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0475~0561 ❹ 百濟의 南下 > 0551~0554 한강 유역과 관산성

백제는 가라와 함께 고려를 침공하여 한성과 그 건너편의 평양을 빼앗아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이때 신라도 고려를 침공하여 죽령 북쪽 10군을 차지하였다. 고려는 돌궐의 침공을 막느라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게다가 북제로부터도 유민을 송환당하는 등 고립에 처하자 신라와 손을 잡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제가 위기를 느껴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고 그 땅은 신라가 주웠다.
 
0547.04 ○ 眞慕宣文┆哥麻┆東城子言┆汶休麻那
8048#24989 SIBLINGS CHILDREN 24989
 
0548.01 ● 眞慕宣文
8048#27191 SIBLINGS CHILDREN 27191
 
0548.04 ○ 掠葉禮
8048#27307 SIBLINGS CHILDREN 27307
 
0548.04 ●
8048#29261 SIBLINGS CHILDREN 29261
 
0548.10 ●
8048#29262 SIBLINGS CHILDREN 29262
 
0549.06 ● 久貴┆馬次文
8048#29252 SIBLINGS CHILDREN 29252
 
0550.02 ● 阿比多
8048#29255 SIBLINGS CHILDREN 29255
 
0550.04.01 ○ 阿比多
8048#29256 SIBLINGS CHILDREN 29256
 
0550.04.16 ○ 皮久斤┆灼干那
8048#29258 SIBLINGS CHILDREN 29258
 
0551.03 ●
8048#29260 SIBLINGS CHILDREN 29260
 
0552.05 ○ 木刕今敦┆阿斯比多
8048#29263 SIBLINGS CHILDREN 29263
 
0553.01.12 ○ 科野次酒┆禮塞敦
8048#29264 SIBLINGS CHILDREN 29264
 
0553.01.15 ● 木刕今敦┆阿斯比多
8048#29265 SIBLINGS CHILDREN 29265
 
0553.06 ● 內臣
8048#29267 SIBLINGS CHILDREN 29267
 
0553.08 ○ 科野新羅┆汶休帶山
8048#29268 SIBLINGS CHILDREN 29268
 
0554.01 ○ 木刕施德文次┆曰佐分屋
8048#29269 SIBLINGS CHILDREN 29269
 
0554.02 ○ 三貴┆物部烏
8048#29270 SIBLINGS CHILDREN 29270
 
0554.05 ● 內臣
8048#29271 SIBLINGS CHILDREN 29271
 
0554.12 ○ 汶斯干奴
8048#29272 SIBLINGS CHILDREN 29272
 
0555.02 ○ 惠
8048#29273 SIBLINGS CHILDREN 29273
 
0556.01 ● 惠
8048#29274 SIBLINGS CHILDREN 29274
 
0534 北魏→東魏+西魏
北魏의 효무제는 高歡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자 낙양에서 장안으로 도피하여 宇文泰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자 고환은 鄴에서 효정제를 옹립하였다. 한편 우문태는 효무제를 독살하고 문제를 옹립하였다.
8048#2217 SIBLINGS CHILDREN 2217
 
0541 三國史記(1145) 新羅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서 화친을 청하므로 허락하였다. ▐ 임나를 놓고는 신라와 치열한 외교전을 치루고 있었다.
8048#29275 SIBLINGS CHILDREN 29275
 
0541~0544 ◾任那² 재건 시도
任那²의 㖨己呑, 南加羅 그리고 卓淳이 신라에 넘어가자, 왜는 529년에 모야신을 任那²에 파견하여 통치기구를 설치하고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잠잠하다 흠명천황이 즉위 이듬해인 541년부터 다시 시도하는데, 이번에는 백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日本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任那² 여러 나라의 우두머리를 旱岐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그러나 545년 이후 지지부진하다 554년 이후에는 日本府와 旱岐가 기록에서 사라졌다.
8048#23981 SIBLINGS CHILDREN 23981
 
0545 日本書紀(720)
고구려에 대란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살해당하였다.(백제본기에는 “12월 갑오에 고려국의 細群과 麁群이 궁문에서 싸웠다.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세군이 패하였으나 사흘 동안 군사를 해산하지 않았다. 세군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무술에 狛國의 香岡上王이 죽었다.”고 한다.)
8048#29626 SIBLINGS CHILDREN 29626
 
0545.03 三國史記(1145) 高句麗
陽原王(혹은 陽崗上好王이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平成이고 安原王의 맏아들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장성해서는 용맹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533년에 세워 태자를 삼았으며, 545년에 왕이 세상을 떠남에 이르러 태자가 즉위하였다.
8048#30597 SIBLINGS CHILDREN 30597
 
0546 日本書紀(720)
이 해에 고구려에 대란이 있었다. (백제본기에서 “고구려에서 정월 병오에 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나이가 8살이었다. 狛王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다. 正夫人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中夫人이 세자를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麁群이었다. 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細群이었다. 박왕이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부인이 낳은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세군 측에서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8048#30595 SIBLINGS CHILDREN 30595
 
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0547.04 日本書紀(720)
백제가 전부 덕솔 眞慕宣文과 나솔 哥麻 등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였다. 그래서 하부 東城子言을 보내어 덕솔 汶休麻那와 교대하게 하였다.
8048#30598 SIBLINGS CHILDREN 30598
 
0548.01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왕 평성(양원왕)이 濊와 공모하여 한수 이북의 獨山城을 공격해 왔다.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을 시켜 갑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고구려 군사들과 일전을 벌여 크게 이겼다.
8048#29279 SIBLINGS CHILDREN 29279
 
0548.01 日本書紀(720)
백제의 사신 전부 덕솔 眞慕宣文 등이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그래서 조를 내려 “요청한 구원병은 반드시 보내서 구원할 것이다. 속히 왕에게 가서 보고하라.”고 명하였다.
8048#30599 SIBLINGS CHILDREN 30599
 
0548.02 三國史記(1145) 新羅
고구려가 穢人과 함께 백제의 獨山城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장군 주령을 보내 정예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공격하게 하니,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8048#29276 SIBLINGS CHILDREN 29276
 
0548.04 日本書紀(720)
백제는 중부 간솔 掠葉禮 등을 보내 “덕솔 宣文 등이 칙을 받들어 신의 나라에 이르러 ‘구원병은 때에 맞춰 파견할 것이다.’라는 말을 전하였습니다. 삼가 은조를 받으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馬津城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가 ‘안라국과 일본부가 불러들여 정벌하기를 권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참으로 그럴 법한 일입니다.
8048#25323 SIBLINGS CHILDREN 25323
 
0548.04 ◾馬津城
8048#30600 SIBLINGS CHILDREN 30600
 
0548.04 日本書紀(720)
천황은 조를 내려 “상주한 내용을 듣고 우려하는 바를 살펴보니 日本府와 安羅가 이웃의 어려움을 구하지 않은 것은 짐도 또한 괴롭다. 또 고구려에 몰래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짐이 명하였다면 보냈을 것이다. 명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맘대로 보낼 수 있겠는가. 任那와 함께 전에 명한 대로 힘을 합쳐서 북적을 막고 각각 봉토를 지켜라. 짐은 사람을 보내 安羅가 도망가 버린 공지를 채우도록 하겠다.”고 명하였다.
8048#872 SIBLINGS CHILDREN 872
 
0548.10 日本書紀(720)
백제에 370명을 보내어 得爾辛에 성을 쌓는 것을 도왔다.
8048#30601 SIBLINGS CHILDREN 30601
 
0549.06 日本書紀(720)
장덕 久貴와 고덕 馬次文 등이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延那斯와 麻都가 몰래 사사로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낸 것은 짐이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허실을 물을 것이다. 요청한 군사는 바라는 바에 따라 중지시키겠다.”라고 하였다.
8048#30602 SIBLINGS CHILDREN 30602
 
0550 ~ 0559 北齊 문선제 고양
8048#1990 SIBLINGS CHILDREN COMMENT OPEN
 
0550 ~ 0577 東魏➔北齊
547년에 東魏의 실권자 高歡이 죽자 그의 맏아들 高澄이 권력을 계승하였는데 549년에 살해되었다. 그러자 고환의 차남 高洋이 난을 수습하고 황제가 되어 北齊를 세웠다. 577년에 北周에게 망했다.
8048#2218 SIBLINGS CHILDREN 2218
 
0550.01 三國史記(1145) 新羅
백제가 고구려의 道薩城을 쳐서 빼앗았다.
8048#29278 SIBLINGS CHILDREN 29278
 
0550.02 日本書紀(720)
백제에 사신을 보내어 (백제본기에는 “3월 12일 신유에 일본의 사신 阿比多가 배 3척을 이끌고 도성 아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조를 내려 “짐이 장덕 久貴와 고덕 馬進文 등이 올린 표의 뜻에 따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하나하나 교시하겠다. 이제 좀 더 자세히 대답하고자 사신을 보낸다.”고 명하였다. 거듭해서 조를 내려 “짐이 듣건대 북적은 강하고 포악하다고 한다. 그래서 화살 30구를 내리니 바라건대 한 곳을 방어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8048#30603 SIBLINGS CHILDREN 30603
 
0550.03 三國史記(1145) 新羅
고구려가 백제의 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쳐서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군사 1,000명을 머물면서 지키게 하였다.
8048#29277 SIBLINGS CHILDREN 29277
 
0550.04.01 日本書紀(720)
백제에 있는 일본의 사자가 바야흐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백제본기에는 4월 1일 경진에 日本 阿比多가 돌아갔다고 한다.) 백제왕 성명이 사자에게 “임나의 일은 칙을 받들어 굳게 지키겠다. 延那斯와 麻都의 일은 문책할 것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칙에 따를 것이다.”라고 말하고 고구려 노 6구를 바치고 별도로 사자에게 노 1구를 주었다. (모두 爾林을 공격하여 사로잡은 노예이다.)
8048#8757 SIBLINGS CHILDREN 8757
 
0550.04.01 ◾移那斯(延那斯)·麻都
542년 7월에 성왕은 임나의 移那斯와 麻都를 본거지로 보내달라는 표를 올렸다.┆543년 11월에 천황은 임나를 재건하면 移那斯와 麻都는 저절로 물러갈 것이라고 하였다.┆544년 3월에 성왕은 移那斯와 麻都를 비난하는 표를 다시 올렸으나 10월에 내려진 조서에는 두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549년 6월에 천황은 延那斯와 麻都가 고려와 내통했는지 조사하겠다고 말했다.┆550년 4월에 성왕은 延那斯와 麻都 문제는 천황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8048#6699 SIBLINGS CHILDREN 6699
 
0550.04.16 日本書紀(720)
백제가 중부 나솔 皮久斤과 하부 시덕 灼干那 등을 보내어 고구려의 포로 10구를 바쳤다.
8048#30604 SIBLINGS CHILDREN 30604
 
0550.06 三國史記(1145) 高句麗
사신을 北齊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8048#8031 SIBLINGS CHILDREN COMMENT 8031
 
0550.09 三國史記(1145) 高句麗
북제가 왕을 봉하여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삼았다.
8048#8032 SIBLINGS CHILDREN COMMENT 8032
 
0551 日本書紀(720)
是歲 百濟聖明王 親率衆及二國兵(二國謂新羅任那也) 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 凡六郡之地 遂復故地 백제 성명왕이 몸소 군사 및 신라와 임나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여 한성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8048#35340 SIBLINGS CHILDREN COMMENT 35340
 
0551 ◾平壤
대동강변의 平壤은 백제의 영토였던 적이 없으므로 討平壤凡六郡之地遂復故地에 있는 平壤은 한강변의 平壤이다.
8048#8011 SIBLINGS CHILDREN 8011
 
0551    ◾百濟와 新羅의 고려침공
0551 ◾百濟와 新羅의 고려침공
8048#8016 SIBLINGS CHILDREN COMMENT 8016
 
0551 三國史記(1145) 新羅
王命 居柒夫等八將軍 與百濟侵髙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乗勝 取竹嶺以外髙峴以内十郡 왕이 거칠부 등 여덟 장군에게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거칠부 등은 승리를 틈타서 죽령 바깥, 고현 이내의 10군을 빼앗았다.
8048#35342 SIBLINGS CHILDREN 35342
 
0551 三國史記(1145) 新羅
王命居柒夫等侵高句麗乘勝取十郡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입케 하였는데, 이긴 기세를 타서 10개의 군을 빼앗았다. ▐ 이 사건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은 이상하게도 신라본기와 열전에만 있고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는 없다. 그러나 일본서기와는 일치한다.
8048#35341 SIBLINGS CHILDREN COMMENT 35341
 
0551.03 日本書紀(720)
보리 씨앗 1천 곡을 백제왕에게 주었다.
8048#10342 SIBLINGS CHILDREN 10342
 
0551.05 三國史記(1145) 高句麗
사신을 북제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8048#8033 SIBLINGS CHILDREN COMMENT 8033
 
0551.09 三國史記(1145) 高句麗
돌궐이 와서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옮겨서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양원왕이 장군 고흘을 보내 병력 1만을 거느리고 막아 싸워서 이기고,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8048#8009 SIBLINGS CHILDREN COMMENT 8009
 
0551.10 ❰❰ 0553 「三國誤記」 日本書紀
백제의 왕자 여창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고려국을 향했는데 백합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백제는 고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다시 그 부장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고려왕을 東聖山 위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 553년의 정황에는 맞지 않으므로 551년으로 옮긴다. 고려는 9월에 돌궐의 침공을 받았으므로 한 달 후에 있었던 백제의 침공에는 무력했을 것이다.
8048#8049 SIBLINGS CHILDREN COMMENT 8049
 
0551.10 ❰❰ 0553 ◾東聖山
이 기록의 東聖山을 지금의 평양 동쪽에 있는 大城山으로보면 551년 사건에서 말하는 平壤은 지금의 평양을 말하는 것이 된다.
8048#671 SIBLINGS CHILDREN 671
 
0551~0552 국사편찬위원회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를 보면 돌궐의 木汗可汗(553~572)이 遼海 이서까지 진출하여 契丹, 室韋, 庫莫奚 등 여러 종족에 영향력을 미치면서 마찰을 빚은 바 있다. 또 新城과 白巖城에서 전투를 벌였고, 고구려·말갈과 돌궐의 利稽察 세력 간에 충돌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수를 견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돌궐과의 연합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8048#8017 SIBLINGS CHILDREN 8017
 
0552 北史(659)
文宣至營州 使博陵崔柳使于高麗 求魏末流人 敕柳曰 若不從者 以便宜從事 及至 不見許 柳張目叱之 拳擊成墜於床下 成左右雀息不敢動 乃謝服 柳以五千戶反命
8048#35351 SIBLINGS CHILDREN COMMENT 35351
 
0552 北史(659)
문선제는 박릉 최유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 위나라 말에 흘러 들어간 백성들을 요구케 하였다. 허락을 받지 못하자, 최유는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면서 주먹으로 成(양원왕)을 쳐 용상 밑으로 떨어 뜨렸다(拳擊成墜於床下). 成의 좌우는 숨을 죽이고 감히 꼼짝도 못한 채 사죄하고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최유는 5천호를 돌려 받아 복명하였다. ▐ 최유의 허풍일 수 있겠으나 그만큼 고려는 북위로부터도 박대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8048#8012 SIBLINGS CHILDREN COMMENT 8012
 
0552 日本書紀(720)
是歲百濟棄漢城與平壤新羅因此入居漢城今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과 니미방이다.
8048#8007 SIBLINGS CHILDREN COMMENT 8007
 
0552.05 日本書紀(720)
백제, 가라, 안라가 중부 덕솔 木刕今敦과 하내부 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高麗與新羅 通和幷勢 謀滅臣國與任那 故謹求請救兵 先攻不意 軍之多少 隨天皇勅 고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합니다. 삼가 원병을 요청하여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칙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조를 내려 “지금 백제왕, 안라왕, 가라왕과 日本府臣 등이 함께 사신을 보내 상주한 상황은 잘 들었다.”라고 하였다.
8048#8010 SIBLINGS CHILDREN COMMENT 8010
 
0552.05 ◾
백제 성왕이 왜왕에게 한 『高麗與新羅 通和幷勢 謀滅臣國與任那 고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를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합니다.』는 말은 일본서기에 『百濟棄漢城與平壤 新羅因此入居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리자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다.』고 기록된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삼국사기에는 『新羅取東北鄙置新州 신라가 동북 변경을 가져 신주를 설치했다.』라고 되어 있다.
8048#5532 SIBLINGS CHILDREN COMMENT 5532
 
0552.05 ◾
0552.05 ◾
551년 9월에 돌궐로부터 침공을 받았고, 그 한 달 뒤 백제와 임나 그리고 신라의 침공을 받아 한강 유역을 빼앗겼으며, 그 이듬해에는 북위로부터 박대를 받은 고려가 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은 신라와 손을 잡는 것이었을 듯하다.
8048#8039 SIBLINGS CHILDREN 8039
 
0553.01.12 日本書紀(720)
백제가 상부 덕솔 科野次酒와 간솔 禮塞敦 등을 보내 군병을 청하였다. ▐ 백제는 552년 5월에도 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었다.
8048#35345 SIBLINGS CHILDREN COMMENT 35345
 
0553.01.15 日本書紀(720)
백제의 사신 중부 간솔 木刕今敦과 하내부 阿斯比多 등이 돌아갔다. ▐ 552년 5월에 와서 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었다.
8048#8014 SIBLINGS CHILDREN 8014
 
0553.06 日本書紀(720)
內臣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좋은 말 2필, 동선 2척, 활 50장, 화살 50구를 주었다. 칙을 내려 “청한 군대는 왕이 바라는 바에 따르겠다.”고 하고, 다른 칙을 내려 “의박사·역박사·력박사 등은 교대할 때가 되었으니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 보내 교대시켜라. 또 복서 및 역본과 여러 가지 약물도 보내라”고 하였다. ▐ 백제는 552년 5월과 553년 1월에 거듭 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었다.
8048#35346 SIBLINGS CHILDREN COMMENT 35346
 
0553.07 三國史記(1145) 百濟
新羅取東北鄙置新州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차지하고 신주를 설치하였다.
8048#30217 SIBLINGS CHILDREN 30217
 
0553.07 「三國誤記」 新羅
取百濟東北鄙置(新興→)新州以阿湌武力爲軍主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차지하고 신주를 설치하여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8048#8013 SIBLINGS CHILDREN COMMENT 8013
 
0553.08 日本書紀(720) ⓵
백제가 상부 나솔 科野新羅와 하부 고덕 汶休帶山 등을 보내 표를 올려 말하였다. “올해 문득 듣자니 신라와 狛國이 통모하여 ‘백제와 임나가 자주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고 있다. 생각컨대 이것은 군사를 청하여 우리나라를 치려는 것이다. 일본의 군사가 출발하기 전에 안라를 공격해 빼앗고 일본에서 오는 길을 막자.’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천황께서 자애로운 마음으로 속히 전군과 후군을 계속 파견하여 구원해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8048#8015 SIBLINGS CHILDREN COMMENT 8015
 
0553.08 日本書紀(720) ⓶
가을까지는 해외 彌移居를 굳게 지키겠습니다. 만약 지체하여 늦는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파견군이 신의 나라에 도착하면 옷과 식량 비용은 신이 충당할 것입니다. 임나에 도착하여도 역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만일 지급할 수 없다면 신이 반드시 충당하여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8048#11079 SIBLINGS CHILDREN 11079
 
0553.08 日本書紀(720) ⓷
別的臣敬受天勅 來撫臣蕃 夙夜乾乾 勤修庶務 由是 海表諸蕃 皆稱其善 謂當萬歲 肅淸海表 不幸云亡 深用追痛 今任那之事 誰可修治 伏願 天慈速遣其代 以鎭任那 ▐ 성왕은 544년 3월의 표문에서 的臣을 비난했었다.
8048#14474 SIBLINGS CHILDREN 14474
 
0553.08 日本書紀(720) ⓷
한편 的臣이 삼가 천칙을 받고 와서 신의 나라를 위무하고 있습니다. 주야로 태만하지 아니하고 정사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해외의 여러 蕃들은 모두 그의 선정을 칭송하여 영원히 해표의 여러 나라에 선정을 베풀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죽었다 하니 깊이 추도하는 바입니다. 이제 임나의 일을 누가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천황의 자애로운 마음으로 속히 그를 대신할 사람을 보내 임나를 다스리시길 엎드려 바랍니다.
8048#10348 SIBLINGS CHILDREN 10348
 
0553.08 日本書紀(720) ⓸
또한 바다 밖의 여러 나라들은 활과 말이 매우 부족합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천황에게 지급받아 강한 적을 막았습니다. 천황께서 자애로운 마음으로 활과 말을 많이 내려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라고 말하였다.
8048#13723 SIBLINGS CHILDREN 13723
 
0553.10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 ▐ 백제는 552년 5월과 553년 1월과 8월에 거듭 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었다. 이듬해에 신라를 침공한 사실과 연결해 볼 때 일종의 '위장평화공세' 같은 것일 듯하다.
8048#30218 SIBLINGS CHILDREN 30218
 
0553.10 日本書紀(720)✘
백제의 왕자 여창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고려국을 향했는데 백합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백제는 고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다시 그 부장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고려왕을 東聖山 위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8048#24979 SIBLINGS CHILDREN 24979
 
0554.01 日本書紀(720)
백제가 중부의 木刕施德文次, 전부의 시덕 曰佐分屋 등을 筑紫에 보내 內臣과 佐伯連 등에게 묻기를 “덕솔 차주와 간솔 색돈 등이 지난 해 윤달 4일에 와서 ‘臣 등(內臣을 말한다)은 내년 정월에 도착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약간이나마 들어 미리 군영을 쌓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내신이 명령을 받들어 “바로 도와줄 군대 1천, 말 1백 필, 배 40척을 보내도록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8048#35349 SIBLINGS CHILDREN COMMENT 35349
 
0554.02 日本書紀(720)
백제가 하부 간솔 장군 三貴와 상부 나솔 物部烏 등을 보내 구원병을 청했다. 그리고 덕솔 東城子莫古를 바쳐 전에 番을 섰던 나솔 東城子言을 교대하고 오경박사 왕류귀로 고덕 마정안을 대신하고 승 담혜 등 9인으로 승 도침 등 7인을 교대하였다. 따로 명령을 받들어 역박사 시덕 왕도량, 역박사 고덕 왕보손, 의박사 나솔 왕유릉타, 채약사 시덕 반량풍, 고덕 정유타, 악인 시덕 삼근, 계덕 기마차, 계덕 진노, 대덕 진타를 바쳤는데 모두 청에 따라 교대하였다
8048#35156 SIBLINGS CHILDREN COMMENT 35156
 
0554.02 日本書紀(720)
▐ 東城子言은 547년에 汶休麻那를 교대했었다.
8048#24858 SIBLINGS CHILDREN 24858
 
0554.05 日本書紀(720)
內臣率舟師詣于百濟 내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에 나아갔다. ▐ 백제는 552년 5월과 553년 1월과 8월 그리고 554년 1월과 2월에 거듭 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었다.
8048#35350 SIBLINGS CHILDREN COMMENT 35350
 
0554.07 三國史記(1145) 新羅
百濟王明襛與加良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8048#27427 SIBLINGS CHILDREN COMMENT 27427
 
0554.07 三國史記(1145) 新羅 ✘
백제 성왕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인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크게 이겨서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 6백 명의 목을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8048#29622 SIBLINGS CHILDREN 29622
 
0554.07 三國史記(1145) 百濟 ✘
王欲襲新羅親帥歩騎五十夜至狗川新羅伏兵發與戰爲亂兵所害薨謚曰聖 성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聖이라 하였다.
8048#25864 SIBLINGS CHILDREN COMMENT 25864
 
0554.09 三國遺事(1281)
백제 병사가 珎城을 침범하여 남녀 3만 9천명과 말 8천 필을 빼앗아 갔다.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자고 하니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바라겠느냐.” 하였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니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이 되어서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백제가 이것을 원망하여 침범을 한 것이다.
8048#24980 SIBLINGS CHILDREN 24980
 
0554.10 三國史記(1145) 百濟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熊川城을 침공하였다가 패하고 돌아갔다.
8048#35354 SIBLINGS CHILDREN COMMENT 35354
 
0554.12 日本書紀(720) ①
겨울 12월 백제가 하부의 간솔 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 신 明과 안라에 있는 왜신들, 임나 여러 나라의 한기들은 아룁니다. 사라가 무도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狛과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彌移居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有至臣 등을 보내 군사를 청해 사라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천황께서 有至臣을 보내시니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 有至臣은 內臣이다.
8048#23962 SIBLINGS CHILDREN 23962
 
0554.12 日本書紀(720) ②
12월 9일에 사라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동방령 물부막가무련을 보내 자기 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函山城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有至臣이 데리고 온 백성 죽사 물부막기위사기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 위령의 도움을 받아 이 달 9일 유시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 라고 하였다.
8048#23964 SIBLINGS CHILDREN 23964
 
0554.12 日本書紀(720) ③
따로 아뢰기를 “만약 신라뿐이라면 유지신이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狛이 사라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竹斯島에 있는 군사들을 빨리 보내 와서 신의 나라를 돕고 또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라 하였다.
8048#23965 SIBLINGS CHILDREN 23965
 
0554.12 日本書紀(720) ④
또 “신이 따로 군사 만 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 급하여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단지 좋은 비단 2필, 탑등 1령, 도끼 300구, 사로잡은 성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적어 송구합니다” 라 아뢰었다.
8048#23966 SIBLINGS CHILDREN 23966
 
0554.12 日本書紀(720) Ⓐ
여창이 신라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원로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여창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대국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 하고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久陀牟羅에 보루를 쌓았다.
8048#8021 SIBLINGS CHILDREN COMMENT 8021
 
0554.12 日本書紀(720) Ⓑ
그 아버지 명왕은 여창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는 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 50명의 군사로 신라를 습격하려 했었다는 삼국사기(1145)의 설명은 어색하다.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가다가 습격을 받았다는 일본서기(720)의 설명이 자연스럽다.
8048#8022 SIBLINGS CHILDREN COMMENT 8022
 
0554.12 日本書紀(720) Ⓒ
이 때 신라에서 좌지촌의 사마노 苦都(다른 이름은 谷智다)에게 “고도는 천한 노비이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비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8048#8023 SIBLINGS CHILDREN COMMENT 8023
 
0554.12 日本書紀(720) Ⓓ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谷智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8048#8024 SIBLINGS CHILDREN COMMENT 8024
 
0554.12 日本書紀(720) Ⓔ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다른 책에는 “신라가 명왕의 머리뼈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8048#8025 SIBLINGS CHILDREN COMMENT 8025
 
0554.12 日本書紀(720) Ⓕ
여창은 포위에서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축자국조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뜨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8048#8026 SIBLINGS CHILDREN COMMENT 8026
 
0554.12 日本書紀(720) Ⓖ
이로 인해 여창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여창이 국조가 활로 포위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안교군”이라 이름하였다(안교는 우리 말로 くろじ라 한다). 이 때 신라 장수들이 백제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드디어 멸망시켜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한 장수가 “안된다. 일본 천황이 임나의 일 때문에 여러 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백제관가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8048#8027 SIBLINGS CHILDREN COMMENT 8027
 
0554.12 ❰❰ 0554.07 「三國誤記」 新羅
백제 성왕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인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크게 이겨서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 6백 명의 목을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 일본서기(720)의 기록에 맞춰 옮긴다.
8048#25129 SIBLINGS CHILDREN 25129
 
0554.12 ❰❰ 0554.07 「三國誤記」 百濟
王欲襲新羅親帥歩騎五十夜至狗川新羅伏兵發與戰爲亂兵所害薨謚曰聖 성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聖이라 하였다. ▐ 일본서기(720)의 기록에 월과 날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야기도 자세하므로 일본서기의 기록에 맞춰 옮긴다.
8048#27183 SIBLINGS CHILDREN 27183
 
0554.12 三國史記(1145)
할아버지 武力은 新州道行軍摠管이 되어 일찍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백제 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참수하였다.
8048#1224 SIBLINGS CHILDREN COMMENT 1224
 
0555 三國史記(1145) 高句麗
사신을 북제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8048#8034 SIBLINGS CHILDREN COMMENT 8034
 
0555.02 日本書紀(720)
백제 왕자 여창이 왕자 惠(威德王의 동생이다)를 보내어 “성명왕이 적에게 살해당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5년에 신라에게 살해당했다. 그래서 지금 그것을 아뢴 것이다.) 혜가 “천황의 덕에 의지하여 돌아가신 부왕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만약 불쌍히 여겨 병기를 많이 주신다면 치욕을 씻고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신이 돌아갈지 머무를지는 오직 명에 따를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8048#2222 SIBLINGS CHILDREN 2222
 
0555.02 ◾ 종합
0555.02 ◾ 종합
관산성 전투에 관련된 기록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554.06 왜의 여자신이 지원군을 이끌고 백제에 도착하였다. ② 554.07 백제가 가라와 함께 관산성을 침공하자 신주의 김무력이 지원하였고 삼년산군이 성왕을 전사시키자 백제는 대패하였다. ③ 554.09 백제가 신라의 진성을 침공하였다. ④ 554.12 왜의 여자신이 함산성을 함락시켰으나 성왕이 전사하며 백제는 대패하였다. ⑤ 555.02 백제가 왕자 혜를 왜에 보내 성왕의 전사를 알렸다.
8048#29624 SIBLINGS CHILDREN 29624
 
0556.01 日本書紀(720)
백제의 왕자 惠가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병기와 좋은 말을 매우 많이 주었다. 또한 빈번하게 상으로 물품을 많이 하사하여 여러 사람들이 찬탄하였다. 이때 阿倍臣·佐伯連·播磨直을 파견하여 축자국의 수군을 이끌고 그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하도록 하였다. 별도로 筑紫火君(백제본기에는 축자군의 아들 火中君의 아우라고 한다)을 파견하여 용감한 군사 1천 명을 이끌고 彌弖까지 호위하도록 하고 뱃길의 요충지를 지키게 했다.
8048#23967 SIBLINGS CHILDREN 23967
 
0557.03 日本書紀(720)
백제 왕자 여창이 왕위를 이었다. 이 사람이 위덕왕이다.
8048#23968 SIBLINGS CHILDREN 23968
 
0559.03 三國史記(1145) 高句麗
왕이 서거하니 이름을 양원왕이라 하였다.
8048#8030 SIBLINGS CHILDREN COMMENT 8030
 
0560.09 日本書紀(720)
신라가 彌至己知 奈末을 보내어 조부를 바쳤다.
8048#23969 SIBLINGS CHILDREN 23969
 
0561 日本書紀(720)
신라가 久禮叱及伐干을 보내어 조부를 바쳤다. 그런데 이때 사빈이 베푼 향응의례의 횟수가 평상시보다 적었다. 급벌간은 분해하며 돌아갔다.
8048#23970 SIBLINGS CHILDREN 23970
 
0561 日本書紀(720)
다시 奴氐大舍를 보내 지난번의 조부를 바쳤다. 난파의 대군에서 여러 번국들의 서열을 매겼는데 장객 액전부련과 갈성직 등이 백제의 아래에 신라 사신을 세워 인도하였다. 대사는 화가 나서 돌아갔다. 穴門에 이르렀다. 이때 혈문관은 수리 중이었다. 대사가 “어떤 손님을 위해 짓는가?”라고 묻자, 공장 하내마사수압승이 거짓으로 “서방의 무례를 문책하러 보낼 사자가 머무를 숙소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신라는 阿羅 波斯山에 성을 쌓고 일본에 대비하였다.
8048#23972 SIBLINGS CHILDREN 23972
 
0562 新羅, 가라 병합
8048#8050 SIBLINGS CHILDREN COMMENT 8050
 
김석동
돌궐 또한 한민족 고대사와 긴밀한 연결 관계를 갖고 있다. 돌궐은 당과는 적대 관계였으나 고구려와는 우호·동맹 관계였다. 고구려를 이은 발해 역시 돌궐과는 우호 관계였다. ▐ 고려와 돌궐은 항상 우호 관계였던 것이 아니라 당나라 이전에는 적대 관계였다. 또 발해는 신라와 적대 관계였고 일본과 우호 관계였던 것으로 보아, 우호 관계와 종족적 친연성은 별개의 문제다.
8048#24820 SIBLINGS CHILDREN 24820
 
나무위키
8048#23980 SIBLINGS CHILDREN 23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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