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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書
穢人은 前兒를 바친다. 前兒는 원숭이처럼 생기고 서서 다니며 어린애와 같은 소리를 낸다.
良夷는 在子를 바친다. 在子는 화폐의 체형을 하고 있으나 머리는 사람이다. 배에 기름이 있어 그것을 태운다.
▐ 濊가 중국과 통하는 길은 단단대령 남쪽을 돌아 대동강으로 간 다음 거기서 중국으로 건너갔을 것이다. 穢人 다음으로 거론된 良夷는 대동강 유역의 주민으로 추정되므로 이를 뒷받침한다.
15419#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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楸哥嶺 構造谷
추가령구조곡은 임진강에서 영흥만 지역에 들어가는 통로 역할을 했다. 한국 뿐만 아니라 낙랑도 단단대령 남쪽으로 나 있는 이 통로를 통해 영흥만과 교류하였을 것이다.
2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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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8- 史記(-91)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真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나라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천자에게 입현치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 예가 단단대령 남로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였다면 위만 조선에 의해 그 길이 끊길 수 있었다.
2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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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8 ~ -0125 蒼海郡
濊는 단단대령 남쪽을 돌아 대동강을 거쳐 중국과 교류하였는데 위만 조선에 의해 이 길이 막히자 濊君 남려 등은 28만 구를 들어 황초령을 넘고 압록강을 지나 요동에 귀속하였다. 한무제는 濊에 蒼海郡을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지하였다.
蒼海는 푸른 바다라는 뜻으로 누런 바다라는 뜻의 黃海와 대조된다. 濊의 위치로 보나 蒼海라는 명칭으로 보나 蒼海郡은 동해에 접한 지역으로 볼 수 있다.
蒼海郡의 설치 경험은 훗날 臨屯郡을 설치하는 바탕이 되었을 듯하다.
13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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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 ~ -0082 東暆
창해군은 황초령을 넘어 한나라와 연결되며 설치되었으므로 치소는 황초령 아래에 있었을 듯하다. 임둔군은 창해군을 재건하는 의미를 지녔으므로 임둔군의 치소 또한 창해군의 치소를 재건했을 듯하다.
9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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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 三國志(289)
변경의 郡을 줄이면서 도위도 폐지하였다. 그 후부터 縣에 있던 우두머리로 모두 縣侯를 삼으니 不耐·華麗·沃沮 등의 제 縣은 전부 侯國이 되었다.
▐ 한나라의 군현에서 빠지는 것은 곧 한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된다.
21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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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 扶餘의 북쪽에는 弱水가 있고 서쪽에는 鮮卑가 있으며 동쪽에는 挹婁가 있고 남쪽에는 高句麗가 있다. 高句麗의 북쪽에는 扶餘가 있고 동쪽에는 沃沮가 있으며 남쪽에는 朝鮮과 濊가 있다. 朝鮮의 동쪽이 다 濊다. 沃沮의 북쪽에는 扶餘와 挹婁가 있고 서쪽에는 高句麗가 있으며 남쪽에는 濊가 있다. 濊의 북쪽에는 高句麗와 沃沮가 있고 남쪽에는 辰韓이 있다.
1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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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8~0926 南海府
발해(渤海)는 고려가 망한 지 30여년 뒤인 698년에 고려의 유민 대조영이 세운 왕조다.
고려를 구성했던 맥(貊), 예(濊), 옥저 그리고 부여는 각각 발해의 압록부, 남해부, 용원부 그리고 부여부로 편제되었다.
200여 년 간 왕조를 이어가다 926년에 요(遼)에 병합되었다.
15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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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高麗史(1451)
하공진이 일찍이 동여진을 공격하여 패배를 당하자 유종은 그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였는데, 마침 여진족 95인이 내조하여 和州館에 도착하자 유종이 모두 죽였다. 여진족이 거란에 참소하자 거란주가 군신에게 말하기를, “고려의 강조가 임금을 시해한 것은 대역죄이므로 군사를 내어 죄를 묻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23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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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東界에 이르러 長春驛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병마판관 최홍정·황군상을 定州와 長州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許貞과 羅弗 등을 돌려보내고자 하니 와서 명령을 들으라.”고 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것을 믿어 古羅 등 400여 인이 이르니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하여, 매복해 있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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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109 윤관의 여진 정벌
마운령까지였는지, 길주·명천까지는지, 아니면 두만강 유역 전체까지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각각 濊, 東沃沮 그리고 北沃沮에 해당된다.
함흥에서 두만강 유역 끝까지는 훗날 금나라의 曷懒路에 해당되기도 한다.
왕고는 9개 성을 쌓아주고 1년만에 물러났다.
여진은 이 지역에 수백년 동안 살아왔었고 이후로도 수백년 동안 살았다.
15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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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 太宗實錄(1431)
여진의 인민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吉州를 海陽이라 칭하고, 端州를 禿魯兀이라 칭하고, 英州를 參散이라 칭하고, 雄州를 洪肯이라 칭하고, 咸州를 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22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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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1356 雙城摠管府
천산산맥 북쪽에 금의 함주가 있었다. 금을 멸망시킨 원은 왕고의 철령 북쪽에 있던 함주를 이와 혼동하여 인근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철령 이북을 소속시켰다. 또 금의 함주에는 개원로를 설치하였는데 쌍성총관부를 이 개원로에 소속시켰다.
원을 몰아낸 명은 원의 개원로에 속했던 철령 이북을 왕고로부터 돌려받아 철령위를 설치하고 새로 설치된 요동도사에 소속시키려 하였다.
왕고는 이에 반발하여 요동을 공격하게 했으나 정벌군 장수 이성계는 반란을 일으켰다.
15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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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 高麗史(1451)
공민왕 5년에 江陵朔方道라 불렀다.
7월에 추밀원부사 유인우를 보내어 쌍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이때에 지도를 순찰하여 和州·登州·定州·長州·預州·高州·文州·宜州 및 宣德鎭·元興鎭·寧仁鎭·耀德鎭·靜邊鎭 등의 여러 성을 수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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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 和寧
화령은 왕고의 공민왕이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를 되찾아 화령부로 개칭하면서 생겨난 이름이다. 지금의 영흥만 일대로 이성계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 화령은 우리나라의 국호가 될 뻔했다.
한편, 명나라에 쫓겨난 몽골의 도읍도 화령이었다.
15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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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함흥
함흥은 황초령을 넘어 압록강 유역으로 향하는 길과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안변을 향하는 길 및 역시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길주로 향하는 길이 만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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