모두가 동일한 나라를 가리킨다.
7246#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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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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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 三國史記(1145)
眞興大王侵滅之以其地爲大加耶郡
景徳王攺名今因之
진흥왕이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대가야군으로 하였다.
경덕왕이 고친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 大加耶와 南加耶는 가라와 남가라를 구별하는 삼국사기 나름의 표기인가?
가라가 멸망한 것은 562년이고 왕조가 520년간 지속되었다고 하니 건국은 42년에 한 것이다. 마침 남가라의 건국도 42년이라고 하니 적어도 삼국사기 내에서는 가라와 남가라가 동시에 건국되었다.
7246#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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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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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日本書紀
고황산이 신성한 이불로 황손 천진언을 덮어서 내려 보냈다. 황손은 천반좌를 떠나 또 하늘의 팔중 구름을 헤치고 그 위세로 길을 헤치고 나가 일향의 襲의 고천수봉에 강림하였다. 그리고 황손이 나아가는 모습은 신비한 二上산의 天浮橋로부터 내려와 떠있는 섬의 둔치가 있는 평지에 서서, 불모의 땅인 空國의 구릉으로부터 좋은 나라를 찾아나서 오전 장옥의 입협 해변에 도착하였다.
7246#7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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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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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① 大加耶
高靈郡 本大加耶國 自始祖伊珍阿豉王(一云內珍朱智) 至道設智王 凡十六世 五百二十年 眞興大王侵滅之 以其地為大加耶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고령군은 본래 대가야국이 시조 이진아시왕(내진주지라고도 한다)에서 도설지왕까지 모두 16대 520년 이어졌던 곳이다.
▐ 일본서기(720)에 加羅와 南加羅가 있으므로 삼국사기에도 김해의 南加耶에 맞춰 고령은 加耶라고 해야 어울린다.
삼국사기도 이 기록 외에는 대부분 加耶로 표기했다.
7246#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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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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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① 阿那加耶
❸ 삼국지(289)에 나오는 狗邪는 일본서기(720)에서 加羅와 南加羅로 분리되었고, 삼국사기(1145)는 이를 大加耶와 南加耶로 구별하였는데, 두 나라의 뿌리가 별개라는 사실은 명확히 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加耶라는 말이 나라 이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낙동강 서쪽의 소국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로 오인하였다.
그래서 安耶로 불러야 할 나라를 阿那加耶로 표기했고 훗날 古寧으로 개칭되는 古冬攬의 옛 소국을 古寧加耶로 표기하였다.
7246#7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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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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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① 古寧加耶
古寧郡 本古寧加耶國 新羅取之 為古冬攬郡(一云古陵縣) 景德王改名 今咸寧郡
▐ 古寧은 신라에 병합된 후에 붙여진 이름이고, □□加耶란 명칭의 나라는 원래 없었으며, 삼국사기가 竒物과 今勿을 혼동하고 馬珍과 馬津을 혼동하며 比斯와 比自火를 혼동한 사례를 볼 때, 신라에 병합되기 전에 함창에 있었다는 古寧加耶는 高靈에 있었다는 加耶의 착오일 듯하다.
7246#7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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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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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固城郡은 본래 古自郡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
▐ 삼국유사(1281)에서 말하는 小伽耶의 흔적이 없다.
삼국유사는 본조사략에 있는 阿羅(咸安), 古寧(咸寕), 星山·碧珍(加利), 非火(昌寕) 그리고 金官(金海)에서 非火(昌寕)를 大伽耶(髙霊)로 바꾸고 가락국기에 나오는 6가야에 맞추기 위해 固城을 넣어 大伽耶에 대응하는 小伽耶란 이름을 붙인 듯하다.
7246#7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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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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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गया(Gaya)
불교가 들어와 널리 퍼지면서 지명, 특히 산이름이 불교식으로 많이 개칭되었다. 예산의 加耶山도 그 중 하나로 加耶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인도의 गया(Gaya)를 음차한 것이다.
여기서 고령의 옛 소국명 加耶와 산이름 加耶山의 형성에도 불교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나 삼국지(289)의 狗邪와 삼국사기(1145)의 加耶는 발음이 비슷하고 加羅·加耶와 多羅·大耶의 변화가 같은 규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불교의 영향은 확인되지 않는다.
7246#25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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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三國遺事 駕洛國記 ④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此有人否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 등이 말하였다. "吾徒在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또 말하였다. "황천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다."
7246#6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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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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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三國遺事 駕洛記 賛
5가야(가락기찬에 의하면 “한 가닥 자줏빛 노끈이 드리워 여섯 개 둥근 알을 내리니 다섯 개는 여러 고을로 돌아가고 한 개가 이 성 안에 남았다.”라고 하였다. 즉 한 개는 수로왕이 되고 남은 다섯 개는 각각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는 것이니, 금관을 다섯 숫자에 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본조의 사략에서는 금관국도 함께 꼽아 창녕이라고 함부로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7246#30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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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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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三國遺事 本朝史畧
本朝史畧云 太祖天福五年庚子改五伽耶名 一金官(為金海府) 二古寧(爲加利縣) 三非火(今昌寕恐髙霊之訛) 餘二阿羅·星山(同前星山或作碧珍伽耶)
본조의 사략에 이르기를 “940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치니 1은 금관(김해부가 되었다)이요, 2는 고령(가리현이 되었다)이요, 3은 비화(지금의 창녕이란 것은 아마도 고령의 잘못인 것 같다)요,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앞과 마찬가지로 성산은 벽진가야라고도 한다)이다.”라고 하였다.
7246#16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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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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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三國遺事
阿羅(一作耶)伽耶(今咸安) 古寧伽耶(今咸寕) 大伽耶(今髙霊) 星山伽耶(今亰山 一云碧珎) 小伽耶(今固城)
아라(야)가야(지금의 함안), 고령가야(지금의 함녕), 대가야(지금의 고령), 성산가야(지금의 경산, 벽진이라고도 한다), 소가야(지금의 고성)이다.
▐ 阿羅·阿耶伽耶는 삼국지(289)의 安邪와 狗邪가 합쳐진 것이다.
7246#7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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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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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京山府는 본래 신라의 本彼縣으로 경덕왕 때 이름을 新安으로 고치고 星山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뒤에 碧珍郡으로 고쳤다. 태조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 碧珍이란 지명은 경덕왕 이후 생긴 것이므로 그 전에 碧珍伽耶가 있을 수는 없다.
이는 삼국사기(1145)의 古寧加耶와 유사한 모순이다.
7246#16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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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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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加羅는 고령과 김해에만 있었다.
삼국사기가 이 두 나라를 보고 加耶를 낙동강 서쪽의 소국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오인하면서 安耶에도 加耶를 붙여 阿那加耶라 했고 古寧에도 加耶를 붙여 古寧加耶라 했다.
삼국유사(1281)에 와서는 小伽耶와 星山(碧珎)伽耶가 추가되었다.
古寧과 星山 그리고 碧珎이란 지명이 신라시대에 만들어졌으니 그 지명이 붙은 加耶도 그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小伽耶는 가락국기에 나오는 6가야에 맞추기 위해 大加耶에 대응하는 이름을 붙여 끼운 듯하다.
7246#14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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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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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고령과 김해의 加羅는 뿌리가 달랐다.
▐ 일본서기(720)에는 加羅와 南加羅의 뿌리가 같다는 이야기가 없다.
삼국사기(1145)에는 大加耶와 南加耶의 뿌리가 분명히 분리되어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이 인용한 釋利貞傳에서는 두 시조가 형제로 나오며, 삼국유사(1281)가 인용한 駕洛國記에는 六伽耶가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되어 있다.
씌어졌다는 연대는 釋利貞傳, 駕洛國記 그리고 삼국사기의 순서이나 이야기가 부풀려지는 과정은 삼국사기, 釋利貞傳 그리고 駕洛國記의 순서다.
7246#26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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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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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竹以南 - 盧·邪·羅·奈·那·耶·良·洛
▐ 마한에는 盧가 6개 있었고 변진에는 盧가 2개, 邪가 2개 있었다. 반도의 재편 이후 마한의 萬盧와 변진의 斯盧는 각각 邁羅와 斯羅로 바뀌었고, 변진의 狗邪와 安邪는 백제에서 加羅와 安羅로 바뀌고 신라에서 加耶·加良과 阿耶·阿尸良으로 바뀌었다. 羅·奈·那는 백제식이고 耶·良·洛는 신라식이다.
삼국지 이후 고려와 왜 그리고 중국은 주로 백제를 통해 이들 나라를 알게 되었으므로 백제식 표기를 썼다.
7246#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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