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삼한 연대기 > 008년부터 289년 사이 > 0012 추모왕 피살

왕망과 맥고려의 갈등은 같은 이야기가 한서(82), 삼국지(289), 후한서(445)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 실려있다. 그러나 인물은 달라, 왕망에 의해 죽은 인물이 한서와 후한서에는 고려왕 추(騶), 삼국지에는 고려왕 도(騊)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고려 장수 연비(延丕)로 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414)에는 추모왕(鄒牟王)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되어있어 시신 없이 장사를 지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기록이 왜곡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0082 한서 - 騶
왕망(9~23) 초에 고구려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법을 어기고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고구려후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왕망이 고구려를 하구려로 이름을 바꾸고 천하에 알리게 하였다. 이에 맥인이 변경을 더욱 침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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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삼국지 - 騊
왕망(9~23) 초에 고구려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구려후 도(騊)를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왕망이 천하에 알려 고구려를 하구려로 이름을 바꾸게 하였다. 이때부터 후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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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광개토왕릉비 - 鄒牟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강을 건너가서 비류곡 홀본 서쪽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 履龍頁昇天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흘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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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광개토왕릉비 - 鄒牟
▶한서에 쓰인 騶(추)는 마부라는 뜻이고 삼국지에 쓰인 騊(도)는 말이며 광개토왕릉비에 쓰인 鄒(추)와 속일본기에 쓰인 都(도)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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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5 후한서 - 騶
왕망(9~23) 초에 구려의 병력를 뽑아 흉노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구려후 추(騶)를 들어오게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왕망이 고구려왕을 하구려후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맥인이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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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0± 모두루묘지명(牟頭婁墓誌銘) - 鄒牟
하박(河泊)의 손자이며 일월(日月)의 아들인 추모(鄒牟) 성왕(聖王)이 북부여에서 나셨으니,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천하사방이 알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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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 위서 - 朱蒙
고구려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朱蒙)이라 한다. 흘승골성에 이르러 마침내 정착하고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인하여 성을 고(高)씨라 하였다. -- 장수왕 이전의 기록에는 고씨 성 이야기가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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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07 안승 책문 - 中牟
사찬 수미산을 보내어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은 다음과 같다. “...신라 왕은 고구려 상속자 안승에게 명령을 내리노라. 공의 태조 중모왕(中牟王)은 덕을 북산(北山)에 쌓고 공을 남해(南海)에 세워 위엄있는 풍모가 청구(靑丘)에 떨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玄菟)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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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7 속일본기 - 都慕
"저희들은 본계가 백제국 귀수왕에서 나왔습니다. 귀수왕은 백제가 처음 일어난 때로부터 제16대 왕입니다. 대저 백제의 태조 도모대왕(都慕大王)은 태양신이 몸에 내려온 분으로, 부여에 머물러 나라를 열었습니다. 천제가 녹을 주어 모든 한(韓)을 통솔하고 왕을 칭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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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7 속일본기 - 都慕
그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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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고려사(1451)
加平壤 木覓橋淵道知巖東明王等神勳號 평양의 목멱, 교연, 도지암, 동명왕 등의 신에게 훈호를 올렸다.
13630
 
1109 고려사(1451)
遣同知樞密院事許慶 祭平壤木覓東明神祠 又設文豆屢道場于興福永明長慶金剛等寺 동지추밀원사 허경을 보내 평양 목멱과 동명의 신사에 제사를 올리게 했으며 흥복사·영명사·장경사·금강사 등의 절에 문두루도량을 열게 했다.
13648
 
1145 삼국사기 - 朱蒙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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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歳 葬龍山 號東明聖王 (BC 19년) 가을 9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그 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 불렀다. ▶ 한서(82)에는 왕망의 장수에게 유인되어 살해되고 머리는 잘려져 왕망에게 보내졌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414)에는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되어 있고 제왕운기(1287)에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되어 있다. 한서의 기록이 사실인데 삼국사기는 언급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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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삼국사기
유리왕 31년에 왕망이 우리의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법을 어기게 되고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서울에 보냈다. 왕망이 기뻐하며 우리 왕의 명칭을 하구려후로 바꾸고 천하에 알리게 하였다. 이때부터 도적들이 한(漢)의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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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8 고려사(1451)
命贊成事元傅等 祀聖容殿東明平壤木覓廟 찬성사 원부 등을 시켜 성용전·동명묘 및 평양의 목멱묘 등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13649
 
1287 제왕운기(帝王韻紀)
在位十九年九月 升天不復迴雲輧 聖子類利在(扶餘時 婦所孕者)來嗣位 葬遺玉鞭成墳塋 (今龍山墓也) 동명왕 주몽이 재위한지 19년 9개월 만에, 승천하여 구름수레를 타고 돌아오지 않으셨네. 성자 유리(부여에 있을 때 부인이 임신한 사람)가 와서 왕위를 이으니, 남기신 옥채찍을 묻어 무덤을 만들었네. (지금의 용산묘다.) ▶시신 없이 장사를 지낸 것을 암시한다. 여기에 나오는 龍山이 동명왕을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1145)의 그 龍山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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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3 고려사(1451)
王至西京 謁聖容殿 分遣人 祭平壤君祠東明王及木覓廟 왕이 서경에 이르러 성용전을 참배한 후 평양군사, 동명왕묘, 목멱묘에 각각 사람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13650
 
1451 고려사 평양
東明王墓가 있다. 府의 동남쪽 中和縣 경계의 龍山에 있으며, 민간에서는 珍珠墓라고 부른다. 또 仁里坊에 祠宇가 있는데, 고려 때에 御押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초하루와 보름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지금까지 일이 있으면 자주 소원을 빈다. 세상에 전하기를 東明聖帝의 사당이라 한다.
13654
 
1451 동명왕릉
13621
 
고려건국설화
고려건국설화는 광개토왕릉비(414), 위서(554), 수서(636), 주서(636), 북사(659)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 실려 있다. 고려 시조에 대한 명칭은 鄒牟(모두루묘지명,광개토왕릉비), 朱蒙(위서,주서,수서,북사,천남산묘지명), 都慕(속일본기), 中牟(안승 책문) 등으로 나타난다. 騶(한서,후한서)와 騊(삼국지)도 鄒牟의 다른 명칭이다.
13646
 
김부식의 역사 왜곡
삼국사기는 왕망의 군대에 유인되어 살해된 고려 추모왕을 고려 장수 연비로 기록해 놓았고 왜군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된 신라 우로왕을 신라 장수로 기록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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