❶ 濊 → 衛滿朝鮮 → 漢·蒼海郡 → 漢·臨屯郡 → 漢·樂浪郡·東部都尉 → 高麗 → 渤海·南海府 → 王高 → 元·雙城摠管府 → 李朝 ❷ 沃沮 → 衛滿朝鮮 → 漢·玄菟郡 → 漢·樂浪郡·東部都尉 → 高麗 → 渤海·柵城府 → 金·曷懶路 → 李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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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 ◾長夷→穢人
순임금 시기에 중국의 동쪽에 長夷와 鳥夷가 있었는데 서주 시기에 와서는 각각 前兒를 바치는 穢人과 在子를 바치는 良夷로 불리고 있었다.
良夷는 훗날 다시 朝鮮으로 불리게 되는데, 삼국지(289)에 의하면, 朝鮮의 동쪽이 다 濊고 濊의 북쪽에는 高句麗와 沃沮가 있었으며 濊의 남쪽에는 辰韓이 있었다.
穢人은 단단대령 남쪽을 돌아 대동강 유역에 이른 뒤 거기서부터는 다시 鳥夷 때부터 이어져오던 良夷의 교역 경로를 따라 중국에 이른 듯하다.
20656#3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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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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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8⁻ 史記(-91)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真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나라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천자에게 입현치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 예가 단단대령 남로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였다면 위만 조선에 의해 그 길이 끊길 수 있었다.
20656#2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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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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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8~-0125 蒼海郡
濊는 단단대령 남쪽을 돌아 대동강을 거쳐 중국과 교류하였는데 위만 조선에 의해 이 길이 막히자 濊君 남려 등은 28만 구를 들어 황초령을 넘고 압록강을 지나 요동에 귀부하였다. 한무제는 濊에 蒼海郡을 설치하였다가 수년 후에 폐지하였다.
蒼海는 푸른 바다라는 뜻으로 누런 바다라는 뜻의 黃海와 대조된다. 濊의 위치로 보나 蒼海의 뜻으로 보나 蒼海郡은 동해에 접한 지역으로 볼 수 밖에 없다.
蒼海郡의 설치 경험은 훗날 臨屯郡을 설치하는 바탕이 되었을 듯하다.
20656#15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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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7 漢書 臣瓚曰 茂陵書
臨屯郡 治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十五縣┆真番郡 治霅縣 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十五縣
▐ 장안에서의 거리가 霅縣까지는 7640리고 東暆까지는 6138리다. 真番郡은 차령 이남까지 내려오지 않았을 듯하므로 東暆가 철령 이남이라면 真番郡의 치소와의 거리차가 1500리가 되기 힘들다. 따라서 東暆의 위치로는 영흥만이 어울린다.
20656#6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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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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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扶餘의 북쪽에는 弱水가 있고 서쪽에는 鮮卑가 있으며 동쪽에는 挹婁가 있고 남쪽에는 高句麗가 있다. 高句麗의 북쪽에는 扶餘가 있고 동쪽에는 沃沮가 있으며 남쪽에는 朝鮮과 濊가 있다. 朝鮮의 동쪽이 다 濊다. 沃沮의 북쪽에는 扶餘와 挹婁가 있고 서쪽에는 高句麗가 있으며 남쪽에는 濊가 있다. 濊의 북쪽에는 高句麗와 沃沮가 있고 남쪽에는 辰韓이 있다.
20656#1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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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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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沃沮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句麗에 신속케 되었다. 句麗는 그 중에서 大人을 두고 사자로 삼아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大加로 하여금 조세를 통괄 수납케하여, 貊·布·魚·鹽·海中食物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나르게 하고, 또 그곳의 美女를 보내게 하여 婢나 妾으로 삼았으니 그들을 奴僕처럼 대우하였다.
▐ 고려는 옥저를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20656#23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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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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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1 ❰❰⁵ -0020 솔까역사 新羅
호공을 마한에 보내니 馬韓王이 말했다. “辰卞二韓 爲我屬囯 比年不輸職□ 事大之禮 其若是乎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했다.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그리고 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좌우가 간하여 그치고 돌아가게 해주었다.
20656#16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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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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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2 ❰❰⁵ 0032 솔까역사 高句麗
왕자 好童이 沃沮에 갔다가 樂浪王 崔理를 만났는데 崔理가 北國 神王의 아들이라며 好童을 데려가 딸을 시집보냈다. 후에 好童이 돌아가 최씨 딸에게 사람을 보내 무기고의 북을 찢고 피리를 뽀개게 한 뒤 왕에게 樂浪²을 치게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성 밑에 이른 뒤에야 북과 피리가 망가진 것을 알게 된 崔理는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혹은 '樂浪²을 멸망시키려고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며느리로 맞은 뒤 돌려보내 무기를 파괴하게 했다'고도 한다.
20656#21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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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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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1~1115 高麗史(1451)
女眞은 본디 靺鞨의 遺種으로 隋·唐 사이에 勾高麗에 병합되었으며, 나중에 취락을 이루고 산택에 흩어져 살면서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였다. 定州·朔州 근처의 국경에 거주하는 자가 비록 간혹 내부하기도 했으나 잠시 신하노릇을 하다가 갑자기 배신하기도 하였다. 盈哥와 烏雅束에 이르러 서로 이어서 추장이 되니 자못 무리의 인심을 얻어 그 기세가 점차 사나워졌다.
▐ 수서(636)에 고려가 598년에 말갈 기병 만여기를 동원하여 요서를 침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20656#2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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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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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1125 金史(1344)
당나라 초엽에는 靺鞨이 粟末·黑水 2부가 있었는데, 모두 高麗에 신속되었었다. 당나라가 高麗를 멸하자 粟末이 東牟山을 차지하고 점점 강대하여져 渤海라 부르고 성을 大씨라 하였는데 문물과 예악이 있었다. 당나라 말엽에 이르러 차츰 쇠퇴하여져 이 뒤로는 다시 알려지지 아니하였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정벌하자 발해는 귀부하였는데, 대개 그 후예들이다.
20656#23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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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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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0~0873 신당서(1060)
□貃故地為東京 曰龍原府 亦曰柵城府 領慶鹽穆賀四州 沃沮故地為南京 曰南海府 領沃睛椒三州
예맥의 옛 땅으로 동경을 삼으니 용원부로 책성부라고도 한다. 경·염·목·하의 4주를 통치한다.
옥저의 옛 땅으로 남경을 삼으니 남해부이며 옥·청·초의 3주를 통치한다.
▐ 예맥과 옥저가 바뀌어 있다. 柵城은 고구려의 幘溝漊(幘城) 및 북옥저의 置溝婁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20656#15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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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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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東女眞
黑水는 장백산 동북쪽에 있었다. 이곳에는 靺鞨 이외의 종족은 없었던 듯하며 따라서 黑水人은 黑水靺鞨과 같은 뜻이다. 靺鞨은 女眞이라고도 했는데 장백산 일대의 산악 지형에 의해 동과 서로 갈려 있었다. 따라서 黑水靺鞨은 곧 東女眞이다. 왕고는 이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고 東蕃이라고도 불렀다.
○ 黑水人=黑水靺鞨=東女眞=東蕃
20656#4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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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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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5 高麗史(1451) 湧州防禦使
泉井(於乙買) → 井泉 ➔ 湧州 → 宜州(東牟·宜春·宜城)
┆ 宜州는 본래 고구려의 泉井郡(於乙買라고도 한다.)으로, 681년에 신라가 이곳을 차지하고 井泉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湧州라 불렀다. 995년에 방어사를 두었고, 뒤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1108년에 성을 쌓았다. 별호는 東牟이고(성종 때 정하였다.), 또 宜春·宜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요해처로 鐵關이 있다. 바다섬인 竹島가 있다.
20656#2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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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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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6◾ @을리골 @乙離骨
乙離骨은 왕고에 인접해 있었지만 그 동쪽과 서쪽의 여러 부족들은 완안부에 종속되었으므로 乙離骨은 왕고의 북쪽에 있었다.
완안부는 乙離骨을 거쳐 曷懶에 이르렀는데, 曷懶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었으므로 乙離骨은 개마대산의 서쪽에 있었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는 乙離骨의 위치로는 허천강 유역이 가장 적합하다.
고대에는 이곳이 西蓋馬였었다.
┆西蓋馬·蓋馬國·乙離骨·甲山
20656#2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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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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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04.20 ⁻ 金史(1344) 列傳73 005
을리골령 복산부의 호석래 발근이 고려와 여진 사이에 거주하고 있었다. 목종이 족인 수아를 시켜 불러오게 하고 수아로 하여금 의원을 호송하여 고려 국경까지 돌려보내게 하였다. 의원이 돌아가 고려인들에게 “여진족으로 흑수부에 사는 부족은 날로 강성해져서 군대는 더욱 정예화되었으며 농사는 해마다 풍년이 든다.”라고 하였다. 고려왕이 이 말을 듣고 여진에 사신을 통하였다. 얼마 후에 호석래가 을리골령 동쪽의 여러 부족을 거느리고 내부하였다.
20656#23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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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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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01.06 高麗史(1451)
▐ 曷懶河 사람들은 원래 요나라에 귀부하였었다. 그러나 인접한 왕고의 영향도 많이 받았고 완안부가 성장하자 그 영향권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금사에는 오아속이 石適歡을 파견하여 배반한 7城을 거두게 했는데 왕고가 단련사 14명을 억류하는 바람에 5水의 사람들이 왕고에 붙었다고 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고려사에는 오아속이 公兄之助를 보내어 別部의 夫乃老를 토벌하게 했다고 되어 있고 동여진의 사신은 왕고에 와서 오아속을 거부하는 弓漢村을 토벌했다고 하였다.
20656#23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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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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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04 金史(1344)
4월에 고려가 다시 쳐들어오자 석적환이 군사 5백명을 거느리고 벽등수에서 방어하여 크게 쳐부수고 추격하여 벽등수로 들어가 패잔병들을 국경너머로 쫓아버렸다. ▐ 고려사(1451)에서 3월 4일에 있었다고 하는 윤관의 패전을 말하는 듯하다. 당시 국경이 定州 인근에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闢登水는 함흥 서쪽을 흐르는 성천강인 듯하다.
20656#23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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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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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6.03.05 高麗史(1451)
동북면병마사가 아뢰기를 “東女眞의 之訓이 기병 2,000명을 이끌고 와서 관외에 진을 치고 성심을 다하여 복종하며 말하기를 ‘지난해의 전쟁은 새로 즉위한 왕이 알지 못하는 것이며 公牙가 내조하였을 때 그 뜻을 깨우치고 후한 상을 주어 돌려보냈으니 왕의 은혜가 지극히 두터운데 어찌 감히 잊고 배신하겠습니까?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진심으로 부지런히 조공을 바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20656#23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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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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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東界에 이르러 長春驛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병마판관 최홍정·황군상을 定州와 長州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許貞과 羅弗 등을 돌려보내고자 하니 와서 명령을 들으라.”고 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것을 믿어 古羅 등 400여 인이 이르니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하여, 매복해 있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20656#2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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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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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金史(1344)
高麗許之 曰 使使至境上受之 康宗以為信然 使完顏部阿聒 烏林答部勝昆往境上受之 康宗畋於馬紀嶺乙隻村以待之 阿聒 勝昆至境上 高麗遣人殺之 而出兵曷懶甸 築九城
고려가 허락하면서 “사신을 파견하여 국경에 이르러 인수하여 가라.”고 하니 강종은 이를 믿고 완안부 아괄·오림답부 승곤 등으로 하여금 국경으로 가 인수하도록 하고 마기령 을집촌에서 사냥하면서 기다렸다.
아괄·승곤 등이 국경에 도착하자 고려는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살해하고 갈라전으로 출병시켜 9성을 쌓았다.
20656#2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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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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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東界에 이르러 長春驛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병마판관 최홍정·황군상을 定州와 長州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許貞과 羅弗 등을 돌려보내고자 하니 와서 명령을 들으라.”고 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것을 믿어 古羅 등 400여 인이 이르니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하여, 매복해 있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20656#23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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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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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高麗史(1451)
❶ 윤관이 스스로 53,000명을 이끌고 정주 大和門으로 나가고 ❷ 중군병마사 좌복야 김한충이 36,000명을 이끌고 安陸戍로 나갔으며 ❸ 좌군병마사 좌산기상시 문관이 33,900명을 이끌고 정주 弘化門으로 나갔다. ❹ 우군병마사 병부상서 김덕진이 43,800명을 이끌고 宣德鎭의 安海戍·拒防戍의 2수 사이로 나가고 ❺ 선병별감 이부원외랑 양유송, 원흥도부서사 정숭용, 진명도부서부사 견응도 등이 선병 2,600명을 이끌고 道鱗浦로 나갔다.
20656#23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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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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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高麗史(1451)
大乃巴只村을 지나 한나절을 행군하였다. 文乃泥村에 이르러 冬音城을 파괴시켰다. 石城의 남녀노소 모두 섬멸하였다.
❶ 윤관의 군대는 大乃巴只로부터 37개 촌을 격파하여 2,120명의 목을 베고 500명을 사로잡았고 ❷ 중군은 高史漢村 등 35개 촌을 격파하여 380명의 목을 베고 230명을 사로잡았으며 ❸ 좌군은 深昆村 등 31개 촌을 격파하여 950명의 목을 베었고 ❹ 우군은 廣灘村 등 32개 촌을 격파하여 290명의 목을 베고 300명을 사로잡았다.
20656#23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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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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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 尹瓘
女眞 本勾高麗之部落 聚居于盖馬山東
여진은 본디 구고려의 부락으로서 개마산 동쪽에 모여 살았다.
其地方三百里 東至于大海 西北介于盖馬山 南接于長·定二州 山川之秀麗 土地之膏腴 可以居吾民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그 땅은 사방 300리로 동쪽은 대해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개마산이며 남쪽으로는 장주·정주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구고려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20656#1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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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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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 尹瓘
▐ 曷懶甸에 대한 묘사가 삼국지(289)에 나오는 東沃沮와 비슷하다. 沃沮가 女眞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윤관은 그들에 대해 동족 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勾高麗가 통치했던 곳이니 勾高麗를 계승한 王氏高麗가 차지하는 것이 합리화될 수 있다는 논리다. 왕조와 종족이 분리되어 있다.
20656#2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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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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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 高麗史(1451)
여진은 본디 勾高麗의 부락으로서 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공직을 바치며 우리 조종의 깊은 은혜를 깊이 입었다.┆그 땅의 둘레는 300리로 동쪽은 大海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長州·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고구려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무릇 고구려가 예전에 잃었던 것인데 지금 임금께서 그 후에 얻은 것이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20656#23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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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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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1356 雙城摠管府
천산산맥 북쪽에 금의 함주가 있었다. 금을 멸망시킨 원은 왕고의 철령 북쪽에 있던 함주를 이와 혼동하여 인근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철령 이북을 소속시켰다. 또 금의 함주에는 개원로를 설치하였는데 쌍성총관부를 이 개원로에 소속시켰다.
원을 몰아낸 명은 원의 개원로에 속했던 철령 이북을 왕고로부터 돌려받아 철령위를 설치하고 새로 설치된 요동도사에 소속시키려 하였다.
왕고는 이에 반발하여 요동을 공격하게 했으나 정벌군 장수 이성계는 반란을 일으켰다.
20656#15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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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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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 合懶路
合懶路 置總管府 합라로에 총관부를 두었다.
貞元元年 改總管為尹 仍兼兵馬都總管 년에 총관을 尹로 개칭하고 병마도총관을 겸했다.
承安三年 設兵馬副總管 년에 병마부총관을 설치했다.
舊貢海葱 大定二十七年罷之 년에 폐지했다.
有移鹿古水 이록고수가 있다.
西至上京一千八百里 東南至高麗界五百里 서쪽으로 상경까지 1800리고 동남쪽으로 고려의 경계까지 500리다.
▐ 咸州는 合懶에서 나온 듯하다.
20656#2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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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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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 高麗史(1451)
동북면병마사 유인우가 雙城을 함락시키자 총관 조소생, 천호 탁도경이 도망쳐버리니 和州·登州·定州·長州·預州·高州·文州·宜州 및 宣德鎭·元興鎭·寧仁鎭·耀德鎭·靜邊鎭 등지를 되찾게 되었다. 咸州 이북은 고종 무오년부터 원이 차지했는데 이때 와서 모두 수복하였다.
▐ 咸州 이남 지역을 열거하고 咸州 이북이라 칭하고 있다. 鐵嶺 이북이라 해야 옳다.
20656#2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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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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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7.12 明史(1739)
命戶部咨高麗王 以鐵嶺北東西之地 舊屬開元 其土著軍民女直 韃靼 高麗人等 遼東統之 鐵嶺之南 舊屬高麗人民 悉聽本國管屬 疆境既正 各安其守 不得復有所侵越
호부로 하여금 고려왕에게 외교문서를 보내도록 하기를, “철령 북방 동서쪽의 땅은 옛날부터 개원에 속하였으니 요동에서 통치하도록 하고, 철령 남쪽은 옛날부터 고려에 속하였으니 고려에서 통치토록 하오. 서로 국경을 확정하여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20656#23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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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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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04.04 太宗實錄(1431)
遼東천호 왕가인이 받들고 온 칙서에
"지금 參散·禿魯兀 등 11처의 溪關만호 寗馬哈, 參散천호 李亦里不花, 禿魯兀천호 佟參哈·佟阿蘆, 洪肯천호 王兀難, 哈蘭천호 朱蹯失馬, 大伸천호 高難, 都夫失里천호 金火失帖木, 海童천호 童貴洞, 阿沙천호 朱引忽, 斡合천호 劉薛列, 阿都歌천호 崔咬納·崔完者를 초유한다."
하였다.
▐ 溪關┆參散(英州)┆禿魯兀(端州)┆洪肯┆哈蘭(咸州)┆大伸┆都夫失里┆海童┆阿沙┆斡合┆阿都歌
20656#23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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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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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9.07.17 世宗實錄
對馬爲島 隷於慶尙道之雞林 本是我國之地 載在文籍 昭然可考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 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 대마도를 정벌할 때 태종이 대마도 우두머리에게 한 말이다. 이 주장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정치적 억지 주장이다. 명나라가 여진에 건주위를 설치하려고 할 때 孔州 운운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20656#27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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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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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1109년에 길주로부터 시작하여 9성의 전투 장비·군량을 내지로 거두어 들였고 마침내 崇寧·通泰·眞陽의 세 진 및 영주·복주의 성을 철거하였다. 또 함주·웅주 및 宣化鎭의 성을 철거하고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의주의 6주 및 공험진·통태진·평융진의 3진이 9성이다. 성을 철거하고 여진에게 돌려줄 때에 의주 및 공험진·평융진이 없고 숭령진·진양진·선화진이 추가로 보이고 설치한 호의 수가 각기 같지 않다.
20656#2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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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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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福州
福州는 오랫동안 여진이 기거하던 곳으로, 吳林金村이라 불렀다. 1108년에 州를 설치하여 防禦使를 두었다. 1109년에 城을 철수하여 그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뒤에 원나라에 편입되어 禿魯兀이라 불렀다. 공민왕 때에 이르러 옛 영토를 수복하였다. 1382년에 端州安撫使로 고쳤다. 요해처가 2곳인데, 伊板嶺(州 동북쪽에 있는데, 곧 磨天嶺이다)과 豆乙外嶺(州 남쪽에 있는데, 곧 磨雲嶺이다)이다.
20656#22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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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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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三國誤記」 高麗史 吉州¹
吉州久爲女眞所據 號弓漢村 睿宗三年 置州 爲防禦使 (六年→)四年 築(中城→)重城 尋以地 還女眞
길주는 오랫동안 여진이 기거하던 곳으로 궁한촌이라 불렀다. 1108년에 州를 설치하여 방어사를 두었다. 1109년에 중성을 쌓았다가 얼마 후에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 1109년에 길주가 포위당하자 許載가 重城을 쌓아 버틴 바 있다. 길주를 포함한 9성은 그 해에 돌려주었다.
20656#29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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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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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옛 孔州로서 혹은 匡州라고도 하는데 오랫동안 호인에게 점거되었다. 윤관이 호인을 몰아내고 公險鎭防禦使를 두었다. 1398년에 德陵과 安陵이 있다고 하여 경원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성을 수축하다가 匡州防禦之印이라 되어 있는 인신을 얻었다. 1409년에 목책을 所多老의 營基에 설치하고 부를 옮겼고 1410년에 야인의 난리로 인하여 鏡城郡에 합쳤다가 1417년에 鏡城의 豆籠耳峴 이북을 떼어서 다시 도호부로 삼고 富家站에 목책을 세우고 치소로 삼았다.
20656#2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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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북쪽으로 공험진에 이르기 7백 리다.
巨陽城이 있는데 본래 고려 대장 윤관이 쌓은 것이다. 거양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先春峴이니 곧 윤관이 비를 세운 곳이다. 그 비의 4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으나 호인이 그 글자를 깎아 버렸는데, 뒤에 사람들이 그 밑을 팠더니 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
英哥沙吾里站 북쪽으로 蘇下江 가에 公險鎭이 있으니 곧 윤관이 설치한 진이다.
20656#23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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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4
東林城 → 北去五里 所多老 → 其北三十里 → 越江十里 → 其北九十里 → 其北三十里 → 其北六十里 → 其東北七十里 巨陽城 城本高麗大將尹瓘所築 → 西距六十里 先春峴 卽尹瓘立碑處 有高麗之境四字
동림성 → 북쪽으로 5리 소다로 → 북쪽으로 30리 → 강을 건너 10리 → 북쪽으로 90리 → 북쪽으로 30리 → 북쪽으로 60리 → 동북쪽으로 70리 윤관이 쌓은 거양성 → 서쪽으로 60리 윤관이 비를 세운 선춘현. 그 밑을 팠더니 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
20656#23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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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6
동림성 → 북쪽으로 5리 소다로 → 북쪽으로 30리 → 북쪽으로 60리 → 북쪽으로 3리 두만강탄 → 북쪽으로 90리 → 북쪽으로 60리 → 북쪽으로 1백 리 영가 사오리 → 북쪽 소하강 가에 윤관이 설치한 공험진이 있다.┆영가 사오리 → 서쪽으로 60리 백두산
▐ 고려사(1451)에 나오는 公嶮鎭(白頭山東北 一云 在蘇下江邊)과 일치한다.
20656#2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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弓漢嶺
두리산 남쪽의 물은 단천을 지나 동해로 들어가지만 두리산 북쪽의 물은 세 갈래로 갈라진다.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 허천강을 거쳐 압록강으로 들어가고 또 한 갈래는 북쪽으로 흘러 두만강으로 들어가며 나머지 한 갈래는 동쪽으로 흘러 길주를 지나 동해로 들어간다. 고대에는 물길을 따라 길이 났으므로 세 물길이 만나는 이곳이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 그리고 동해안 지역이 교류하는 통로였다.
20656#23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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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1451)
여진의 병사 수만 명이 와서 雄州를 포위하였다. 그 때 척준경이 성 안에 있었는데, 州守가 말하여 이르기를, “성을 지키는 것이 오래되어 군량이 떨어질 것 같은데 밖에서 도움이 오지 않으니, 공이 성을 나가서 군대를 거두고 돌아와 성 안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사졸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을까 두렵습니다.”라 하였다. 척준경은 밤에 줄을 타고 성에서 내려와서 定州로 돌아가 군사를 정돈하여 通泰鎭을 통과하고 也等浦에서 吉州까지 적을 만나 싸워 크게 패배시켰다.
20656#23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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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1451)
1108년에 윤관과 오연총이 정예병사 8,000명을 거느리고 加漢村 병목의 작은 길로 나갔다. 적이 갑자기 공격하니 군사가 모두 궤멸되고 10여명만 남았다. 적이 윤관 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고 오연총은 화살에 맞았다. 척준경이 용사 10여 명을 이끌고 와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여 10여 명을 때려 죽였다. 최홍정과 이관진 등이 골짜기에서 병사를 이끌고 오니 적이 포위를 풀고 도망갔다. 윤관 등은 날이 저물자 돌아와 英州城으로 들어왔다.
20656#23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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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1451) 윤관 열전
伊位의 경계 위로 산이 잇달아 연결되어 있는데, 동해안으로부터 우뚝 솟아 우리의 북쪽 변방에 이르기까지 매우 험하고 황량하여 사람이나 말이 넘어갈 수가 없었다. 틈새로 길이 하나 있고 속칭 甁項이라 하였는데, 출입하는 구멍이 하나뿐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공을 세우려는 사람이 때때로 의견을 올리기를, 그 길을 막아버리면 오랑캐의 길이 끊어질 것이니 군사를 내어 그들을 평정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20656#23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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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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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不耐縣
245년 유주자사 관구검은 고구려를 침공하여 도읍을 점령하고 현도태수 왕기로 하여금 도주하는 동천왕을 쯫게 하였는데, 왕기는 옥저를 파괴하고 숙신까지 쫓다가 돌아갔다.
같은 해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군대를 일으켜 단단대령 동쪽의 예를 정벌하였는데 불내후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만약, 옥저와 예가 모두 영흥만에 있었다면 왕기는 옥저를 정벌하고 인접한 예는 먼 낙랑과 대방에서 군대를 보내 정벌한다는 이야기가 되어 매우 어색해진다.
20656#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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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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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東暆縣
무릉서에는 임둔군의 치소 동이가 진번군의 치소 삽현보다 장안에서 1500리 가깝다고 되어 있다. 진번군은 낙랑군과 차현 사이의 지역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곳의 치소보다 1500리 가까운 곳이 되려면 동이는 영흥만 지역에 있는 것이 적당하다.
그런데 현도군의 치소 옥저성이 영흥만 지역에 있었다면, 임둔군의 치소 동이와 함께 좁은 지역에 두 군의 치소가 있게 되어 매우 어색하다.
20656#2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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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蒼海郡
예는 원래 단단대령 남쪽을 돌아 대동강을 거쳐 중국과 교류한 듯하다. 그런데 위만조선에 의해 이 길이 막히자 예군 남려는 28만구를 들어 한나라에 투항하는데, 이때는 단단대령 북쪽을 돌아 압록강을 거쳐 요동으로 가는 경로였을 듯하다.
이때 창해군이 설치되었다가 폐지되는데 20여년 후 설치된 임둔군 또한 예를 다스리는 군이었다.
단단대령 북쪽을 돌아가는 길은 황초령을 넘어가므로 예가 이 길을 이용했다는 것은 황초령 아래도 예라는 정황을 말해준다.
20656#2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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