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遼黑史 > 1392 元明 교체

대체적으로 한국에서의 왕조교체는 중국에서의 왕조교체와 맞물려 일어났다. 중국에서 元이 明으로 교체될 때도 한국에서 왕씨고려가 이씨조선으로 교체되었다. 명나라를 치라고 보낸 왕고의 장수 이성계는 군대를 되돌려 왕씨왕조를 전복하고 이씨왕조를 세웠다. 그리고 명나라에 조선과 화령 두 국호 안을 올려 조선으로 하라는 결정을 받고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다.
 
 원명교체기
원명교체기
고대 예가 있던 곳에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고 고대 조선과 낙랑이 있던 곳에 동녕부가 설치되었다. 요동에서 압록강 유역을 가로질러 예에 이르던 길은 쌍성총관부가 원나라의 개원로와 교통하는 길이 되었고 명나라가 철령을 설치하러 오는 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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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2.06.16 고려사(1451)
최우가 왕을 협박하여 강화로 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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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1368
1234~1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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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4 朝鮮王朝實錄
全州의 李安社는 山城別監이 객관에 왔을 때 관기 사건으로 갈등이 생기자 三陟縣으로 옮겨 갔는데, 이때 백성 170여 집이 따라갔다. 李安社는 다시 山城別監을 피해 宜州로 옮겨가 살았는데, 이때도 170여 집은 따라갔다. 高麗에서는 李安社를 宜州兵馬使로 삼아 고원을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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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4 朝鮮王朝實錄
그러나 雙城 이북이 開元路에 소속되고 원나라 散吉大王이 雙城에 주둔하면서 鐵嶺 이북을 차지하려 하자, 李安社는 1천여 집을 거느리고 항복하고 종친의 딸을 散吉에게 시집보냈다. 李安社는 時利(利城)를 거쳐 開元路 南京의 斡東으로 옮겨가 거주하였다. 이때가 1254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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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5 朝鮮王朝實錄
1255년에 산길이 이 사실을 원나라 황제에게 알리니 원나라에서 斡東千戶所를 세우고 금패를 내려 주어 南京 등처 五千戶所의 首千戶로 삼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 斡東은 南京 동남쪽 90여 리에 있으니, 지금의 慶興府 동쪽 30리에 떨어져 있다. 알동의 서북쪽 1백 20여 리에 豆門城이 있고 또 그 서쪽 1백 20여 리에 斡東沙吾里가 있으니 沙吾里는 여진 말로서 참이다. 참이 관동 알동의 관내에 있는 까닭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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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12.14 高麗史(1451)
몽고 散吉 대왕과 普只官人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옛 화주 땅에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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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12.14 高麗史(1451)
용진현 사람 조휘와 정주 사람 탁청이 화주 이북 지방을 몽고에 넘겨주었다. 몽고가 화주에 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으로, 탁청을 천호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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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12.23 高麗史(1451)
달포성 사람들이 방호별감 정기 등을 잡아서 몽고에 투항하였다. ▐ 달포성은 황해도 곡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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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9.10.03 고려사(1451)
을해 서북면병마사영의 기관 최탄·한신과 삼화현인 전 교위 이연령, 정원도호부 낭장 계문비, 연주인 현효철 등이 임연을 죽인다는 명분을 내걸고 용강현·함종현·삼화현의 사람들을 불러모아 함종현령 최원을 살해하였고, 밤에 가도로 들어가서 분사어사 심원준과 감창사 박수혁, 경별초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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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9.10.28 고려사(1451)
최탄이 서경유수 및 용주·영주·철주·선주·자주 등 5개 주의 수령을 죽이니, 서북지역 여러 고을의 관리가 모두 반적에게 살해되었다. 최탄이 몽고 사신 탈타아에게 거짓말로 말하기를, “고려는 온 나라가 장차 깊은 섬으로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여러 고을의 수령을 죽이고 원나라에 들어가서 보고하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의주부사 김효거 등 22인을 붙잡아서 몽고에 투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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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0.02.07 고려사(1451)
최탄이 몽고 군사 3천 명을 요청하여 서경에 주둔시키자, 몽고 황제가 최탄·이연령에게 금패를, 현효철·한신에게 은패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조서를 내려 직접 몽고에 속하게 하고 동녕부라고 이름을 고쳤으며 자비령을 국경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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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2.02 고려사(1451)
"저 일본만은 성스러운 덕화를 입지 못했으니 조서를 휴대한 사신을 보내고 계속 군세를 과시해야 할 터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전함과 군량의 확보가 필수적일 것입니다. 그 일을 저에게 맡기신다면 심력을 다해 미력이나마 상국의 군대를 돕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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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2.02 고려사(1451)
▐ 이것은 왕고의 세자 왕심(훗날 충렬왕)이 元에 머무르고 있을 때 쓴 편지다. 그는 이 편지를 쓰고 귀국을 허락받았다. 고려사는 왕심이 귀국하고 싶어서 저런 편지를 썼다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元은 계속해서 일본에게 복종을 요구하고 있었고 일본은 계속 이를 거부하고 있었다. 따라서 元이 일본침공을 결심하는 데는 그런 국제관계가 영향을 준 것이지 저 편지가 영향을 준 것으로는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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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3.04 고려사(1451)
김방경이 힌두·홍다구와 함께 전라도 함선 160척과 수군과 육군 1만여 명을 지휘해 탐라에서 싸워 수많은 적군을 죽이거나 노획하니 적이 궤멸되었다. 김원윤 등 여섯 명을 참수하고 항복한 적군 1,300여 명을 배에 나누어 실어 육지로 옮겼으며 원래 탐라에 거주했던 자는 예전처럼 안거하게 했다. 적이 완전히 평정되자 장군 송보연 등을 시켜 그대로 머물러 지키게 한 후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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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03 원사(1370)
三月己卯,詔以勸課農桑諭高麗國王王禃,仍命安撫高麗軍民總管洪茶丘提點農事。己醜,呂文煥隨司千戶陳炎謀叛,誅首惡二人,其隨司軍並其妻子皆令內徙。庚寅,敕鳳州經略使忻都、高麗軍民總管洪茶丘等將屯田軍及女直軍,並水軍,合萬五千人,戰船大小合九百艘,征日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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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04 고려사(1451)
"저희나라는 국토가 좁고 인구가 적은 관계로 군인과 농민의 구분이 없으며 그 위에 생활마저 매우 피폐한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번 탐라정벌에 동원되었던 병졸과 뱃사공들이 이제 다시 배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으며, 이번 일본원정에 나설 병졸과 초공들도 전번 부역에 나왔던 일꾼들 가운데 뽑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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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04 고려사(1451)
▐ 1274년 3월에 일본침공이 결정되고 왕고에게도 많은 할당량이 떨어졌다. 삼별초 토벌을 끝낸지 1년도 안된 왕고로서는 부담이 클 수 밖에 없었다. 충렬왕이 元황제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그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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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06 고려사(1451)
원종이 제상궁에서 죽으니 15년간 왕위에 있었고 향년은 5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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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07 고려사(1451)
김방경이 일본 정벌군의 선봉별초를 거느리고 먼저 원정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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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10 고려사(1451)
도독사 김방경으로 하여금 중군을 지휘하게 하고 박지량과 김흔을 지병마사로 임개를 부사로 김신을 좌군사로 위득유를 지병마사로 손세정을 부사로 임명했다. 또 김문비를 우군사로 나유와 박보를 지병마사로 반부를 부사로 임명해 삼익군이라 이름지었다. 이들은 원나라의 도원수 힌두와 우부원수 홍다구, 좌부원수 유복형과 함께 몽고·한족 연합군 2만 5천, 아군 8천, 초공·바닷길 안내자·선원 6천 7백 명과 전함 9백여 척으로 일본 정벌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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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10 고려사(1451)
이끼도(一岐島)에 이르러 천여 명을 죽이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니 왜인들이 달아나는데 쓰러진 시체가 삼대같이 즐비했다. 날이 저물어 공격을 늦추었는데 마침 밤에 들이닥친 폭풍우로 전함이 바위 언덕에 부딪쳐 많이 침몰했으며 김신은 익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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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10 고려사(1451)
▐ 김방경, 흔두 그리고 홍다구는 모두 삼별초 토벌을 이끌었던 장수들이다. 일기도는 울릉도만한 섬인데 저 기록을 보아 많은 학살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왕고군이 선봉에 섰으니 왕고가 일본의 원망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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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11 고려사(1451)
일본 원정군이 합포(경남 마산)로 귀환해 오자 충렬왕이 동지추밀원사 장일을 보내 노고를 위로하게 했는데, 귀환하지 못하고 전사한 자가 무려 13,500여 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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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5 朝鮮王朝實錄
李行里가 아버지 李安社의 관직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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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0.08 고려사(1451)
충렬왕이 황제를 알현하자 황제가 왕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호종한 신하들도 참석하도록 했다. 이에 앞서 왕이 박의를 시켜 “일본 정벌의 일은 제가 입조해 직접 지시를 받겠습니다.”라고 건의해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 힌두·홍다구·범문호가 모두 먼저 명령을 받은지라 ... 이에 왕은 전제조건으로 일곱 개 항목을 들어 수락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황제는 “건의한 사항들을 모두 받아들이노라.”고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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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0.08 고려사(1451)
▐ 일본에 대한 재침공은 원나라에서 결정되었고 충렬왕이 원나라 황제를 찾아가 참전조건을 제시하고 왕고가 선봉에 서겠다고 한 것은 왕고의 부담을 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에서는 왕고가 침공을 주도한 것으로 읽혀 원망을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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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0.08 원사(1370)
고려왕 왕춘(충렬왕)이 와서 조회하고 병사 3만을 더하여 일본을 정벌하려 한다고 하자 범문호·흔도·홍다구를 중서우승으로 삼고 이정·장발돌을 참지정사로 삼아 중서성의 일을 아울러 행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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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朝鮮王朝實錄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니 천하의 병선이 합포에 모였다. 李行里가 본소의 인호에 군인을 기명하여 뽑아서 雙城摠管府의 삼살 천호와 몽고의 대탑실 등과 함께 정벌에 나아갔다. 마침내 고려의 충렬왕을 뵈옵고 사과하기를 "선신께서 북방으로 달아난 것은 실로 호랑이의 아가리를 벗어나고자 한 것이고 감히 君父를 배반한 것은 아니오니,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옵소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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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蒙古襲來繪詞
1281 蒙古襲來繪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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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蒙古襲來繪詞
1281 蒙古襲來繪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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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蒙古襲來繪詞
1281 蒙古襲來繪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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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04 고려사(1451)
힌두·홍다구·김방경·박구·김주정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일본을 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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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06 고려사(1451)
범문호도 전함 3,500척으로 만군(蠻軍 남송군) 10여만 명을 거느리고 오다가 태풍을 만나 만군이 모두 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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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07 고려사(1451)
원수 김방경이 중랑장 박온을 시켜, “각 부대가 다자이후까지 진군해 여러 차례 교전하다가 아군과 적군이 다 퇴각해 있던 차에 만선 50척이 뒤미처 도착하므로 다시 성을 향해 진격 중입니다.”라는 보고를 올리고는 노획한 갑옷과 투구, 활과 화살, 안장 딸린 말 등의 물품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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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1281.08 고려사(1451)
별장 김홍주가 합포현(경남 마산)으로부터 행궁에 와서 일본정벌에 나섰던 군사들이 패배한 사실과 원수들이 합포현으로 귀환한 것을 보고했다. 힌두·홍다구·범문호 등이 원나라로 돌아갔다. 일본 원정에 나섰던 군사 가운데 귀환하지 못한 자가 무려 십만 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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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08 고려사(1451)
▐ 흔두, 홍다구 그리고 김방경은 삼별초 토벌과 일본에 대한 1차침공을 모두 이끌었던 장수들이고 범문호는 원(元)에 투항한 송(南宋)의 장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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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0 朝鮮王朝實錄
李行里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 강성하니 여러 천호들이 "어찌 깊은 곳의 사람들에게 군사를 청하여 그를 제거하고 그 재산을 나눠갖지 않겠는가?" 하였다. 李行里는 가인들로 하여금 두만강을 따라 내려가 赤島에서 만나기로 하고 부인과 함께 말을 달려 북쪽 언덕에 이르렀다. 北海는 본디 조수가 없는데 물이 갑자기 얕아지므로 李行里와 부인이 건넜는데 물이 다시 크게 불어나므로 적병이 건너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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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0 朝鮮王朝實錄
섬에서 오래 거주하다 배 10척을 만들어 타고 1290년에 다시 宜州로 돌아와 거주하니 孔州의 백성들이 그를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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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7 고려사절요
충렬왕이 원나라 테무르 황제가 행차하여 사냥하는 것을 관람하였는데, 이때 왕씨고려가 항복한 이후 포로된 자와 유민으로서 요양과 심양에 있는 자를 모두 본국으로 데려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테무르 황제가 이를 허락하니 충렬왕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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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朝鮮王朝實錄
10월에 칙명으로 承仕郞을 제수하여 쌍성 등지의 고려 군민을 다스리는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일을 맡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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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朝鮮王朝實錄
李椿(孛顔帖木兒)이 아버지 李行里의 관직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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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2 朝鮮王朝實錄
孛顔帖木兒가 죽었다. 함흥부의 예안부 운천동에 장사지내니, 곧 義陵이다. 塔思不花가 사유를 갖추어 開元路에 사람을 보내어 알리니, 개원로에서 조감해 보매 탑사불화는 정실의 아들이므로 탑사불화로 하여금 관직을 이어받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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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3 朝鮮王朝實錄
9월에 탑사불화가 죽었으나 아들 교주가 어리므로 원나라에서 李子春으로 하여금 임시로 관직을 이어 받았다가 교주가 정년이 되면 그에게 관직을 주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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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1 홍건의 난
하북성에 본거를 둔 비밀종교결사 백련교회의 두령 한산동은 일찍부터 미륵불하생의 설을 가지고 포교활동을 하여 허베이·허난·안후이 등 각지에서 널리 신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때마침 1351년 대범람을 일으킨 황허강 수리를 위하여 수많은 농민과 노동자를 징발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생긴 민심의 동요를 틈타서 '송(宋) 휘종 8세의 손자'라고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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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5 高麗史(1451)
이 해에 우리 桓祖가 雙城等處千戶로서 와서 왕을 알현하는데 왕이 말하기를, “그대의 조부와 아비는 몸은 비록 나라 밖에 있었지만 그 마음은 우리 왕실에 있었기에 나의 선조들께서는 실제로 총애하고 가상하게 여겼노라. 지금 경은 선조의 이름에 더할 것이 없으니 내가 장차 너를 귀하게 성취시켜 주겠노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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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03 高麗史(1451)
桓祖가 입조하자 왕이 “완악한 백성들을 어루만지느라 어찌 수고롭지 않겠는가?” 하였다. 당시 奇氏 일족들이 기황후의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렸는데, 어떤 사람이 “기철이 몰래 雙城의 반란을 일으킨 민들과 내통하여 무리를 결성하고 반역을 도모하는 데 도움을 받으려 합니다.” 하였다. 왕이 환조에게 “경은 마땅히 돌아가서 우리 민을 잘 진무할 것이며 만약 변란이 발생하면 나의 명령을 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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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05 고려사(1451)
대사도 기철, 태감 권겸, 경양부원군 노책이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당하고 그 일당들은 죄다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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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06 高麗史(1451)
왕이 지정(元 순제의 연호)의 사용을 중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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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07 高麗史(1451)
동북면병마사 유인우가 雙城을 함락시키자 총관 조소생, 千戶 탁도경이 도망쳐버리니 和州·登州·定州·長州·預州·高州·文州·宜州 및 宣德鎭·元興鎭·寧仁鎭·耀德鎭·靜邊鎭 등지를 되찾게 되었다. 咸州 이북은 1258년부터 원이 차지했는데 이때 와서 모두 수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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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10.12 高麗史(1451)
雙城·三撒은 원래 우리나라 영토였는데, 1258년에 조휘·탁청 등이 범죄를 저지르고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여진을 꾀어 들여 우리가 살피지 못하고 있는 틈을 타서, 관리들을 살육하고 남녀 백성들을 사로잡아가서 모두 노비로 삼았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시어 雙城과 三撒 이북 땅에 關防을 두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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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7.08.16 高麗史(1451)
雙城·三撒 등처를 살펴보면 원래 본국의 영토로 북쪽으로는 伊板領이 경계로 되어 있었습니다. 伊板의 좁은 입구에 關防을 설치하여 출입을 통제하게 하면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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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 명(明) 건국
홍건적에 속한 장수였던 가난한 농부 출신 주원장은 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장강유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여 1368년 명(明)을 건국하였다. 주원장는 건국하자마자 북벌을 개시하여 원(元) 순제는 북경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은 명(明)에 의해 통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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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09 고려사(1451)
우리나라 사람 김지수가 원(元)으로부터 돌아와서, “명(明) 수군 함선 1만여 척이 통주에 닻을 내리고 원(元) 수도를 공격하니 황제와 황후는 상도로 도망가고 황태자도 싸우다가 패하자 역시 상도로 도망갔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백관들에게 명(明)과 서로 사신을 주고 받을 방법을 의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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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11 고려사(1451)
예의판서 장자온을 시켜 오왕(주원장을 말하는 듯)을 예방하게 하니 오왕이 예법에 따라 매우 후대하면서 6부와 어사대를 시켜 위로 잔치를 열어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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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11 고려사(1451)
원(元)에서 이용감태경 만자한을 보내, “장수들로 하여금 명(明)에 점거당한 영토를 회복할 전략을 세우도록 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전달하게 하자 왕이 행성에서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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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9.04 고려사(1451)
명(明) 황제가 부보랑 설사를 보내 ... 황제의 친서는 다음과 같았다. "대명황제가 고려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송(趙宋)이 정치를 그르쳐 하늘의 버림을 받게 되자 우리 한족(漢族)이 아닌 원(元)이 천명을 받아 백 년 넘게 중국의 주인 노릇을 해 왔다. ... 하늘이 이미 그 국왕의 덕을 살펴 왕으로 삼았으니 우린들 어찌 길이 그를 고려의 국왕으로 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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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9.05 고려사(1451)
원(元) 연호인 지정을 쓰지 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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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 이성계의 정벌
압록강 건너 우라산성을 정벌하였다. 이때 동쪽으로는 황성, 북쪽으로는 동녕부, 서쪽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의 주민들이 대거 왕고로 귀순하여 이 지역은 텅 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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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01 고려사(1451) 1
이성계가 기병 5,000명과 보병 10,000명을 거느리고 동북면으로부터 황초령을 넘어 600여 리를 행군하여 설한령에 이르렀으며, 또 700여 리를 행군하여 갑진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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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01 고려사(1451) 2
동녕부의 동지인 이오로첩목아는 이성계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산성으로 이동해 주둔하여 험한 지형에 의지해서 항거하려고 하였다. 태조가 야둔촌에 이르자 무기를 버리고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저의 선조는 본래 고려 사람이니(吾先本高麗人),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고 300여 호를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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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01 고려사(1451) 3
두목 20여 명이 무리를 이끌고 나와서 항복하니, 여러 성들이 소문을 듣고 모두 항복하였으므로 모두 10,000여 호를 얻게 되었다. 노획한 소 2,000여 마리와 말 수백 필을 모두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방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으며, 귀순하는 자들로 저자거리와 같게 되었다. 동쪽으로는 황성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동녕부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이 텅 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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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
1370¦
▐ 동녕부는 1290년에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겨갔다. 황성, 압록강, 황해 그리고 동녕부로 둘러싸인 지역은 옛 맥의 영역이다. 이오로첩목아가 말하는 고려는 왕씨고려가 아니라 맥고려를 뜻하는 듯하다. 낙랑고려가 망한 뒤에도 貊은 발해 시기의 압록부와 요나라 시기의 정안국으로 이어졌으며 14세기에도 왕고에서 북방의 한 종족으로 언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貊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이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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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7~1388 철령위와 위화도 회군
천산산맥 북쪽에 금의 함주가 있었다. 금을 멸망시킨 원은 왕고의 철령 북쪽에 있던 함주를 이와 혼동하여 인근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철령 이북을 소속시켰다. 또 금의 함주에는 개원로를 설치하였는데 쌍성총관부를 이 개원로에 소속시켰다. 원을 몰아낸 명은 원의 개원로에 속했던 철령 이북을 왕고로부터 돌려받아 철령위를 설치하고 새로 설치된 요동도사에 소속시키려 하였다. 왕고는 이에 반발하여 요동을 공격하게 했으나 정벌군 장수 이성계는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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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 명사(1739)
권국사 창(昌)이 상진하여 입조할 것을 청하였으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 해에 성계는 창(昌)을 폐위시키고 정창국원군 요(瑤)를 즉위시켰다. 이듬해 정월에 사신을 보내와 이 사실을 통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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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1.03 명사(1739)
고려에 가서 말을 사오라는 조서를 내렸다. 8월에 권국사 요(瑤)가 사들인 말 1천 5백필을 올려 보내자, 황제는 말하기를, “삼한의 군신들이 정의에 반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 요즈음만 해도 두 번이나 되지만, 지금 왕위를 이은 왕요는 왕씨의 후손이니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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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1.12 명사(1739)
요(瑤)가 그의 아들 석(奭)을 보내어 이듬해 정단을 조하하도록 하였는데, 석(奭)이 미처 돌아가기 전에 성계가 스스로 왕위에 올라 그 나라를 차지하고, 요(瑤)를 원주에 내쳐서 살게 하였다. 왕씨는 5대10국 때부터 수백년 동안 나라를 이어 왔는데 이 때에 이르러 끊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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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07 조선왕조실록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남은이 드디어 문하 평리 정희계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북천동의 시좌궁에 이르러 교지를 선포하니, 공양왕이 부복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하여 사기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하면서, 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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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09 명사(1739)
고려의 지밀직사사 조반 등이 그 나라 도평의사의 주문을 가지고 왔는데, 이르기를, “신 등이 나라의 기로들과 상의하여 그(이성계)에게 국사를 맡아 주도록 다같이 추대했사오니, 오로지 성주의 윤허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유시케 하기를, “과연 천도에 순응하고 인심에 화합할 수 있으며, 변경을 침범하지 않고 사신이 왕래할 수 있다면, 이는 진실로 그대 나라의 복이니 내가 또 무엇을 책망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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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11 조선왕조실록
예문관 학사 한상질을 보내어 중국 남경에 가서 조선(朝鮮)과 화령(和寧)으로써 국호를 고치기를 청하게 하였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과 화령 등의 칭호로써 천총에 주달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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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11 명사(1739)
성계가 황태자의 훙거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위로의 표문을 올리고 아울러 국호를 고칠 것을 청원하므로, 황제는 이에 그 나라의 옛 칭호에 따라서 조선이라 부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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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06.01 조선왕조실록
"1388년에 신우(우왕)와 최영 등이 군대를 함부로 일으켜 요동으로 향하고자 했으며, 1392년에 왕요(공양왕)와 정몽주 등이 신우의 부정한 뜻을 계승하여 장차 상국을 범하려 하므로, 신이 온 나라 신민들에게 효유하여, 오랑캐가 중화를 소란하게 할 수가 없으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할 수 없다고 말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그 역리와 순리를 알게 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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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 太祖實錄(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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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04.04 太宗實錄(1431)
遼東千戶 王可仁이 받들고 온 칙서에 "지금 參散·禿魯兀 등 11처의 溪關萬戶 寗馬哈·參散千戶 李亦里不花·禿魯兀千戶 佟參哈·佟阿蘆·洪肯千戶 王兀難·哈蘭千戶 朱蹯失馬·大伸千戶 高難·都夫失里千戶 金火失帖木·海童千戶 童貴洞·阿沙千戶 朱引忽·斡合千戶 劉薛列·阿都歌千戶 崔咬納·崔完者를 초유한다." 하였다.
2725#23226 SHARED
 
1404.04.27 太宗實錄(1431)
영춘추관사 하윤·지춘추관사 권근에게 명하여 사고를 열고 전조의 예종실록에서 예종조 시중 윤관이 동여진을 치고 변경에다 비를 세운 것을 조사하게 하였다. 황제가 왕가인을 여진에 보내어 建州衛를 설치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에 의거하여 대답하려고 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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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05 李朝 太宗 奏
照得 本國東北地方 自公嶮鎭歷孔州吉州端州英州雄州咸州等州 俱係本國之地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은 공험진으로부터 공주·길주·단주·영주·웅주·함주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 우왕의 표문과 거의 같으나 公嶮鎭의 위치만 함흥 인근에서 길주 북쪽으로 바꾸어놓았다. 이는 이미 차지하고 있는 함흥 이북 지역을 지키고 조상의 묘소가 있는 孔州(경원)까지 차지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2725#21723 SHARED
 
1404.05┆孔州
23115 SHARED
 
1404.10.01 太宗實錄(1431)
김첨이 칙서를 가지고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왔다. "조선 국왕 李에게 칙유한다. 상주하여 말한 參散 천호 이역리불화 등 10처 인원을 성찰하고 준청한다. 그러므로, 칙유하는 것이다."
23409 SHARED
 
1441.01.08 李朝 世宗 奏
중추원 부사 김을현을 북경에 보내어 사은하게 하고 임금이 사은표를 배송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그 주본에 말하기를
2725#23215 SHARED
 
1591 선조수정실록(1657)
현소가 다시 말하기를, "옛날 고려가 원(元)나라 병사를 인도하여 일본을 쳤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에 원한을 갚고자 하니, 이는 사세상 당연한 일입니다." 하였다. 그의 말이 점점 패려하여 성일이 다시 캐묻지 못하였다. ● 이때 김성일이 유연한 외교를 펼쳤다면 임진왜란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고려가 원나라 병사를 인도하여 일본을 쳤다'는 부분은, 일본이 피장파장의 논리로 자주 이용하는 것인데, 역사적 사실인 것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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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녕부
1269년(원종 10년) 서북면 병마사의 기관(記官)인 최탄(崔坦) 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과 자비령(慈悲嶺)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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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씨고려 행정구역
왕씨고려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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