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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시조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신라는 혁거세를 시조로 모셨고 왕고는 추모와 기자를 시조로 모셨으며 이조는 추모와 기자에 단군을 더했다. 신라의 후속국인 왕고가 추모와 기자를 시조로 모신 건 고려계승이라는 왕조의 명분을 뒷받침하고 중원에 기대어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조가 단군을 더한 것은 새로이 생겨나 퍼져나간 단군설화를 반영한 것이다.
 
-0108 조선 침공과 기자동래설
기자동래설에 의하면 위만 왕조를 정벌하는 것은 기자의 후손으로부터 왕위를 탈취한 것을 응징하는 일이고 한사군을 설치하는 것은 옛 주나라의 봉지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隋의 고려 침공 시기에 秦장성이 낙랑 수성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퍼지거나 일본의 한국 병합 시기에 倭의 임나경영설이 퍼진 것과 비교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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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8 三國史記(1145) 百濟
元年夏五月立東明王廟 온조왕 원년 여름 5월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 추모가 동명이라는 인식은 후대에 생겨났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동명왕은 원래 시조라 되어있던 것을 동명왕으로 고쳐 적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의 기록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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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 三國史記(1145) 新羅
신라 종묘의 제(制)는 제2대 남해왕 3년 봄에 처음 시조 혁거세의 묘당을 세웠다. 사계절로 제사지내고 친누이 아로로써 제사를 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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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9 三國史記(1145) 百濟
다루왕 2년 봄 정월에 시조 동명의 묘에 아뢰었다. 책계왕 2년 봄 정월·분서왕 2년 봄 정월·계왕 2년 여름 4월·아신왕 2년 봄 정월·전지왕 2년 봄 정월에 모두 위와 같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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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8 三國史記(1145) 高句麗
신대왕 4년(168)에 졸본에 이르러 시조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국천왕 원년(179), 동천왕 2년(228), 중천왕 13년(260), 고국원왕 2년(332), 안장왕 3년(521), 평원왕 2년(560), 건무왕 2년(619)에도 모두 위와 같이 행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시조는 추모다. 이 기록으로 보면 추모왕릉은 졸본에 있었고 고려말까지도 평양으로 옮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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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8 紇升骨城
▐ 평양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 평양 천도 이후에는 이곳에 있던 추모왕릉을 평양으로 옮겼을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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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일찍이 기자가 조선에 가서 8조의 敎를 만들어 그들을 가르치니, 문을 닫아 걸지 않아도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漢 무제는 조선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4군을 설치하였다. 이 뒤로부터 胡族과 漢族 사이에 점차 구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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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맥고려와 낙랑고려의 제사
맥고려 때 宗廟, 靈星, 社稷 그리고 隧神에 대한 숭배가 나타나고 낙랑고려 때 日神, 可汗神 그리고 箕子神에 대한 숭배가 나타난다.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때는 -1046년경인데 맥고려 때는 기자 숭배가 없다가 낙랑고려에 와서야 나타난다. 이것은 고려가 평양 천도 이후에 낙랑의 기자 숭배를 계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단군 숭배는 맥고려는 물론 낙랑고려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낙랑고려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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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0522 낙랑유민 묘지명
○ 樂浪名邦 王氏名宗 낙랑은 이름있는 나라이며 왕씨는 이름 있는 집안이다. ○ 其先出自有殷 周武王剋商 封箕子於朝鮮 子孫因而氏焉 그 선조는 은으로부터 나왔으니 주무왕이 상을 정복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는데, 자손이 이로 인하여 성씨를 삼았다. ○ 殷有三人 周訪九疇 只族王家 藉冑鮮侯 은나라에 세 어진 신하가 있어 주나라가 9주를 물었다. 그 집안이 성을 왕씨라 하고 자손들이 조선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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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 三國史記(1145)
평양 성주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의 적의·황의의 도적 명귀 등이 귀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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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 추모왕릉
0905+ 추모왕릉
왕씨고려는 고려의 발상지를 평양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왕고는 추모왕의 무덤도 평양에서 찾았을 것이다. 지금 추모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은 왕고가 905년에 평양을 차지한 이후 추모왕릉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자릉과 단군릉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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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 추모왕릉 위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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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3 고려사(1451)
(후당으로부터 받은 조서의 일부) 踵朱蒙啓土之禎 爲彼君長 履箕子作蕃之跡 宣乃惠和 왕건은 주몽의 계토지정을 따라 군장이 되었고 기자의 작번지적을 밟아 사랑과 평화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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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3 고려사(1451)
▐ 왕씨고려는 신라와 차별되는 독자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계승을 내세웠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국조의 자리는 신라의 혁거세에서 고려의 동명으로 바뀌었다. 왕고는 더 나아가 낙랑고려의 기자 숭배까지 이어받았다. 이는 중원의 왕조에게 자신과 중원과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북방의 민족들에게는 중원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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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고려사(1451)
加平壤 木覓橋淵道知巖東明王等神勳號 평양의 목멱, 교연, 도지암, 동명왕 등의 신에게 훈호를 올렸다. ▐ 여기에 나오는 동명은 부여의 시조가 아니라 고려의 시조 추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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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5 고려사(1451)
(거란이 압록강 부근에 전투용 방책을 설치하자 이에 항의하며 보낸 국서의 일부) 當國 襲箕子之國 以鴨江爲疆 우리나라는 기자의 나라를 물려받아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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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2 고려사(1451)
(송나라로부터 받은 칙서의 일부) 箕子啓封 肇於遼左 僧伽演敎 追在泗濱 원래 기자는 요동에 봉토를 받아 나라를 열었고 승가는 사수가에서 불교를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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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고려사(1451)
禮部奏 我國敎化禮義 自箕子始 而不載祀典 乞求其墳塋 立祠以祭 從之 예부에서 아뢰기를, “우리나라가 예의에 교화되기는 기자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제사를 지내는 법전에는 빠졌사오니 무덤을 찾게 하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지내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 말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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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기자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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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기자릉
1102+ 기자릉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이야기도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고,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2천년 후에 발견되는 일도 믿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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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기자릉
1102+ 기자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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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고려사(1451)
遣使祭東明聖帝祠 獻衣幣 숙종이 사자를 보내 동명성제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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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 고려사(1451)
遣同知樞密院事許慶 祭平壤木覓東明神祠 又設文豆屢道場于興福永明長慶金剛等寺 동지추밀원사 허경을 보내 평양 목멱과 동명의 신사에 제사를 올리게 했으며 흥복사·영명사·장경사·금강사 등의 절에 문두루도량을 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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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高麗圖經
기자서여(箕子胥餘)가 주(周) 무왕에 의해 조선에 봉해진 후 자성(子姓)이 8백여 년을 내려오다 한(漢) 고조 12년(B.C.195)에 연(燕)나라 위만이 추결(椎結 상투)하고 와서 조선왕이 되었다. 한편 부여의 주몽이 흘승골성에 와서 그곳을 스스로 ‘고구려(高句驪)’라 부르고, 따라서 ‘고(高)’로 성씨를 삼고 나라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군에 소속시켰는데 점점 자라나 왕을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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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高麗圖經
東神祠 在宣仁門內 正殿榜曰東神聖母之堂 以帟幕蔽之 不令人見神像 蓋刻木作女人狀 或云乃夫餘妻河神女也 以其生朱蒙 爲高麗始祖 故祀之 동신사는 선인문 안에 있다. 정전에는 동신성모지당이란 방이 붙어 있고 장막으로 가려 사람들이 신상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나무를 깎아 여인상을 만들었기 때문인데, 어떤 사람은 그것이 부여의 처인 하신의 딸이라고 한다. 고려의 시조가 된 주몽을 낳았기 때문에 제사를 모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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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왕이 돌아가시니 그 때 나이가 40세였다. 龍山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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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 고려사(1452)의 1011년, 1105년 그리고 1109년의 기록에는 평양에서 추모를 제사지냈다고 되어있고 또 지리지에는 평양 동남쪽에 龍山이 있는데 그 龍山에 추모왕릉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여기에 나오는 龍山도 고려사의 그 龍山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평양에 있는 추모왕릉은 그 기원이 1145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이 기록은 추모왕릉이 졸본에 있다는 삼국사기의 168년 기록 등과 모순된다. 세간에 떠돌던 이야기를 수집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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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곳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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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海東에 국가가 있은 지는 오래되었다. 기자가 周 왕실로부터 책봉을 받으면서부터 漢 초에 위만이 스스로 왕을 칭할 때까지 세월의 흐름이 매우 오래되었지만, 문자기록이 소략하여 상세하게 고찰할 수 없다. ▐ 삼국지에는 위만 이전에 기자의 후손이 준왕에 이르기까지 왕조를 이어왔다는 위략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지만 김부식의 말처럼 소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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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8 고려사(1451)
서경의 공해전을 차등을 두어 다음과 같이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유수관은 공해전 50결과 지위전 270결 37부 7속, 육조는 공해전 20결과 지위전 15결, 법조사는 공해전 15결, 각 학원은 공해전 15결과 서적위전 50결, 문선왕(공자)은 유향전 15결, 선성(先聖)은 유향전 50결【선성은 바로 기자(箕子)다】, 약점은 공해전 7결, 승록사는 공해전과 지위전 각 15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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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9 고려사(1451)
(금나라로부터 받은 조서의 일부) 粤箕子之故區 寔卞韓之舊壤 根本固而所庇者久 枝葉茂而其承者蕃 옛날 기자가 다스린 지역이며 옛 변한의 땅인 고려는 근본이 튼튼한 까닭에 오래토록 잘 보호되어 왔으며, 왕족이 번성한 까닭에 대대로 왕업이 이어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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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8 고려사(1451)
찬성사 원부 등을 시켜 성용전·동명묘 및 평양의 목멱묘 등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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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삼국유사
당의 배구전(裵矩傳)에 이르기를 “고려(高麗)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하고 조선이라 하였다. 漢이 3郡으로 나누었으니, 현토(玄菟)· 낙랑(樂浪)· 대방(帶方, 北帶方)이다.”라고 하였으며 통전(通典)에도 역시 이 설명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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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삼국유사
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檀君王儉이 있어 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였다. 나라를 개창하여 朝鮮이라 했으니 高와 같은 시대이다.” 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桓因의 庶子인 桓雄이 天下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三危太白을 내려다보니 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만한지라, 이에 天符印 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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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7 제왕운기(帝王韻紀)
本紀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에게 서자가 있었으니 이름이 웅이었다. 환인이 환웅에게 말하기를 '지상의 삼위태백에 내려가 인간을 크게 이롭게 하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환웅이 천부인 3개를 받고 귀신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에 있는 신단수 아래로 내려 왔으니 이 분을 단웅천왕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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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3 고려사(1451)
王至西京 謁聖容殿 分遣人 祭平壤君祠·東明王及木覓廟 왕이 서경에 이르러 성용전을 참배한 후 평양군사, 동명왕묘, 목멱묘에 각각 사람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 평양에 있는 추모왕릉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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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5 고려사(1451)
기자가 우리나라에 봉해진 때로부터 예악과 교화가 비로소 시행되었으니 평양부에 지시해 그의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게 할 것이다. ▐ 1102년에 기자 무덤을 찾아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로 했고 1178년에는 기자에게 제사지낼 비용으로 토지 50결을 배분한 바 있다. 몽골 침략기에 유실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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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5 조연수(趙延壽) 묘지명
平壤之先 仙人王儉 至今遺民 堂堂司空 平壤君子 在三韓前 壽過一千 胡考且仙 拜之▨宣 其系蟬聮 衰盾之日 公悉兩全 평양의 선조는 선인 왕검으로 지금까지도 백성이 남아 있으니 당당한 사공이시다. 평양의 군자는 삼한의 전부터 있었으니 수명이 1천 년을 넘어 오래 살아 신선이 되셨다. 나라를 지키는 중신이 되어 그 가계가 계속 이어졌고 쇠락하고 기피하는 시대에 공은 실로 두 가지를 온전히 갖추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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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2 고려사(1451)
기자는 우리 땅에 봉해져 지금까지 우리가 그 교화와 예악의 은택을 받고 있으니 평양부로 하여금 그 사당을 수축해 제사를 지내게 할 것이며 그 나머지 충의의 인물들에 대한 제사도 모두 옛날처럼 지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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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고려사(1451)
곽영석이 귀국하는 길에 평양을 지나다가 기자의 사당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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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2 고려사(1451)
지밀직사사 홍사범을 명나라 조정으로 보내 촉(蜀)지역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게 했는데 그 표문은 다음과 같다. ... 儻容互鄕之童, 得齒虞庠之胄, 臣謹當奉揚聲敎, 永綏 箕子 之封, 罄竭忠誠, 益貢華人之祝. 우리 젊은이들을 받아들여 상국의 학생들과 나란히 학교에서 공부하게 해 주신다면 저는 마땅히 폐후의 덕화를 높이 받들어 옛날 기자의 봉토였던 이 땅을 길이 잘 다스리고 상국에 충성을 다할 것이며 폐하의 복록과 만수무강을 빌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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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3 고려사(1451)
(왕고의 관원들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들은 교시의 일부) 我是一个農家 與我中原作主 恁是 箕子之國新羅樂浪郡相敵 擄了平百姓 如今恁便都做了恁的奴婢 나는 일개 농민으로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 그대는 기자의 나라, 신라, 낙랑군에 비견될 수 있으며 그들이 지배했던 백성들은 지금 모두 그대의 노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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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1392 조선왕조실록
예조 전서 조박 등이 상서하였다. "조선의 단군(檀君)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箕子)는 처음으로 교화를 일으킨 임금이오니, 평양부로 하여금 때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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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 조선왕조실록
(이성계는 조선과 화령이라는 두 가지 명칭을 명나라에 보내어 조선을 국호로 쓰라는 허락을 받았는데, 아래는 이에 대해 이성계가 올린 표문의 일부다.) 竊惟昔在箕子之世 已有朝鮮之稱 玆用奏陳 敢干聰聽 兪音卽降 異渥尤偏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옛날 기자의 시대에 있어서도 이미 조선이란 칭호가 있었으므로, 이에 아뢰어 진술하여 감히 천자께서 들어주시기를 청했는데, 천자의 대답이 곧 내리시니 특별한 은혜가 더욱 치우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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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 조선왕조실록
하윤이 또한 일찍이 건의하여 조선의 단군(檀君)을 제사하도록 청하였다. 예조에서 참상하기를, “기자의 제사는 마땅히 사전(祀典)에 싣고, 춘추(春秋)에 제사를 드리어 숭덕(崇德)의 의를 밝혀야 합니다. 또 단군(檀君)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이니, 마땅히 기자와 더불어 함께 한 사당에 제사지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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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3 조선왕조실록
예조에서 상서하여 사전(祀典)을 여러 조목 진달하였다. “삼가 당(唐)나라 예악지를 보니, 옛 선제왕들을 아울러 중사(中祀)에 두었고, 국조에서도 선농·선잠·문선왕을 중사에 두었으니, 단군(檀君)·기자(箕子)·전조 태조(前朝太祖)를 마땅히 중사에 올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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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5 조선왕조실록
기자 사당(箕子祠堂)을 배알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자 신위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있고, 단군(檀君) 신위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있었습니다. ... 단군의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하도록 하여 제사를 받들면 거의 제사 의식에 합당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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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9 단군사당
▐ 단군 이야기는 왕씨고려 때부터 기록에 등장하지만 왕조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은 이씨왕조부터다. 1392년부터 기자와 함께 단군을 국조로 모셔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1412년부터 평양성 안에 있는 기자 사당에 단군 신위를 함께 모시고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425년에는 단군 사당을 따로 건립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1429년에 기자 사당 남쪽에 따로 사당을 만들어 동쪽에는 동명을 모시고 서쪽에는 단군을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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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고려사
동명왕묘가 있다. 부의 동남쪽 중화현 경계의 용산(龍山)에 있으며, 민간에서는 진주묘라고 부른다. 또 인리방에 사우가 있는데, 고려 때에 어압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초하루와 보름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지금까지 일이 있으면 자주 소원을 빈다. 세상에 전하기를 동명성제의 사당이라 한다. 을밀대가 있다. 대는 금수산 정상에 있으며, 대의 아래층의 절벽 가까이에 영명사가 있는데, 곧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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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 이것이 위만 조선(衛滿朝鮮)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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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기자묘가 부성 북쪽 토산 위에 있는데, 정자각·석인·석양이 모두 남쪽을 향하였으며, 사당은 성안 의리방에 있다.【봄·가을에 향축을 전하여 제사를 지낸다. 금상(세종) 12년 경술에 유사에 전지하기를, “예전에 무왕이 은(殷)나라를 이기고, 은나라 태사를 우리 나라에 봉한 것과 그가 신하노릇하지 아니할 뜻을 이루게 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문물 예악이 중국과 같은 것은 오직 기자의 가르침에 힘입은 까닭이니, 비석을 사당에 세우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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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단군 사당(檀君祠堂)은 기자의 사당 남쪽에 있고,【금상(今上) 11년 기유에 비로소 사당을 세우고 고구려 시조 동명왕(東明王)을 합사(合祠)하였는데, 단군이 서쪽에, 동명이 동쪽에 있게 하여 모두 남향하게 하였다. 봄·가을마다 향축(香祝)을 내리어 제사를 지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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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동명왕묘가 부(府) 동남쪽 30리 되는 중화 용산에 있다.【화반석으로 광(壙)을 영조하였다. 진주묘라 한다. 이승휴가 기록하기를, “하늘에 올라서 다시 운병에 돌아오지 않고 장사지내는 데 옥편을 더하여 무덤을 이루었다.” 한 것은 곧 이것이다. 인리방에 사당이 있는데 고려에서 때로 어압을 내려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보름에도 또한 소재관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였다. 읍인들이 지금도 일이 있으면 문득 비는데 고로들이 전하기를 동명성제의 사당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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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옆에 영명사가 있으니, 곧 동명왕의 구제궁이다. 안에 기린을 기르던 굴이 있는데, 후인이 비석을 세워서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굴 남쪽 백은탄에 바위가 있는데, 밀물에는 묻히고 썰물에는 드러난다. 이름을 조천석이라 한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동명왕이 기린을 타고 굴 속에서 나와 조천석에 올라서 천상에 주사하였다.” 한다. 이승휴가 이르기를, “천상을 오가며 천정에 나아가니, 조천석 위에 기린이 날쌔도다.”한 것은 곧 이를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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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_ 세종실록지리지 - 평양부
▐ 여기서의 동명은 부여의 시조가 아니라 고려의 시조 추모를 말한다. ▐ 추모왕 때는 평양이 낙랑군이었다. 따라서 평양에 있는 추모왕릉은 평양천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추모가 평양에서 기린을 길렀다는 등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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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현(江東縣) 대총(大塚), 하나는 현의 서쪽으로 3리에 있으며 둘레 4백 10척으로 속담에 단군묘(檀君墓)라 전한다. 하나는 현의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도마산(刀亇山)에 있는데 속담에 옛 황제(皇帝)의 무덤이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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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ᑀ 단군릉
1530 ᑀ 단군릉
단군이 없었으니 단군릉도 있을 수 없다. 한국의 학자들은 이 릉을 낙랑고려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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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ᑀ 단군릉 위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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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準의 후손
箕子의 후손 準이 衛滿에게 축출되어 마한을 건국하면서 자손들이 韓 성을 가지게 되었고 기자의 자손 중 友平의 후손은 鮮于씨, 友諒의 자손은 韓씨, 友誠의 자손은 奇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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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 이후 묘향산지(妙香山誌)
第代朝記云 桓仁之子桓熊 降于太白山神檀下居焉 熊一日與白虎交通生子 是謂檀君 ‘제대조기’에 의하면, 환인의 아들이 환웅이고 태백산의 신단 아래로 내려와 살았다. 한웅이 어느날 백호와 교통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분이 단군이시고, 우리 동방에 요임금과 같은 해에 나라를 세우신 군장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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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7 조선왕조실록
기자(箕子)의 후손을 거두어다 기용하고 해마다 강동(江東)의 단군묘(檀君墓)와 평양(平壤)의 동명왕묘(東明王墓)를 손질하여 가다듬도록 청하자, 모두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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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안정복
고기에 나오는 ‘환인제석(桓因帝釋)’이라는 칭호는 법화경(法華經)에서 나왔고, 그 밖의 칭호도 다 중들 사이의 말이니, 신라ㆍ고려 때에 불교를 숭상하였으므로, 그 폐해가 이렇게까지 된 것이다. 동방이 병화를 여러 번 겪어서 비장된 국사가 죄다 없어져 남은 것이 없었으나, 승려가 적어 둔 것은 암혈 가운데에서 보존되어 후세에 전할 수 있었으므로, 역사를 짓는 이들이 적을 만한 것이 없어서 답답한 끝에 이를 정사에 엮어 넣는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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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 조선왕조실록
단군(檀君)의 묘소를 수리하고 무덤을 수호(守護)할 호(戶)구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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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조선왕조실록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변변치 않은 말이나마 굽어 살피시고 조정의 의논을 널리 모으시어 특별히 본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강동의 단군묘도 기자와 동명왕 두 능의 예에 따라 똑같이 숭봉하게 하여 성인을 받드는 뜻을 밝히고 백성들의 기대를 위로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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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단군릉
▐ 원래 단군릉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단군묘로 처음 나타난다. 이후 왕조에서 수리를 하고 수호인을 두었는데, 단군릉으로 승격되어 기자릉 및 동명왕릉과 같은 격이 된 것은 1900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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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대동사강
대동사강(大東史綱)은 1929년에 김광(金洸)이 쓴 책으로, 단군조선에서 순종황제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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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ᑅ 최남선
최남선도 “평양의 기자묘는 고려 중기 이후 견강부회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한족은 항상 주변 종족의 선조와 한족 조보(祖譜)를 연계시켜 종조화(宗祖化)한다”고 했다. 기자조선설은 “중국인이 이민족을 동화하는 정책의 산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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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이병도
檀君은 神話아닌 우리 國祖 - 원로 문헌 사학자 李丙燾씨 조선일보 특별기고 - 1-1.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 때 끊겼다" 대체 天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天을 君長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開天節은 즉 「君長을 開設한다」는 것이 되므로 開國, 建國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開天은 즉 最古 시조인 檀君의 즉위와 開國을 의미하는 開天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三國遺事 紀異 제1권의 「古朝鮮(王儉朝鮮)」條에 의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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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조선통사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통치계급들이 건국시조를 신성화함으로써 자기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꾸며낸 건국신화이다. 이 신화에서는 왕을 하늘의 보호를 받고 있는 절대적인 신적인 존재로 떠받드는 것과 같은 계급사회 특히 노예제도 사회에서의 사회적 관계, 통치계급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 신화는 환상적이며 비과학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으나 우리 민족의 원시공동체사회 말기, 노예사회 초기의 역사와 함께 당시 사회경제형편과 생활, 사람들의 소박한 의식과 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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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단군의 무덤인가, 공산주의의 무덤인가?
1993 단군의 무덤인가, 공산주의의 무덤인가?
김조는 처음에 단군 설화를 '고조선의 통치계급들이 건국시조를 신성화함으로써 자기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꾸며낸 건국신화'라 하더니, 1993년에 단군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을 발굴하고나서는 거기서 나온 인골의 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서기전 3100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며 단군의 유골이라 주장하고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벌여 거대한 사각뿔 돌무덤을 만들었다. 이는 1991년에 있었던 공산주의의 붕괴로 인해 통치 명분이 흔들리자 민족주의로 보완하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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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국사교과서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모든 신화에 공통되는 속성이기도 하다. 단군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 때, 환웅 부족은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이들은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또,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계되는 것을 주관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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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고조선역사 개관
신화적 인물에서 실제 역사적 인물로 전환된 단군의 출생에 대해 환웅은 하늘신을 믿던 종족의 공동체 추장을, 웅녀는 곰씨족의 추장 여인을 형상화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환웅과 웅녀의 결혼에 대해 곰씨족 추장이 하늘신을 숭배한 종족의 추장과 혼인한 사실을 그린 것인 동시에 이 두 종족 들이 종족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형상화한 것이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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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송호정
단군은 만들어진 신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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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이희근
(1) 만들어진 고조선상 - 소중화주의자들의 역사의식이 만들어낸 우상, (2) 역사상 존재하지도 않았던 기자조선 - 한나라 이후 중화주의자들의 역사 조작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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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고조선 건국신화’ 역사에 편입
교육인적자원부가 단군왕검 신화를 역사로 편입하고 고조선이 기원전 2000년쯤에 시작된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성립됐다는 점을 고교 역사교과서에 명시한 것은 그동안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반영한 것이다. 이는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시기적으로 단절된 우리 역사의 간극을 메운다는 의미가 있다. 대외적으로는 한민족의 기원을 분명히 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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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5 김운회
진서 요사 당서 등의 기록들은 고조선이 동호이며, 후일 요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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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2 김운회
단군신화는 13세기에 잡기류(雜記類)인 삼국유사와 시문집(詩文集)인 제왕운기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공식적으로는 그 어떤 실체도 파악되지 않는 반고려·반원 세력의 정치적 민중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다.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고구려·백제·신라)이 단군과 관련해 자신들의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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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동명왕릉인가 장수왕릉인가?
평양천도 이후에도 안장왕, 평원왕, 영류왕은 졸본에 가서 시조 사당에 제사를 올렸으므로 평양 용산에 있는 무덤은 동명왕의 무덤이 아니거나 허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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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후손
청주한씨(淸州韓氏)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행주기씨(幸州奇氏)
 
동명왕릉
동명왕릉이 평양에 만들어지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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