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의 무제가 죽은 이듬해부터 왜가 삼한에 진출하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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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5 三國史記(1145)
왕이 "왜인이 자주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가 없다. 나는 백제와 꾀하여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들어가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라고 묻자 홍권이,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라고 답하였다.
32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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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6.08 三國史記(1145)
모용외가 침략해왔다. 고국원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다. 파는 사람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있고 또 무덤 안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는가 두려워하여 곧 물러갔다.
▐ 모용외는 5호16국시대 선비족 모용부의 수장으로 훗날 연(前燕)을 세운 모용황의 아버지다.
41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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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7 三國史記(1145)
(신라) 伊西國이 금성을 공격해 왔으므로 우리 편에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막았으나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왔는데,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그 사람들은 모두 귀에 대나무 잎을 달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공격하여 깨뜨린 후 어디로 간지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 청도에 伊西面이 있다.
32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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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9.04┆5주갑인상
289년에 편찬된 삼국지에는 백제가 마한 50여국의 하나로 나오고 신라가 변진 24국의 하나로 나오지만,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릉비에는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이 나오지 않고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안라 등이 나온다.
따라서 삼국지와 광개토왕릉비 사이에 한국에서 큰 재편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고, 8~9년에 망했다는 삼국사기의 마한 기록은 5주갑을 인하해야 자연스럽다.
14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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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0 三國史記(1145)
(신라) 흘해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나해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각간 우로(于老)이고 어머니는 명원부인으로 조분왕의 딸이다. 기림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군신들이 의논해 말하기를, “흘해가 어리지만 노련한 덕이 있다.”고 하며 이내 그를 받들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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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04 자치통감(1084)
遼東張統據樂浪 帶方二郡 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 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 廆爲之置樂浪郡 以統爲太守 遵參軍事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과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백성 1,000여 가를 이끌고 외(慕容廆)에게 귀부케 하였다. 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32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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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6 晉(西晉) 멸망
311년 흉노족은 진의 수도인 洛陽을 약탈하고 황제를 죽였다. 진은 고대의 수도였던 長安에 새 황제를 세우고 나라를 재건했지만 이는 이민족의 침입을 잠시 늦추는 것에 불과했다. 316년 사마염의 손자인 민제는 흉노족의 부족장에게 항복하고 퇴위했다가 후에 살해당했다.
25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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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7 연(前燕) 건국
요서 일대에 살던 모용선비는 307년 모용외(慕容廆)가 선비대선우를 자칭하며 자립하고 319년에 진(西晉)의 최비(崔毖)를 물리치며 요동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의 아들 모요황(慕容皝)은 337년에 연왕을 칭하고 단부, 조(後趙), 고려, 우문선비 등과 경쟁하며 성장하였다. 모용준(慕容儁)은 352년에 하북을 점령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41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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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8 자치통감(1084)
송황(宋晃)은 338년에 후조의 석륵이 모용황을 공격하자 전연의 성주내사 최도(崔燾), 거취령 유홍(游泓), 동이교위 봉추(封抽) 등과 함께 이에 내응하였다. 그러나 석륵이 오히려 패하고 모용황이 반했던 성들을 토멸하자, 최도는 석륵에게로, 송황은 봉추·유홍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해 왔다. 석륵이 같은 해 고구려에 양곡 30만 곡(斛)을 배 300척에 실어 보낸 것도 이러한 사정에서였다.
4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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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2 모용황의 高句麗 침공
모용외의 아들 황(晃)이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쇠(釗 고국원왕)는 더불어 싸우다 크게 패하여 단신으로 말을 타고 달아났다. 황(晃)은 승리한 기세로 계속 추격하여 환도(丸都)에 이르러 궁실을 불지르고 남자 5만여구를 노략질하여 돌아왔다.
2408#9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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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6 三國史記(1145)
(신라) 왜의 군사가 갑자기 풍도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또 진군하여 금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하였다. 왕이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니 적은 식량이 떨어져 장차 물러가려 하였다. 강세에게 명하여 날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쫓아버렸다.
3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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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5 三國史記(1145)
(고려) 겨울 12월에 왕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준이 이것을 허락하고 전중장군 조감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왕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로 삼고, 낙랑공으로 봉하고,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3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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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7 동수(佟壽)
무덤의 주인은 동수(冬壽)로 진서(晉書)와 자치통감에 나오는 동수(佟壽)로 추정된다. 명문에 있는 ‘永和十三年’는 동진의 연호로서 서기 357년에 해당된다.
使持節 都督 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相 昌黎玄菟帶方太守 都鄕侯
사지절 도독 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토대방태수 도향후
32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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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4.04 三國史記(1145)
왜의 군사가 대거 이르렀다. 왕이 듣고서 대적할 수 없을까 두려워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 아래에 나란히 세워 두었다. 그리고 용맹한 군사 1천 명을 부현의 동쪽 들판에 숨겨놓았다. 왜인이 자기 무리가 많음을 믿고 곧바로 나아가자 숨어 있던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군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
3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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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4.07 日本書紀(720)
백제왕이 久氐·彌州流·莫古 세 사람을 보내어 일본에 조공하게 했는데 이들이 卓淳國에 와 길을 물었으나, 길을 알 지 못하며 또 큰 배가 있어야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일본에서 사신이 오면 자기 나라에 알려 달라는 부탁을 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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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6.03 日本書紀(720)
斯摩宿禰를 탁순에 보냈는데, 斯摩宿禰는 탁순왕 末錦旱岐로부터 백제 이야기를 듣고 爾波移와 過古를 백제에 보냈다. 백제 肖古왕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였다. 爾波移는 돌아와 志摩宿禰에게 보고하였고 志摩宿禰는 탁순으로부터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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