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遼黑史 > 1115~1234 金
 
0916~1125 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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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86? 金祖宗
遼黒 지역의 夫餘人이 半島로 와서 百濟 왕조를 세웠듯이 半島의 新羅人도 遼黑으로 가서 金 왕조를 세웠다.
2726#14553 SHARED
 
0918~1125 金史(1344)
당나라 초엽에는 靺鞨이 粟末·黑水 2부가 있었는데, 모두 高麗에 신속되었었다. 당나라가 高麗를 멸하자 粟末이 東牟山을 차지하고 점점 강대하여져 渤海라 부르고 성을 大씨라 하였는데 문물과 예악이 있었다. 당나라 말엽에 이르러 차츰 쇠퇴하여져 이 뒤로는 다시 알려지지 아니하였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정벌하자 발해는 귀부하였는데, 대개 靺鞨의 후예들이다.
23072 SHARED
 
1094~1102
고려의 의사가 完顔部에 머물면서 병을 잘 고쳤다. 乙離骨嶺 僕散部의 胡石來 勃堇이 고려와 여진 사이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穆宗이 족인 叟阿를 시켜 불러오게 하고, 叟阿로 하여금 의원을 호송하여 고려 국경까지 돌려보내게 하였다. 의원이 돌아가 말하기를 “女眞으로 黑水에 살고 있는 자는 부족이 나날이 강성하고 군대가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왕이 이에 사신을 보내기 시작하여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2726#23331 SHARED
 
1102.04.11 高麗史節要(1452)
동여진의 盈歌가 사자를 보내어 은 세공인을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23335 SHARED
 
1102.04.20 高麗史(1451)
東女眞酋長盈歌遣使來朝 盈歌卽金之穆宗也 동여진의 추장 영가가 사자를 보내 내조하였는데, 영가는 곧 금의 목종이다.
14704 SHARED
 
1102冬 金史(1344)
九年壬午 1102년 冬 蕭海里叛 겨울에 해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遼追海里兵數千人 攻之不能克 요나라가 수천명의 군대를 보내어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太祖策馬突戰 流矢中海里首 海里墮馬下 執而殺之 大破其軍 아골타가 말을 채찍질하여 돌진하였는데 흐르는 화살이 해리의 머리에 명중하여 말에서 떨어지자 잡아서 죽였다. 그 군대를 대파하였다.
23320 SHARED
 
1103 金史(1344)
阿疏가 요나라에서 그의 무리 達紀를 시켜 曷懶甸 사람들을 유혹하니 그들이 그를 체포하였다. 穆宗(盈歌)은 達紀를 고려에 보내며 고려왕(肅宗)에게 “앞서 그대의 변방에서 난리를 일으켰던 자는 이런 무리들이다.” 고 하였다.
2726#23326 SHARED
 
1103.02
盈歌가 蕭海里를 격파하고 우리에게 승리를 알려주니 우리(肅宗)도 사신을 보내 그것을 축하하였다.
2726#23328 SHARED
 
1103.07.27
斜葛과 斡魯罕 등으로 빙문하도록 하니 고려왕(肅宗)은 “斜葛은 여직의 족제이니 대우하는 예가 융숭하여야 한다.” 며 큰 은반 한개로 사례하였다.
2726#23327 SHARED
 
1103.07~1103.10 金史(1344)
厥後 曷懶甸諸部盡欲來附 高麗聞之不欲使來附 恐近於己而不利也 使人邀止之 斜葛在高麗及往來曷懶道中 具知其事 遂使石適歡往納曷懶甸人 그 뒤 갈라전 등 여러 부족들이 귀부하려고 하자 고려에서 듣고 귀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는 고려에 가까워 불리할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사람을 시켜 그들을 불러들여 중지시켰다. 사갈이 고려에 있으면서 갈라와 왕래하던 도중에 그 사실을 자세히 알았으므로, 석적환을 보내어 갈라전 사람들을 귀부하도록 하려 하였다.
23075 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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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3.10.29 金史(1344)
1103년 10월 29일에 穆宗이 죽었다. 동남으로는 乙離骨, 曷懶, 耶懶 그리고 土骨論에 이르렀다.
23076 SHARED
 
1103.11 高麗史節要(1452)
동여진 태사 盈歌가 古洒, 率夫, 阿老 등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23336 SHARED
 
1103┆ 金史(1344)
穆宗이 죽고 康宗이 왕위를 이은 뒤 비로소 石適歡을 파견하여 星顯과 統門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乙離骨嶺으로 가서 군사를 더 모집하여 活涅水로 나아가 曷懶甸을 순행하여 배반한 7城을 거두도록 하였다. ▐ 叛亡七城은 1107년에 윤관이 점령한 지역에 대응시킬 수 있다.
23089 SHARED
 
1103┆ 金史(1344)
고려에서 사람이 와 의논해야 할 일이 있다고 통고하니 曷懶甸 관속인 斜勒詳穩, 冶剌保詳穩 등을 보내자 石適歡도 盃魯를 보냈다. 고려에서는 冶剌保 등은 잡아두고 盃魯는 돌려보냈다. 이때 5水의 백성들이 모두 고려에 귀부하고 붙잡힌 團練使가 14명이었다. ▐ 五水之民皆附於高麗는 1107년에 윤관이 점령한 지역에 대응시킬 수 있다. 石適歡이 보낸 사람만 돌려보낸 이유는 完顔部의 개입을 거부한다는 뜻인 거 같다.
23088 SHARED
 
1103┆ 金史(1344)
이보다 앞서 고려가 사신을 보내어 우호관계를 통하였었는데, 얼마 있다가 틈이 생겼다. 고려의 사신이 와서 사안을 의논하자고 청하므로 사신이 고려에 도착하였더니 고려가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5水의 백성으로써 고려에 붙은 자들이 團練使 14명을 사로잡았다. ▐ 五水之民附于高麗은 1107년에 윤관이 점령한 지역에 대응시킬 수 있다. 왕고가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石適歡이 보낸 사람 뿐이다.
23321 SHARED
 
1103┆乙離骨
21327 SHARED
 
1103┆耶懶
2726#23316 SHARED
 
1104.01.06 高麗史(1451)
동여진의 남녀 1,753인이 내투하였다.┆동여진의 추장 烏雅束이 別部의 夫乃老와 사이가 벌어지자 公兄之助를 시켜 군대를 동원해 공격하게 했는데, 기병이 定州 관문 밖까지 와서 진을 쳤다.
2726#23105 SHARED
 
1104.02.08 高麗史(1451)
林幹與女眞 戰于定州城外 敗績 임간이 여진과 정주성 밖에서 싸워 패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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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02.08ꜛ 金史(1451)
二年甲申 高麗來攻 石適歡大破之 殺獲甚眾 追入其境 焚略其戍守而還 1104년에 고려가 쳐들어오자 석적환이 크게 쳐부수어 죽이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으며 고려 국경까지 추격하여 들어가 진지를 불살라 버리고 돌아왔다.
23082 SHARED
 
1104.02.08ꜛ 高麗史(1451)
오아속이 또 別部의 夫乃老와 사이가 벌어져 군사를 일으켜 그를 공격하려고 국경 근처에 와서 주둔하자, 왕이 임간에게 명령하여 가서 대비하도록 하였다. 임간이 공을 세우는데 급급하여 병사를 이끌고 깊이 들어갔는데 그들에게 공격을 받아 연달아 패배하여 죽은 자가 거의 절반이었다. 여진이 승세를 타고 定州 宣德關의 성에 난입하여 죽이고 노략질 한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
23352 SHARED
 
1104.02.21 高麗史(1451)
추밀원사 윤관을 동북면행영병마도통으로 임명하고 중광전에 나아가 그에게 부월을 하사하여 출정시켰다.
23322 SHARED
 
1104.03.04 高麗史(1451)
윤관이 여진과 싸워 30여 명의 머리를 베었는데, 우리 군대의 사상자와 실종자도 과반이 넘었다.
23078 SHARED
 
1104.03.04ꜛ 高麗史(1451)
이에 윤관을 임간 대신으로 동북면행영도통에 임명하고 부월을 주어 보냈다. 윤관이 적과 싸워 30여 급을 베었으나, 우리 군사도 싸우다 죽거나 다친 자가 절반이 넘어 군세가 부진하니, 결국 언사를 낮추어 강화하여 맹약을 맺고 돌아왔다.
23354 SHARED
 
1104.04 金史(1451)
四月 高麗復來攻 石適歡以五百人禦於闢登水 復大破之 追入闢登水 逐其殘眾踰境 4월에 고려가 다시 쳐들어오자 석적환이 군사 5백명을 거느리고 벽등수에서 방어하여 크게 쳐부수고 추격하여 벽등수로 들어가 패잔병들을 국경너머로 쫓아버렸다. ▐ 당시 국경이 定州 인근에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闢登水는 함흥 서쪽을 흐르는 성천강이 유력하다.
23077 SHARED
 
1104.04ꜛ 金史(1451)
1104년에 고려가 다시 와서 공격하자 石適歡이 다시 격파하였다.
23086 SHARED
 
1104.06.13 高麗史(1451)
동북면병마도통이 아뢰기를 “여진이 스스로 성책을 허물고, 公兄之助 등 68인이 관문을 두들기며 화친하기를 애걸합니다.”라고 하였다.
23079 SHARED
 
1104.06.13 ꜛ 金史(1451)
고려는 다시 화의를 요청하면서 전에 사로잡은 團練 14명을 모두 돌려보내었으므로, 石適歡이 변경의 백성을 어루만져서 안정시키고 돌아왔다.
23333 SHARED
 
1104.06.13 ꜛ 金史(1451)
이에 고려왕은 “국경의 분쟁을 충동질한 자는 모두 官屬祥丹, 傍都里, 昔畢罕 무리들이었다.” 고 하며 團練 14명과 6路의 사자로서 고려에 있던 자들을 모두 돌려보내는 동시에 강화하자고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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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06.13+ 金史(1451)
遂使斜葛經正疆界 至乙離骨水 曷懶甸活禰水 留之兩月 斜葛不能聽訟 每一事輒至枝蔓 民頗苦之 康宗召斜葛還 而遣石適歡往 石適歡立幕府于三潺水 其嘗陰與高麗往來為亂階者 即正其罪 餘無所問 康宗以為能
23084 SHARED
 
1104.06.13+ 金史(1451)
드디어 사갈로 하여금 경계를 바르게 정하도록 하니 을리골수와 갈라전의 활녜수에 이르러 2개월을 머물렀다. 사갈은 송사를 잘 판결하지 못하여 사건마다 지체시키니 백성들이 매우 괴롭게 여겼다. 그래서 강종은 사갈을 소환하고 석적환을 파견하였다. 석적환은 삼존수에다 막부를 설치하고 과거에 고려와 몰래 왕래하여 난리를 조성한 사람은 즉시 죄에 따라 처벌하고 나머지는 불문에 부치니 강종은 그를 유능하게 여겼다.
23100 SHARED
 
1104┆乙離骨
1104┆乙離骨
▐ 사갈을 소환하고 석적환을 파견하였으니 사갈이 있던 乙離骨水와 曷懶甸活禰水는 석적환이 있던 三潺水와 같은 지역이거나 인접한 지역으로 볼 수 있다. 태종실록(1431)에는 英州를 參散이라 칭하였다고 하고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北靑都護府의 본래 이름이 參散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의 北靑으로 추정한다.
23332 SHARED
 
1106.01.18 高麗史(1451)
동번의 公牙 등 10인이 내조하였다. 왕이 선정전에서 불러 보고, 술과 음식을 전례에 따라 하사하였다. 처음에 임간이 군대를 내보냈을 때 추장 延盖가 之訓 등에게 그들을 역습하게 하여 우리 군사가 크게 패배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之訓이 公牙를 보내 내조하였다.
23103 SHARED
 
1106.03.04 高麗史(1451)
요나라에서 우리 군사 종지 등 12인을 돌려보냈다. 1104년 전쟁에서 동번에 패배하여 요로 도망쳐 들어간 자들이었다.
23080 SHARED
 
1106.03.05 高麗史(1451)
동북면병마사가 아뢰기를 “東女眞의 之訓이 기병 2,000명을 이끌고 와서 관외에 진을 치고 성심을 다하여 복종하며 말하기를 ‘지난해의 전쟁은 새로 즉위한 왕이 알지 못하는 것이며 公牙가 내조하였을 때 그 뜻을 깨우치고 후한 상을 주어 돌려보냈으니 왕의 은혜가 지극히 두터운데 어찌 감히 잊고 배신하겠습니까?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진심으로 부지런히 조공을 바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23081 SHARED
 
1107~1108 王高 禑王 表(1388)
至遼乾統七年 有東女眞等作亂 奪據咸州迆北之地 睿王告遼請討 遣兵克復 就築咸州及公嶮鎭等城 1107년에 동여진이 난을 일으켜서 함주 이북의 땅을 빼앗아 점거하니, 예왕이 요에 고하고 토벌할 것을 청하여 병사를 보내어 쳐서 회복하고 함주와 공험진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23085 SHARED
 
1107~1108 王高 禑王 表(1388)
▐ 발해가 망한 이후 남해부와 책성부의 토착 세력들은 다른 동여진과 함께 점차 왕고에 신속되었는데, 완안부 여진이 강성해지며 주변을 흡수하기 시작하자 이곳 갈라전 여진도 그쪽으로 귀부하였다. 윤관의 여진 정벌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22977 SHARED
 
1107~1108┆咸州
▐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咸興의 옛 이름이 咸州였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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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109 윤관의 여진 정벌
개마대산 동쪽의 여진을 정벌하고 공험진에서부터 함주, 영주, 복주, 웅주 그리고 길주까지 성을 쌓았다가 1년만에 물러났다. 여진은 이 지역에 수백년 동안 살아왔었고 이후로도 수백년 동안 살았다.
2726#20656 SHARED
 
1109.02 高麗史(1451)
이여림을 遼에 보내 東界에 9성을 신축한 것을 알리고 반서대 1개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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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6 高麗史(1451)
昔我太師盈歌嘗言 我祖宗出自大邦 至于子孫 義合歸附 今太師烏雅束亦以大邦爲父母之國 在甲申年閒 弓漢村人不順太師指諭者 擧兵懲之 國朝以我爲犯境 出兵征之 復許修好 故我信之 朝貢不絶 不謂去年 大擧而入 殺我耄倪 置九城 使流亡靡所止歸 故太師使我來請舊地 若還許九城 使安生業 則我等告天爲誓 至于世世子孫 恪修世貢 亦不敢以瓦礫 投於境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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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06 高麗史(1451)
왕이 선정전 남문에서 요불과 사현 등 여섯 명을 접견하고 입조한 연유를 묻자 요불 등이 다음과 같이 애걸했다. “현재 태사를 맡고 있는 오아속도 역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만약 9성을 되돌려주셔서 저희들로 하여금 안정된 생업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신다면, 하늘에 맹세코 자손대대로 조공을 정성껏 바칠 것이며, 감히 기와 조각 하나라도 귀국의 영토에 던지지 않겠나이다.”
14649 SHARED
 
1109.07 金史(1345)
高麗請和 盡歸前後亡命及所侵故地 退九城之戍 遂與之和 고려가 화친을 청하여, 전후로 망명한 자들과 침략한 옛 땅을 모두 돌려주고 9성의 병사를 퇴각시키니, 마침내 화친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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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金史(1344)
上曰 遼以賓鐵爲號取其堅也 賓鐵雖堅終亦變壞惟金不變不壞 金之色白完顏部色尚白 于是國號大金改元收國 아골타가 말하기를 "요나라는 쇠로 이름을 지어 견고함을 취했다. 쇠는 견고하나 결국 녹슬고 망가지는데 오직 금만 변하지도 않고 망가지지도 않는다. 금빛은 밝고 완안부의 빛 또한 밝다." 이로부터 나라 이름을 대금이라 하고 연호를 수국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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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01 高麗史(1451)
是月 生女眞完顔阿骨打稱皇帝 更名旻 國號金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이름을 민이라 고치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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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04 高麗史(1451)
이수 등이 요(遼)에서 귀국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遼) 황제의 회답을 가지고 왔다. “이제 경이 사신을 보내 답장을 올렸으니, 짐의 명령을 좇는 경의 충절을 잘 알게 되었다. 그러나 봄철을 맞은 지금 군사를 동원하면 농사를 해칠 우려가 있으니 우선 훈련에 힘쓰면서 작전 시행은 따로 기다리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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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08 고려사절요(1452)
요(遼)에서 여진을 치려고 사신을 보내와서 청병하였다. 재추ㆍ시신ㆍ도병마판관과 여러 위의 대장군 이상을 불러 의논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파병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오직 위위소경 척준경과 예부낭중 김부일, 호부원외랑 한충, 우사간 김부식ㆍ우정언 민수가 국가에서 정해ㆍ무자의 전란 이후로 군사와 백성들이 겨우 어깨를 쉬게 되었는데, 지금 타국을 위하여 군사를 출동한다면 이것은 자진하여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니, 장래의 이해가 어찌 될지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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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11 高麗史(1451)
요(遼)에서 이주관내 관찰사 야율의와 대리소경 손양모를 보내 군대 동원을 독촉했는데 그 조서는 다음과 같다. “이제 각 부대가 모두 집결해 적지를 향해 진군하고 있는 바, 그대 나라의 부대는 진작 군세를 점검했으니 즉시 먼저 출발하여 적을 협격하는 일에 늦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에 사신을 시켜 고려군의 출정을 살펴보게 했으니 충성을 다해 짐의 명령에 따라 공적을 떨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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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1234
1115~1234
曷懒路治所在今朝鲜咸镜北道吉州。辖境相当今长白山以东,吉林图们江流域以南,朝鲜咸镜南道咸兴以北地。 갈라로의 치소는 지금의 조선 함경북도 길주에 있었다. 관할 구역은 장백산 동쪽인데, 북으로는 길림 도문강 유역을 포함하고 남으로는 조선 함경남도 함흥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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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04 高麗史(1451)
중서문하성에서, “요(遼)가 여진의 침략을 당하여 매우 위급한 형편이니, 요(遼)로부터 받은 역법을 써서는 안 됩니다. 이제부터 공사의 모든 문서에서 천경이라는 연호를 삭제하고 간지만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고 건의하자 왕이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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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03 高麗史(1451)
金主阿骨打遣阿只等五人 寄書曰 兄大女眞金國皇帝 致書于弟高麗國王 自我祖考 介在一方 謂契丹爲大國 高麗爲父母之邦 小心事之 契丹無道 陵轢我疆域 奴隷我人民 屢加無名之師 我不得已拒之 蒙天之祐 獲殄滅之 惟王許我和親 結爲兄弟 以成世世無窮之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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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03 高麗史(1451)
금의 임금 아골타가 서한을 보내 “형인 대여진금국 황제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문서를 보내오. 우리는 할아버지 때부터 한쪽 지방에 끼어 있으면서 거란을 대국이라고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하면서 조심스럽게 섬겨왔소. 나는 부득이하게 그에 항거하였는데 하늘의 도움을 얻어 그들을 섬멸하게 되었소. 생각하건대 왕은 우리와의 화친을 허락하고 형제의 관계를 맺어 대대로 무궁한 우호관계를 이루기 바라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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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07 高麗史(1451)
요(遼)에서 악원부사 소준례 편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보냈다. “올린 표문을 살펴보고 모든 것을 잘 알았다. 이렇듯 강개한 마음을 더하였으니 반드시 적을 소탕하기에 노력해야 할 것이며, 공동의 원수를 앞에 둔 처지에 이렇게 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일 것이다. 실제로 성과가 나타나는가 살피면서 다음 표문을 기다렸다가 다시 회답을 보낼 터이니 그대로 준수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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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1146 金史(1344)
高麗國王 王楷 其地鴨綠江以東 曷懶路以南 東南皆至于海 고려왕은 왕해다. 고려 땅은 압록강 이동과 갈라로 이남에 위치하여 동쪽과 남쪽은 다 바다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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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遼 패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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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金史(1344)
黑水靺鞨은 옛 肅愼 땅에 있었으며, 白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는 長白山으로 금나라가 흥기한 곳이다. 女直이 비록 옛적에는 高麗에 예속되었으나 다시 서로 왕래하지 아니한 지 오래되었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자 高麗는 요나라를 섬기던 옛날 예대로 금나라에 칭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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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03 高麗史(1451)
모든 관리들을 소집해 금(金)을 상국으로 대우하는 일의 가부를 의논하게 하자 모두 불가하다고 했으나 이자겸과 척준경만이 찬성하고 나섰다. "지금 금(金)은 급격히 세력을 떨쳐 요(遼)와 송(趙宋)을 멸망시켰으며,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군세 또한 막강해 나날이 강대국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와는 국경이 맞물려 있으니 형편상 상국으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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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04 高麗史(1451)
遣鄭應文李侯如金 稱臣上表曰 大人垂統 震耀四方 異國入朝 梯航萬里 况接境之伊邇 諒馳誠之特勤 伏惟 天縱英明 日新德業 渙號一發 群黎無不悅隨 威聲所加 隣敵莫能枝梧 實帝王之高致 宜天地之冥扶 伏念 臣塉土小邦 眇躬涼德 聞非常之功烈 久已極於傾虔 惟不腆之苞苴 可以伸於忠信 雖愧蘋蘩之薦 切期山藪之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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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04 高麗史(1451)
정응문과 이후를 금(金)에 보내 본국을 신하라고 칭하면서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저는 하찮은 작은 지방을 다스리는 덕이 부족한 사람이긴 합니다만 황제폐하의 비상한 위업을 듣고, 이미 오랫동안 존경을 바쳐 왔으니, 넉넉지 못한 예물이나마 충성의 뜻으로 바치고자 합니다. 변변치 못한 공물을 바치는 것이 부끄럽긴 하오나, 크신 은덕으로 받아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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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05 고려사절요(1452)
준경이 갑옷을 입고 급히 궁궐로 들어가니, 왕은 천복전 문에 나와 준경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준경이 왕을 모시고 나오는데 자겸의 무리가 활로 준경을 쏘았다. 준경이 칼을 빼어 들고 한번 호통하니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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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07 高麗史(1451)
송(趙宋)에서 합문지후인 후장과 귀중부 등 60여 명을 보내왔다. "천하의 군사를 동원해 추악한 오랑캐들의 죄를 묻고자 하니 고려국왕은 군대를 지휘해 우리 군대와 협력해 적에게 천벌을 내리도록 하라." 후장이 송(趙宋)으로 돌아가는 편에 왕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전달하게 했다. "저희나라는 본래 강성한 나라가 아닐 뿐더러, ... 상국의 군사가 적을 제압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적으나마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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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11 정강의 변
1126년 금나라는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함락시키고 황제 흠종과 전 황제 휘종을 비롯한 왕족과 관료 수천 명을 만주로 끌고 가 모욕을 주었다. 이때가 정강 원년이었기 때문에 정강의 변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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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05 高麗史(1451)
김부식 등이 趙宋의 明州까지 갔으나 마침 金의 군대가 汴京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바람에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고 계묘일에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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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03 고려사절요(1452)
서경에 행차하여 새 궁궐에 들어 앉았다. 이때 어떤 사람은 표를 올려 '황제'라 일컫고, 원년의 칭호를 정하라고 왕에게 권하고, 어떤 사람은 제(齊)와 동맹하여 금(金)을 협공하여 멸하기를 청하였다. 식자는 그것을 비난하였으며 묘청의 무리는 유창한 말로 지껄여댔으나 왕이 마침내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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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3 金史(1344)
合懶路 置總管府 貞元元年 改總管為尹 仍兼兵馬都總管 承安三年 設兵馬副總管 (舊貢海葱 大定二十七年罷之 有移鹿古水 西至上京一千八百里 東南至高麗界五百里) 1153 1198 1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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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 金 패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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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8 女眞文字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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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上京路即海古之地金之舊土也國言金曰按出虎按出虎水源於此故名金源建國之號蓋取諸此 상경로(黑龍江省哈爾濱市阿城區白城遺址)는 해고의 땅인데 금(金)의 옛 땅이다. 나랏말에 금을 안출호라 하는데, 안출호수(阿什河)가 여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금원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나라 이름도 여기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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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4 金史(元 脫脫)
⑨函普(함보) ⑧烏魯(오로) ⑦跋海(발해) ⑥綏可(수가) ⑤石魯(석로) ④烏古迺(오고내) ③劾里缽(핵리발) ③頗剌淑(파자숙) ③盈歌(영가) ②烏雅束(오아속) ○阿骨打(아골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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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 異域誌
女真在鴨綠之陽長白山之下古肅慎氏之國也始因新羅人完顏氏者奔於國遂家焉地多產金故女真阿古答稱帝國號大金 여진 - 압록강의 양(陽), 장백산의 아래에 있다. 옛 숙신씨의 나라다. 처음에 신라인 완안씨가 나라에서 도망쳐 나와 마침내 집안을 이루었다. 금이 많이 난다. 옛날 여진 아고답(아골타)이 황제를 칭하고 나라 이름을 대금(大金)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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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 東溟海槎錄(金世濂)
지금 나라 안의 김(金) 성이 거의 신라의 후예이고, 김부(경순왕)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그 외손 완안 아골타는 곧 권행(權幸)의 후예인데, 중국을 분할하여 다스리고 백 년 동안 대를 이었으니, 어찌 신명의 후예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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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2 清太祖武皇帝實錄
「我乃天女佛古倫所生,姓愛新華言金也覺羅姓也,名布庫里英雄,天降我定汝等之亂。」 나는 천녀 불고륜에서 났는데 성(姓)은 애신(중국말로 gold)각라고 이름은 포고리영웅으로 하늘이 나를 내려보내 너희들의 난을 평정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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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 滿洲源流考
新羅王金姓相傳数十世則金之自新羅來無疑建國之名亦應取此金史地理志乃云以國有金水源為名史家附㑹之詞未足憑耳 신라 왕성 김(金)이 수십 대를 이어 왔으므로 금(金)이 신라에서 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나라의 이름 역시 당연히 여기서 나온 것이다. 금사지리지에는 금수원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는데, 이는 역사가들이 왜곡한 것이니 들을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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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 滿洲源流考
完顔(金始祖自新羅來居完顔部因以為氏) 금(金)시조는 신라에서 왔고 완안부에 살았기 때문에 부족명인 완안을 성씨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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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 滿洲源流考
因錫之姓曰愛新覺羅 名之曰布庫哩雍順 성(姓)을 애신각라라 하고 이름을 포고리옹순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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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金 국호의 어원
금 국호의 어원에 대해서 금사는 두 가지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하나는 요나라의 국호가 쇠를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쇠보다 우수한 금을 따라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금나라의 뿌리가 금수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 강 이름을 따라 국호를 정했다는 것이다. 한편, 만주원류고에서는 금나라의 시조가 김씨 신라인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 성을 따라 국호를 금나라로 하였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맞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각각의 이야기에는 나름의 정치적 의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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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1856 오주연문장전산고(이규경)
청제의 성을 애신각라라고 한 데 대하여는 여진(女眞)의 방언(方言)에, 금(金)을 애신, 종실(宗室)을 각라라 하는데, 청제가 자칭 금의 후예라 하여, 애신각라로 성을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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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 大金国志(席世臣)
혹자는, 그 첫 추장(본래 신라인인데 완안씨라 부른다. 완안은 한자음으로 왕과 같다. 여진의 여자를 처로 삼아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장남이) 곧 호래(胡來)다. 그로부터 3대를 지나 양할(楊割) 태사에 이르렀고 마침내 아골타에 이르렀다. 그 나라에 금이 나고 금수의 발원지가 있으니 대금이라 칭했다. - 1234 금지(金志 南宋 宇文懋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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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고조선이 중국사면 청나라는 한국사
말지의 김선영 기자가 2004년 08월 30일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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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新羅의 후예였다!
중원에서 최초로 한족을 밀어낸 금태조 아골타, 그의 시조는 놀랍게도 신라인 함보였다. 이것은 전설이나 야사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와 금 건국 시 송나라에서 씌어진 <송막기문>에 명확히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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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만주족
현재 청(淸) 황실의 후손들은 愛新覺羅(아이신지오로)라는 성을 쓰지 않고 金(진)이라는 성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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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百科在线 - 佟姓
據考證原遼國的加古氏到金國時期仍爲夾(加)古氏元朝亦爲夾古氏而到了明朝則諧音爲夾溫氏清朝時期又演變爲覺羅氏 고증에 근거하면, 원래 요나라 시기의 가고(加古)씨는 금나라 시기에 협고(夾古)씨와 병행해서 쓰이더니 원나라 시기에는 마침내 협고(夾古)씨가 되었다. 명나라가 끝나갈 무렵에는 음이 변하여 협온(夾溫)씨가 되었고 청나라 시기에는 각라(覺羅)씨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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完颜函普
“新罗人”考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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续编两朝纲目备要 佚名 编
完颜之始祖浦(函普)者,新罗人,自新罗奔女真,女真诸酋推为首领,七传至而始大,所谓阿骨打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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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史(1345) 卷1
金之先,出靺鞨氏。靺鞨本號勿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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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고려, 발해, 요, 금 그리고 청은 요흑사
부여, 고려, 발해, 요, 금 그리고 청은 요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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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말갈에 대한 요(遼)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아골타가 말갈 부족들을 통합하고 요(遼)를 격파한 후 1115년에 금(金)을 세웠다. 이후 금(金)은 1125년에 요(遼)를 멸망시키고 1127년에는 송(趙宋)마저 남쪽으로 밀어내고 북중국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왕조가 오래가지는 못하고 1234년 몽골의 침략을 받아 망하고 말았다. 금사에는 금(金)의 유래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다. 금사(金史 1345 元 脫脫) 금(金)의 선조는 말갈에서 나왔다. 말갈은 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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