沃沮 ❱ 衛滿朝鮮 ❱ 漢 玄菟郡 ❱ 漢 樂浪郡 東部都尉 ❱ 高麗 ❱ 渤海 柵城府 ❱ 金 曷懶路 ❱ 李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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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지 분포
동해안의 농경지는 매우 희박하다. 해안을 따라 조금씩 분포하고 있으며 개마대산 동쪽은 단단대령 동쪽보다 더 적다. 이러한 농경지 분포는 동옥저 및 예의 호수가 삼국지에 각각 5천호와 2만호로 되어 있는 것과 어울린다. 개마대산 동쪽만 놓고 보면 길주명천지구대 주변의 농경지가 가장 넓다.
15437#15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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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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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4~0246 曺魏, 고려 정벌
조위의 침공을 받아 도읍이 함락되자 동천왕은 竹嶺을 넘어 옥저로 도주하였다. 맥고려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경로는 황초령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竹嶺을 황초령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 결과, 흔히 황초령 아래 함흥을 옥저로 비정한다. 그러나 맥고려가 26년에 개마국을 정복한 것을 볼 때, 맥고려에서 개마국을 거쳐 개마대산을 넘는 길이 황초령 동북쪽에 충분히 개척되어 있었을 듯하다.
15437#1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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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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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沃沮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濵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夫餘 南與濊貊接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부여와, 남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 고구려가 貊이니 여기에 나오는 濊貊은 濊로 보아야 할 듯하다.
15437#2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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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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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沃沮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구려에 신속케 되었다. 구려는 그 중에서 대인을 두고 사자로 삼아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대가로 하여금 조세를 통괄 수납케하여, 貊·布·魚·鹽·海中食物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나르게 하고, 또 그곳의 美女를 보내게 하여 婢이나 妾으로 삼았으니 그들을 奴僕처럼 대우하였다.
15437#1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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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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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0~0873 신당서(1060)
□貃故地為東京 曰龍原府 亦曰柵城府 領慶鹽穆賀四州 沃沮故地為南京 曰南海府 領沃睛椒三州
예맥의 옛 땅으로 동경을 삼으니 용원부로 책성부라고도 한다. 경·염·목·하의 4주를 통치한다.
옥저의 옛 땅으로 남경을 삼으니 남해부이며 옥·청·초의 3주를 통치한다.
▐ 예맥과 옥저가 바뀌어 있다. 柵城은 고구려의 幘溝漊(幘城) 및 북옥저의 置溝婁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15437#15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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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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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東女眞
黑水는 장백산 동북쪽에 있었다. 이곳에는 靺鞨 이외의 종족은 없었던 듯하며 따라서 黑水人은 黑水靺鞨과 같은 뜻이다. 靺鞨은 女眞이라고도 했는데 장백산 일대의 산악 지형에 의해 동과 서로 갈려 있었다. 따라서 黑水靺鞨은 곧 東女眞이다. 왕고는 이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고 東蕃이라고도 불렀다.
○ 黑水人=黑水靺鞨=東女眞=東蕃
15437#4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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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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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東界에 이르러 長春驛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병마판관 최홍정·황군상을 定州와 長州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許貞과 羅弗 등을 돌려보내고자 하니 와서 명령을 들으라.”고 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것을 믿어 古羅 등 400여 인이 이르니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하여, 매복해 있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15437#2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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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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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金史(1344)
高麗許之 曰 使使至境上受之 康宗以為信然 使完顏部阿聒 烏林答部勝昆往境上受之 康宗畋於馬紀嶺乙隻村以待之 阿聒 勝昆至境上 高麗遣人殺之 而出兵曷懶甸 築九城
왕고가 허락하면서 “사신을 파견하여 국경에 이르러 인수하여 가라.”고 하니 강종은 이를 믿고 완안부 아괄·오림답부 승곤 등으로 하여금 국경으로 가 인수하도록 하고 마기령 을집촌에서 사냥하면서 기다렸다.
아괄·승곤 등이 국경에 도착하자 고려는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살해하고 갈라전으로 출병시켜 9성을 쌓았다.
15437#2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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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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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02.27± 尹瓘
여진은 본디 高麗의 부락으로서 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그 땅은 사방 300리로 동쪽은 대해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長州·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高麗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 東沃沮와 묘사가 비슷하다. 沃沮가 女眞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15437#23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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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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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高麗史 福州
福州는 오랫동안 여진이 기거하던 곳으로, 吳林金村이라 불렀다. 1108년에 州를 설치하여 防禦使를 두었다. 1109년에 城을 철수하여 그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뒤에 원나라에 편입되어 禿魯兀이라 불렀다. 공민왕 때에 이르러 옛 영토를 수복하였다. 1382년에 端州安撫使로 고쳤다. 요해처가 2곳인데, 伊板嶺(州 동북쪽에 있는데, 곧 磨天嶺이다)과 豆乙外嶺(州 남쪽에 있는데, 곧 磨雲嶺이다)이다.
15437#22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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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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弓漢嶺
두리산 남쪽의 물은 단천을 지나 동해로 들어가지만 두리산 북쪽의 물은 세 갈래로 갈라진다.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 허천강을 거쳐 압록강으로 들어가고 또 한 갈래는 북쪽으로 흘러 두만강으로 들어가며 나머지 한 갈래는 동쪽으로 흘러 길주를 지나 동해로 들어간다. 고대에는 물길을 따라 길이 났으므로 세 물길이 만나는 이곳이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 그리고 동해안 지역이 교류하는 통로였다.
15437#23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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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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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不耐縣
245년 유주자사 관구검은 고구려를 침공하여 도읍을 점령하고 현도태수 왕기로 하여금 도주하는 동천왕을 쯫게 하였는데, 왕기는 옥저를 파괴하고 숙신까지 쫓다가 돌아갔다.
같은 해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군대를 일으켜 단단대령 동쪽의 예를 정벌하였는데 불내후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만약, 옥저와 예가 모두 영흥만에 있었다면 왕기는 옥저를 정벌하고 인접한 예는 먼 낙랑과 대방에서 군대를 보내 정벌한다는 이야기가 되어 매우 어색해진다.
15437#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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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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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東暆縣
무릉서에는 임둔군의 치소 동이가 진번군의 치소 삽현보다 장안에서 1500리 가깝다고 되어 있다. 진번군은 낙랑군과 차현 사이의 지역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곳의 치소보다 1500리 가까운 곳이 되려면 동이는 영흥만 지역에 있는 것이 적당하다.
그런데 현도군의 치소 옥저성이 영흥만 지역에 있었다면, 임둔군의 치소 동이와 함께 좁은 지역에 두 군의 치소가 있게 되어 매우 어색하다.
15437#2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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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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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의 기존 위치 비판 - 蒼海郡
예는 원래 단단대령 남쪽을 돌아 대동강을 거쳐 중국과 교류한 듯하다. 그런데 위만조선에 의해 이 길이 막히자 예군 남려는 28만구를 들어 한나라에 투항하는데, 이때는 단단대령 북쪽을 돌아 압록강을 거쳐 요동으로 가는 경로였을 듯하다.
이때 창해군이 설치되었다가 폐지되는데 20여년 후 설치된 임둔군 또한 예를 다스리는 군이었다.
단단대령 북쪽을 돌아가는 길은 황초령을 넘어가므로 예가 이 길을 이용했다는 것은 황초령 아래도 예라는 정황을 말해준다.
15437#2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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