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0195 遼黑史 > 1115~1234 金 > 1107~1109 윤관의 옥저 정벌

개마대산 동쪽의 여진을 정벌하고 공험진에서부터 함주, 영주, 복주, 웅주 그리고 길주까지 성을 쌓았다가 1년만에 물러났다. 여진은 이 지역에 수백년 동안 살아왔었고 이후로도 수백년 동안 살았다.
 
1107.10.20 열병
20656#21339 SIBLINGS CHILDREN 21339
 
1107.12.15 雄州·英州·福州·吉州에 성을 쌓다.
20656#22963 SIBLINGS CHILDREN 22963
 
1108.02 咸州와 公嶮鎭에 성을 쌓다.
20656#23183 SIBLINGS CHILDREN 23183
 
1108.02.13 대도독부와 방어사를 설치하다.
20656#23186 SIBLINGS CHILDREN 23186
 
1108.02.27 公嶮鎭에 비를 세우다.
20656#23271 SIBLINGS CHILDREN 23271
 
1108.03.30 宜州·通泰·平戎에 성을 쌓다.
20656#23241 SIBLINGS CHILDREN 23241
 
1108.04.08 여진이 雄州城을 포위하다.
20656#23150 SIBLINGS CHILDREN 23150
 
1388 왕고 우왕의 표
20656#23005 SIBLINGS CHILDREN 23005
 
1404 이조 태종의 주
20656#23006 SIBLINGS CHILDREN 23006
 
index
20656#22964 SIBLINGS CHILDREN 22964
 
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蓋馬大山·單單大領
蓋馬大山·單單大領
서해로 흘러가는 압록강·대동강 유역과 동해로 흘러가는 여러 강들의 유역을 가르는 산줄기는 험준한 지형으로 그 동쪽과 서쪽의 문화권을 갈라 놓았다. 그 동쪽에는 沃沮와 濊가 있었는데, 沃沮의 서쪽 산줄기를 蓋馬大山이라 하고 濊의 서쪽 산줄기를 單單大領이라 한다. 군데군데 이 산줄기를 넘는 고개가 있었는데, 黃草嶺이 대표적이다. 한편, 동해안을 따라가는 길도 군데군데 작은 산줄기로 막혀서 그것을 넘는 고개가 있었는데, 磨雲嶺이 대표적이다.
20656#23139 SIBLINGS CHILDREN 23139
 
0916~1125 요나라
0916~1125 요나라
20656#23362 SIBLINGS CHILDREN 23362
 
1018 高麗史(1451) 和州防禦使
長嶺鎭·唐文·博平郡 → 和州 → 和州安邊都護府 ➔ 和州防禦使 → 雙城摠管府 ┆和州는 혹은 長嶺鎭이라 불렀고 혹은 唐文이라 불렀고 혹은 博平郡이라고도 불렀는데 고려 초에 和州라고 하였다. 995년에 和州安邊都護府라 고쳤다. 1018년에 和州防禦使로 강등시키고 본영으로 삼았다. 고종 때에 몽고에 편입되어 雙城摠管府가 되었다. 화주가 이로 인해 登州에 합병되었지만 여전히 방어사로 불렀다. 뒤에 通州에 합병되었다. 충렬왕 때에 복구되었다.
20656#22960 SIBLINGS CHILDREN 22960
 
1018 世宗實錄地理志(1454) 長州防禦使
長州防禦使 → 長州縣 → 長谷縣 ┆속현이 1이니 長谷이다. 1012년에 城을 쌓고 1018년 무오에 長州防禦使라 일컫다가 뒤에 長州縣으로 고쳐서 본부의 임내를 삼았고 1422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20656#22997 SIBLINGS CHILDREN 22997
 
1041 高麗史(1451) 定州防禦使
巴只·宣威 ➔ 定州防禦使 → 定州都護府(中山) ┆定州는 옛날에 巴只라고 불렀고(宣威라고도 한다) 1041년에 定州防禦使로 하고 關門을 두었다. 1356년에 都護府로 승격시켰다. 별호는 中山이다. 鼻白山이 있다(봄·가을에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20656#22951 SIBLINGS CHILDREN 22951
 
1046.02 遼史(1343) 曷懶河
蒲盧毛朵界曷懶河戶來附 詔撫之 포로모타계 갈라하의 호가 내부하니 조서를 내려 진무하였다.
20656#23360 SIBLINGS CHILDREN 23360
 
1046.03 遼史(1343) 曷懶河
蒲盧毛朵曷懶河百八十戶來附 포로모타부 갈라하의 180호가 내부하였다.
20656#23361 SIBLINGS CHILDREN 23361
 
1096 金史(1344) 乙離骨嶺
命勝官醜阿等撫 定乙離骨嶺·注阿門水之西諸部居民 승관과 추아 등에 명하여 을리골령과 주아문수의 서쪽 각 부에 사는 백성들을 어루만져 평정하게 하였다. ▐ 을리골령 서쪽에 왕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20656#23102 SIBLINGS CHILDREN 23102
 
1101.02.12 高麗史(1451)
동여진의 乃巴只村 귀덕장군 甫馬와 弓漢伊忽村 도령 麻浦, 廣灘村 장군 骨夫 등 55인이 입조를 청하자 허락하였다.
20656#23295 SIBLINGS CHILDREN 23295
 
1102- 金史(1344) 乙離骨嶺
乙離骨嶺僕散部胡石來勃堇 居高麗·女直之兩間 을리골령 복산부 호석래 발근이 고려와 여직 사이에 살고 있었다. 穆宗使族人叟阿招之 因使叟阿送醫者 歸之高麗境上 목종이 족인 수아를 시켜 불러오게 하고 수아로 하여금 의원을 호송하여 고려 국경까지 돌려보내게 하였다.
20656#22975 SIBLINGS CHILDREN 22975
 
1102- 金史(1344) 乙離骨嶺
▐ 을리골령은 왕고에 인접해 있었다. 穆宗은 盈歌다.
20656#23339 SIBLINGS CHILDREN 23339
 
1102- 金史(1344) 乙離骨嶺
胡石來來歸 遂率乙離骨嶺東諸部皆內附 호석래가 귀부하였는데, 을리골령 동쪽의 여러 부족을 모두 데리고 내부하였다. ▐ 을리골령 동쪽에 왕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20656#23340 SIBLINGS CHILDREN 23340
 
1103 金史(1344) 乙離骨
東南至于乙離骨·曷懶·耶懶·土骨論 東北至于五國·主隈·禿答 金蓋盛于此 동남쪽으로는 을리골, 갈라, 야라, 토골론에서부터 동북쪽으로는 오국, 주외, 독답에까지 이르렀는바, 금나라는 대개 여기에서 강성해졌다. ▐ 을리골은 갈라와 별개였다.
20656#23311 SIBLINGS CHILDREN 23311
 
1103 金史(1344) 乙離骨嶺
遣石適歡以星顯統門之兵往至乙離骨嶺 益募兵趨活涅水 徇地曷懶甸 收叛亡七城 석적환을 파견하여 성현과 통문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을리골령에 이르러서 군사를 더 모집한 다음, 활녈수로 나아가 갈라전을 순행하면서 배반하여 도망한 7성을 수습하도록 하였다. ▐ 을리골령을 거쳐서 활녈수에 이르렀다.
20656#23341 SIBLINGS CHILDREN 23341
 
1104 金史(1344) 乙離骨水
遂使斜葛經正疆界 至乙離骨水·曷懶甸活禰水 留之兩月 사갈로 하여금 국경을 확정하게 하였다. 사갈이 을리골수와 갈라전 활녜수에 이르러 두 달을 머물렀다. ▐ 을리골령에서 을리골수가 흘러내리고 활녜수는 갈라전에 있다. 이후 을리골은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왕고와 조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부각되었지만 작은 세력이었기 때문에 이후 주목을 받지 못한 듯하다.
20656#23342 SIBLINGS CHILDREN 23342
 
1104 金史(1344) 三潺水
斜葛不能聽訟 每一事輒至枝蔓 民頗苦之 康宗召斜葛還 而遣石適歡往 石適歡立幕府于三潺水 사갈은 송사를 잘 판결하지 못하여 사건마다 지체시키니 백성들이 매우 괴롭게 여겼다. 그래서 강종은 사갈을 소환하고 석적환을 파견하였다. 석적환은 삼존수에다 막부를 설치하였다.
20656#22991 SIBLINGS CHILDREN 22991
 
1104 金史(1344) 三潺水
▐ 康宗은 阿骨打의 형 吳刺束이다.
20656#23346 SIBLINGS CHILDREN 23346
 
1104 金史(1344) ◾乙離骨
1104 金史(1344) ◾乙離骨
을리골은 왕고에 인접해 있었지만 그 동쪽과 서쪽의 여러 부족들은 완안부에 종속되었으므로 을리골은 왕고의 북쪽에 있었다. 완안부는 을리골을 거쳐 갈라에 이르렀는데, 갈라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었으므로 을리골은 개마대산의 서쪽에 있었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는 을리골의 위치로는 허천강 유역이 가장 적합하다. 이 지역은 토지가 척박하여 큰 세력이 등장하지 못했다.
20656#23349 SIBLINGS CHILDREN 23349
 
1104 金史(1344) ◾西蓋馬
1104 金史(1344) ◾西蓋馬
허천강 유역은 고대에 西蓋馬였다.
20656#23002 SIBLINGS CHILDREN 23002
 
1104.01.06 高麗史(1451)
東女眞酋長烏雅束 與別部夫乃老有隙 遣公兄之助 發兵攻之 騎兵來屯定州關外 동여진의 추장 오아속이 별부의 부내로와 사이가 벌어지자 공형지조를 시켜 군대를 동원해 공격하게 했는데, 기병이 정주 관문 밖까지 와서 진을 쳤다.
20656#23291 SIBLINGS CHILDREN 23291
 
1104.01.06◾定州
20656#21284 SIBLINGS CHILDREN 21284
 
1107.10.20 高麗史(1451)
장차 여진을 정벌하려고 순천관 남문에 나아가 열병하였으며 은과 포, 술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20656#20666 SIBLINGS CHILDREN 20666
 
1107.10.20+ 金史(1344)
1106년에 고려가 黑歡方石을 사신으로 보내와 직위 계승을 축하하자 康宗은 盃魯로 하여금 보빙하도록 하고 망명한 백성들을 요구하였다. 고려가 허락하면서 “사신을 파견하여 국경에 이르러 인수하여 가라.” 고 하니 康宗은 이를 믿고 完顏部 阿聒·烏林荅部 勝昆 등으로 하여금 국경으로 가 인수하도록 하고 馬紀嶺 乙隻村에서 사냥하면서 기다렸다. 阿聒·勝昆 등이 국경에 도착하자 고려는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살해하고 曷懶甸으로 출병시켜 9성을 쌓았다.
20656#17550 SIBLINGS CHILDREN 17550
 
1107.10.20+ 金史(1344)
▐ 康宗은 阿骨打의 형 吳刺束이다.
20656#23065 SIBLINGS CHILDREN 23065
 
1107.10.20+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東界에 이르러 長春驛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병마판관 최홍정·황군상을 定州와 長州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許貞과 羅弗 등을 돌려보내고자 하니 와서 명령을 들으라.”고 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것을 믿어 古羅 등 400여 인이 이르니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하여, 매복해 있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20656#22984 SIBLINGS CHILDREN 22984
 
1107.10.20+ ◾定州
20656#22987 SIBLINGS CHILDREN 22987
 
1107.10.20+ ◾長州
20656#21600 SIBLINGS CHILDREN 21600
 
1107.10.20+ 高麗史(1451)
❶ 윤관이 스스로 53,000명을 이끌고 정주 大和門으로 나가고 ❷ 중군병마사 좌복야 김한충이 36,000명을 이끌고 安陸戍로 나갔으며 ❸ 좌군병마사 좌산기상시 문관이 33,900명을 이끌고 정주 弘化門으로 나갔다. ❹ 우군병마사 병부상서 김덕진이 43,800명을 이끌고 宣德鎭의 安海戍·拒防戍의 2수 사이로 나가고 ❺ 선병별감 이부원외랑 양유송, 원흥도부서사 정숭용, 진명도부서부사 견응도 등이 선병 2,600명을 이끌고 道鱗浦로 나갔다.
20656#23387 SIBLINGS CHILDREN 23387
 
1107.10.20+ 高麗史(1451)
大乃巴只村을 지나 한나절을 행군하였다. 文乃泥村에 이르러 冬音城을 파괴시켰다. 石城의 남녀노소 모두 섬멸하였다. ❶ 윤관의 군대는 大乃巴只로부터 37개 촌을 격파하여 2,120명의 목을 베고 500명을 사로잡았고 ❷ 중군은 高史漢村 등 35개 촌을 격파하여 380명의 목을 베고 230명을 사로잡았으며 ❸ 좌군은 深昆村 등 31개 촌을 격파하여 950명의 목을 베었고 ❹ 우군은 廣灘村 등 32개 촌을 격파하여 290명의 목을 베고 300명을 사로잡았다.
20656#23388 SIBLINGS CHILDREN 23388
 
1107.12.15 高麗史(1451)
윤관이 여진을 쳐서 크게 패배시키자, 여러 장수를 보내 경계를 정하고 雄州·英州·福州·吉州의 4주에 성을 쌓았다.
20656#20667 SIBLINGS CHILDREN 20667
 
1107.12.15ꜛ 高麗史(1451)
윤관이 蒙羅骨嶺 아래에 성랑 950칸을 쌓아 英州라 하고, 火串山 아래에 992칸을 쌓아 雄州라 하였다. 吳林金村에 774칸을 쌓아 福州라 하였다. 弓漢伊村에 670칸을 쌓아 吉州라 하였다.
20656#21323 SIBLINGS CHILDREN 21323
 
1107.12.15ꜛ 高麗史(1451)
윤관이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지계를 획정하였는데, 동쪽으로는 火串嶺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弓漢伊嶺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蒙羅骨嶺에 이르렀다. 또 일관 최자호을 보내어 몽라골령 아래의 땅을 살펴 성랑 950칸을 짓고 英州라고 불렀고 火串嶺 아래에 992칸을 짓고 雄州라 불렀으며 吳林金村에 774칸을 짓고 福州라고 불렀고 弓漢伊村에 670칸을 짓고 吉州라고 불렀다. 또 護國仁王寺와 鎭東普濟寺 두 절을 英州城 안에 창건하였다.
20656#22973 SIBLINGS CHILDREN 22973
 
1107.12.15ꜛ 世宗實錄地理志(1454) 福州防禦使
豆乙外·禿魯兀 ➔ 福州防禦使 → 端州安撫使 → 知端州郡事 → 端川 ┆오랫동안 호인에게 점거되었었는데 별호를 豆乙外라 하고 또는 禿魯兀이라고도 한다. 고려 대장 윤관이 호인을 몰아내고 9성을 설치하여 福州防禦使로 삼았다가 1382년에 端州安撫使로 고쳤다. 1398년 무인에 知端州郡事로 고쳤다가 1413년 계사에 예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20656#22988 SIBLINGS CHILDREN 22988
 
1107.12.24 高麗史(1451)
東女眞의 裊乙乃 등 3,230인이 내부하였다.
20656#20759 SIBLINGS CHILDREN 20759
 
1108 高麗史(1451)
6성을 새로 설치하였으니, 첫 번째는 鎭東軍 咸州대도독부고 두 번째는 安嶺軍 英州방어사며 세 번째는 寧海軍 雄州방어사고 네 번째는 吉州방어사다. 다섯 번째는 福州방어사고 여섯 번째는 公嶮鎭방어사다.
20656#23010 SIBLINGS CHILDREN 23010
 
1108.02 高麗史(1451)
咸州 및 公嶮鎭에 성을 쌓았다. ▐ 雄州·英州·福州·吉州 4주에 성을 먼저 쌓고 이때 咸州·公嶮鎭에 성을 쌓아 6성이 되었다.
20656#23052 SIBLINGS CHILDREN 23052
 
1108.02 世宗實錄地理志(1454) 咸州
1108년 2월에 鎭東軍咸州大都督府를 설치하고 큰 성을 쌓아서 남계의 정호 1천 9백 48호를 이주시켜 이를 채웠다. 1416년에 함흥부로 승격시켜 도순문찰리사로 하여금 관청을 이곳에 옮기게 하고 토관을 두었다.
20656#23240 SIBLINGS CHILDREN 23240
 
1108.02.11 高麗史(1451)
여진이 雄州를 포위하자 최홍정이 성문을 열고 나가 격파하여 그들을 크게 물리쳤다. 포로로 잡은 80명의 머리를 베고 수레와 말과 무기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획득하였다.
20656#20763 SIBLINGS CHILDREN 20763
 
1108.02.13 高麗史(1451)
상서 유택을 咸州대도독부사로 임명하고 英州·福州·雄州·吉州 4개 주와 公嶮鎭에 방어사를 설치하였다.
20656#20764 SIBLINGS CHILDREN 20764
 
1108.02.13 高麗史(1451)
6성을 새로 설치하였으니, 첫 번째는 鎭東軍 咸州大都督府로, 병민이 1,948정호이다. 두 번째는 安嶺軍 英州防禦使로 병민이 1,238정호이다. 세 번째는 寧海軍 雄州防禦使로 병민이 1,436정호이다. 네 번째는 吉州防禦使로 병민이 680정호이다. 다섯 번째로 福州防禦使로 병민이 632정호이다. 여섯 번째는 公嶮鎭防禦使로 병민이 532정호이다.
20656#21325 SIBLINGS CHILDREN 21325
 
1108.02.27 高麗史(1451)
윤관이 여진을 평정하고 새로 6성을 쌓았으므로 표문을 받들어 하례하였다. 公嶮鎭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 ▐ 경계비를 세운 것으로 보아 公嶮鎭은 경계에 인접한 곳으로 보인다. 신라의 황초령비나 마운령비의 사례를 볼 때, 왕고의 경계비도 마땅히 火串嶺, 弓漢嶺 또는 蒙羅骨嶺에 세워야 할 듯한데, 이 세 고개에는 경계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20656#20765 SIBLINGS CHILDREN 20765
 
1108.02.27± 윤관의 옥저인 학살
여진은 본디 高麗의 부락으로서 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그 땅은 사방 300리로 동쪽은 대해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長州·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高麗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 삼국지(289)에 나오는 東沃沮와 묘사가 비슷하므로 沃沮가 女眞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20656#23058 SIBLINGS CHILDREN OPEN
 
1108.03.29 高麗史(1451)
여진이 英州城 밖에 진을 치자 관군이 나아가 싸워 그들을 격퇴하였다. 20명의 목을 베고 무기와 말 8필을 노획하였다.
20656#20766 SIBLINGS CHILDREN 20766
 
1108.03.30 高麗史(1451)
윤관이 宜州·通泰·平戎에 세 성을 쌓고 남계의 백성을 이주시켜 새로 쌓은 9성을 채웠다. ▐ 咸·英·雄·福·吉·宜六州 及公嶮·通泰·平戎三鎭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의주의 6주 및 공험진·통태진·평융진의 3진이 9성이다.
20656#20907 SIBLINGS CHILDREN 20907
 
1108.03.30 高麗史(1451)
宜州·通泰·平戎의 세 성을 쌓았다.
20656#23242 SIBLINGS CHILDREN 23242
 
1108.03.30 高麗史(1451) 宜州
宜州는 본래 고구려의 泉井郡(於乙買라고도 한다.)으로, 681년에 신라가 이곳을 차지하고 井泉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湧州라 불렀다. 995년에 방어사를 두었고, 뒤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1108년에 성을 쌓았다. 별호는 東牟이고(성종 때 정하였다.), 또 宜春·宜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요해처로 鐵關이 있다. 바다섬인 竹島가 있다.
20656#21742 SIBLINGS CHILDREN 21742
 
1108.04.02 高麗史(1451)
윤관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로, 오연총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로 임명하였다. 내시낭중 한교여를 보내 조서와 고신, 자주색으로 수를 놓은 안장과 구마 2필을 가지고 雄州에 이르러 그것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20656#20909 SIBLINGS CHILDREN 20909
 
1108.04.08 高麗史(1451)
여진이 목책을 설치하고 雄州城을 포위하였다. ▐ 6성을 설치할 때, 雄州에는 성랑 992간을 짓고 병민 1,436정호를 두었고 吉州에는 성랑 670간을 짓고 병민 680정호를 두었으므로, 吉州보다 雄州가 더 큰 규모였다. 또 동쪽끝인 火串嶺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雄州는 9성을 설치한 후 가장 먼저 대규모 공격을 받았다.
20656#20963 SIBLINGS CHILDREN 20963
 
1108.04.08ꜛ 金史(1344)
강종이 돌아오자 여러 사람들은 모두 “병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합니다. 요나라 사람들이 앞으로 우리를 탓할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태조만이 홀로 “만약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어찌 曷懶甸만 잃어버릴 뿐이겠는가? 여러 부가 모두 우리 소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강종도 그렇게 여기고 마침내 斡塞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하도록 하여 고려군을 크게 쳐부수었다. ▐ 강종은 오아속이고 태조는 아골타다.
20656#23068 SIBLINGS CHILDREN 23068
 
1108.04.09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왔다. 왕이 고취와 군위를 갖추어 그들을 맞이하도록 명령하였다. 帶方侯 왕보와 齊安侯 왕서를 보내 동교에서 위로연을 베풀었다. 윤관과 오연총이 경령전에 이르러 복명하고 부월을 반환하여 바치자, 왕이 문덕전에 나아가 윤관과 오연총, 여러 재추를 불러 전각 위로 오르게 하고 친히 변방의 일을 물었는데,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20656#20971 SIBLINGS CHILDREN 20971
 
1108.04.23 高麗史(1451)
병마부원수 오연총을 보내 부월을 주고 가서 雄州를 구원하도록 하였다.
20656#20972 SIBLINGS CHILDREN 20972
 
1108.07.07 高麗史(1451)
행영병마원수 문하시중 윤관에게 다시 여진을 정벌하라고 명령하였다.
20656#20998 SIBLINGS CHILDREN 20998
 
1108.07.25 高麗史(1451)
행영병마판관 어사 신현 등이 수군으로 寧仁鎭에서 적을 물리치고 20명의 머리를 베었다.
20656#21046 SIBLINGS CHILDREN 21046
 
1108.08.10 高麗史(1451)
오연총이 돌아왔다. 왕이 문덕전에서 불러 보고 친히 변방의 일을 물었으며 잔치를 베풀어 그를 위로하였다.
20656#21264 SIBLINGS CHILDREN 21264
 
1108.08.11 高麗史(1451)
병마판관 왕자지와 척준경이 咸州와 英州에서 여진과 싸워서 33명의 머리를 베었다.
20656#21265 SIBLINGS CHILDREN 21265
 
1108.08.16 高麗史(1451)
병마판관 유익과 장군 송충, 신기군 박회절 등이 여진과 吉州에서 싸우다가 죽자, 유익에게는 병부시랑 지어사대사를, 송충에게는 상장군 병부상서를 추증하였다.
20656#21271 SIBLINGS CHILDREN 21271
 
1108.09.16 高麗史(1451)
행영병마판관 왕자지와 척준경이 沙至嶺에서 여진을 공격하여 27명의 머리를 베고 3명을 사로잡았다.
20656#21274 SIBLINGS CHILDREN 21274
 
1109 공험진 전투
20656#23363 SIBLINGS CHILDREN 23363
 
1109 斜卯阿里
斜卯阿里 父渾坦 穆宗時內附 數有戰功 阿里年十七 從其伯父胡麻谷討詐都 獲其弟沙里只 高麗築九城於曷懶甸 渾坦攻之 遇敵於木里門甸 力戰久之 阿里挺槍馳刺其將於陣中 敵遂潰 渾坦與石適歡合兵於徒門水 阿里首敗敵兵 取其二城 사묘아리의 아버지는 혼탄이다. 고려가 갈라전에 9성을 쌓자 혼탄이 목리문전에서 오래 싸웠다. 사묘아리가 그 장수를 찌르자 적이 무너졌다. 혼탄은 석적환과 도문수에서 군대를 합하였는데 사묘아리가 앞장서서 성 2개를 획득하였다.
20656#23356 SIBLINGS CHILDREN 23356
 
1109 斜卯阿里
高麗入寇 以我兵屯守要害 不得進 乃還 阿里追及于曷懶水 高麗人爭走冰上 阿里乘之 殺略幾盡 遂合兵於石適歡 道遇敵兵五萬 擊走之 又與石適歡遇敵七萬 阿里先登 奮擊大敗之 石適歡曰 汝一日之間 三破重敵 功豈可忘 乃厚賜之 고려가 쳐들어왔으나 요해처를 지키니 돌아갔는데, 사묘아리가 추격하여 갈라수에서 거의 다 죽이고 석적환과 군대를 합쳤다. 길에서 적병 5만여 명을 만나자 쫓아버렸고 또 7만 명의 적병을 만났는데, 사묘아리가 나서 대파하였다.
20656#23357 SIBLINGS CHILDREN 23357
 
1109 世宗實錄地理志(1454)
1109년에 동계의 崇寧鎭·通泰鎭·眞陽鎭의 3진과 英州·福州의 두 주성을 철폐하고 또 咸州·雄州 2주와 宣化鎭의 성을 철폐하였다.
20656#23254 SIBLINGS CHILDREN 23254
 
1109 斜卯阿里
1109 斜卯阿里
▐ 사묘아리의 무용담과 가장 비슷한 사건은 공험진 전투다. ① 力戰久之(힘써 오래 싸웠다)가 圍吉州數月(길주를 몇달간 포위하였다)와 비슷하고 ② 渾坦與石適歡合兵於徒門水(혼탄이 석적환과 도문수에서 합류하였다)가 聚遠近諸部(원근의 여러 부족을 모았다)와 비슷하며 ③ 取其二城(그 두 성을 빼앗았다)가 웅주성과 공험진성이 인접한 상황과 어울리고 ④ 무엇보다 高麗築九城於曷懶甸 이후 수만명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전투는 공험진 전투 밖에 없기 때문이다.
20656#23369 SIBLINGS CHILDREN 23369
 
1109 斜卯阿里
▐ 그러나 追及于曷懶水高麗人爭走冰上(갈라수까지 추격하니 왕고인들이 다투어 얼음 위로 달아났다)는 5월에 벌어졌던 공험진 전투와 어울리지 않고 하루에 수만명이 참여하는 전투를 세 번이나 벌였다는 점도 비현실적이다. ▐ 사묘아리의 무용담이 공험진 전투에서 있었던 일이라면 曷懶水는 길주를 흐르는 浮瑞川이 된다. 그리고 1108년에 윤관이 점령지에 명칭을 붙일 때 合懶를 咸州라 한 것처럼 吉州라는 명칭도 曷懶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생긴다.
20656#23370 SIBLINGS CHILDREN 23370
 
1109.01.04 高麗史(1451)
동계행영병마녹사 왕사근과 하경택 등이 咸州에서 여진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20656#21275 SIBLINGS CHILDREN 21275
 
1109.02 高麗史(1451)
이여림을 遼에 보내 東界에 9성을 신축한 것을 알리고 반서대 1개를 보냈다.
20656#23292 SIBLINGS CHILDREN 23292
 
1109.03.11 高麗史(1451)
行營兵馬判官許載·金義元等與女眞 戰于吉州關外 斬三十級 獲其鐵甲牛馬 행영병마판관 허재와 김의원 등이 吉州의 관문 밖에서 여진과 싸워 30급을 베고 철갑과 소와 말을 포획하였다.
20656#21281 SIBLINGS CHILDREN 21281
 
1109.03.11 高麗史(1451)
또 행영병마판관이 되어 김의원 등과 함께 여진을 吉州關 밖에서 공격하여 30명의 목을 베고 그들의 갑옷, 병장기, 소, 말을 노획하였다.
20656#29282 SIBLINGS CHILDREN 29282
 
1109.03.11 高麗史(1451)
行營兵馬判官許載·金義元等與女眞 戰于吉州關外 斬三十級 獲其鐵甲牛馬 행영병마판관 허재와 김의원 등이 길주의 관문 밖에서 여진과 싸워 30급을 베고 철갑과 소와 말을 포획하였다.
20656#29285 SIBLINGS CHILDREN 29285
 
1109.04.30 高麗史(1451)
東女眞이 다시 史顯을 우리의 국경으로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20656#21282 SIBLINGS CHILDREN 21282
 
1109.05 高麗史(1451)
나라에서 처음 9성을 쌓았을 때 거란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女眞弓漢里 乃我舊地 其居民 亦我編氓 여진의 궁한리는 우리의 옛 땅이므로 그곳에 거주하는 민들도 역시 우리의 백성입니다. 근래에 변방을 노략질 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수복하고 그 성을 쌓았습니다.’라 하였습니다. 표문에 말을 그렇게 하였으나 궁한리의 추장에는 거란의 관직을 받은 자가 많기 때문에 9성을 반환하지 않는다면 거란이 반드시 우리를 책망하고 꾸짖을 것입니다.
20656#23293 SIBLINGS CHILDREN 23293
 
1109.05 高麗史(1451)
▐ 我舊地라 한 것은 옥저가 고려에 병합되었고 왕씨고려가 그 고려의 계승을 표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왕고 이전에 이미 발해가 고려 계승을 표방하였고 옥저 지역에 책성부를 두어 다스렸기 때문에 왕고의 주장은 억지였다. 더구나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키고 옛 고려의 땅이 모두 요나라의 것이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옥저 고지에 대한 왕고의 소유권 주장은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었다.
20656#23394 SIBLINGS CHILDREN 23394
 
1109.05 高麗史節要(1452)
여진의 弓漢里 밖에는 산이 연달아 벽처럼 서 있어 오직 작은 길 하나만이 통행할 수 있으니, 만약 관성을 세워 작은 길을 막는다면 우환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20656#23297 SIBLINGS CHILDREN 23297
 
1109.05 高麗史節要(1452)
1109.05 高麗史節要(1452)
▐ 이것이 弓漢嶺 아래 깊은 골짜기에 吉州를 설치하고 성을 쌓은 이유의 하나가 될 듯하다. 그러나 점령하고 보니 '水陸道路無往不通 수륙으로 길이 나 있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20656#23400 SIBLINGS CHILDREN 23400
 
1109.05.06 高麗史(1451)
행영병마에서 아뢰기를, “여진이 宣德鎭을 침략하여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해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20656#21283 SIBLINGS CHILDREN 21283
 
1109.05.06┆宣德鎭
정평군 선덕리.
20656#23117 SIBLINGS CHILDREN 23117
 
1109.05.09 高麗史(1451)
東蕃의 적은 祖宗 이래로 우리나라의 힘에 의지하여 큰 은택을 입어 왔는데도 지금은 배은망덕하게도 멀리 있는 적까지 불러 모아 국경을 침범하였다. 1104년에는 끊임없이 군사를 내어 우리 군사와 백성을 살해하였으며 때로는 생포하여 노예로 삼은 자들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자 군사를 일으키고 고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그러나 적의 잔당은 場寨를 설치하고 吉州를 공격해 왔기에 다시 군사를 독려해 공격하고자 한다.
20656#21285 SIBLINGS CHILDREN 21285
 
1109.05.09 高麗史(1451)
東蕃의 적은 祖宗 이래로 우리나라의 힘에 의지하여 큰 은택을 입어 왔는데도 지금은 배은망덕하게도 멀리 있는 적까지 불러 모아 국경을 침범하였다. 1104년에는 끊임없이 군사를 내어 우리 군사와 백성을 살해하였으며 때로는 생포하여 노예로 삼은 자들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자 군사를 일으키고 고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그러나 적의 잔당은 場寨를 설치하고 吉州를 공격해 왔기에 다시 군사를 독려해 공격하고자 한다.
20656#23282 SIBLINGS CHILDREN 23282
 
1109.05.16 @공험진(公嶮鎭)
1109.05.16 @공험진(公嶮鎭)
▐ 吉州¹를 구원하려는 병력은 雄州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雄州에서 吉州¹에 가려면 雄州 북쪽에 있는 夫瑞坪을 거쳐야 한다. 夫瑞坪 남쪽은 雄州보다 더 火串嶺에 가까운 곳으로, 火串嶺이 동쪽 경계였으니 이곳에 정계비를 세울 만하다. 이곳은 수백년 후 吉州²가 설치되어 남쪽의 옛 雄州까지 관할하게 된 곳이다. 이곳이 公嶮鎭의 조건에 가장 부합한다. @길주 @吉州 @웅주 @雄州 @부서평 @夫瑞坪 @화곶령 @火串嶺
20656#23275 SIBLINGS CHILDREN 23275
 
1109.05.16 高麗史(1451)
여진이 吉州를 포위하니 오연총이 군사를 이끌고 구하려 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20656#23283 SIBLINGS CHILDREN 23283
 
1109.05.16ꜛ 金史(1344)
6월에 고려가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와 도전하자 斜塞가 패전시키고 진격하여 그 성을 포위하였다.
20656#23066 SIBLINGS CHILDREN 23066
 
1109.05.16ꜛ 高麗史(1451)
여진이 다시 여러 부족을 모아 吉州를 수개월 포위하고 성에서 10리 거리에 작은 성을 쌓아 6개의 목책을 세우고 매우 급하게 성을 공격하였다. 오연총이 그것을 듣고 분개하여 나가려고 하니 왕이 다시 부월을 주어 보냈다. 행렬이 公嶮鎭에 이르니 적이 길을 막고 갑자기 공격하여 우리 군사들이 크게 패하였으며 장졸들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여러 성으로 흩어져 들어가니 성이 함락될 때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20656#23056 SIBLINGS CHILDREN 23056
 
1109.05.16ꜛ 高麗史(1451)
여진이 다시 여러 부족을 모아 吉州를 수개월 포위하고 성에서 10리 거리에 작은 성을 쌓아 6개의 목책을 세우고 매우 급하게 성을 공격하였다. 오연총이 그것을 듣고 분개하여 나가려고 하니 왕이 다시 부월을 주어 보냈다. 행렬이 公嶮鎭에 이르니 적이 길을 막고 갑자기 공격하여 우리 군사들이 크게 패하였으며 장졸들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여러 성으로 흩어져 들어가니 성이 함락될 때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20656#23187 SIBLINGS CHILDREN 23187
 
1109.05.16¦公嶮鎭
公嶮鎭의 위치를 추정하는 데는 두 가지 기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는 그곳에 경계비를 세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吉州를 구원하러 가다 그곳에서 적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경계비를 세울 곳으로는 동쪽 경계인 火串嶺이 최적이고 吉州를 구원하는 군대는 雄州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雄州 북쪽이자 火串嶺 아래인 夫瑞坪 남쪽을 公嶮鎭으로 추정한다. 이곳은 수백년 후 다시 설치된 吉州의 치소가 있던 곳으로 지금의 吉州다.
20656#22965 SIBLINGS CHILDREN 22965
 
1109.05.16¦曷懶
金史에 나오는 사묘아리의 무용담과 가장 비슷한 사건은 1109년에 있었던 공험진 전투다. 그렇다면 그 무용담에 나오는 曷懶水는 공험진 전투가 벌어졌던 吉州를 지나는 浮瑞川이 된다. 1107년에 윤관이 점령지에 명칭을 붙일 때 合懶를 咸州라 한 것을 보면 吉州라는 명칭도 曷懶에서 나온 듯하다.
20656#23365 SIBLINGS CHILDREN 23365
 
1109.05.16¦沃沮→夫租→曷懶→吉州
1109.05.16¦沃沮→夫租→曷懶→吉州
▐ 길주는 -107년에 한나라가 현도군을 설치하고 치소를 두었던 옥저성으로 추정된다. 이후에도 이곳은 개마대산 동쪽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그래서 갈라로 명칭이 바뀐 후에는 曷懶라는 명칭이 두만강 유역에서 함흥까지 아우르는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20656#23351 SIBLINGS CHILDREN 23351
 
1109.05~06 高麗史(1451) 許載
9성의 役에 중군녹사로서 守吉州城 女眞來攻 載與兵馬副使李冠珍等 固守數月 城幾陷 勵士卒 一夜更築重城 以拒之 虜乃退 길주성을 지키다가 여진이 와서 공격하니, 허재는 병마부사 이관진 등과 함께 수개월을 굳게 지켰다. 성이 거의 함락되려고 하자 사졸을 독려하여 하룻밤에 다시 중성을 쌓고 그들을 막아내니 적이 마침내 물러났다. ▐ 길주가 1109년 5월에 포위되어 윤관과 오연총이 구원하러 가던 중 6월에 강화가 체결되어 되돌아간 사건을 말하는 듯하다.
20656#25358 SIBLINGS CHILDREN 25358
 
1109.06 高麗史節要(1452)
頃 有弓漢村人自作不靖 本非太師指揮 근자에 궁한촌 사람이 스스로 소란을 일으킨 것이었지 본디 태사가 지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귀국에서 변경을 범한 죄를 들어 토벌하였다가 다시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20656#23294 SIBLINGS CHILDREN 23294
 
1109.06.12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군대를 이끌고 吉州를 구원하려다가 여진이 화친을 요청한다는 소식을 듣고 定州로 되돌아왔다.
20656#21286 SIBLINGS CHILDREN 21286
 
1109.06.12 高麗史(1451)
오연총이 스스로를 탄핵하는 장계를 갖추어 올리고는 윤관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吉州로 나아가려 하였는데, 마침 적이 사신을 보내 강화를 청하여 결국 돌아왔다.
20656#23057 SIBLINGS CHILDREN 23057
 
1109.06.12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군대를 이끌고 吉州를 구원하려다가 여진이 화친을 요청한다는 소식을 듣고 定州로 되돌아왔다.
20656#23284 SIBLINGS CHILDREN 23284
 
1109.06.12 高麗史(1451)
오연총이 스스로를 탄핵하는 장계를 갖추어 올리고는 윤관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吉州로 나아가려 하였는데, 마침 적이 사신을 보내 강화를 청하여 결국 돌아왔다.
20656#23285 SIBLINGS CHILDREN 23285
 
1109.06.23 高麗史(1451)
재상과 대간 및 6부 관리를 불러 9성의 반환을 의논하였다. 평장사 최홍사 등 28인은 그렇게 하자고 하였으나 예부낭중 박승중과 호부낭중 한상은 반대하였다.
20656#21287 SIBLINGS CHILDREN 21287
 
1109.06.26 高麗史(1451)
東蕃의 사신 褭弗과 史顯 등이 내조하였다.
20656#21288 SIBLINGS CHILDREN 21288
 
1109.06.27 高麗史(1451)
褭弗과 史顯 등 6인을 접견하고 입조한 연유를 묻자 “옛날 우리 太師인 盈歌가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조상도 大邦으로부터 나왔으니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귀부하는 것이 의리에 맞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인 烏雅束 역시 대국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만약 9성을 되돌려주어 우리의 생업을 편안하게 해주시면, 자손대대에 이르기까지 공물을 정성껏 바칠 것이며 감히 기와 조각 하나라도 국경에 던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20656#21289 SIBLINGS CHILDREN 21289
 
1109.06.27 高麗史(1451)
在甲申年閒 弓漢村人不順太師指諭者 擧兵懲之 國朝以我爲犯境 出兵征之 1104년에 궁한촌 사람들 중 태사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군사를 일으켜 응징하자, 고려에서는 우리들이 국경을 침범한 것으로 생각하고 군사를 내어 정벌하였지만 다시 수호를 허락하였습니다.
20656#23296 SIBLINGS CHILDREN 23296
 
1109.06.27 高麗史(1451)
▐ 1101년에 동여진의 弓漢伊忽村 도령 麻浦 등 55인이 왕고에 입조하였는데, 이 때문인지 1104년에 烏雅束이 군사를 일으켜 弓漢村 사람들 중 자신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응징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1104년에 동여진의 추장 烏雅束이 별부의 夫乃老와 사이가 벌어지자 公兄之助를 시켜 군대를 동원해 공격하게 했는데, 기병이 정주 관문 밖까지 와서 진을 쳤다고도 한다.
20656#23298 SIBLINGS CHILDREN 23298
 
1109.07 金史(1344)
7월에 고려가 다시 강화하자고 요청하니 강종은 “조건이 맞으면 강화하라.” 고 하였다. 고려가 도망하여 들어간 백성의 송환을 허락하고 9성의 병사도 철수시키며 침략한 옛 땅도 반환하겠다고 하자 마침내 그들과 강화하였다.
20656#23067 SIBLINGS CHILDREN 23067
 
1109.07 金史(1451)
七月 高麗請和 盡歸前後亡命及所侵故地 退九城之戍 遂與之和 7월에 고려가 화친을 요청하면서 전후에 망명한 자들과 침략한 옛 땅을 모두 돌려주고 9성 방어에서 퇴각함으로써 드디어 고려와 화친하였다.
20656#23087 SIBLINGS CHILDREN 23087
 
1109.07.02 高麗史(1451)
재추 및 대성·제사·지제고·시신·도병마판관 이상과 문무 3품 이상의 관리를 선정전에 모이게 하여 9성의 반환에 대한 가부를 물으니 모두 돌려주는 것을 옳다고 하였다.
20656#21290 SIBLINGS CHILDREN 21290
 
1109.07.03 高麗史(1451)
선정전 남문에 거둥하여 褭弗 등을 접견하고 9성의 반환을 허락하자, 요불이 감격하여 울며 감사의 절을 올렸다. 왕이 물품을 하사하고 돌려보내면서 내시 김향에게 명령하여 국경까지 호송하게 하였다. 이어서 원수 등에게 조서를 내려 9성을 반환하려는 뜻을 타일렀다.
20656#21291 SIBLINGS CHILDREN 21291
 
1109.07.18 高麗史(1451)
최홍정과 문관이 여진 추장 居熨伊 등에게 “너희가 9성의 반환을 요청했으니 마땅히 이전에 했던 약속처럼 하늘에 대해 맹세하라.”라고 하였다. 추장 등은 咸州 성문 밖에 제단을 설치하고 “지금 이후 대대손손까지 악한 마음을 품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칠 것입니다.”라고 맹세하고 물러갔다. 弘正等始自吉州 以次收入九城戰具資粮于內地 최홍정 등은 길주부터 차례로 9성의 전투 장비와 군량을 내지로 거두어 들였다.
20656#21292 SIBLINGS CHILDREN 21292
 
1109.07.18 高麗史(1451)
최홍정 등은 吉州부터 차례로 9성의 전투 장비와 군량을 내지로 거두어 들였다.
20656#23206 SIBLINGS CHILDREN 23206
 
1109.07.19 高麗史(1451)
東界의 崇寧鎭과 通泰鎭 2진에 축조한 성을 철거하였다.
20656#21293 SIBLINGS CHILDREN 21293
 
1109.07.21 高麗史(1451)
英州·福州의 2주와 眞陽鎭에 축조한 성을 철거하였다.
20656#21294 SIBLINGS CHILDREN 21294
 
1109.07.21 高麗史(1451)
英州·福州의 2주와 眞陽鎭에 축조한 성을 철거하였다.
20656#23165 SIBLINGS CHILDREN 23165
 
1109.07.22 高麗史(1451)
咸州·雄州의 2주와 宣化鎭에 축조한 성을 철거하였다. ▐ 9성에서의 철수는 여진의 호감을 샀고 그들의 협력을 받으며 이루어졌기 때문에 굳이 먼 곳부터 철수할 필요가 없었다.
20656#21310 SIBLINGS CHILDREN 21310
 
1109.07.22 高麗史(1451)
咸州·雄州의 2주와 宣化鎭에 축조한 성을 철거하였다.
20656#23161 SIBLINGS CHILDREN 23161
 
1109.08.02 高麗史(1451)
신기군 군사들이 東界에서 돌아왔다. 왕이 중광전 서루에 거둥하여 그들을 위로하며 이르기를, “동계 전투에서의 패배는 장수의 잘못이니 내가 어찌 너희의 노고를 잊겠는가?”라고 하였다.
20656#21312 SIBLINGS CHILDREN 21312
 
1109~1258
1109~1258
금나라 시기에는 1109년에 형성된 경계가 유지되었을 듯하다.
20656#23258 SIBLINGS CHILDREN 23258
 
1111 世宗實錄地理志(1454)
築中城于州 築山城于公險鎭 중성을 길주에 쌓고 산성을 공험진에 쌓았다.
20656#23177 SIBLINGS CHILDREN 23177
 
1111 世宗實錄地理志(1454)
中城을 吉州에 쌓고 山城을 公險鎭에 쌓았다. ▐ 이 기록은 정황에 맞지 않기 때문에 오기로 판단한다.
20656#23255 SIBLINGS CHILDREN 23255
 
1111 世宗實錄地理志(1454)
▐ 이 기록은 정황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이전에 허재가 重城을 쌓은 것과 혼동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20656#29280 SIBLINGS CHILDREN 29280
 
1111 高麗史(1451)
吉州는 1111년에 中城을 쌓았다. ▐ 1109년에 9성을 돌려주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1111년에 중성을 쌓았다는 이야기는 매우 어색하다.
20656#21406 SIBLINGS CHILDREN 21406
 
1111 高麗史(1451)
公嶮鎭은 1111년에 山城을 쌓았다. ▐ 1111년에 吉州에 中城을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당시 정황과 맞지 않는다.
20656#23232 SIBLINGS CHILDREN 23232
 
1115~1234
1115~1234
20656#23338 SIBLINGS CHILDREN 23338
 
1330±
1330±
1258~1356에 원나라가 和州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鐵嶺 이북을 차지하였다
20656#23381 SIBLINGS CHILDREN 23381
 
1330± 析津志輯佚
木吉(百一十) 迭甫(百四十) 阿剌可失列(百四十) 瑞州(百二十) 青州(百一十) 洪寬(百二十) 合懶府(高麗後門其東海) ▐ 木吉은 사묘아리의 무용담에 나오는 木里門甸을 떠올리게 한다.
20656#23375 SIBLINGS CHILDREN 23375
 
1330± 析津志輯佚
木吉 (百一十) 迭甫 (百四十) 阿剌可失列 (百四十) 瑞州 (百二十) 青州 (百一十) 洪寬 (百二十) 合懶府(高麗後門其東海) ▐ 洪原을 洪寬이라 했다.
20656#23377 SIBLINGS CHILDREN 23377
 
1330± 析津志輯佚
▐ 木吉站은 이조때의 古站으로 추정된다. 徒門水에서 내려오면 이곳에서 地境峴(←火串嶺)을 사이에 두고 吉州²(←公險鎭)에 주둔한 왕고와 대치하게 된다.
20656#23393 SIBLINGS CHILDREN 23393
 
1342┆義陵
20656#23308 SIBLINGS CHILDREN 23308
 
1356 高麗史(1451)
동북면병마사 유인우가 雙城을 함락시키자 총관 조소생, 천호 탁도경이 도망쳐버리니 和州·登州·定州·長州·預州·高州·文州·宜州 및 宣德鎭·元興鎭·寧仁鎭·耀德鎭·靜邊鎭 등지를 되찾게 되었다. 咸州 이북은 고종 무오년부터 원이 차지했는데 이때 와서 모두 수복하였다. ▐ 咸州 이남 지역을 열거하고 咸州 이북이라 칭하고 있다. 鐵嶺 이북이라 해야 옳다.
20656#23245 SIBLINGS CHILDREN 23245
 
1356 高麗史(1451)
동북면병마사 유인우가 雙城을 함락시키자 총관 조소생, 천호 탁도경이 도망쳐버리니 和州·登州·定州·長州·預州·高州·文州·宜州 및 宣德鎭·元興鎭·寧仁鎭·耀德鎭·靜邊鎭 등지를 되찾게 되었다. 咸州 이북은 고종 무오년부터 원이 차지했는데 이때 와서 모두 수복하였다. ▐ 咸州 이남 지역을 열거하고 咸州 이북이라 칭하고 있다. 鐵嶺 이북이라 해야 옳다.
20656#23260 SIBLINGS CHILDREN 23260
 
1387.12 明史(1739)
命戶部咨高麗王 以鐵嶺北東西之地 舊屬開元 其土著軍民女直 韃靼 高麗人等 遼東統之 鐵嶺之南 舊屬高麗人民 悉聽本國管屬 疆境既正 各安其守 不得復有所侵越 호부로 하여금 고려왕에게 외교문서를 보내도록 하기를, “철령 북방 동서쪽의 땅은 옛날부터 개원에 속하였으니 요동에서 통치하도록 하고, 철령 남쪽은 옛날부터 고려에 속하였으니 고려에서 통치토록 하오. 서로 국경을 확정하여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20656#23181 SIBLINGS CHILDREN 23181
 
1387.12 明史(1739)
命戶部咨高麗王 以鐵嶺北東西之地 舊屬開元 其土著軍民女直 韃靼 高麗人等 遼東統之 鐵嶺之南 舊屬高麗人民 悉聽本國管屬 疆境既正 各安其守 不得復有所侵越 호부로 하여금 고려왕에게 외교문서를 보내도록 하기를, “철령 북방 동서쪽의 땅은 옛날부터 개원에 속하였으니 요동에서 통치하도록 하고, 철령 남쪽은 옛날부터 고려에 속하였으니 고려에서 통치토록 하오. 서로 국경을 확정하여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20656#23261 SIBLINGS CHILDREN 23261
 
1388 王高 禑王 表
大明欲建鐵嶺衛 禑遣密直提學朴宜中 表請曰 명에서 철령위를 세우고자 하니 우왕이 밀직제학 박의중을 보내어 표문으로 청하였다. "切照鐵嶺迆北 歷文高和定咸等諸州 以至公嶮鎭 自來係是本國之地 철령 이북을 살펴보면, 역대로 문주·고주·화주·정주·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에 이르니, 원래부터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20656#21737 SIBLINGS CHILDREN 21737
 
1390 高麗史(1451)
1390년에 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州가 북쪽에 있고 雄州는 남쪽에 있다)를 설치하였다.
20656#23257 SIBLINGS CHILDREN 23257
 
1390.02.06 高麗史(1451)
밀직부사 王可仁을 遼陽으로 돌려보냈다. 왕가인은 海洋副千戶 王萬僧의 아들인데, 都司에서 공문을 보내어 보내달라고 하였으므로 돌려보냈다.
20656#23403 SIBLINGS CHILDREN 23403
 
1390~1393 世宗實錄地理志(1454)
1390년에 雄州·吉州 등처에 管軍民萬戶府를 두었다가 1393년에 吉州牧으로 고쳤다.
20656#23256 SIBLINGS CHILDREN 23256
 
1392 高麗史(1451)
速頻·失的覓·蒙骨·改陽·實憐·八隣·安頓·押蘭·喜剌兀·兀里因·古里罕·魯別·兀的改 땅은 원래 우리나라의 공험진 경내여서 이미 초유를 하였으나 지금까지도 귀부하지 않고 있으니 도리에 어긋난다.
20656#23046 SIBLINGS CHILDREN 23046
 
1392 高麗史(1451)
速頻·失的覓·蒙骨·改陽·實憐·八隣·安頓·押蘭·喜剌兀·兀里因·古里罕·魯別·兀的改 땅은 원래 우리나라의 공험진 경내여서 이미 초유를 하였으나 지금까지도 귀부하지 않고 있으니 도리에 어긋난다.
20656#23286 SIBLINGS CHILDREN 23286
 
1395 太祖實錄(1413)
哈闌都達魯花赤 해탄가랑합
20656#23410 SIBLINGS CHILDREN 23410
 
1395 太祖實錄(1413)
海洋猛安 괄아아화실첩목아┆洪肯猛安 괄아아올난
20656#23408 SIBLINGS CHILDREN 23408
 
1395 太祖實錄(1413)
參散猛安 고론두란첩목아
20656#23411 SIBLINGS CHILDREN 23411
 
1395 太祖實錄(1413)
禿魯兀猛安 협온불화
20656#23412 SIBLINGS CHILDREN 23412
 
1404.04 太宗實錄(1431)
영춘추관사 하윤·지춘추관사 권근에게 명하여 사고를 열고 전조의 예종실록에서 예종조 시중 윤관이 동여진을 치고 변경에다 비를 세운 것을 조사하게 하였다. 황제가 왕가인을 여진에 보내어 建州衛를 설치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에 의거하여 대답하려고 함이었다.
20656#23178 SIBLINGS CHILDREN 23178
 
1404.04 太宗實錄(1431)
영춘추관사 하윤·지춘추관사 권근에게 명하여 사고를 열고 전조의 예종실록에서 예종조 시중 윤관이 동여진을 치고 변경에다 비를 세운 것을 조사하게 하였다. 황제가 왕가인을 여진에 보내어 建州衛를 설치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에 의거하여 대답하려고 함이었다.
20656#23263 SIBLINGS CHILDREN 23263
 
1404.04.04 太宗實錄(1431)
遼東천호 왕가인이 받들고 온 칙서에 "지금 參散·禿魯兀 등 11처의 溪關만호 寗馬哈, 參散천호 李亦里不花, 禿魯兀천호 佟參哈·佟阿蘆, 洪肯천호 王兀難, 哈蘭천호 朱蹯失馬, 大伸천호 高難, 都夫失里천호 金火失帖木, 海童천호 童貴洞, 阿沙천호 朱引忽, 斡合천호 劉薛列, 阿都歌천호 崔咬納·崔完者를 초유한다." 하였다. ▐ 溪關┆參散(英州)┆禿魯兀(端州)┆洪肯┆哈蘭(咸州)┆大伸┆都夫失里┆海童┆阿沙┆斡合┆阿都歌
20656#23251 SIBLINGS CHILDREN 23251
 
1404.05 李朝 太宗 奏
遣計稟使藝文館提學金瞻如京師 瞻與可仁偕行 奏本云 계품사 예문관 제학 김첨을 보내어 경사에 가게 하였는데, 첨이 왕가인과 함께 갔다. 주본은 이러하였다. "照得 本國東北地方 自公嶮鎭歷孔州吉州端州英州雄州咸州等州 俱係本國之地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은 공험진으로부터 공주·길주·단주·영주·웅주·함주 등 고을을 거치는데,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 1388년의 표문에 보이지 않던 孔州가 추가되었다.
20656#23146 SIBLINGS CHILDREN 23146
 
1404.05 李朝 太宗 奏
乞將公嶮鎭迤北 還屬遼東 公嶮鎭迤南至鐵嶺 還屬本國 (1388년에) 공험진 이북은 요동에 환속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까지는 본국에 환속시켜 주기를 빌었습니다.
20656#23166 SIBLINGS CHILDREN 23166
 
1404.05.19 李朝 太宗 奏
遣計稟使藝文館提學金瞻如京師 瞻與可仁偕行 奏本云 계품사 예문관 제학 김첨을 보내어 경사에 가게 하였는데, 첨이 왕가인과 함께 갔다. 주본은 이러하였다. "照得 本國東北地方 自公嶮鎭歷孔州吉州端州英州雄州咸州等州 俱係本國之地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은 공험진으로부터 공주·길주·단주·영주·웅주·함주 등 고을을 거치는데,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20656#23264 SIBLINGS CHILDREN 23264
 
1404.05.19 李朝 太宗 奏
여진의 인민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吉州를 海陽이라 칭하고, 端州를 禿魯兀이라 칭하고, 英州를 參散이라 칭하고, 雄州를 洪肯이라 칭하고, 咸州를 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 雄州가 지명에서 사라진 것은 1393년에 雄吉州등처관군민만호부가 吉州牧으로 바뀌면서부터다. 10여년 밖에 안 지났지만 이때부터 洪原과 혼동이 일어났다.
20656#23136 SIBLINGS CHILDREN 23136
 
1404┆ 孔州
20656#23055 SIBLINGS CHILDREN 23055
 
1413 世宗實錄地理志(1454) 定平
1413년에 定州를 定平으로 고쳤으니 평안도 定州牧과 이름이 같음을 피해서였다.
20656#23265 SIBLINGS CHILDREN 23265
 
1439 世宗實錄(1454)
臣父先臣恭靖王某備 洪武二十一年間 欽蒙太祖高皇帝聖旨 準請公險鎭迤北還屬遼東 公險鎭迤南至鐵嶺 仍屬本國事因 신의 아비 선신 공정왕 아무개가 1388년에 태조 고황제의 성지를 받으니, ‘公險鎭 이북은 도로 요동에 부속시키고, 공험진 이남 鐵嶺까지는 그대로 본국에 소속하라. ’는 사유를 허락하시매
20656#638 SIBLINGS CHILDREN 638
 
1451 高麗史
公嶮鎭은 孔州 혹은 匡州라고도 한다. 혹은 先春嶺 동남쪽이자 白頭山 동북쪽에 있다고도 한다. 혹은 蘇下江변에 있다고도 한다. ▐ 公嶮鎭에 관한 1404년 이후의 기술은 모두 1404년의 주문에 나오는 주장을 따른 것이다.
20656#4615 SIBLINGS CHILDREN 4615
 
1451 高麗史
1109년에 길주로부터 시작하여 9성의 전투 장비·군량을 내지로 거두어 들였고 마침내 崇寧·通泰·眞陽의 세 진 및 영주·복주의 성을 철거하였다. 또 함주·웅주 및 宣化鎭의 성을 철거하고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의주의 6주 및 공험진·통태진·평융진의 3진이 9성이다. 성을 철거하고 여진에게 돌려줄 때에 의주 및 공험진·평융진이 없고 숭령진·진양진·선화진이 추가로 보이고 설치한 호의 수가 각기 같지 않다.
20656#23054 SIBLINGS CHILDREN 23054
 
1451 高麗史 吉州
吉州는 오랫동안 여진이 기거하던 곳으로 弓漢村이라 불렀다. 1108년에 주를 설치하여 방어사를 두었다. 1111년에 中城을 쌓았다가 얼마 후에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뒤에 원나라에 편입되어 海洋(三海陽이라고도 한다)이라 불렀다가 공민왕 때에 옛 영토를 수복하였다. ▐ 1111년에 중성을 쌓았다는 부분은 당시 정황과 맞지 않아 착오인 듯하다. 또 吉州가 海洋이라 불린 게 아니라 雄州가 海洋이라 불렸는데, 훗날 그곳에 吉州가 설치되면서 착오가 생긴 듯하다
20656#23250 SIBLINGS CHILDREN 23250
 
1451 高麗史 登州
安邊都護府 登州는 본래 고구려의 比列忽郡(淺城郡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556년에 比列州라 하고 군주를 두었는데, 경덕왕 때에 朔庭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登州라고 불렀다. 995년에 단련사를 두었다. 1018년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고종 때에 定平 이남의 여러 성이 몽고의 침입을 받자 江陵道 襄州에 임시로 머물렀다가, 다시 杆城으로 옮겨 거의 40년을 지냈다. 1298년에 각자 본성으로 돌아갔다. 별호는 朔方이다(성종 때 정하였다.).
20656#22958 SIBLINGS CHILDREN 22958
 
1451 高麗史 雄州
雄州는 1108년에 州를 설치하여 防禦使를 두었고 寧海軍이라 불렀다. 1109년에 성을 철수하고 그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뒤에 吉州에 합병하였다.
20656#22972 SIBLINGS CHILDREN 22972
 
1451 「三國誤記」 高麗史 (吉州→)公嶮鎭
後沒於元 稱海洋(一云三海陽) 恭愍王時 收復舊疆 恭讓王二年 置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州在北 雄州在南) 有卵島 뒤에 원나라에 편입되어 해양(삼해양이라고도 한다)이라 불렀다가, 공민왕 때에 옛 영토를 수복하였다. 1390년에 웅길주등처관군민만호부(州가 북쪽에 있고 웅주는 남쪽에 있다)를 설치하였다. 난도가 있다. ▐ 公嶮鎭을 두었던 곳에 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를 설치했고 훗날 吉州가 되었다.
20656#29284 SIBLINGS CHILDREN 29284
 
1451 「三國誤記」 高麗史 吉州¹
吉州久爲女眞所據 號弓漢村 睿宗三年 置州 爲防禦使 (六年→)四年 築(中城→)重城 尋以地 還女眞 길주는 오랫동안 여진이 기거하던 곳으로 궁한촌이라 불렀다. 1108년에 州를 설치하여 방어사를 두었다. 1109년에 중성을 쌓았다가 얼마 후에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 1109년에 길주가 포위당하자 許載가 重城을 쌓아 버틴 바 있다. 길주를 포함한 9성은 그 해에 돌려주었다.
20656#29283 SIBLINGS CHILDREN 29283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예전에는 치소가 西之委에 있었으나 지금은 夫瑞坪 남쪽으로 옮겼는데 옛 치소와의 거리가 40리이다. 長德山이 주의 동쪽에 있다. 浮瑞川이 주의 서쪽에 있다.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78리, 서쪽으로 白頭山의 내맥인 大山에 이르기 90리인데 甲山과 접경이 되며, 남쪽으로 端川 磨天嶺에 이르기 91리, 북쪽으로 鏡城 雲加委의 大川에 이르기 89리이다. 驛이 5인데 雄平은 1422년에 두었다. 사철이 주의 동남쪽 40리 되는 多信浦項의 바닷가에서 난다.
20656#23247 SIBLINGS CHILDREN 23247
 
1454 世宗實錄地理志 定平
1413년에 定平으로 고쳤으니 평안도 定州牧과 이름이 같음을 피해서였다.
20656#23392 SIBLINGS CHILDREN 23392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옛 孔州로서 혹은 匡州라고도 하는데 오랫동안 호인에게 점거되었다. 윤관이 호인을 몰아내고 公險鎭防禦使를 두었다. 1398년에 德陵과 安陵이 있다고 하여 경원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성을 수축하다가 匡州防禦之印이라 되어 있는 인신을 얻었다. 1409년에 목책을 所多老의 營基에 설치하고 부를 옮겼고 1410년에 야인의 난리로 인하여 鏡城郡에 합쳤다가 1417년에 鏡城의 豆籠耳峴 이북을 떼어서 다시 도호부로 삼고 富家站에 목책을 세우고 치소로 삼았다.
20656#23236 SIBLINGS CHILDREN 23236
 
1454 世宗實錄地理志
1107년에 윤관과 오연총이 군사 17만 명을 거느리고 여진을 몰아내고 장군을 나누어 보내 경계를 획정하였다. 동쪽으로 火串嶺까지 북쪽으로 弓漢嶺까지 서쪽으로 蒙羅骨嶺까지를 우리 강토로 삼았는데 火串山 아래에 성곽 9백 52간을 쌓고 이름을 雄州라 하고 吳林金村에 7백 74간을 쌓고 이름을 福州라고 하고 蒙羅骨嶺 아래에 9백 52간을 쌓고 이름을 英州라 하고 弓漢村에 6백 74간을 쌓고 이름을 吉州라고 하였다. 길주가 북쪽에 있고 웅주가 남쪽에 있다.
20656#21319 SIBLINGS CHILDREN 21319
 
1454 世宗實錄地理志
1107년에 윤관과 오연총이 여진을 몰아내고 경계를 획정하였는데, 동쪽으로 火串嶺까지 북쪽으로 弓漢嶺까지 그리고 서쪽으로 蒙羅骨嶺까지를 우리 강토로 삼았다. 火串山 아래에 성곽 952간을 쌓고 이름을 雄州라 하고, 吳林金村에 774간을 쌓고 이름을 福州라고 하고, 蒙羅骨嶺 아래에 952간을 쌓고 이름을 英州라 하고, 弓漢村에 674간을 쌓고 이름을 吉州라고 하였는데, 吉州가 북쪽에 있고 雄州가 남쪽에 있다.
20656#23012 SIBLINGS CHILDREN 23012
 
1454 世宗實錄地理志
公險鎭에 성을 쌓고 이택으로써 咸州대도독부사를 삼아서 비로소 英州·福州·雄州·吉州의 4주와 公險鎭에 방어사를 두었다. 윤관이 북계에 여러 성을 쌓고 남계의 백성들을 옮겨서 이를 채웠는데, 咸州를 鎭東軍이라 하여 1만 3천 호를 두고, 英州를 安嶺軍이라 하고, 雄州를 寧海軍이라 하여 각각 1만 호를 두고, 吉州·福州·宜州의 3주에는 각각 7천 호를 두었고, 公險鎭·通泰鎭·平戎鎭 3진에는 각각 5천 호를 두었다.
20656#23253 SIBLINGS CHILDREN 23253
 
1454 世宗實錄地理志 北靑
본래의 이름은 參散이다. 오랫동안 호인에게 점거되어 왔는데 고려 대장 윤관이 호인을 몰아내고 9성을 설치하였으나 그 이름은 미상이다. 1356년에 雙城의 옛 지경을 수복하고 安北千戶防禦所를 두었다가 1372년에 北靑州萬戶府로 고쳤다. 1398년에 靑州로 고쳤다가 1416년 병신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니 淸州牧과 이름이 같은 까닭이었다.
20656#23238 SIBLINGS CHILDREN 23238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① 雄州
▐ 雄州란 명칭은 1393년에 雄吉州만호부를 吉州牧으로 바꾸며 사라졌다. 30여년 후 1422년에 吉州 남쪽에 雄平驛이 만들어지는데, 이 雄平驛이 옛 雄州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390년에 雄吉州만호부를 설치할 때 吉州가 북쪽에 있고 雄州는 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吉州와 雄平驛의 위치 관계가 그 묘사와 같기 때문이다. 1413년에 定州를 定平으로 고친 사례를 볼 때, 雄州가 雄平이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20656#23231 SIBLINGS CHILDREN 23231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② 火串山
▐ 雄平驛이 옛 雄州라면 雄州 위에 있었다는 火串山은 長德山이 된다.
20656#23267 SIBLINGS CHILDREN 23267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③ 火串嶺
▐ 雄平驛이 옛 雄州라면 雄州 위에 있었다는 火串嶺은 地境峴이 된다.
20656#23244 SIBLINGS CHILDREN 23244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④ 弓漢嶺
▐ 왕고가 1107년에 차지한 영토는 동으로는 火串嶺에 이르고 북으로는 弓漢嶺에 이르는데 火串嶺 아래에 雄州를 설치하고 弓漢村에 吉州¹를 설치했다고 하므로, 弓漢嶺과 弓漢村은 雄州의 서북쪽에 있었다. 압록강 유역에서 雄州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起雲嶺을 넘어야 하는데, 이 起雲嶺이 弓漢嶺의 조건에 부합한다. 起雲嶺을 넘어 浮瑞川을 따라 내려오다 吉州²에서 40리 떨어진 곳에 이르면, 그곳이 바로 초기에 吉州¹를 설치했던 弓漢村이리라.
20656#23114 SIBLINGS CHILDREN 23114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⑤ 弓漢嶺
▐ 弓漢嶺은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 그리고 동해안 지역을 서로 연결하는 통로였다.
20656#23429 SIBLINGS CHILDREN 23429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⑥
多信浦
20656#23266 SIBLINGS CHILDREN 23266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⑦ 弓漢村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⑦ 弓漢村
▐ 夫瑞坪 남쪽에서 多信浦項 바닷가까지의 거리만큼 서북쪽으로 浮瑞川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이 吉州가 처음 있던 西之委다. 그리고 夫瑞坪 남쪽에서 多信浦項 바닷가까지의 거리를 40리로 설정하면, 吉州²에서 豆里山까지 거리가 88리가 되므로, 이 산이 吉州²에서 90리 떨어져 있고 甲山과 접경에 있다는 大山이 된다. @다신포항 @多信浦項 @부서천 @浮瑞川 @두리산 @豆里山 @궁한촌 @弓漢村
20656#22968 SIBLINGS CHILDREN 22968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⑧
@두리산 @豆里山 @개마대산
20656#23433 SIBLINGS CHILDREN 23433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⑨
1454 世宗實錄地理志 吉州 ⑨
▐ 吉州² 위의 들판이 夫瑞坪이고 그 서쪽에 흘러내리는 강이 浮瑞川이다. 吉州² 동쪽에 있는 산이 長德山(←火串山)이고 그 북쪽을 넘어가는 고개가 地境峴(←火串嶺)이다. 그리고 吉州² 남쪽 長德山 아래가 雄州다. @부서평 @夫瑞坪 @부서천 @浮瑞川 @지경현 @地境峴 @장덕산 @長德山 @웅주 @雄州 @화곶령 @火串嶺 @화곶산 @火串山
20656#23243 SIBLINGS CHILDREN 23243
 
1454 世宗實錄地理志 安邊
安邊都護府. 고구려의 淺城郡(比列忽郡)이었는데 556년에 신라가 比列州로 삼아 군주를 두었다가 경덕왕이 朔定郡으로 고쳤다. 고려에 이르러 登州로 고쳐 995에 단련사를 두었다가 1018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20656#21407 SIBLINGS CHILDREN 21407
 
1454 世宗實錄地理志 宣德
속진이 1이니 宣德이다. 1055년에 새로 宣德城을 쌓고 진으로 삼았다.
20656#23234 SIBLINGS CHILDREN 23234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북쪽으로 공험진에 이르기 7백 리다. 巨陽城이 있는데 본래 고려 대장 윤관이 쌓은 것이다. 거양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先春峴이니 곧 윤관이 비를 세운 곳이다. 그 비의 4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으나 호인이 그 글자를 깎아 버렸는데, 뒤에 사람들이 그 밑을 팠더니 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 英哥沙吾里站 북쪽으로 蘇下江 가에 公險鎭이 있으니 곧 윤관이 설치한 진이다.
20656#23064 SIBLINGS CHILDREN 23064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1
慶源 古孔州 或稱匡州 경원은 옛 공주다. 광주라고도 한다. 本朝太祖戊寅 陞爲慶源都護府 修城堀地 得印一顆 匡州防禦之印 1398년에 경원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성을 수리하려 땅을 팠더니 광주방어사라 새겨진 인장이 나왔다. 北距公險鎭七百里 東北距先春峴七百餘里 북쪽으로 공험진에 이르기 7백 리고 동북쪽으로 선춘현에 이르기 7백여 리다.
20656#23182 SIBLINGS CHILDREN 23182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2
▐ 고려사(1451)에는 公嶮鎭을 一云孔州 一云匡州라고 했는데, 이는 慶源과 혼동한 듯하다. 公嶮鎭이 慶源에서 북쪽으로 7백리 되는 곳에 있고 先春峴이 慶源에서 동북쪽으로 7백리 되는 곳에 있다면 公嶮鎭은 先春峴 서편에 있게 되는데, 이는 고려사에 公嶮鎭(一云 在先春嶺東南)과 어긋난다.
20656#23214 SIBLINGS CHILDREN 23214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3
東林城 東控豆滿江 太宗元年辛巳 修其城爲慶源府山城 阿吾知古城 在東林城南 孔州城在阿吾知城南豆滿江邊 동림성은 동쪽으로 두만강을 끼고 있다. 1400년에 수축하여 경원부의 산성으로 삼았다. 아오지 고성이 동림성 남쪽에 있고 공주성이 아오지성 남쪽 두만강 가에 있다.
20656#23209 SIBLINGS CHILDREN 23209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4
東林城 → 北去五里 所多老 → 其北三十里 → 越江十里 → 其北九十里 → 其北三十里 → 其北六十里 → 其東北七十里 巨陽城 城本高麗大將尹瓘所築 → 西距六十里 先春峴 卽尹瓘立碑處 有高麗之境四字 동림성 → 북쪽으로 5리 소다로 → 북쪽으로 30리 → 강을 건너 10리 → 북쪽으로 90리 → 북쪽으로 30리 → 북쪽으로 60리 → 동북쪽으로 70리 윤관이 쌓은 거양성 → 서쪽으로 60리 윤관이 비를 세운 선춘현. 그 밑을 팠더니 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
20656#23212 SIBLINGS CHILDREN 23212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5
東林城 → 北去五里 所多老 → 北去三十里 → 其北六十里 → 其北三里 豆滿江灘 → 北去九十里 → 其北六十里 → 其北一百里 英哥沙吾里 → 其北 蘇下江邊有公險鎭卽尹瓘所置鎭┆英哥沙吾里 → 西去六十里 白頭山
20656#23211 SIBLINGS CHILDREN 23211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6
동림성 → 북쪽으로 5리 소다로 → 북쪽으로 30리 → 북쪽으로 60리 → 북쪽으로 3리 두만강탄 → 북쪽으로 90리 → 북쪽으로 60리 → 북쪽으로 1백 리 영가 사오리 → 북쪽 소하강 가에 윤관이 설치한 공험진이 있다.┆영가 사오리 → 서쪽으로 60리 백두산 ▐ 고려사(1451)에 나오는 公嶮鎭(白頭山東北 一云 在蘇下江邊)과 일치한다.
20656#23210 SIBLINGS CHILDREN 23210
 
1454 世宗實錄地理志 文川
예전에는 妹城이라 칭하였는데 989년에 성을 쌓고 文州防禦使로 삼았다가, 뒤에 宜州에 합쳤다. 1345년에 다시 나누어서 주로 삼았으며, 1413년 계사에 예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20656#22976 SIBLINGS CHILDREN 22976
 
1454 世宗實錄地理志 永興
고려 초에 和州로 되었고 뒤에 원나라에 속하게 되어 雙城摠管府가 되었다. 1356년에 군사를 보내어 수복하고 和州牧을 삼았고 1369년에 和寧府로 승격시켰다. 1393년에 외가인 최씨네가 부의 永興鎭에 우거하였다 하여 永興府로 고쳤다.
20656#21410 SIBLINGS CHILDREN 21410
 
1454 世宗實錄地理志 洪原
속현이 1이니 洪原이다. 예전에는 洪獻이라 일컬었는데, 遼陽志에는 紅坑이라 일컬었다. 1398년에 洪原縣으로 개칭하여 내속시켰다.
20656#23135 SIBLINGS CHILDREN 23135
 
1454 世宗實錄地理志 高原
옛날에는 德寧鎭이라 하였었는데, 973년에 비로소 성을 쌓았고, 현종 때 高州防禦使로 고치었다가, 1356년에 知高州事로 삼았으며, 1413년에 예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20656#22985 SIBLINGS CHILDREN 22985
 
1530 新增東國輿地勝覽 洪原
古稱洪肯 或稱洪獻 옛날에는 홍긍 또는 홍헌이라고 일컬었다. ▐ 1108년에 설치되었던 雄州는 이듬해에 여진에게 반환되며 그 명칭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원나라 시기에는 海洋이라 불리었던 듯하다. 1390년에 海洋 인근에 吉州가 설치되어 海洋까지 관할하게 되면서, 雄州의 위치는 알기 어렵게 되었고 훗날 吉州가 海洋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착각이 생겨나게 되었다.
20656#5649 SIBLINGS CHILDREN 5649
 
1530 新增東國輿地勝覽 洪原
▐ 1404년에 명나라가 洪肯의 천호 왕올란 등을 초유한다고 했을 때, 태종이 洪肯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윤관의 동북9성에 나오는 雄州를 끌어다 洪肯에 대응시켰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洪原이 洪獻 또는 紅坑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되어 있어 명나라가 언급한 洪肯은 洪原이 맞는 듯하다. 그러나 그 洪肯이 雄州라는 태종의 주장은 근거를 찾을 수 없고 기록에 나오는 정황과도 맞지 않는다.
20656#23366 SIBLINGS CHILDREN 23366
 
1736 盛京通志
原作僕散渾坦扶餘地名
20656#23062 SIBLINGS CHILDREN 23062
 
1736 盛京通志
原作乙離骨托卜正也
20656#22995 SIBLINGS CHILDREN 22995
 
1834 靑邱圖 吉州
20656#22966 SIBLINGS CHILDREN 22966
 
1834 靑邱圖 高麗五道兩界州縣總圖
▐ 雄州가 나타나는 드문 지도다. 그러나 이 지도의 雄州는 吉州에 가깝다는 조건 외에 雄州가 가져야 할 다른 여러 조건들은 만족시키지 못한다.
20656#23133 SIBLINGS CHILDREN 23133
 
1884
1884
20656#23134 SIBLINGS CHILDREN 23134
 
1884 吉州
20656#23137 SIBLINGS CHILDREN 23137
 
1884 明川
20656#23138 SIBLINGS CHILDREN 23138
 
@길주(吉州)
20656#23278 SIBLINGS CHILDREN 23278
 
@길주(吉州)
20656#23157 SIBLINGS CHILDREN 23157
 
@안변(安邊)
@천성군(淺城郡) @비열홀군(比列忽郡) @삭정군(朔庭郡) @등주(登州)
20656#15007 SIBLINGS CHILDREN 15007
 
@영흥(永興)
@장령(長嶺) @당문(唐文) @등평(博平) @화주(和州) @쌍성(雙城) @화령(和寧)
20656#30253 SIBLINGS CHILDREN 30253
 
@웅주(雄州) @화곶령(火串嶺) @길주(吉州) @궁한령(弓漢嶺)
@웅주(雄州) @화곶령(火串嶺) @길주(吉州) @궁한령(弓漢嶺)
20656#23287 SIBLINGS CHILDREN 23287
 
@함흥(咸興)
@합라(合懶) @함주(咸州) @합란(合蘭)
20656#372 SIBLINGS CHILDREN 372
 
② 蒙羅骨嶺
▐ 을리골에서 개마대산을 넘어 갈라로 가는 고개는 여러 개 있지만, 완안부와 왕고가 처음 교류할 때부터 이용하였을 듯한 고개는 몽라골령이다. 그 아래에서 사갈과 석적환이 갈라를 경영한 거 같다.
20656#23350 SIBLINGS CHILDREN 23350
 
③ 압록강 유역
③ 압록강 유역
▐ 발해와 그 뒤를 이은 여진은 중국과 교류할 때 압록강을 이용하였다. 허천강은 압록강의 지류이니 완안부와 허천강 유역의 교류도 아주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20656#23347 SIBLINGS CHILDREN 23347
 
④ 蓋馬大山
④ 蓋馬大山
▐ 허천강 유역에서는 동해안을 따라 길게 분포하는 갈라 지역의 어디든, 개마대산을 넘어 불시에 공격할 수 있었다.
20656#23348 SIBLINGS CHILDREN 23348
 
北靑
20656#23237 SIBLINGS CHILDREN 23237
 
厚致嶺
20656#23270 SIBLINGS CHILDREN 23270
 
合懶
咸州는 合懶에서 나온 듯하다.
20656#23358 SIBLINGS CHILDREN 23358
 
合懶路
合懶路 置總管府 貞元元年 改總管為尹 仍兼兵馬都總管 承安三年 設兵馬副總管 舊貢海葱 大定二十七年罷之 有移鹿古水 西至上京一千八百里 東南至高麗界五百里
20656#23359 SIBLINGS CHILDREN 23359
 
咸興
20656#23239 SIBLINGS CHILDREN 23239
 
宣德
20656#23233 SIBLINGS CHILDREN 23233
 
平戎
20656#21405 SIBLINGS CHILDREN OPEN
 
弓漢嶺
弓漢嶺
두리산 남쪽의 물은 단천을 지나 동해로 들어가지만 두리산 북쪽의 물은 세 갈래로 갈라진다.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 허천강을 거쳐 압록강으로 들어가고 또 한 갈래는 북쪽으로 흘러 두만강으로 들어가며 나머지 한 갈래는 동쪽으로 흘러 길주를 지나 동해로 들어간다. 고대에는 물길을 따라 길이 났으므로 세 물길이 만나는 이곳이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 그리고 동해안 지역이 교류하는 통로였다.
20656#23431 SIBLINGS CHILDREN 23431
 
慶源
20656#23235 SIBLINGS CHILDREN 23235
 
於乙買串
본래 백제의 천정구현(泉井口縣)이었는데, 뒤에 고구려가 취하였다가 신라의 영토가 된 뒤에 교하군(交河郡)으로 바뀌었다.
20656#26805 SIBLINGS CHILDREN 26805
 
通泰
20656#21396 SIBLINGS CHILDREN OPEN
 
香嶺
20656#23268 SIBLINGS CHILDREN 23268
 
高麗史(1451)
여진의 병사 수만 명이 와서 雄州를 포위하였다. 그 때 척준경이 성 안에 있었는데, 州守가 말하여 이르기를, “성을 지키는 것이 오래되어 군량이 떨어질 것 같은데 밖에서 도움이 오지 않으니, 공이 성을 나가서 군대를 거두고 돌아와 성 안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사졸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을까 두렵습니다.”라 하였다. 척준경은 밤에 줄을 타고 성에서 내려와서 定州로 돌아가 군사를 정돈하여 通泰鎭을 통과하고 也等浦에서 吉州까지 적을 만나 싸워 크게 패배시켰다.
20656#23279 SIBLINGS CHILDREN 23279
 
高麗史(1451)
권지승선 왕자지가 公嶮城에서 병사를 거느리고 도독부로 오다가, 갑자기 오랑캐의 추장 史現의 병사를 만나 싸우다가 패하고 타고 있던 말까지 잃어버렸다. 척준경이 즉시 굳센 병졸을 이끌고 가서 구원하고 적을 물리쳤으며 갑옷 입은 말까지 잡아서 돌아왔다.
20656#23213 SIBLINGS CHILDREN 23213
 
高麗史(1451)
1108년에 윤관과 오연총이 정예병사 8,000명을 거느리고 加漢村 병목의 작은 길로 나갔다. 적이 갑자기 공격하니 군사가 모두 궤멸되고 10여명만 남았다. 적이 윤관 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고 오연총은 화살에 맞았다. 척준경이 용사 10여 명을 이끌고 와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여 10여 명을 때려 죽였다. 최홍정과 이관진 등이 골짜기에서 병사를 이끌고 오니 적이 포위를 풀고 도망갔다. 윤관 등은 날이 저물자 돌아와 英州城으로 들어왔다.
20656#23290 SIBLINGS CHILDREN 23290
 
ꜛ index
ꜛ index
20656#21344 SIBLINGS CHILDREN 21344
 
ꜛ乙離骨
20656#23003 SIBLINGS CHILDREN 23003
 
ꜛ咸州
20656#22967 SIBLINGS CHILDREN 22967
 
ꜛ定州
20656#21318 SIBLINGS CHILDREN 21318
 
ꜛ福州
20656#22962 SIBLINGS CHILDREN 22962
 
ꜛ長州
20656#22959 SIBLINGS CHILDREN 22959
 
고지도
1712~1750 左海圖 함경도1800~1808 地圖摠覽 함경도1895 地圖 함경도1898 朝鮮地圖 함경남도1898 朝鮮地圖 함경북도
 
국사편찬위원회
乙離骨嶺은 當時 女眞과 高麗 사이에 있었던 커다란 山으로 생각되는데 生女眞 30姓의 하나인 僕散部가 居住하던 地域이었다. 乙離骨嶺을 蓋馬高原으로 보아야 內附한 諸部族의 位置와 그 規模가 걸맞는다.
20656#17232 SIBLINGS CHILDREN 17232
 
_1107.12.15┆ 英州
▐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北靑의 옛 이름이 英州라고 되어 있다. 蒙羅骨嶺은 압록강 유역에서 북청으로 오기 위해 넘어야 하는 厚致嶺 또는 香嶺으로 추정된다.
20656#21331 SIBLINGS CHILDREN 21331
 
_1107.12.15┆ 吉州
20656#23269 SIBLINGS CHILDREN 23269
 
_1107.12.15◾雄州
윤관은 동쪽으로 火串嶺에 이르고 북쪽으로 弓漢伊嶺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火串嶺 아래에 雄州를 설치하고 弓漢伊村에 吉州를 설치하였다가 이내 모두 돌려주었다. 250여년 후 다시 이 지역을 차지하였을 때는, 吉州를 옛 雄州 북쪽에 설치하고 옛 雄州까지 관할하였다.
20656#23053 SIBLINGS CHILDREN 23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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