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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la > 0918 ❽ 王氏高麗의 역사왜곡 |
왕씨고려는 영토와 백성은 신라 그대로고 왕조만 바뀐 것이다. 왕씨왕조가 고려계승을 내세운 것은 신라왕조에 한참 뒤지는 정통성을 만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왕고는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고려를 한국사에 끼워넣었다. 그런데 왕고가 내세운 고려계승은 봉건적 지배권을 말하는 것이었지 종족적 동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옛 고려 지역의 주민들은 내쫓기도 하고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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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① 고려와 한국은 서로를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② 고려의 대부분을 구성했던 맥, 예, 옥저 그리고 부여는 발해의 압록부, 남해부, 책성부 그리고 부여부가 되었다. 왕씨고려가 고려계승을 내세울 때 이미 고려계승을 내세운 그 발해가 수백년째 건재하고 있었다.
③ 고려의 일부였던 대방만 신라의 땅이 되었고 삼국사기가 고려의 땅으로 분류한 한강 하류는 원래 백제가 있던 곳이다.
왕씨고려는 그런 신라의 후속국에 불과하다.
1719#2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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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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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 ⏍ 箕子
기자동래설에 의하면 위만 왕조를 정벌하는 것은 기자의 후손으로부터 왕위를 탈취한 것을 응징하는 일이고 한사군을 설치하는 것은 옛 주나라의 봉지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隋의 고려 침공 시기에 秦장성이 낙랑 수성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퍼지거나 일본의 한국 병합 시기에 倭의 임나경영설이 퍼진 것과 비교될 수 있다.
1719#1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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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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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史記(1145)
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是爲辰韓六部
조선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육촌을 이루었다. 이것이 진한 육부가 되었다.
▐ 삼국사기가 참고한 역사 기록에는 海東의 역사가 箕子·衛滿朝鮮, 玄莬·樂浪郡 그리고 高麗로 이어지는 계통과 秦難民, 辰韓 그리고 新羅로 이어지는 계통으로 나뉘어 있었다. 따라서 新羅에서 나와서 高麗계승을 내세운 王氏高麗에게는 新羅와 高麗를 연결시켜주는 이야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秦遺民을 朝鮮遺民으로 바꾼 것이 아닐까?
1719#3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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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부여·고려·百濟 건국설화
부여 동명설화는 부여 북쪽에서 왕을 모시는 시녀가 하늘의 정기를 받아 임신을 하고 동명을 낳았는데, 그가 활을 잘 쏘자 시기를 받아 쫓기게 되었고 하늘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부여를 세웠다는 이야기다.
고려 주몽설화는 부여에서 도망나온 주몽이 강을 건너 고구려를 세운다는 것으로 이야기 구조는 부여 동명설화와 같다.
백제 비류온조설화는 주몽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갈라져 나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에 정착했다가 위례성으로 합쳐 백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1719#3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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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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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0668 맥고려와 낙랑고려의 제사
맥고려 때 宗廟, 靈星, 社稷 그리고 隧神에 대한 숭배가 나타나고 낙랑고려 때 日神, 可汗神 그리고 箕子神에 대한 숭배가 나타난다.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때는 -1046년경인데 맥고려 때는 기자 숭배가 없다가 낙랑고려에 와서야 나타난다. 이것은 고려가 평양 천도 이후에 낙랑의 기자 숭배를 계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단군 숭배는 맥고려는 물론 낙랑고려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낙랑고려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1719#14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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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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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0522 樂浪 遂城人 王氏 墓誌銘
○ 樂浪名邦 王氏名宗 낙랑은 이름있는 나라이며 왕씨는 이름 있는 집안이다.
○ 其先出自有殷 周武王剋商 封箕子於朝鮮 子孫因而氏焉 그 선조는 은으로부터 나왔으니 주무왕이 상을 정복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는데, 자손이 이로 인하여 성씨를 삼았다.
○ 殷有三人 周訪九疇 只族王家 藉冑鮮侯 은나라에 세 어진 신하가 있어 주나라가 9주를 물었다. 그 집안이 성을 왕씨라 하고 자손들이 조선후가 되었다.
1719#18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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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6~0905 髙麗계승론의 모순
당나라가 668년에 고려를 멸망시키고 평양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를 676년에 요동으로 옮겼다는 구당서(945)의 기록을 끝으로 평양은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移安東府於遼東郡故城置┆901년에 궁예가 무성한 잡초로 꽉 차 있다(故平壌舊都 鞠爲茂草)고 한 평양이 역사 무대에 다시 등장한 것은 905년에 평양 성주 검용이 궁예고려에 복속해 왔다는 삼국사기(1145)의 기록부터다. 平壌城主将軍黔用降
「죽은 사람의 이름을 갖다 쓴다고 다시 살아나지는 않는다.」
1719#13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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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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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8~0926 髙麗계승론의 모순
高麗의 구성은 東夷 중에서 貊, 濊, 沃沮 그리고 夫餘, 漢郡 중에서 樂浪, 帶方 그리고 遼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高麗가 망하고 貊, 濊, 沃沮 그리고 夫餘는 각각 渤海의 鴨淥府, 南海府, 柵城府 그리고 扶餘府가 되었고 帶方과 遼東은 각각 신라와 당나라로 흡수되었다.
상황이 이러한데 신라의 후속국가인 왕씨고려가 어떻게 高麗를 계승할 수 있나?
1719#3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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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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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0 견훤百濟
상주 출신의 견훤은 서남해안을 지키는 新羅 장수였는데 新羅의 중앙이 혼란한 틈을 타 892년에 무진주를 차지하고 독립하였다. 900년에는 완산주를 순행했다가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받자 “新羅의 김유신이 흙먼지를 날리며 황산을 거쳐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百濟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며 百濟를 세웠다.
옛 백제 지역에서 왕조를 세우는 데에 백제 계승만큼 좋은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1719#4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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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1 궁예高麗
新羅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후손으로 알려진 궁예는 북원에서 독립한 양길의 부하로 있다가 901년에 송악에서 高麗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지난날 新羅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高麗를 깨뜨렸다. 그런 까닭에 평양 옛 도읍은 무성한 잡초로 꽉 차 있다. 내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고 하였다. 新羅 및 견훤百濟와 경쟁해야 하는 궁예의 입장에서는 髙麗계승만큼 좋은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1719#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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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 髙麗계승론의 모순
평양은 위만조선으로 87년, 낙랑군으로 420년 그리고 고려로 355년을 지냈다. 그 이후 229년 동안은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905년에 평양이 다시 역사 무대에 올라왔을 때, 기록은 남아 있었으나 그 기록과 공간의 연결은 끊어져 있었다.
이를 다시 연결하는 과정에서 많은 착오가 발생했다.
추모왕의 활동이 평양 을밀대 아래에서 이루어졌다거나, 추모왕의 무덤이 평양 용산에 있다거나, 고국원왕의 황성이 평양 목멱산에 있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다.
1719#1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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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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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東女眞
黑水는 장백산 동북쪽에 있었다. 이곳에는 靺鞨 이외의 종족은 없었던 듯하며 따라서 黑水人은 黑水靺鞨과 같은 뜻이다. 靺鞨은 女眞이라고도 했는데 장백산 일대의 산악 지형에 의해 동과 서로 갈려 있었다. 따라서 黑水靺鞨은 곧 東女眞이다. 왕고는 이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고 東蕃이라고도 불렀다.
東女眞이 왕고와 접촉하는 창구는 和州館이었다.
1719#5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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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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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3 高麗史(1451)
唐에서 왕경과 양소업을 보내 왕을 책봉하고 조서를 내렸다.
"踵朱蒙啓土之禎 爲彼君長 履箕子作蕃之跡 宣乃惠和 (왕건은) 주몽의 상서로운 개국을 뒤쫓아 나라의 군주가 되고 기자가 번국을 이룩한 자취를 밟아서 자애와 상서를 펼치고 있다."
▐ 후당의 조서는 고려계승을 내세운 왕씨왕조가 듣고 싶어하는 말로 채워져 있다. 주몽은 맥고려의 시조다. 기자는 낙랑이 숭배하던 조선의 시조인데, 낙랑고려가 이었던 것을 왕씨고려가 또 이은 것이다.
1719#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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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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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3 고려사(1451)
▐ 왕씨고려는 신라와 차별되는 독자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계승을 내세웠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국조의 자리는 신라의 혁거세에서 고려의 동명으로 바뀌었다. 왕고는 더 나아가 낙랑고려의 기자 숭배까지 이어받았다. 이는 중원의 왕조에게 자신과 중원과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북방의 민족들에게는 중원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1719#2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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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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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2.10 三國誤記 高麗史
거란이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선사했다. 왕은 거란이 과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켜 버린 것을 볼 때, 이는 매우 무도한 나라로서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을 만한 나라가 못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그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매어두어 다 굶어죽게 했다.✘)
▐ 발해에 대해 고려계승국이라는 인식이 나타나지 않는다.
1719#3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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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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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0 定安國
契丹의 침공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정안국왕 오현명의 조부가 백성들을 이끌로 이주하여 세웠다. '고려의 옛 땅에 사는 발해의 유민(臣本以高麗舊壤渤海遺黎)'을 자처하였다. 정안국에 대한 왕씨고려의 지원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왕고에 의해 장백산 너머로 쫓겨난 듯하다. 정안국은 맥고려의 발상지에 고려계승국인 발해의 유민이 세웠기 때문에, 역시 고려계승을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 계승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왕고의 건국 명분을 무력화시킬 우려가 있었을 듯하다.
1719#5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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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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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3.10 髙麗계승론의 모순
왕씨髙麗는 신라에서 나왔으니 髙麗의 옛 땅을 손대지 말라는 거란의 주장에 대해 반박이 궁색했다.
왕씨髙麗가 신라에서 나온 건 부정할 수 없기에 신라에 髙麗를 포함시키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왕씨髙麗가 편찬한 삼국사기(1145)에는 백제와 예의 땅이었던 차현과 죽령 이북의 한주, 삭주 그리고 명주를 옛 髙麗 지역이라 기술해 놓았다.
1719#3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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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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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1030 興遼國
契丹 東京의 장군 大延琳은 渤海 大祚榮의 7대손인데 반란을 일으켜 興遼國을 세웠다.
王高는 그 틈을 타 압록강 동쪽 기슭을 차지하려 공격하였다가 실패하였다.
興遼國의 大延定이 東北女眞을 이끌고 契丹과 서로 공격하다 사신을 보내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王高는 응하지 않고 유소를 鎭으로 보내 興遼國에 대비하였다.
興遼國은 大慶翰, 高吉德 그리고 이광록을 차례로 보내어 원조를 간청하였으나 王高는 응하지 않았고 興遼國이 망하는 바람에 이광록은 돌아가지 못했다.
1719#3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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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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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高麗史(1451)
▐ 기자는 낙랑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소재였다. 따라서 낙랑에서 그를 숭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낙랑을 병합한 고려도 기자를 숭배했다고 기록에 나온다.
왕씨고려에 이르러 기자의 무덤은 물론 사당도 없었다는 것은 고려의 문화가 신라와 그 뒤를 이은 왕씨고려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719#30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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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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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3 金史(1344)
고려에서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해서 갈라전의 관속인 사륵상은, 야랄보상은 등이 가고 석적환도 배노를 보냈다. 고려는 야랄보 등은 잡아두고 배노는 돌려보냈다. 이때 5水의 백성들이 모두 왕고에 귀부하고 붙잡힌 단련사가 14명이었다.
▐ 갈라전은 옛 옥저 지역이다. 석적환은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형이 추장을 할 때 이곳을 장악하기 위해 파견한 인물이다.
1719#3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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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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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高麗史(1451) ❷ 옛 옥저 학살
윤관과 오연총이 동계에 이르러 장춘역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병마판관 최홍정·황군상을 정주와 장주 2주에 나누어 보내고 여진 추장에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허정과 나불 등을 돌려보내고자 하니 와서 명령을 들으라.”고 한 뒤 매복하여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것을 믿어 고라 등 400여 인이 이르니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하고 매복해 있는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1719#3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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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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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 金史(1344)
고려가 허락하면서 “사신을 파견하여 국경에 이르러 인수하여 가라.”고 하니 강종은 이를 믿고 완안부 아괄·오림답부 승곤 등으로 하여금 국경으로 가 인수하도록 하고 마기령 을집촌에서 사냥하면서 기다렸다.
아괄·승곤 등이 국경에 도착하자 고려는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살해하고 갈라전으로 출병시켜 9성을 쌓았다.
▐ 강종은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형이다.
1719#23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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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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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109 曷懶甸
일찌기 高麗는 蓋馬大山 동쪽의 沃沮에 대인을 두고 산물을 수탈하고 미인은 데려가 종이나 첩으로 삼았다.
王氏高麗는 蓋馬大山 동쪽이 본래 高麗의 소유였다며 대군을 보내 늙은이와 어린아이들을 죽이고 9성을 쌓은 뒤 王高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王高가 주장했던 高麗계승은 高麗 백성들에 대한 동족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高麗왕조가 가졌던 지배권을 차지하려는 데 이용된 측면이 있다.
1719#3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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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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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 高麗史(1451) 옛 옥저를 정벌했던 尹瓘의 인식
女眞 本勾高麗之部落 聚居于盖馬山東 여진은 본디 구고려의 부락으로서 개마산 동쪽에 모여 살았다. 其地方三百里 東至于大海 西北介于盖馬山 南接于長·定二州 山川之秀麗 土地之膏腴 可以居吾民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그 땅은 사방 300리로 동쪽은 대해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개마산이며 남쪽으로는 장주·정주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구고려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1719#3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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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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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高麗圖經
箕子胥餘가 周 무왕에 의해 조선에 봉해진 후 子姓이 8백여 년을 내려오다 漢 고조 12년(-195)에 燕나라 위만이 椎結하고 와서 조선왕이 되었다. 한편 부여의 주몽이 흘승골성에 와서 그곳을 스스로 高句驪라 부르고, 따라서 高로 성씨를 삼고 나라를 高麗라 하였다.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군에 소속시켰는데 점점 자라나 왕을 칭했다.
1719#33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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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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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高麗圖經
東神祠 在宣仁門內
正殿榜曰東神聖母之堂 以帟幕蔽之 不令人見神像 蓋刻木作女人狀 或云乃夫餘妻河神女也 以其生朱蒙 爲高麗始祖 故祀之
동신사는 선인문 안에 있다. 정전에는 동신성모지당이란 방이 붙어 있고 장막으로 가려 사람들이 신상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나무를 깎아 여인상을 만들었기 때문인데, 어떤 사람은 그것이 부여의 처인 하신의 딸이라고 한다. 고려의 시조가 된 주몽을 낳았기 때문에 제사를 모시게 된 것이다.
1719#29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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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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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平壤東黃城의 위치와 移居 기록의 성격 - 기경량
黃城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는 평양 목멱산 일대는 왕성이 있을 만한 곳이 못되고 왕성의 흔적도 없으므로, 黃城으로 천도했다는 삼국사기(1145)의 기록은 당시 세간에 떠도는 잘못된 속설을 채집한 것으로 판단하고 고국원왕이 平壤으로 천도한 사실도 부정하였다.
그러나 黃城으로 천도했다는 부분만 부정하면 되지 平壤으로 천도한 정황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黃城을 부정한 논리라면 龍山도 부정해야 마땅하나 거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1719#3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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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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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東明
▐ 삼국사기 이전에 주몽을 동명이라 칭한 사례는 없다. 삼국사기가 인용한 사서에도 부여 동명설화와 고려 주몽설화가 별개로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삼국사기는 주몽을 동명이라 칭했다. 그렇게 하면 주몽설화가 동명설화를 베낀 사실이 가려지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이전부터 왕고에서는 주몽을 동명으로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또한 왕고가 고려를 실질적으로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1719#30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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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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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8 高麗史(1451)
서경의 공해전을 차등을 두어 다음과 같이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유수관은 공해전 50결과 지위전 270결 37부 7속, 육조는 공해전 20결과 지위전 15결, 법조사는 공해전 15결, 각 학원은 공해전 15결과 서적위전 50결, 문선왕(공자)은 유향전 15결, 先聖은 유향전 50결(선성은 바로 箕子다), 약점은 공해전 7결, 승록사는 공해전과 지위전 각 15결.
1719#41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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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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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 壇君
燕나라의 衛滿은 -195+년에 조선으로 건너와 평양에서 왕조를 세웠다. 다른 고대 왕조처럼 衛滿 왕조 또한 건국설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08년에 한나라가 衛滿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하면서 통치에 권위를 부여하는 설화는 箕子 설화로 대체되었다.
이후 衛滿 설화는 지하로 들어가 무속신앙, 도교, 불교, 箕子 설화, 퉁구스 설화, 일본 설화 등과 결합하여 풍부한 이야기로 발전하였고 천여년이 지난 후에는 壇君 설화가 되어 있었다.
1719#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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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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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삼국유사
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檀君王儉이 있어 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였다. 나라를 개창하여 朝鮮이라 했으니 高와 같은 시대이다.”
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桓因의 庶子인 桓雄이 天下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三危太白을 내려다보니 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만한지라, 이에 天符印 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1719#17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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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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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7 帝王韻紀
本紀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에게 서자가 있었으니 이름이 웅이었다. 환인이 환웅에게 말하기를 '지상의 삼위태백에 내려가 인간을 크게 이롭게 하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환웅이 천부인 3개를 받고 귀신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에 있는 신단수 아래로 내려 왔으니 이 분을 단웅천왕이라 한다."
1719#17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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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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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7 帝王韻紀 東明
往來天上詣天政 朝天石上驎蹄輕 在位十九年九月 升天不復迴雲輧 聖子類利(在扶餘時 婦所孕者) 來嗣位 葬遺玉鞭成墳塋(今龍山墓也)
천상에 왕래하면서 천정에 참예하였으니 조천석 위에 말발굽 자국이 남아 있네.
재위한지 19년 9개월 만에, 승천하여 구름수레를 타고 돌아오지 않으셨네. 성자 유리(부여에 있을 때 부인이 임신한 사람)가 와서 왕위를 이으니, 남기신 옥채찍을 묻어 무덤을 만들었네. (지금의 용산묘다.)
1719#30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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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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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5 趙延壽 묘지명
平壤之先 仙人王儉 至今遺民 堂堂司空 平壤君子 在三韓前 壽過一千 胡考且仙 拜之▨宣 其系蟬聮 衰盾之日 公悉兩全
평양의 선조는 선인 왕검으로 지금까지도 백성이 남아 있으니 당당한 사공이시다. 평양의 군자는 삼한의 전부터 있었으니 수명이 1천 년을 넘어 오래 살아 신선이 되셨다. 나라를 지키는 중신이 되어 그 가계가 계속 이어졌고 쇠락하고 기피하는 시대에 공은 실로 두 가지를 온전히 갖추셨다.
1719#17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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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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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2 高麗史(1451)
지밀직사사 홍사범을 명나라 조정으로 보내 蜀지역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게 했는데 그 표문은 다음과 같다.
儻容互鄕之童 得齒虞庠之胄 臣謹當奉揚聲敎 永綏 箕子 之封 罄竭忠誠 益貢華人之祝 우리 젊은이들을 받아들여 상국의 학생들과 나란히 학교에서 공부하게 해 주신다면 저는 마땅히 폐후의 덕화를 높이 받들어 옛날 기자의 봉토였던 이 땅을 길이 잘 다스리고 상국에 충성을 다할 것이며 폐하의 복록과 만수무강을 빌 것입니다. ...
1719#41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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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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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 太祖實錄(1413)
(이성계는 조선과 화령이라는 두 가지 명칭을 명나라에 보내어 조선을 국호로 쓰라는 허락을 받았는데, 아래는 이에 대해 이성계가 올린 표문의 일부다.)
竊惟昔在箕子之世 已有朝鮮之稱 玆用奏陳 敢干聰聽 兪音卽降 異渥尤偏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옛날 기자의 시대에 있어서도 이미 조선이란 칭호가 있었으므로, 이에 아뢰어 진술하여 감히 천자께서 들어주시기를 청했는데, 천자의 대답이 곧 내리시니 특별한 은혜가 더욱 치우쳤습니다.”
1719#33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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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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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9 단군사당
▐ 단군 이야기는 왕씨고려 때부터 기록에 등장하지만 왕조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은 이씨왕조부터다. 1392년부터 기자와 함께 단군을 국조로 모셔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1412년부터 평양성 안에 있는 기자 사당에 단군 신위를 함께 모시고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425년에는 단군 사당을 따로 건립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1429년에 기자 사당 남쪽에 따로 사당을 만들어 동쪽에는 동명을 모시고 서쪽에는 단군을 모셨다.
1719#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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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7 龍飛御天歌
平安道 江界府 西越江古百四十里 有大野 中有古城 諺稱大金皇帝城 城北七里有碑 又其北有石陵二
평안도 강계부 서쪽으로 강을 건너 140리 쯤에 큰 벌판이 있다. 그 가운데 옛 성이 있는데 세상에서는 대금 황제성이라고 일컫는다. 성 북쪽으로 7리 쯤에는 비석이 있다. 또 그 북쪽에는 돌무덤 2기가 있다.
1719#30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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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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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1454 東明 고려사
乙密臺(臺在錦繡山頂 臺下層崖之旁 有永明寺 卽東明王九梯宮 內有麒麟窟 窟南白銀灘 有巖出沒潮水 名曰朝天石)
을밀대가 있다. (대는 금수산 정상에 있으며 대의 아래층의 절벽 가까이에 영명사가 있는데 곧 동명왕의 구제궁이다. 안에 기린굴이 있고 굴의 남쪽이 백은탄이다. 조수에 따라 출몰하는 바위가 있는데 조천석이라 부른다.)
▐ 제왕운기(1287)에 나오는 설화다.
1719#4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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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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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1454 東明 고려사
東明王墓(在府東南 中和境龍山 俗號珍珠墓 又仁里坊有祠宇 高麗以時降御押 行祭 朔望亦令其官 行祭 邑人至今有事輒禱 世傳東明聖帝祠)
동명왕묘가 있다. (부의 동남쪽 중화현 경계의 용산에 있으며 민간에서는 진주묘라고 부른다. 또 인리방에 사우가 있는데 고려 때에 어압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초하루와 보름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지금까지 일이 있으면 자주 소원을 빈다. 세상에 전하기를 동명성제의 사당이라 한다.)
1719#3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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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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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1454 東明 세종실록지리지
옆에 永明寺가 있으니 곧 동명왕의 九梯宮이다. 안에 麒麟을 기르던 굴이 있는데 후인이 비석을 세워서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굴 남쪽 白銀灘에 바위가 있는데 밀물에는 묻히고 썰물에는 드러난다. 이름을 朝天石이라 한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동명왕이 기린을 타고 굴 속에서 나와 조천석에 올라서 천상에 주사하였다." 한다. 이승휴가 이르기를, "천상을 오가며 천정에 나아가니, 조천석 위에 기린이 날쌔도다."한 것은 곧 이를 말한 것이다.
1719#30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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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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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1454 東明 세종실록지리지
東明王墓가 부 동남쪽 30리쯤 中和 지경 龍山에 있다. (모두 畫班石으로 壙을 營造하였다. 세상에서 眞珠墓라 한다. 이승휴가 동명왕의 사적을 기록하기를 "하늘에 올라서 다시 雲輧에 돌아오지 아니하고 장사지내는 데 玉鞭을 더하여 무덤을 이루었다." 한 것은 곧 이것이다. 또 仁理坊에 사당이 있는데 고려에서 御押을 내려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보름에도 그 所在官에게 제사지내게 하였다. 邑人들이 지금도 일이 있으면 비는데 古老들이 東明聖帝의 사당이라 한다.)
1719#30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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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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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1454 東明 세종실록지리지
▐ 삼국사기(1145)에서 東明聖王을 묻었다는 龍山과 우연히 지명이 같을 수도 있겠으나,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추모왕의 무덤을 평양으로 이전하면서 그곳의 지명을 龍山으로 바꾸었을 수도 있고,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 龍山에 東明王墓로 알려진 무덤이 있어 삼국사기 편찬자가 東明聖王이 龍山에 묻힌 것으로 기록했을 수도 있다.
永明寺에 東明王 이야기가 덧붙여진 것과 함께 龍山에 있는 고총을 東明王墓로 인식하게 된 것도 905년 이후에 생겨났을 듯하다.
1719#30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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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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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1454 箕子 세종실록지리지
기자묘가 부성 북쪽 토산 위에 있는데, 정자각·석인·석양이 모두 남쪽을 향하였으며, 사당은 성안 의리방에 있다. (봄·가을에 향축을 전하여 제사를 지낸다. 금상(세종) 12년 경술에 유사에 전지하기를, “예전에 무왕이 殷나라를 이기고, 은나라 태사를 우리 나라에 봉한 것과 그가 신하노릇하지 아니할 뜻을 이루게 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문물 예악이 중국과 같은 것은 오직 기자의 가르침에 힘입은 까닭이니, 비석을 사당에 세우라.” 하였다.)
1719#30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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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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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 世宗實錄地理志 平壤府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
이것이 위만 조선(衛滿朝鮮)이었다.
1719#3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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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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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1861 東輿圖 @大塚
▐ 이 대총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江東縣의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刀亇山에 있는데 속담에 옛 황제의 무덤(古皇帝墓)이라 전한다'고 되어 있다.
용비어천가(1447)에서 국내성을 大金皇帝城으로 인식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고려가 망하면서 발해와 요나라를 거쳐 금나라에 점유되었던 지역의 고려 유적을 왕고인들은 금나라의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1719#30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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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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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이병도
檀君은 神話아닌 우리 國祖
- 원로 문헌 사학자 李丙燾씨 조선일보 특별기고 -
1-1.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 때 끊겼다"
대체 天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天을 君長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開天節은 즉 「君長을 開設한다」는 것이 되므로 開國, 建國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開天은 즉 最古 시조인 檀君의 즉위와 開國을 의미하는 開天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三國遺事 紀異 제1권의 「古朝鮮(王儉朝鮮)」條에 의하면 ...
1719#7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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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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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조선통사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통치계급들이 건국시조를 신성화함으로써 자기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꾸며낸 건국신화이다. 이 신화에서는 왕을 하늘의 보호를 받고 있는 절대적인 신적인 존재로 떠받드는 것과 같은 계급사회 특히 노예제도 사회에서의 사회적 관계, 통치계급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 신화는 환상적이며 비과학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으나 우리 민족의 원시공동체사회 말기, 노예사회 초기의 역사와 함께 당시 사회경제형편과 생활, 사람들의 소박한 의식과 관념
1719#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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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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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단군의 무덤인가, 공산주의의 무덤인가?
김조는 처음에 단군 설화를 '고조선의 통치계급들이 건국시조를 신성화함으로써 자기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꾸며낸 건국신화'라 하더니, 1993년에 단군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을 발굴하고나서는 거기서 나온 인골의 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서기전 3100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며 단군의 유골이라 주장하고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벌여 거대한 사각뿔 돌무덤을 만들었다. 이는 1991년에 있었던 공산주의의 붕괴로 인해 통치 명분이 흔들리자 민족주의로 보완하려 한 것이다.
1719#27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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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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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국사교과서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모든 신화에 공통되는 속성이기도 하다. 단군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 때, 환웅 부족은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이들은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또,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계되는 것을 주관하게 하였다.
1719#30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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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고조선역사 개관
신화적 인물에서 실제 역사적 인물로 전환된 단군의 출생에 대해 환웅은 하늘신을 믿던 종족의 공동체 추장을, 웅녀는 곰씨족의 추장 여인을 형상화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환웅과 웅녀의 결혼에 대해 곰씨족 추장이 하늘신을 숭배한 종족의 추장과 혼인한 사실을 그린 것인 동시에 이 두 종족
들이 종족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형상화한 것이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1719#1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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