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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왕자 여창이 왜의 지원군 및 가라와 함께 신라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는 신주에 주둔하고 있던 김무력으로 하여금 관산성을 지원하게 하였다. 백제 성왕이 여창을 격려하러 가다가 신라군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마침내 전세가 역전되어 백제는 패하고 여창은 포위를 뚫고 겨우 돌아갔다.
 
0554  관산성 전투
0554 관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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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01 日本書紀(720)
백제가 중부의 목리시덕문차, 전부의 시덕왈좌분옥 등을 축자에 보내 내신과 좌백련 등에게 묻기를 “덕솔 차주와 간솔 색돈 등이 지난 해 윤달 4일에 와서 ‘신(臣) 등(內臣을 말한다)은 내년 정월에 도착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약간이나마 들어 미리 군영을 쌓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내신이 명령을 받들어 “바로 도와줄 군대 1천, 말 1백 필, 배 40척을 보내도록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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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02 日本書紀(720)
백제가 하부 간솔 장군 삼귀와 상부 나솔 물부오 등을 보내 구원병을 청했다. 그리고 덕솔 동성자막고를 바쳐 이전 번 나솔 동성자언을 교대하고 오경박사 왕류귀로 고덕 마정안을 대신하고 승 담혜 등 9인으로 승 도침 등 7인을 교대하였다. 따로 명령을 받들어 역박사 시덕 왕도량, 역박사 고덕 왕보손, 의박사 나솔 왕유릉타, 채약사 시덕 반량풍, 고덕 정유타, 악인 시덕 삼근, 계덕 기마차, 계덕 진노, 대덕 진타를 바쳤는데 모두 청에 따라 교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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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05 日本書紀(720)
內臣率舟師詣于百濟 내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에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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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07 三國史記(1145)
王欲襲新羅親帥歩騎五十夜至狗川新羅伏兵發與戰爲亂兵所害薨謚曰聖 성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 50명의 군사로 신라를 습격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적다. 주력 부대를 위로하기 위해 가다가 습격을 받았다는 일본서기(720)의 설명이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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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07 三國史記(1145)
백제 성왕이 加良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인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크게 이겨서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 6백 명의 목을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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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07 三國史記(1145)
위덕왕은 이름이 창이니 성왕의 맏아들이다. 성왕이 재위 32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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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12 日本書紀(720)
겨울 12월 백제가 하부의 간솔 문사간노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 신 명(明)과 안라에 있는 왜신들, 임나 여러 나라의 한기들은 아룁니다. 사라가 무도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박(狛)과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미이거(彌移居 みやけ 官家)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유지신 등을 보내 군사를 청해 사라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천황께서 유지신을 보내시니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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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三國史記(1145)
할아버지 무력(武力)은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이 되어 일찍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백제 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참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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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日本書紀(720) 1
여창이 신라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원로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여창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대국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 하고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보루를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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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日本書紀(720) 2
그 아버지 명왕은 여창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는 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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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日本書紀(720) 3
이 때 신라에서 좌지촌의 사마노 고도(苦都, 다른 이름은 谷智다)에게 “고도는 천한 노(奴)이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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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日本書紀(720) 4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奴)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奴)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谷智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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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日本書紀(720) 5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다른 책에는 “신라가 명왕의 머리뼈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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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日本書紀(720) 6
여창은 포위에서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축자국조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뜨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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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日本書紀(720) 7
이로 인해 여창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여창이 국조가 활로 포위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안교군”이라 이름하였다(안교는 우리 말로 くろじ라 한다). 이 때 신라 장수들이 백제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드디어 멸망시켜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한 장수가 “안된다. 일본 천황이 임나의 일 때문에 여러 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백제관가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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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 Dictionary
What breed is this p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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