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시조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신라는 혁거세를 시조로 모셨고 왕고는 추모와 기자를 시조로 모셨으며 이조는 추모와 기자에 단군을 더했다.
신라의 후속국인 왕고가 추모와 기자를 시조로 모신 건 고려계승이라는 왕조의 명분을 뒷받침하고 중원에 기대어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조가 단군을 더한 것은 새로이 생겨나 퍼져나간 단군설화를 반영한 것이다.
•
0427 맥고려와 낙랑고려의 제사
맥고려 때 宗廟, 靈星, 社稷 그리고 隧神에 대한 숭배가 나타나고 낙랑고려 때 日神, 可汗神 그리고 箕子神에 대한 숭배가 나타난다.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때는 -1046년경인데 맥고려 때는 기자 숭배가 없다가 낙랑고려에 와서야 나타난다. 이것은 고려가 평양 천도 이후에 낙랑의 기자 숭배를 계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단군 숭배는 맥고려는 물론 낙랑고려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낙랑고려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2336#14388
SIBLINGS
CHILDREN
14388
›
0509~0522 낙랑유민 묘지명
○ 樂浪名邦 王氏名宗 낙랑은 이름있는 나라이며 왕씨는 이름 있는 집안이다.
○ 其先出自有殷 周武王剋商 封箕子於朝鮮 子孫因而氏焉 그 선조는 은으로부터 나왔으니 주무왕이 상을 정복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는데, 자손이 이로 인하여 성씨를 삼았다.
○ 殷有三人 周訪九疇 只族王家 藉冑鮮侯 은나라에 세 어진 신하가 있어 주나라가 9주를 물었다. 그 집안이 성을 왕씨라 하고 자손들이 조선후가 되었다.
2336#18317
SIBLINGS
CHILDREN
OPEN
•
0933 고려사(1451)
▐ 왕씨고려는 신라와 차별되는 독자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계승을 내세웠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국조의 자리는 신라의 혁거세에서 고려의 동명으로 바뀌었다. 왕고는 더 나아가 낙랑고려의 기자 숭배까지 이어받았다. 이는 중원의 왕조에게 자신과 중원과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북방의 민족들에게는 중원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2336#2450
SIBLINGS
CHILDREN
COMMENT
2450
•
1124 高麗圖經
기자서여(箕子胥餘)가 주(周) 무왕에 의해 조선에 봉해진 후 자성(子姓)이 8백여 년을 내려오다 한(漢) 고조 12년(B.C.195)에 연(燕)나라 위만이 추결(椎結 상투)하고 와서 조선왕이 되었다. 한편 부여의 주몽이 흘승골성에 와서 그곳을 스스로 ‘고구려(高句驪)’라 부르고, 따라서 ‘고(高)’로 성씨를 삼고 나라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군에 소속시켰는데 점점 자라나 왕을 칭했다.
2336#33579
SIBLINGS
CHILDREN
COMMENT
33579
•
1124 高麗圖經
東神祠 在宣仁門內
正殿榜曰東神聖母之堂 以帟幕蔽之 不令人見神像 蓋刻木作女人狀 或云乃夫餘妻河神女也 以其生朱蒙 爲高麗始祖 故祀之
동신사는 선인문 안에 있다. 정전에는 동신성모지당이란 방이 붙어 있고 장막으로 가려 사람들이 신상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나무를 깎아 여인상을 만들었기 때문인데, 어떤 사람은 그것이 부여의 처인 하신의 딸이라고 한다. 고려의 시조가 된 주몽을 낳았기 때문에 제사를 모시게 된 것이다.
2336#29470
SIBLINGS
CHILDREN
29470
•
1145 三國史記
▐ 고려사(1452)의 1011년, 1105년 그리고 1109년의 기록에는 평양에서 추모를 제사지냈다고 되어있고 또 지리지에는 평양 동남쪽에 龍山이 있는데 그 龍山에 추모왕릉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여기에 나오는 龍山도 고려사의 그 龍山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평양에 있는 추모왕릉은 그 기원이 1145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이 기록은 추모왕릉이 졸본에 있다는 삼국사기의 168년 기록 등과 모순된다. 세간에 떠돌던 이야기를 수집한 듯하다.
2336#11865
SIBLINGS
CHILDREN
11865
•
1145 三國史記
海東에 국가가 있은 지는 오래되었다. 기자가 周 왕실로부터 책봉을 받으면서부터 漢 초에 위만이 스스로 왕을 칭할 때까지 세월의 흐름이 매우 오래되었지만, 문자기록이 소략하여 상세하게 고찰할 수 없다. ▐ 삼국지에는 위만 이전에 기자의 후손이 준왕에 이르기까지 왕조를 이어왔다는 위략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지만 김부식의 말처럼 소략하다.
2336#33592
SIBLINGS
CHILDREN
COMMENT
33592
•
1178 고려사(1451)
서경의 공해전을 차등을 두어 다음과 같이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유수관은 공해전 50결과 지위전 270결 37부 7속, 육조는 공해전 20결과 지위전 15결, 법조사는 공해전 15결, 각 학원은 공해전 15결과 서적위전 50결, 문선왕(공자)은 유향전 15결, 선성(先聖)은 유향전 50결【선성은 바로 기자(箕子)다】, 약점은 공해전 7결, 승록사는 공해전과 지위전 각 15결.
2336#41575
SIBLINGS
CHILDREN
COMMENT
41575
•
1281 삼국유사
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檀君王儉이 있어 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였다. 나라를 개창하여 朝鮮이라 했으니 高와 같은 시대이다.”
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桓因의 庶子인 桓雄이 天下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三危太白을 내려다보니 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만한지라, 이에 天符印 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2336#17124
SIBLINGS
CHILDREN
17124
•
1325 조연수(趙延壽) 묘지명
平壤之先 仙人王儉 至今遺民 堂堂司空 平壤君子 在三韓前 壽過一千 胡考且仙 拜之▨宣 其系蟬聮 衰盾之日 公悉兩全
평양의 선조는 선인 왕검으로 지금까지도 백성이 남아 있으니 당당한 사공이시다. 평양의 군자는 삼한의 전부터 있었으니 수명이 1천 년을 넘어 오래 살아 신선이 되셨다. 나라를 지키는 중신이 되어 그 가계가 계속 이어졌고 쇠락하고 기피하는 시대에 공은 실로 두 가지를 온전히 갖추셨다.
2336#17134
SIBLINGS
CHILDREN
17134
•
1372 고려사(1451)
지밀직사사 홍사범을 명나라 조정으로 보내 촉(蜀)지역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게 했는데 그 표문은 다음과 같다.
... 儻容互鄕之童, 得齒虞庠之胄, 臣謹當奉揚聲敎, 永綏 箕子 之封, 罄竭忠誠, 益貢華人之祝. 우리 젊은이들을 받아들여 상국의 학생들과 나란히 학교에서 공부하게 해 주신다면 저는 마땅히 폐후의 덕화를 높이 받들어 옛날 기자의 봉토였던 이 땅을 길이 잘 다스리고 상국에 충성을 다할 것이며 폐하의 복록과 만수무강을 빌 것입니다. ...
2336#41569
SIBLINGS
CHILDREN
COMMENT
41569
•
1393 조선왕조실록
(이성계는 조선과 화령이라는 두 가지 명칭을 명나라에 보내어 조선을 국호로 쓰라는 허락을 받았는데, 아래는 이에 대해 이성계가 올린 표문의 일부다.)
竊惟昔在箕子之世 已有朝鮮之稱 玆用奏陳 敢干聰聽 兪音卽降 異渥尤偏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옛날 기자의 시대에 있어서도 이미 조선이란 칭호가 있었으므로, 이에 아뢰어 진술하여 감히 천자께서 들어주시기를 청했는데, 천자의 대답이 곧 내리시니 특별한 은혜가 더욱 치우쳤습니다.”
2336#33564
SIBLINGS
CHILDREN
COMMENT
33564
•
1412 조선왕조실록
하윤이 또한 일찍이 건의하여 조선의 단군(檀君)을 제사하도록 청하였다. 예조에서 참상하기를,
“기자의 제사는 마땅히 사전(祀典)에 싣고, 춘추(春秋)에 제사를 드리어 숭덕(崇德)의 의를 밝혀야 합니다. 또 단군(檀君)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이니, 마땅히 기자와 더불어 함께 한 사당에 제사지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2336#2449
SIBLINGS
CHILDREN
COMMENT
2449
•
1429 단군사당
▐ 단군 이야기는 왕씨고려 때부터 기록에 등장하지만 왕조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은 이씨왕조부터다. 1392년부터 기자와 함께 단군을 국조로 모셔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1412년부터 평양성 안에 있는 기자 사당에 단군 신위를 함께 모시고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425년에는 단군 사당을 따로 건립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1429년에 기자 사당 남쪽에 따로 사당을 만들어 동쪽에는 동명을 모시고 서쪽에는 단군을 모셨다.
2336#1141
SIBLINGS
CHILDREN
COMMENT
1141
•
1451 고려사
동명왕묘가 있다. 부의 동남쪽 중화현 경계의 용산(龍山)에 있으며, 민간에서는 진주묘라고 부른다. 또 인리방에 사우가 있는데, 고려 때에 어압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초하루와 보름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지금까지 일이 있으면 자주 소원을 빈다. 세상에 전하기를 동명성제의 사당이라 한다. 을밀대가 있다. 대는 금수산 정상에 있으며, 대의 아래층의 절벽 가까이에 영명사가 있는데, 곧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이다.
2336#11866
SIBLINGS
CHILDREN
11866
•
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기자묘가 부성 북쪽 토산 위에 있는데, 정자각·석인·석양이 모두 남쪽을 향하였으며, 사당은 성안 의리방에 있다.【봄·가을에 향축을 전하여 제사를 지낸다. 금상(세종) 12년 경술에 유사에 전지하기를, “예전에 무왕이 은(殷)나라를 이기고, 은나라 태사를 우리 나라에 봉한 것과 그가 신하노릇하지 아니할 뜻을 이루게 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문물 예악이 중국과 같은 것은 오직 기자의 가르침에 힘입은 까닭이니, 비석을 사당에 세우라.” 하였다. 】
2336#41572
SIBLINGS
CHILDREN
COMMENT
41572
•
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동명왕묘가 부(府) 동남쪽 30리 되는 중화 용산에 있다.【화반석으로 광(壙)을 영조하였다. 진주묘라 한다. 이승휴가 기록하기를, “하늘에 올라서 다시 운병에 돌아오지 않고 장사지내는 데 옥편을 더하여 무덤을 이루었다.” 한 것은 곧 이것이다. 인리방에 사당이 있는데 고려에서 때로 어압을 내려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보름에도 또한 소재관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였다. 읍인들이 지금도 일이 있으면 문득 비는데 고로들이 전하기를 동명성제의 사당이라 한다. 】
2336#41571
SIBLINGS
CHILDREN
COMMENT
41571
•
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옆에 영명사가 있으니, 곧 동명왕의 구제궁이다. 안에 기린을 기르던 굴이 있는데, 후인이 비석을 세워서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굴 남쪽 백은탄에 바위가 있는데, 밀물에는 묻히고 썰물에는 드러난다. 이름을 조천석이라 한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동명왕이 기린을 타고 굴 속에서 나와 조천석에 올라서 천상에 주사하였다.” 한다. 이승휴가 이르기를, “천상을 오가며 천정에 나아가니, 조천석 위에 기린이 날쌔도다.”한 것은 곧 이를 말한 것이다.
2336#41573
SIBLINGS
CHILDREN
COMMENT
41573
•
1778 안정복
고기에 나오는 ‘환인제석(桓因帝釋)’이라는 칭호는 법화경(法華經)에서 나왔고, 그 밖의 칭호도 다 중들 사이의 말이니, 신라ㆍ고려 때에 불교를 숭상하였으므로, 그 폐해가 이렇게까지 된 것이다. 동방이 병화를 여러 번 겪어서 비장된 국사가 죄다 없어져 남은 것이 없었으나, 승려가 적어 둔 것은 암혈 가운데에서 보존되어 후세에 전할 수 있었으므로, 역사를 짓는 이들이 적을 만한 것이 없어서 답답한 끝에 이를 정사에 엮어 넣는 수도 있었다.
2336#40469
SIBLINGS
CHILDREN
COMMENT
40469
•
1986 이병도
檀君은 神話아닌 우리 國祖
- 원로 문헌 사학자 李丙燾씨 조선일보 특별기고 -
1-1.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 때 끊겼다"
대체 天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天을 君長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開天節은 즉 「君長을 開設한다」는 것이 되므로 開國, 建國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開天은 즉 最古 시조인 檀君의 즉위와 開國을 의미하는 開天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三國遺事 紀異 제1권의 「古朝鮮(王儉朝鮮)」條에 의하면 ...
2336#7596
SIBLINGS
CHILDREN
COMMENT
7596
•
1987 조선통사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통치계급들이 건국시조를 신성화함으로써 자기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꾸며낸 건국신화이다. 이 신화에서는 왕을 하늘의 보호를 받고 있는 절대적인 신적인 존재로 떠받드는 것과 같은 계급사회 특히 노예제도 사회에서의 사회적 관계, 통치계급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 신화는 환상적이며 비과학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으나 우리 민족의 원시공동체사회 말기, 노예사회 초기의 역사와 함께 당시 사회경제형편과 생활, 사람들의 소박한 의식과 관념
2336#1315
SIBLINGS
CHILDREN
COMMENT
1315
•
1993 단군의 무덤인가, 공산주의의 무덤인가?
김조는 처음에 단군 설화를 '고조선의 통치계급들이 건국시조를 신성화함으로써 자기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꾸며낸 건국신화'라 하더니, 1993년에 단군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을 발굴하고나서는 거기서 나온 인골의 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서기전 3100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며 단군의 유골이라 주장하고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벌여 거대한 사각뿔 돌무덤을 만들었다. 이는 1991년에 있었던 공산주의의 붕괴로 인해 통치 명분이 흔들리자 민족주의로 보완하려 한 것이다.
2336#27663
SIBLINGS
CHILDREN
27663
•
1997 국사교과서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모든 신화에 공통되는 속성이기도 하다. 단군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 때, 환웅 부족은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이들은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또,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계되는 것을 주관하게 하였다.
2336#30989
SIBLINGS
CHILDREN
COMMENT
30989
•
1999 고조선역사 개관
신화적 인물에서 실제 역사적 인물로 전환된 단군의 출생에 대해 환웅은 하늘신을 믿던 종족의 공동체 추장을, 웅녀는 곰씨족의 추장 여인을 형상화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환웅과 웅녀의 결혼에 대해 곰씨족 추장이 하늘신을 숭배한 종족의 추장과 혼인한 사실을 그린 것인 동시에 이 두 종족
들이 종족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형상화한 것이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2336#1188
SIBLINGS
CHILDREN
COMMENT
11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