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史書 > 1145 三國史記(王高 金富軾) > 五周甲引上(오주갑인상) > ❷ 樂浪

백제의 동쪽에 있었다는 樂浪은 춘천에 있었던 樂浪郡의 부용국이었던 듯하다. 337년에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망한 樂浪이 바로 이 樂浪일 것이다.
 
-0108 樂浪¹
樂浪郡은 -108년에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설치한 군이다. 313년까지 400여년간 대동강 유역에 존속하였다. 이것이 첫번째 의미의 樂浪이다.
21047
 
-0020〜0037 ➔ 0281〜0337
-0020〜0037 ➔ 0281〜0337
29888
 
-0020✘ 三國史記 신라
호공을 마한에 보내니 馬韓王이 말했다. “辰卞二韓 爲我屬囯 比年不輸職□ 事大之禮 其若是乎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했다.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그리고 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좌우가 간하여 그치고 돌아가게 해주었다.
5993
 
-0015✘ 三國史記 백제
遣使樂浪修好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닦았다.
16968
 
-0011✘ 三國史記 백제
馬首城을 쌓고 甁山柵을 세웠다. 樂浪太守의 사신이 다음과 같이 아뢰어 말하였다. “지난번에는 서로 예를 갖추어 방문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의 강역을 핍박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이로 말미암아 樂浪과의 우호를 잃게 되었다.
29716
 
-0008 04✘ 三國史記 백제
樂浪이 말갈을 시켜 甁山柵을 습격하여 무너뜨리고 1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16882
 
-0008 07✘ 三國史記 백제
독산책과 구천책의 두 목책을 세워 樂浪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29719
 
-0006 05✘ 三國史記 백제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曰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16903
 
-0002✘ 三國史記 백제
낙랑이 쳐들어와서 慰禮城을 불태웠다.
16935
 
-0001 11✘ 三國史記 백제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乃還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려고 구곡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16920
 
0004.07✘ 三國史記 신라
樂浪兵이 와서 금성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좌우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적들이 우리에게 상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망령되게 병사를 동원하여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적이 얼마 있지 않아 물러나 돌아갔다.
29738
 
0014✘ 三國史記 신라
왜인이 병선 1백여 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6부의 날랜 병사를 발동하여 막게 하였다. 樂浪이 내부가 비었을 것이라고 하고 금성을 공격해 오기를 매우 급하게 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니 그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나 알천의 주위에 주둔하며 돌무지 20개를 만들어 놓고서 떠나갔다.
29745
 
0032✘ 三國史記 고구려
왕자 好童이 沃沮에 갔다가 樂浪王 崔理를 만났는데 崔理가 北國 神王의 아들이라며 好童을 데려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好童이 돌아가 최씨 딸에게 사람을 보내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나팔을 뽀개게 한 뒤 왕에게 낙랑을 치게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성 밑에 이른 뒤에야 북과 피리가 망가진 것을 알게 된 崔理는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혹은 '낙랑을 멸망시키려고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며느리로 맞은 뒤 돌려보내 무기를 파괴하게 했다'고도 한다.
29742
 
0036✘ 三國史記 신라
樂浪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16962
 
0037✘ 三國史記 신라
髙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명이 투항해 오니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25950
 
0040✘ 三國史記 신라
화려현과 불내현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貊國의 우두머리가 곡하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貊國과 우호를 맺었다.
6023
 
0042✘ 三國史記(1145) 신라
貊帥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
6026
 
0044 三國史記(1145) 고구려✘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取其地爲郡縣薩水已南屬漢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 樂浪에 대한 삼국지(289)와 후한서(445) 그리고 한국의 기록을 잘못 조합하였다.
16840
 
0047 三國史記(1145) 고구려
잠지락부의 대가인 대승 등 1만여 가가 樂浪¹에 가서 한나라에 의탁하였다.
16909
 
0146 三國史記(1145) 고구려
왕이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요동군 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樂浪¹大守의 처자를 잡아왔다.
29744
 
0244┆0245
0244┆0245
7241
 
Pet Dictionary
What breed is this pet?
 
0246 三國史記(1145) 고구려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고 앞으로 나아가 칼을 빼서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으니, 위군이 마침내 혼란해졌다. 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빠르게 이들을 공격하니, 위군이 어지러워져서 싸우지 못하고 드디어 樂浪에서 퇴각하였다.
16969
 
0246 三國史記(1145) 백제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樂浪¹太守 유무, 삭방 태수 왕준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왕이 빈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樂浪의 변경 주민을 습격하여 빼앗으니 유무가 듣고 노하였다. 왕이 침략 당할 것을 염려하여 그 주민들을 돌려주었다.
16879
 
0281 ❰❰ -0020 三國史記 신라
호공을 마한에 보내니 馬韓王이 말했다. “辰卞二韓 爲我屬囯 比年不輸職□ 事大之禮 其若是乎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했다.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그리고 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좌우가 간하여 그치고 돌아가게 해주었다.
16681
 
0286 ❰❰ -0015 三國史記 백제
遣使樂浪²修好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닦았다.
16928
 
0290 ❰❰ -0011 三國史記 백제
馬首城을 쌓고 甁山柵을 세웠다. 樂浪²太守의 사신이 다음과 같이 아뢰어 말하였다. “지난번에는 서로 예를 갖추어 방문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의 강역을 핍박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이로 말미암아 樂浪²과의 우호를 잃게 되었다.
16929
 
0293 ❰❰ -0008 04 三國史記 백제
樂浪²이 말갈을 시켜 甁山柵을 습격하여 무너뜨리고 1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29718
 
0293 ❰❰ -0008 07 三國史記 백제
독산책과 구천책의 두 목책을 세워 樂浪²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16883
 
0295 ❰❰ -0006.05 三國史記 백제
“國家東有樂浪² 北有靺鞨² 侵軼疆境 少有寧曰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5794
 
0295 樂浪²
▐ 이 낙랑은 樂浪郡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한나라는 44년에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樂浪¹에 와서 공물을 바치자 한나라의 염사읍군으로 삼아 樂浪郡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하도록 한 적이 있다. 그 염사읍군 또는 그와 유사한 사례가 백제의 동쪽에 있어 백제로부터 樂浪으로 지칭되었을 수 있다.
21048
 
0299 ❰❰ -0002 三國史記 백제
樂浪²이 쳐들어와서 慰禮城을 불태웠다.
16816
 
0300 ❰❰ -0001.11 三國史記 백제
王欲襲樂浪²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乃還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려고 구곡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16886
 
0300 牛頭
▐ 牛頭는 춘천이므로 樂浪²의 위치가 특정된다.
29746
 
0304.02 三國史記 백제
몰래 군사를 보내 樂浪²의 서쪽 현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 백제로부터 서쪽 현을 빼앗겼다면 백제의 동쪽에 있었다는 東有樂浪에 어울린다. 그곳은 300년에 백제가 침공하러 갔다가 눈이 많이 와서 돌아온 바 있다.
29748
 
0304.07 ❰❰ 0004.07 三國史記 신라
樂浪²兵이 와서 금성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좌우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적들이 우리에게 상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망령되게 병사를 동원하여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적이 얼마 있지 않아 물러나 돌아갔다.
16828
 
0304.10 三國史記 백제
왕이 樂浪²大守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 8개월 전에 있었던 백제의 영토 침탈에 대한 보복이다.
29736
 
0313 三國史記(1145) 고구려
樂浪¹郡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29735
 
0314 ❰❰ 0014 三國史記 신라
왜인이 병선 1백여 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6부의 날랜 병사를 발동하여 막게 하였다. 樂浪²이 내부가 비었을 것이라고 하고 금성을 공격해 오기를 매우 급하게 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니 그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나 알천의 주위에 주둔하며 돌무지 20개를 만들어 놓고서 떠나갔다.
16936
 
0332 ❰❰ 0032 三國史記 고구려
왕자 好童이 沃沮에 갔다가 樂浪王 崔理를 만났는데 崔理가 北國 神王의 아들이라며 好童을 데려가 딸을 시집보냈다. 후에 好童이 돌아가 최씨 딸에게 사람을 보내 무기고의 북을 찢고 나팔을 뽀개게 한 뒤 왕에게 樂浪²을 치게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성 밑에 이른 뒤에야 북과 피리가 망가진 것을 알게 된 崔理는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혹은 '樂浪²을 멸망시키려고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며느리로 맞은 뒤 돌려보내 무기를 파괴하게 했다'고도 한다.
16887
 
0336 ❰❰ 0036 三國史記 신라
樂浪²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16927
 
0337 ❰❰ 0037 三國史記 신라
髙句麗王無恤 襲樂浪²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명이 투항해 오니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 304년, 314년 그리고 336년에 신라를 침공했다가 337년에 고구려에 망해 신라로 투항한 낙랑은 樂浪郡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고 樂浪²으로만 설명이 된다. 또 332년에 고구려와 혼인관계를 맺었다가 병합되었다는 낙랑과도 연결되어, 그 병합이 337년에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16838
 
0340 ❰❰ 0040 三國史記(1145) 신라
화려현과 불내현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貊國渠帥가 곡하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 337년에 樂浪²이 맥고려에 병합되면서 기록에서 東有樂浪이 사라지고 340년부터 貊國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樂浪²이 貊國이 되었을 가능성이 생긴다. 정황으로 보아 위치도 樂浪²과 어울린다. 맥고려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貊國으로 불리게 된 듯하다.
29708
 
0342 ❰❰ 0042 三國史記(1145) 신라
貊帥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
29720
 
1145 三國史記 樂浪
16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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