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솔까이야기 > 1991 미군철수 자주화 > 교체기 > 元明 교체기
 
 원명교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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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2-06-16 고려사(1451)
최우가 왕을 협박하여 강화로 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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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8-12-14 고려사(1451)
몽고 산길(散吉) 대왕과 보지관인(普只官人)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옛 화주 땅에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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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8-12-14 고려사(1451)
용진현 사람 조휘와 정주 사람 탁청이 화주 이북 지방을 몽고에 넘겨주었다. 몽고가 화주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으로, 탁청을 천호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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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8-12-23 고려사(1451)
달포성 사람들이 방호별감 정기 등을 잡아서 몽고에 투항하였다. -- 달포성은 황해도 곡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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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9-10-03 고려사(1451)
을해 서북면병마사영의 기관 최탄·한신과 삼화현인 전 교위 이연령, 정원도호부 낭장 계문비, 연주인 현효철 등이 임연을 죽인다는 명분을 내걸고 용강현·함종현·삼화현의 사람들을 불러모아 함종현령 최원을 살해하였고, 밤에 가도로 들어가서 분사어사 심원준과 감창사 박수혁, 경별초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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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9-10-28 고려사(1451)
최탄이 서경유수 및 용주·영주·철주·선주·자주 등 5개 주의 수령을 죽이니, 서북지역 여러 고을의 관리가 모두 반적에게 살해되었다. 최탄이 몽고 사신 탈타아에게 거짓말로 말하기를, “고려는 온 나라가 장차 깊은 섬으로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여러 고을의 수령을 죽이고 원나라에 들어가서 보고하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의주부사 김효거 등 22인을 붙잡아서 몽고에 투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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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0-02-07 고려사(1451)
최탄이 몽고 군사 3천 명을 요청하여 서경에 주둔시키자, 몽고 황제가 최탄·이연령에게 금패를, 현효철·한신에게 은패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조서를 내려 직접 몽고에 속하게 하고 동녕부라고 이름을 고쳤으며 자비령을 국경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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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2-02 고려사(1451)
"저 일본만은 성스러운 덕화를 입지 못했으니 조서를 휴대한 사신을 보내고 계속 군세를 과시해야 할 터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전함과 군량의 확보가 필수적일 것입니다. 그 일을 저에게 맡기신다면 심력을 다해 미력이나마 상국의 군대를 돕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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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3-04 고려사(1451)
김방경이 힌두·홍다구와 함께 전라도 함선 160척과 수군과 육군 1만여 명을 지휘해 탐라에서 싸워 수많은 적군을 죽이거나 노획하니 적이 궤멸되었다. 김원윤 등 여섯 명을 참수하고 항복한 적군 1,300여 명을 배에 나누어 실어 육지로 옮겼으며 원래 탐라에 거주했던 자는 예전처럼 안거하게 했다. 적이 완전히 평정되자 장군 송보연 등을 시켜 그대로 머물러 지키게 한 후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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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4-03 원사(1370)
三月己卯,詔以勸課農桑諭高麗國王王禃,仍命安撫高麗軍民總管洪茶丘提點農事。己醜,呂文煥隨司千戶陳炎謀叛,誅首惡二人,其隨司軍並其妻子皆令內徙。庚寅,敕鳳州經略使忻都、高麗軍民總管洪茶丘等將屯田軍及女直軍,並水軍,合萬五千人,戰船大小合九百艘,征日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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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4-04 고려사(1451)
"저희나라는 국토가 좁고 인구가 적은 관계로 군인과 농민의 구분이 없으며 그 위에 생활마저 매우 피폐한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번 탐라정벌에 동원되었던 병졸과 뱃사공들이 이제 다시 배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으며, 이번 일본원정에 나설 병졸과 초공들도 전번 부역에 나왔던 일꾼들 가운데 뽑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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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4-06 고려사(1451)
원종이 제상궁에서 죽으니 15년간 왕위에 있었고 향년은 5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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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4-07 고려사(1451)
김방경이 일본 정벌군의 선봉별초를 거느리고 먼저 원정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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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4-10 고려사(1451)
도독사 김방경으로 하여금 중군을 지휘하게 하고 박지량과 김흔을 지병마사로 임개를 부사로 김신을 좌군사로 위득유를 지병마사로 손세정을 부사로 임명했다. 또 김문비를 우군사로 나유와 박보를 지병마사로 반부를 부사로 임명해 삼익군이라 이름지었다. 이들은 원나라의 도원수 힌두와 우부원수 홍다구, 좌부원수 유복형과 함께 몽고·한족 연합군 2만 5천, 아군 8천, 초공·바닷길 안내자·선원 6천 7백 명과 전함 9백여 척으로 일본 정벌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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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4-10 고려사(1451)
이끼도(一岐島)에 이르러 천여 명을 죽이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니 왜인들이 달아나는데 쓰러진 시체가 삼대같이 즐비했다. 날이 저물어 공격을 늦추었는데 마침 밤에 들이닥친 폭풍우로 전함이 바위 언덕에 부딪쳐 많이 침몰했으며 김신은 익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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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4-11 고려사(1451)
일본 원정군이 합포(경남 마산)로 귀환해 오자 충렬왕이 동지추밀원사 장일을 보내 노고를 위로하게 했는데, 귀환하지 못하고 전사한 자가 무려 13,500여 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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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0-08 고려사(1451)
충렬왕이 황제를 알현하자 황제가 왕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호종한 신하들도 참석하도록 했다. 이에 앞서 왕이 박의를 시켜 “일본 정벌의 일은 제가 입조해 직접 지시를 받겠습니다.”라고 건의해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 힌두·홍다구·범문호가 모두 먼저 명령을 받은지라 ... 이에 왕은 전제조건으로 일곱 개 항목을 들어 수락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황제는 “건의한 사항들을 모두 받아들이노라.”고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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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0-08 원사(1370)
고려왕 왕춘(충렬왕)이 와서 조회하고 병사 3만을 더하여 일본을 정벌하려 한다고 하자 범문호·흔도·홍다구를 중서우승으로 삼고 이정·장발돌을 참지정사로 삼아 중서성의 일을 아울러 행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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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1-04 고려사(1451)
힌두·홍다구·김방경·박구·김주정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일본을 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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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1-06 고려사(1451)
범문호도 전함 3,500척으로 만군(蠻軍 남송군) 10여만 명을 거느리고 오다가 태풍을 만나 만군이 모두 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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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1-07 고려사(1451)
원수 김방경이 중랑장 박온을 시켜, “각 부대가 다자이후까지 진군해 여러 차례 교전하다가 아군과 적군이 다 퇴각해 있던 차에 만선 50척이 뒤미처 도착하므로 다시 성을 향해 진격 중입니다.”라는 보고를 올리고는 노획한 갑옷과 투구, 활과 화살, 안장 딸린 말 등의 물품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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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1-08 고려사(1451)
별장 김홍주가 합포현(경남 마산)으로부터 행궁에 와서 일본정벌에 나섰던 군사들이 패배한 사실과 원수들이 합포현으로 귀환한 것을 보고했다. 힌두·홍다구·범문호 등이 원나라로 돌아갔다. 일본 원정에 나섰던 군사 가운데 귀환하지 못한 자가 무려 십만 명이나 되었다.
http://qindex.info/i.php?f=2725#35012
 
 1294 원나라 행정구역
1290년에 동녕부를 돌려받았으니 1294년에 왕고의 동북경계는 압록강이다. 개경의 위치도 한양으로 잘못 표기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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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2 조선왕조실록
도조(孛顔帖木兒)가 죽었다. 함흥부의 예안부 운천동에 장사지내니, 곧 의릉(義陵)이다. 탑사불화(塔思不花)가 사유를 갖추어 개원로(開元路)에 사람을 보내어 알리니, 개원로에서 조감해 보매 탑사불화는 정실의 아들이므로 탑사불화로 하여금 관직을 이어받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f=2725#897
 
 1342 조선왕조실록
탑사불화는 이성계의 백부다. 이성계의 집안은 원나라의 쌍성총관부에서 천호의 벼슬을 계승하고 있었는데, 발안첩목아가 죽자 맏아들 탑사불화가 원나라의 승인을 얻어 벼슬을 계승한 것이다. 원나라의 행정구역에는 요양로, 심양로, 개원로 등이 있었는데 쌍성부는 개원로에 소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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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51 홍건의 난
하북성에 본거를 둔 비밀종교결사 백련교회의 두령 한산동은 일찍부터 미륵불하생의 설을 가지고 포교활동을 하여 허베이·허난·안후이 등 각지에서 널리 신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때마침 1351년 대범람을 일으킨 황허강 수리를 위하여 수많은 농민과 노동자를 징발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생긴 민심의 동요를 틈타서 '송(宋) 휘종 8세의 손자'라고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http://qindex.info/i.php?f=2725#40344
 
 1356-03 고려사(1451)
이자춘이 입조하자 왕이 영접하는 자리에서, 완악한 백성들을 어루만지느라 고생이 많노라고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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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56-05 고려사(1451)
대사도 기철, 태감 권겸, 경양부원군 노책이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당하고 그 일당들은 죄다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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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56-06 고려사(1451)
왕이 지정(元 순제의 연호)의 사용을 중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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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56-07 고려사(1451)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유인우(柳仁雨)가 쌍성(雙城)을 함락시키자 총관(摠管) 조소생(趙小生), 천호(千戶) 탁도경(卓都卿)이 도망쳐버리니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 및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지를 되찾게 되었다. 함주(咸州) 이북은 고종(高宗) 무오년부터 원이 차지했는데 이때 와서 모두 수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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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8 명(明) 건국
홍건적에 속한 장수였던 가난한 농부 출신 주원장은 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장강유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여 1368년 명(明)을 건국하였다. 주원장는 건국하자마자 북벌을 개시하여 원(元) 순제는 북경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은 명(明)에 의해 통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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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8-09 고려사(1451)
우리나라 사람 김지수가 원(元)으로부터 돌아와서, “명(明) 수군 함선 1만여 척이 통주에 닻을 내리고 원(元) 수도를 공격하니 황제와 황후는 상도로 도망가고 황태자도 싸우다가 패하자 역시 상도로 도망갔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백관들에게 명(明)과 서로 사신을 주고 받을 방법을 의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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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8-11 고려사(1451)
예의판서 장자온을 시켜 오왕(주원장을 말하는 듯)을 예방하게 하니 오왕이 예법에 따라 매우 후대하면서 6부와 어사대를 시켜 위로 잔치를 열어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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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8-11 고려사(1451)
원(元)에서 이용감태경 만자한을 보내, “장수들로 하여금 명(明)에 점거당한 영토를 회복할 전략을 세우도록 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전달하게 하자 왕이 행성에서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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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9-04 고려사(1451)
명(明) 황제가 부보랑 설사를 보내 ... 황제의 친서는 다음과 같았다. "대명황제가 고려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송(趙宋)이 정치를 그르쳐 하늘의 버림을 받게 되자 우리 한족(漢族)이 아닌 원(元)이 천명을 받아 백 년 넘게 중국의 주인 노릇을 해 왔다. ... 하늘이 이미 그 국왕의 덕을 살펴 왕으로 삼았으니 우린들 어찌 길이 그를 고려의 국왕으로 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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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9-05 고려사(1451)
원(元) 연호인 지정을 쓰지 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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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7-03 명사(1739)
앞서 원나라 말기에 요양(遼陽)·번양(藩陽) 지방에서 병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고려로 옮겨 간 일이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서 말을 사는 기회에 황제가 명을 내려 그들을 찾아내도록 하니, 마침내 요양·번양 지방의 유망민 3백여명이 돌아오게 되었다.
http://qindex.info/i.php?f=2725#894
 
 1387-12 명사(1739)
호부로 하여금 고려왕에게 외교문서를 보내도록 하기를, “철령(鐵嶺) 북방 동서쪽의 땅은 옛날부터 개원(開元)에 속하였으니 요동에서 통치하도록 하고, 철령 남쪽은 옛날부터 고려에 속하였으니 고려에서 통치토록 하오. 서로 국경을 확정하여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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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 철령위와 위화도 회군
 철령위와 위화도 회군    1388-02 고려사(1451)    1388-02 고려사(1451)    1388-03 고려사(1451)    1388-03 고려사(1451)    1388-04 고려사(1451)    1388-04 명사(1739)    1388-04 명사(1739)    1388-05 고려사(1451)    1388-05-13 고려사    1388-06 고려사(1451)    1388-06 고려사(1451)    1388-06 고려사(1451)    1388-06 고려사(1451)    1388-08 명사(1739)    1388-10 명사(1739)    1739 명사    1823 해동역사(海東繹史)    1823 해동역사(海東繹史)    2010-04-15 복기대    2010-04-15 복기대의 오류    성경통지(盛京通志)    성경통지(盛京通志)  
 
 1389 명사(1739)
권국사 창(昌)이 상진하여 입조할 것을 청하였으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 해에 성계는 창(昌)을 폐위시키고 정창국원군 요(瑤)를 즉위시켰다. 이듬해 정월에 사신을 보내와 이 사실을 통고하였다.
http://qindex.info/i.php?f=2725#40364
 
 1391-03 명사(1739)
고려에 가서 말을 사오라는 조서를 내렸다. 8월에 권국사 요(瑤)가 사들인 말 1천 5백필을 올려 보내자, 황제는 말하기를, “삼한의 군신들이 정의에 반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 요즈음만 해도 두 번이나 되지만, 지금 왕위를 이은 왕요는 왕씨의 후손이니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http://qindex.info/i.php?f=2725#40365
 
 1391-12 명사(1739)
요(瑤)가 그의 아들 석(奭)을 보내어 이듬해 정단을 조하하도록 하였는데, 석(奭)이 미처 돌아가기 전에 성계가 스스로 왕위에 올라 그 나라를 차지하고, 요(瑤)를 원주에 내쳐서 살게 하였다. 왕씨는 5대10국 때부터 수백년 동안 나라를 이어 왔는데 이 때에 이르러 끊어지고 말았다.
http://qindex.info/i.php?f=2725#40366
 
 1392-07 조선왕조실록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남은이 드디어 문하 평리 정희계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북천동의 시좌궁에 이르러 교지를 선포하니, 공양왕이 부복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하여 사기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하면서, 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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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2-09 명사(1739)
고려의 지밀직사사 조반 등이 그 나라 도평의사의 주문을 가지고 왔는데, 이르기를, “신 등이 나라의 기로들과 상의하여 그(이성계)에게 국사를 맡아 주도록 다같이 추대했사오니, 오로지 성주의 윤허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유시케 하기를, “과연 천도에 순응하고 인심에 화합할 수 있으며, 변경을 침범하지 않고 사신이 왕래할 수 있다면, 이는 진실로 그대 나라의 복이니 내가 또 무엇을 책망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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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2-11 조선왕조실록
예문관 학사 한상질을 보내어 중국 남경에 가서 조선(朝鮮)과 화령(和寧)으로써 국호를 고치기를 청하게 하였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과 화령 등의 칭호로써 천총에 주달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http://qindex.info/i.php?f=2725#40359
 
 1392-11 명사(1739)
성계가 황태자의 훙거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위로의 표문을 올리고 아울러 국호를 고칠 것을 청원하므로, 황제는 이에 그 나라의 옛 칭호에 따라서 조선이라 부르게 했다.
http://qindex.info/i.php?f=2725#40360
 
 1393-06-01 조선왕조실록
"1388년에 신우(우왕)와 최영 등이 군대를 함부로 일으켜 요동으로 향하고자 했으며, 1392년에 왕요(공양왕)와 정몽주 등이 신우의 부정한 뜻을 계승하여 장차 상국을 범하려 하므로, 신이 온 나라 신민들에게 효유하여, 오랑캐가 중화를 소란하게 할 수가 없으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할 수 없다고 말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그 역리와 순리를 알게 되고, ..."
http://qindex.info/i.php?f=2725#40585
 
 1591 선조수정실록
현소가 다시 말하기를, "옛날 고려가 원(元)나라 병사를 인도하여 일본을 쳤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에 원한을 갚고자 하니, 이는 사세상 당연한 일입니다." 하였다. 그의 말이 점점 패려하여 성일이 다시 캐묻지 못하였다.
http://qindex.info/i.php?f=2725#41768
 
 元朝行政区划
원나라의 행정구역에는 요양로, 심양로, 개원로 등이 있었는데 쌍성부는 개원로에 소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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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吉林農安縣
초기 개원로 치지
http://qindex.info/i.php?f=2725#2359
 
 咸平路
金置。初曰咸州路。金亮升咸州爲府。路因改焉。今奉天開原以北迄於吉林伊通境。治咸平府。卽今奉天開原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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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开原市
개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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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懷遠府
渤海国设置的府。 治所在今吉林省怀德县新集城,一说在黑龙江省同江县。在越喜靺鞨故地。下辖达州、富州(辖境约当今辽宁省铁岭市)、美州、越州、怀州、纪州、福州、邪州、芝州。辽国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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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本溪市
본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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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米中교체기(3) - 원(元)과 명(明) 사이에서
원(元)이 쇠약해지고 명(明)이 등장하자 왕고는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왕씨왕조가 망하고 이씨왕조가 들어섰다.
http://qindex.info/i.php?f=2725#2325
 
 铁岭县
铁岭县位于中国辽宁省东北部,是铁岭市下辖的一个县。 辽置银州,隶辽阳府。金为新兴县,隶咸平府。明移卫至此始称铁岭。清废卫建铁岭县,中华民国十八年(1929年)隶辽宁省。1956年隶铁岭专区,1970年隶铁岭地区,1984年隶铁岭市。
http://qindex.info/i.php?f=2725#2340
 
 開元路
元置。屬遼陽省。滿洲源流考。開元本金上京境内地名。元兵至此遂定其地。而故上京一帶倶已殘毀。因改建開元路。非開元卽上京也。其初寄治黄龍府。(卽今吉林農安縣)後徙治咸平府。(在今奉天開原縣)明初以其地設衞。始改元爲原。亦非今開原縣即黄龍府也。又按元史。開元路即古肅愼、隋唐黑水靺鞨地。東瀕海。南界高麗。西北與契丹接壤。蓋全有今吉林境。元統志言。南鎭長白之山。北浸鯨州之海。則有今長白山至黑龍江東北瀕海之地。與開原衞所轄。廣狹亦逈不侔也。
http://qindex.info/i.php?f=2725#2355
 
 雙城縣
遼置。金廢。故治在今遼寧鐵嶺縣西六十里。⦿金爲上京會寧府之西南境。元爲廢地。明爲阿憐部。清嘉慶間置協領於雙城堡。管理駐京八旗移墾事宜。隸阿勒楚喀副都統。光緖間置雙城廳通判。宣統初升府。屬吉林省。民國改縣。舊屬吉林濱江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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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녕부
1269년(원종 10년) 서북면 병마사의 기관(記官)인 최탄(崔坦) 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과 자비령(慈悲嶺)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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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황성(鳳凰城)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큰 산성의 하나로, 오골성(烏骨城)이라고 불렸다. 압록강 하류에 위치한 중국 요녕성 단동시의 동북쪽 20여 km쯤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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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씨고려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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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元)의 일본침공
일본침공은 왕고에게 득될 것이 없었다. 일본으로부터 복종을 받아내더라도 그 열매는 원(元) 왕조에게만 돌아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력과 물자를 부담하느라 왕과 백성들 모두 고통스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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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령위 사건
철령위를 설치하러 왔다가 압록강에서 저지당하자 인근의 성(城)에 임시로 머물렀는데 몇 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자 지금의 철령시로 옮겨갔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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