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8. 遼黑史 > -0108 낙랑 > 玄菟

高句驪 上殷台 西蓋馬
 
압록강 유역
맥인은 압록강의 지류인 비류수 유역을 중심으로 일대에 살고 있었다. 현도군은 심양과 薩爾滸城(살이허성) 사이에 있었고 고구려현은 赫圖阿拉(혁도아랍)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1090
 
-0109 漢의 衛滿朝鮮 침공
11104
 
-0107 第一玄菟
玄菟郡所在地,原是卫氏朝鲜属国沃沮的故地。汉武帝元封二年(前109年),西汉征卫满,并于次年灭其国,置四郡,是为汉四郡,皆属幽州。汉四郡除玄菟郡外,还包括乐浪郡、临屯郡和真番郡,但以玄菟郡的面积最大。郡治位于玄菟郡夫租城(一说夫租县,即今咸镜南道咸兴市)。公元前82年(汉昭帝始元五年),西汉调整玄菟郡之疆界,废真番郡、临屯郡,并把当中部分编入玄菟郡及乐浪郡。玄菟郡并没有西迁,郡治仍在夫租县。除了直接管治本郡的夫租县和高句丽县之外,扶余国、北沃沮及肃慎亦从属于玄菟郡。公元2年的玄菟郡有户口4万5006户,人 ...
14558
 
0002 第二玄菟
西汉平帝元始五年(公元2年),玄菟郡向西迁至吉林集安。公元32年,又向西迁到苏子河中的新宾县永陵二道河子古城 。 서기 2년에 현도군은 서쪽의 길림 집안으로 치소를 옮겼다. 서기 32년에는 다시 서쪽의 소자하 유역의 신빈 영릉진 고성으로 옮겼다. 江内之地划入玄菟郡,江外之地(郡故治夭租县等)划入乐浪郡,此时的玄菟郡大约南达清川江和大同江上游北岸,与乐浪郡为邻;北达哈达岭、辉发河一带,与夫余为邻;其西为辽东郡,以长城为界;其东以长白山为界与沃沮相接,居民以汉人与高句丽人为主。 王莽篡位后,公 ...
14559
 
0002~0032 吉林 集安
14563
 
0003 삼국사기(1145)
王遷都於國内築尉那巖城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2년부터 32년까지 집안에 현도의 치소가 있었다는 주장과 충돌한다.
14564
 
0008 漢書註
玄菟郡(武帝元封四年開高句驪莽曰下句驪屬幽州應劭曰故眞番朝鮮胡國) 현도군(무제 원봉 4년에 설치했다. 고구려는 왕망이 하구려라 했다. 유주에 속한다. 응소는 옛 진번과 조선이 오랑캐 나라라 했다.) ※사기에는 元封三年 以故遂定朝鮮爲四郡이라 되어 있으나 이 기록에 의해 현도군은 이듬해에 설치된 것으로 판단된다. 왕망은 서한을 멸망시킨 사람이고 응소는 동한 말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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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漢書註
高句驪(遼山遼水所出西南至遼隊入大遼水又有南蘇水西北經塞外應劭曰故句驪胡) 고구려(요산은 요수가 나오는 곳이다. 서남쪽으로 흘러 대요수로 흘러들어간다. 또 남쪽에는 소수가 있어 서북쪽으로 흘러나간다. 응소는 옛 구려는 오랑캐라고 했다.) ※응소는 동한 말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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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漢書註
上殷台(莽曰下殷如淳曰台音鮐師古曰音胎) 상은태(왕망은 하은이라고 했다. 台를 여순은 발음이 鮐라고 했고 사고는 胎라고 했다. ※왕망은 서한을 멸망시킨 사람이고 여순은 조위 사람이며 사고는 당나라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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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漢書註
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過郡二行二千一百里莽曰玄菟亭) 서개마(마자수가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로 들어간다. 서남쪽으로 흘러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2군을 지나 2100리를 흐른다. 왕망은 현토정이라 했다.) ※왕망은 서한을 멸망시킨 사람이다.
14272
 
0008 이전 한서(82)
玄菟郡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上殷台西蓋馬 현토군은 45,006호에 221,845구다. 현은 고구려, 상은태 그리고 서개마가 있다.
11079
 
0008 이후 한서(82)
왕망 초에 고구려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법을 어기고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고구려후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왕망이 高句驪를 下句驪로 이름을 바꾸고 천하에 알리게 하였다. 이에 맥인이 변경을 더욱 침범하게 되었다.
11106
 
0032 소자하
14562
 
0032~0107 赫图阿拉城
14565
 
0107 第三玄菟
东汉安帝永初元年(107年),在原辖高句丽县、西盖马县、上殷台县的基础上,新增候城、高显、望平三县划归玄菟,玄菟郡治迁到抚顺市的劳动公园古城[3] ,另有迁移到抚顺市东洲区小甲帮汉城之说。辖今沈阳、抚顺、扶余一带,人口约4万余。不久,高句丽开始蚕食玄菟郡在长城内的辖地,屡次袭边。 浑河南劳动公园古汉城 汉灵帝建宁二年,玄菟太守耿临与佐使公孙度出兵讨伐高句丽,斩杀数百人。伯固投降,其地归属辽东。熹平年间,伯固乞求归附玄菟郡。
14560
 
0107~0121 劳动公园古城
14566
 
0121 上伯官城址
14567
 
0121 第四玄菟
东汉安帝建光元年(公元121年),“第三玄菟郡”(抚顺劳动公园古城)迁至今沈阳上伯官屯汉城[2] ,该城址地下文化层约1.5米处,出土了大量有自东汉至魏晋时期的绳纹筒瓦、板瓦和青砖等。城址周围的东汉至魏晋时期的墓葬,也与城址内出土的文物相同 汉献帝时公孙度割据海东,“公孙度之雄海东也,伯固遣大加优居、主簿然人等助度击富山贼,破之。”“夫馀本属玄菟。汉末,公孙度雄张海东,威服外夷,夫馀王尉仇台更属辽东。时句丽、鲜卑强,度以夫馀在二虏之间,妻以宗女。”后“拔奇怨为兄而不得立,与涓奴加各将下户三万余口诣康降”, ...
14561
 
0289 삼국지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부여와 남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호수는 5천호인데 대군왕은 없으며 읍락에는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가 있다.
11089
 
0289 삼국지
관구검이 句麗를 토벌할 때 句麗의 왕 궁(宮)은 북옥저로 달아났다. 北沃沮一名置溝婁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속은 남·북이 서로 같으며, 읍루와 접해 있다.
11099
 
0289 삼국지
漢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고구려령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서 조복과 의책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 溝漊者句麗名城也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라 부른다. 구루란 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
11100
 
0926 신당서(1060)
예맥(예貃)의 옛 땅으로 동경(東京)을 삼으니 용원부(龍原府)로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한다. 경(慶)·염(鹽)·목(穆)·하(賀)의 4주를 통치한다. 옥저(沃沮)의 옛 땅으로 남경(南京)을 삼으니 남해부(南海府)이며 옥(沃)·청(晴)·초(椒)의 3주를 통치한다. ※예맥과 옥저는 바뀐듯하다.
11101
 
1145 삼국사기
通典, 漢書志, 周禮 그리고 古記의 기록을 참고하여 고구려가 세워진 곳이자 고구려현이 있던 곳을 요서의 北鎮으로 비정하였다. 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卒夲者 蓋漢玄菟郡之界 大遼國東亰之西 漢志所謂玄菟屬縣髙句麗是歟
7604
 
上殷台县
11056
 
介幘
11103
 
玄菟郡
于前108年初设在今朝鲜半岛咸镜南道的夫租城, 管辖今盖马高原及其周边平原、朝鲜咸镜南道、咸镜北道以及中国辽宁东部、吉林省东部,黑龙江南部一带,郡治大体在咸镜南道境内。 公元前82年,真番、临屯二郡被撤销,真番郡被并入到玄菟郡,但是玄菟郡的治所没变,仍在夫租城。公元2年,治所向西迁至吉林集安。公元32年,治所又向西迁至抚顺市新宾永陵的二道河子古城。公元107年,玄菟郡迁至抚顺市劳动公园古城遗址。公元121年又西迁即为现沈阳市上伯官古城遗址。
14556
 
長白山
勿吉國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니, 옛 肅愼國의 지역이다. 나라 남쪽에는 徒太山이 있는데 魏나라 말로는 大白이다.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고 사람들도 산에서는 오줌이나 대변을 보지 않는다. 산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소변, 대변을 물건에 담아 가지고 간다.
14255
 
高句驪 上殷台 西蓋馬
삼국지에 蓋馬大山이란 지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蓋馬란 지명은 독립적으로 있었던 게 분명하다. 따라서 西蓋馬는 蓋馬 지역의 서쪽 부분을 말하는 것이 된다. 나아가 上殷台 또한 殷台 지역의 상류 부분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다. 이는 上加羅, 下加羅, 上哆唎, 下哆唎 등의 예로 유추할 수 있다. 高句麗 또한 句麗란 어근에 高라는 꾸밈말이 붙은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왕망이 高句驪를 下句驪로 이름을 바꾸었다거나 삼국지에서 高句麗가 句麗로만 칭해지기도 한 것 ...
11092
 
高句驪의 기원
압록강 유역에는 맥인이 살고 있었다. 위만 조선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무너뜨리고 4군을 설치할 때 현도군 고구려현에 소속시켰다. 그러나 점차 한나라의 통제를 벗어나 전한 말에는 추모를 시조로 하는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11088
 
鴨淥江
압록강 유역   0008 ᑅ 한서(82) 遼東郡   0008 漢書註   0220 ᑅ 후한서(445) 幽州   0276 진서(648) 平州   0668 구당서(945)   0668 신당서(1060)   0801 통전(通典)   0801 통전(通典)   1060 신당서   압록강  
 
비리(卑離), 부리(夫里), 벌(伐·弗·火), 홀(忽)
한강 유역과 그 북쪽에는 忽이 붙은 지명이 많다. 이는 다른 지역에 거의 없는 현상이다. 이 忽은 골 또는 고을을 뜻하는 것으로 보여 차령 이남의 夫里와 죽령 이남의 火(불)이 들을 뜻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11105
 
한국학중앙연구원 - 노태돈
高句麗의 어원은 句麗에서 비롯하였다. 범어잡명(梵語雜名)과 돈황문서(敦煌文書) 등에서 高句麗를 무구리(畝久理)라 하였다. 이는 맥구려(貊句麗) 즉 貊族의 句麗를 기술한 것이다. 이는 곧 高句麗에서 句麗가 어간이고, 高는 관형사임을 말해준다. 고구려어에서 城을 구루(溝漊) 또는 홀(忽)이라 하였다. 이는 고을과 통하는 말이다. 高句麗는 句麗에다가 크다 또는 높다는 뜻의 高를 덭붙인 말로서, 큰 고을 또는 높은 성의 뜻을 지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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