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1108 東北九城 > 公嶮鎭→吉州²

ᐥ公嶮鎭은 지금의 吉州에 있었다.ᐥ 1109년에 吉州¹가 포위당하자 오연총이 구원에 나섰는데 그 병력은 인근의 雄州에서 출발했을 듯하다. 雄州에서 吉州¹로 가려면 雄州 북쪽에 있는 夫瑞坪을 거쳐야 한다. 夫瑞坪 남쪽은 雄州보다 더 火串嶺에 가까운 곳으로, 火串嶺이 동쪽 경계였으니 이곳에 경계비를 세울 만하다. 이곳이 公嶮鎭의 조건에 가장 부합되는 곳이다. 그러나 수백년 후 吉州²가 이곳에 설치되면서 公嶮鎭의 위치는 잊혀졌다.
 
吉州
윤관은 1107년에 동쪽으로 火串嶺에 이르고 북쪽으로 弓漢伊嶺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이듬해에 火串嶺 아래에 雄州를 설치하고 弓漢伊村에 吉州¹를 설치하였다가 1109년에 모두 돌려주었다. 250여년 후 다시 이 지역을 차지하였을 때는, 吉州²를 옛 雄州 북쪽에 설치하고 옛 雄州까지 관할하였다.
21339#23364 SIBLINGS CHILDREN 23364
 
1107.12.15 高麗史(1451)
윤관이 여진을 쳐서 크게 패배시키자, 여러 장수를 보내 경계를 정하고 雄州·英州·福州·吉州의 4주에 성을 쌓았다.
21339#23186 SIBLINGS CHILDREN 23186
 
1108.02 高麗史(1451)
咸州 및 公嶮鎭에 성을 쌓았다. ▐ 雄州·英州·福州·吉州 4주에 성을 먼저 쌓고 이때 咸州·公嶮鎭에 성을 쌓아 6성이 되었다.
21339#23242 SIBLINGS CHILDREN 23242
 
1108.02.13 高麗史(1451)
상서 유택을 咸州대도독부사로 임명하고 英州·福州·雄州·吉州 4개 주와 公嶮鎭에 방어사를 설치하였다.
21339#23271 SIBLINGS CHILDREN 23271
 
1108.02.27 高麗史(1451)
윤관이 公嶮鎭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 ▐ 경계비를 세운 것으로 보아 公嶮鎭은 경계에 인접한 곳으로 보인다. 신라의 황초령비나 마운령비의 사례를 볼 때, 왕고의 경계비도 마땅히 火串嶺, 弓漢嶺 또는 蒙羅骨嶺에 세워야 할 듯한데, 이 세 고개에는 경계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21339#23272 SIBLINGS CHILDREN 23272
 
1108.02.27 高麗史(1451)
윤관이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지계를 획정하였는데, 동쪽으로는 火串嶺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弓漢伊嶺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蒙羅骨嶺에 이르렀다. 또 일관 최자호을 보내어 몽라골령 아래의 땅을 살펴 성랑 950칸을 짓고 英州라고 불렀고 火串嶺 아래에 992칸을 짓고 雄州라 불렀으며 吳林金村에 774칸을 짓고 福州라고 불렀고 弓漢伊村에 670칸을 짓고 吉州라고 불렀다.
21339#23273 SIBLINGS CHILDREN 23273
 
1108.02.27 高麗史(1451)
6성을 새로 설치하였으니, 첫 번째는 鎭東軍 咸州대도독부로, 병민이 1,948정호이다. 두 번째는 安嶺軍 英州방어사로 병민이 1,238정호이다. 세 번째는 寧海軍 雄州방어사로 병민이 1,436정호이다. 네 번째는 吉州방어사로 병민이 680정호이다. 다섯 번째로 福州방어사로 병민이 632정호이다. 여섯 번째는 公嶮鎭방어사로 병민이 532정호이다.
21339#23274 SIBLINGS CHILDREN 23274
 
1108.03.30 高麗史(1451)
윤관이 宜州·通泰·平戎에 세 성을 쌓고 남계의 백성을 이주시켜 새로 쌓은 9성을 채웠다. ▐ 咸·英·雄·福·吉·宜六州 及公嶮·通泰·平戎三鎭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의주의 6주 및 공험진·통태진·평융진의 3진이 9성이다.
21339#23241 SIBLINGS CHILDREN 23241
 
1108.04.02 高麗史(1451)
윤관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로, 오연총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로 임명하였다. 내시낭중 한교여를 보내 조서와 고신, 자주색으로 수를 놓은 안장과 구마 2필을 가지고 雄州에 이르러 그것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21339#23276 SIBLINGS CHILDREN 23276
 
1108.04.08 高麗史(1451)
여진이 목책을 설치하고 雄州城을 포위하였다.
21339#23277 SIBLINGS CHILDREN 23277
 
1108.04.23 高麗史(1451)
병마부원수 오연총을 보내 부월을 주고 가서 雄州를 구원하도록 하였다.
21339#23280 SIBLINGS CHILDREN 23280
 
1108.08.10 高麗史(1451)
오연총이 돌아왔다. 왕이 문덕전에서 불러 보고 친히 변방의 일을 물었으며 잔치를 베풀어 그를 위로하였다.
21339#23281 SIBLINGS CHILDREN 23281
 
1109.05.09 高麗史(1451)
東蕃의 적은 祖宗 이래로 우리나라의 힘에 의지하여 큰 은택을 입어 왔는데도 지금은 배은망덕하게도 멀리 있는 적까지 불러 모아 국경을 침범하였다. 1104년에는 끊임없이 군사를 내어 우리 군사와 백성을 살해하였으며 때로는 생포하여 노예로 삼은 자들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자 군사를 일으키고 고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그러나 적의 잔당은 場寨를 설치하고 吉州를 공격해 왔기에 다시 군사를 독려해 공격하고자 한다.
21339#23282 SIBLINGS CHILDREN 23282
 
1109.05.16 @공험진(公嶮鎭)
1109.05.16 @공험진(公嶮鎭)
▐ 吉州¹를 구원하려는 병력은 雄州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雄州에서 吉州¹에 가려면 雄州 북쪽에 있는 夫瑞坪을 거쳐야 한다. 夫瑞坪 남쪽은 雄州보다 더 火串嶺에 가까운 곳으로, 火串嶺이 동쪽 경계였으니 이곳에 경계비를 세울 만하다. 이곳은 수백년 후 吉州²가 설치되어 남쪽의 옛 雄州까지 관할하게 된 곳이다. 이곳이 公嶮鎭의 조건에 가장 부합한다. @길주 @吉州 @웅주 @雄州 @부서평 @夫瑞坪 @화곶령 @火串嶺
21339#23275 SIBLINGS CHILDREN 23275
 
1109.05.16 高麗史(1451)
여진이 吉州를 포위하니 오연총이 군사를 이끌고 구하려 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21339#23283 SIBLINGS CHILDREN 23283
 
1109.05.16ꜛ 高麗史(1451)
여진이 다시 여러 부족을 모아 吉州를 수개월 포위하고 성에서 10리 거리에 작은 성을 쌓아 6개의 목책을 세우고 매우 급하게 성을 공격하였다. 오연총이 그것을 듣고 분개하여 나가려고 하니 왕이 다시 부월을 주어 보냈다. 행렬이 公嶮鎭에 이르니 적이 길을 막고 갑자기 공격하여 우리 군사들이 크게 패하였으며 장졸들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여러 성으로 흩어져 들어가니 성이 함락될 때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21339#23187 SIBLINGS CHILDREN 23187
 
1109.06.12 高麗史(1451)
윤관과 오연총이 군대를 이끌고 吉州를 구원하려다가 여진이 화친을 요청한다는 소식을 듣고 定州로 되돌아왔다.
21339#23284 SIBLINGS CHILDREN 23284
 
1109.06.12 高麗史(1451)
오연총이 스스로를 탄핵하는 장계를 갖추어 올리고는 윤관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吉州로 나아가려 하였는데, 마침 적이 사신을 보내 강화를 청하여 결국 돌아왔다.
21339#23285 SIBLINGS CHILDREN 23285
 
1109.07.18 高麗史(1451)
최홍정 등은 吉州부터 차례로 9성의 전투 장비와 군량을 내지로 거두어 들였다.
21339#23206 SIBLINGS CHILDREN 23206
 
1109.07.21 高麗史(1451)
英州·福州의 2주와 眞陽鎭에 축조한 성을 철거하였다.
21339#23165 SIBLINGS CHILDREN 23165
 
1109.07.22 高麗史(1451)
咸州·雄州의 2주와 宣化鎭에 축조한 성을 철거하였다.
21339#23161 SIBLINGS CHILDREN 23161
 
1111 世宗實錄地理志(1454)
中城을 吉州에 쌓고 山城을 公險鎭에 쌓았다. ▐ 이 기록은 정황에 맞지 않기 때문에 오기로 판단한다.
21339#23177 SIBLINGS CHILDREN 23177
 
1258~1356
1258~1356
원나라 시기에는 원나라가 和州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鐵嶺 이북을 차지하였다.
21339#23228 SIBLINGS CHILDREN 23228
 
1356 高麗史(1451)
동북면병마사 유인우가 雙城을 함락시키자 총관 조소생, 천호 탁도경이 도망쳐버리니 和州·登州·定州·長州·預州·高州·文州·宜州 및 宣德鎭·元興鎭·寧仁鎭·耀德鎭·靜邊鎭 등지를 되찾게 되었다. 咸州 이북은 고종 무오년부터 원이 차지했는데 이때 와서 모두 수복하였다. ▐ 咸州 이남 지역을 열거하고 咸州 이북이라 칭하고 있다. 鐵嶺 이북이라 해야 옳다.
21339#23245 SIBLINGS CHILDREN 23245
 
1387.12 明史(1739)
命戶部咨高麗王 以鐵嶺北東西之地 舊屬開元 其土著軍民女直 韃靼 高麗人等 遼東統之 鐵嶺之南 舊屬高麗人民 悉聽本國管屬 疆境既正 各安其守 不得復有所侵越 호부로 하여금 고려왕에게 외교문서를 보내도록 하기를, “철령 북방 동서쪽의 땅은 옛날부터 개원에 속하였으니 요동에서 통치하도록 하고, 철령 남쪽은 옛날부터 고려에 속하였으니 고려에서 통치토록 하오. 서로 국경을 확정하여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21339#23181 SIBLINGS CHILDREN 23181
 
1388 王高 禑王 表
大明欲建鐵嶺衛 禑遣密直提學朴宜中 表請曰 명에서 철령위를 세우고자 하니 우왕이 밀직제학 박의중을 보내어 표문으로 청하였다. "切照鐵嶺迆北 歷文高和定咸等諸州 以至公嶮鎭 自來係是本國之地 철령 이북을 살펴보면, 문주·고주·화주·정주·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에 이르는데, 원래부터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21339#23145 SIBLINGS CHILDREN 23145
 
1392 高麗史(1451)
速頻·失的覓·蒙骨·改陽·實憐·八隣·安頓·押蘭·喜剌兀·兀里因·古里罕·魯別·兀的改 땅은 원래 우리나라의 공험진 경내여서 이미 초유를 하였으나 지금까지도 귀부하지 않고 있으니 도리에 어긋난다.
21339#23286 SIBLINGS CHILDREN 23286
 
1404.04 太宗實錄(1431)
영춘추관사 하윤·지춘추관사 권근에게 명하여 사고를 열고 전조의 예종실록에서 예종조 시중 윤관이 동여진을 치고 변경에다 비를 세운 것을 조사하게 하였다. 황제가 왕가인을 여진에 보내어 建州衛를 설치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에 의거하여 대답하려고 함이었다.
21339#23178 SIBLINGS CHILDREN 23178
 
1404.05 李朝 太宗 奏
遣計稟使藝文館提學金瞻如京師 瞻與可仁偕行 奏本云 계품사 예문관 제학 김첨을 보내어 경사에 가게 하였는데, 첨이 왕가인과 함께 갔다. 주본은 이러하였다. "照得 本國東北地方 自公嶮鎭歷孔州吉州端州英州雄州咸州等州 俱係本國之地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은 공험진으로부터 공주·길주·단주·영주·웅주·함주 등 고을을 거치는데,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 1388년의 표문에 보이지 않던 孔州가 추가되었다.
21339#23146 SIBLINGS CHILDREN 23146
 
1404.05 李朝 太宗 奏
乞將公嶮鎭迤北 還屬遼東 公嶮鎭迤南至鐵嶺 還屬本國 (1388년에) 공험진 이북은 요동에 환속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까지는 본국에 환속시켜 주기를 빌었습니다.
21339#23166 SIBLINGS CHILDREN 23166
 
1439 世宗實錄(1454)
臣父先臣恭靖王某備 洪武二十一年間 欽蒙太祖高皇帝聖旨 準請公險鎭迤北還屬遼東 公險鎭迤南至鐵嶺 仍屬本國事因 신의 아비 선신 공정왕 아무개가 1388년에 태조 고황제의 성지를 받으니, ‘公險鎭 이북은 도로 요동에 부속시키고, 공험진 이남 鐵嶺까지는 그대로 본국에 소속하라. ’는 사유를 허락하시매
21339#638 SIBLINGS CHILDREN 638
 
Pet Dictionary
What breed is this pet?
 
1451 高麗史
公嶮鎭은 孔州 혹은 匡州라고도 한다. 혹은 先春嶺 동남쪽이자 白頭山 동북쪽에 있다고도 한다. 혹은 蘇下江변에 있다고도 한다. ▐ 公嶮鎭에 관한 1404년 이후의 기술은 모두 1404년의 주문에 나오는 주장을 따른 것이다.
21339#4615 SIBLINGS CHILDREN 4615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1
慶源 古孔州 或稱匡州 경원은 옛 공주다. 광주라고도 한다. 本朝太祖戊寅 陞爲慶源都護府 修城堀地 得印一顆 匡州防禦之印 1398년에 경원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성을 수리하려 땅을 팠더니 광주방어사라 새겨진 인장이 나왔다. 北距公險鎭七百里 東北距先春峴七百餘里 북쪽으로 공험진에 이르기 7백 리고 동북쪽으로 선춘현에 이르기 7백여 리다.
21339#23182 SIBLINGS CHILDREN 23182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2
▐ 고려사(1451)에는 公嶮鎭을 一云孔州 一云匡州라고 했는데, 이는 慶源과 혼동한 듯하다. 公嶮鎭이 慶源에서 북쪽으로 7백리 되는 곳에 있고 先春峴이 慶源에서 동북쪽으로 7백리 되는 곳에 있다면 公嶮鎭은 先春峴 서편에 있게 되는데, 이는 고려사에 公嶮鎭(一云 在先春嶺東南)과 어긋난다.
21339#23214 SIBLINGS CHILDREN 23214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3
東林城 東控豆滿江 太宗元年辛巳 修其城爲慶源府山城 阿吾知古城 在東林城南 孔州城在阿吾知城南豆滿江邊 동림성은 동쪽으로 두만강을 끼고 있다. 1400년에 수축하여 경원부의 산성으로 삼았다. 아오지 고성이 동림성 남쪽에 있고 공주성이 아오지성 남쪽 두만강 가에 있다.
21339#23209 SIBLINGS CHILDREN 23209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4
東林城 → 北去五里 所多老 → 其北三十里 → 越江十里 → 其北九十里 → 其北三十里 → 其北六十里 → 其東北七十里 巨陽城 城本高麗大將尹瓘所築 → 西距六十里 先春峴 卽尹瓘立碑處 有高麗之境四字 동림성 → 북쪽으로 5리 소다로 → 북쪽으로 30리 → 강을 건너 10리 → 북쪽으로 90리 → 북쪽으로 30리 → 북쪽으로 60리 → 동북쪽으로 70리 윤관이 쌓은 거양성 → 서쪽으로 60리 윤관이 비를 세운 선춘현. 그 밑을 팠더니 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
21339#23212 SIBLINGS CHILDREN 23212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5
東林城 → 北去五里 所多老 → 北去三十里 → 其北六十里 → 其北三里 豆滿江灘 → 北去九十里 → 其北六十里 → 其北一百里 英哥沙吾里 → 其北 蘇下江邊有公險鎭卽尹瓘所置鎭┆英哥沙吾里 → 西去六十里 白頭山
21339#23211 SIBLINGS CHILDREN 23211
 
1454 世宗實錄地理志 慶源 6
동림성 → 북쪽으로 5리 소다로 → 북쪽으로 30리 → 북쪽으로 60리 → 북쪽으로 3리 두만강탄 → 북쪽으로 90리 → 북쪽으로 60리 → 북쪽으로 1백 리 영가 사오리 → 북쪽 소하강 가에 윤관이 설치한 공험진이 있다.┆영가 사오리 → 서쪽으로 60리 백두산 ▐ 고려사(1451)에 나오는 公嶮鎭(白頭山東北 一云 在蘇下江邊)과 일치한다.
21339#23210 SIBLINGS CHILDREN 23210
 
@길주(吉州)
21339#23278 SIBLINGS CHILDREN 23278
 
@웅주(雄州) @화곶령(火串嶺) @길주(吉州) @궁한령(弓漢嶺)
@웅주(雄州) @화곶령(火串嶺) @길주(吉州) @궁한령(弓漢嶺)
21339#23287 SIBLINGS CHILDREN 23287
 
高麗史(1451)
권지승선 왕자지가 公嶮城에서 병사를 거느리고 도독부로 오다가, 갑자기 오랑캐의 추장 史現의 병사를 만나 싸우다가 패하고 타고 있던 말까지 잃어버렸다. 척준경이 즉시 굳센 병졸을 이끌고 가서 구원하고 적을 물리쳤으며 갑옷 입은 말까지 잡아서 돌아왔다.
21339#23213 SIBLINGS CHILDREN 23213
 
¦曷懶
金史에 나오는 사묘아리의 무용담과 가장 비슷한 사건은 1109년에 있었던 공험진 전투다. 그렇다면 그 무용담에 나오는 曷懶水는 공험진 전투가 벌어졌던 吉州를 지나는 浮瑞川이 된다. 1108년에 윤관이 점령지에 명칭을 붙일 때 合懶를 咸州라 한 것을 보면 吉州라는 명칭도 曷懶에서 나온 듯하다.
21339#23313 SIBLINGS CHILDREN 2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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