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新羅民族論 > 0012 高句麗 > -0037± 부여·고려·百濟 건국설화

부여 동명설화는 부여 북쪽에서 왕을 모시는 시녀가 하늘의 정기를 받아 임신을 하고 동명을 낳았는데, 그가 활을 잘 쏘자 시기를 받아 쫓기게 되었고 하늘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부여를 세웠다는 이야기다. 고려 주몽설화는 부여에서 도망나온 주몽이 강을 건너 고구려를 세운다는 것으로 이야기 구조는 부여 동명설화와 같다. 백제 비류온조설화는 주몽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갈라져 나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에 정착했다가 위례성으로 합쳐 백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0037 「三國誤記」 高句麗
始祖(東明聖王→)鄒牟王 시조는 추모왕이다. ▐ 동명은 부여의 시조고 고구려의 시조는 광개토왕릉비(414)에 추모왕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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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 추모왕 피살
▐ 왕망과 맥고려의 갈등은 한서(82), 삼국지(289), 후한서(445)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 실려있다. 그러나 왕망에 의해 죽은 인물이 한서와 후한서에는 고려왕 추(騶), 삼국지에는 고려왕 도(騊)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고려 장수 연비(延丕)로 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414)에는 추모왕(鄒牟王)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되어있어 시신 없이 장사를 지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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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0 論衡 夫餘東明說話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 王欲殺之 婢對曰 有氣大如雞子 從天而下 我故有娠 後產子 捐於豬溷中 豬以口氣噓之 不死 復徙置馬欄中 欲使馬借殺之 馬復以口氣噓之 不死 王疑以為天子 令其母收取奴畜之 名東明 令牧牛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掩水 以弓擊水 魚鱉浮為橋 東明得渡 魚鱉解散 追兵不得渡 因都王夫餘 故北夷有夫餘國焉 東明之母初妊時 見氣從天下 及生 棄之 豬馬以氣吁之而生之 長大 王欲殺之 以弓擊水 魚鱉為橋 天命不當死 故有豬馬之救 命當都王夫餘 故有魚鱉為橋之助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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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0 論衡 夫餘東明說話
❶ 북쪽 오랑캐 橐離국의 왕을 모시는 계집종이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 하였다. 계집종이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을 했습니다"고 하였다. 나중에 아들을 낳았는데 돼지 우리와 마굿간에 넣어 보았으나 돼지와 말이 보호해 주었다. 이름을 東明이라 하였는데 활을 잘 쏘았다.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왕이 죽이려 하자 남쪽으로 달아나 掩水에 이르렀는데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건넜다. 夫餘의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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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0 論衡 夫餘東明說話
▐ 하늘의 도움으로 물을 건넌다는 이야기는 지배자에게 하늘의 마음이 있다는 것으로 기독교의 Moses설화나 이씨조선의 건국설화에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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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0 論衡 夫餘東明說話
▐ 활을 잘 쏜다는 이야기는 지배자로서의 능력을 보증하는 것으로 왕씨고려의 건국설화나 이성계설화에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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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0 論衡 夫餘東明說話
▐ 하늘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는 지배자의 혈통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그리스의 Perseus설화나 기독교의 Jesus설화에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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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0 後漢書(445)
乃遣嗣子尉仇台闕貢獻 天子賜尉仇台印綬金綵 부여가 사자 위구태를 보내어 궁궐에 나아와 조공을 바치므로 천자가 위구태에게 인수와 금채를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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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1 後漢書(445)
秋 宮遂率馬韓 濊貊數千騎圍玄菟 夫餘王遣子尉仇台將二萬餘人 與州郡并力討破之 斬首五百餘級 가을에 궁이 드디어 마한·예맥의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그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2만여명을 거느리고 주·군과 함께 힘을 합하여 쳐서 깨뜨리고 5백여명을 참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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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0~0204 三國志(289)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 尉仇台更屬遼東 부여는 본래 현도에 속하였다. 한나라 말년에 공손탁이 해동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외이들을 위력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는 바꾸어 요동군에 복속하였다. ❷ 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이 때에 구려와 선비가 강성해지자, 度은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일족의 딸을 시집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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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4~220 三國志(289)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建安中 ❸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들고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공손모·장창 등을 파견하여 漢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韓과 濊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倭와 韓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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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 魏畧 夫餘東明說話
昔北方有高離之國者 其王者侍婢有身 王欲殺之 婢云 有氣如鷄子來下 我故有身 後生子 王捐之於溷中 猪以喙噓之 徙至馬閑 馬以氣噓之 不死 王疑以為天子也 乃令其母收畜之 名曰東明 常令牧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施掩水 以弓擊水 魚鼈浮為橋 東明得渡 魚鼈乃解散 追兵不得渡 東明因都王夫餘之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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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 魏畧 夫餘東明說話
옛날 북방에 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죽이려 하자,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내려와 임신을 하였습니다.”고 하였다.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돼지 우리와 마굿간에 버려 보았으나 돼지와 말이 보호해 주었다. 이름을 東明이라 하였는데 활을 잘 쏘자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 하여 죽이려 하였다. 달아나서 남쪽의 施掩水에 당도하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건넜다. 夫餘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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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5 晉書(648)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패하여 부여왕 의려는 자살하고, 그의 자제들은 옥저로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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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廣開土王陵碑 高麗朱蒙說話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卽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 履龍頁昇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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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廣開土王陵碑 高麗朱蒙說話
시조 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河伯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 부여의 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라고 하였다.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건너가서 비류곡 忽本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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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廣開土王陵碑 高麗朱蒙說話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 황제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사기(-91)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4425#7337 SHARED
 
0414 廣開土王陵碑 高麗朱蒙說話
▐ 河伯 古代中国神话中的黄河水神 하백은 원래 중국 황하의 수신인데 고려 건국 설화에 나오는 하백은 이와 연관이 없다. 강을 건너는 이야기에 신성함을 부여하기 위해 차용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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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5 魏書(554)
세조 때에 釗(고국원왕)의 증손 璉(장수왕)이 처음으로 사신 안동을 파견하여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치면서 아울러 나라 이름을 물었다. 세조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조명으로 제계의 이름 字를 그 나라에 내려 주고 원외산기시랑 이오를 파견하여 련을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에 배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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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5 後漢書 夫餘東明說話
북쪽 오랑캐 索離국의 왕을 모시는 시녀가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 하였다. 시녀가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을 했습니다"고 하자 살려주었는데 낳은 아이를 돼지 우리와 마굿간에 넣어 보았으나 돼지와 말이 보호해 주었다. 이름을 東明이라 하였는데 커서 활을 잘 쏘았다. 위기를 느낀 왕이 죽이려 하자 달아나 掩㴲水에 이르렀는데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건넜다. 夫餘에 도착하여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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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0± 牟頭婁 묘지명
河泊之孫日月之子(鄒牟) 聖王元出北夫餘天下(四) 하박의 손자이며 일월의 아들인 추모성왕이 북부여에서 나셨으니,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천하사방이 알지니 王奴客祖(先)□□□(北夫) 餘隨聖王來奴客□□□ 노객의 선조가 ... 북부여에서부터 성왕을 수행하여 왔다. 北夫餘大兄冉牟 북부여 대형 염모 祖大兄冉牟(壽)盡 조상 대형 염모가 수명을 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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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2 魏書(554)
臣與高句麗源出夫餘 신(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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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2 魏書(554)
▐ 고려설화는 광개토왕릉비(414)에 최초로 나타난다. 문헌으로는 위서(554)에 처음 나타나는데 이는 435년부터 북위를 방문하기 시작한 고려 사신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출자에 대해서는 472년에 북위에 보낸 백제의 표문에 처음 나타난다. 이후 중국에서는 부여와 백제를 혼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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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0539 梁職貢圖
舊來夷馬韓之屬 백제는 예로부터 오랑캐 마한에 소속되었다. 所治城曰固麻謂邑曰檐魯如中國郡縣有二十二檐魯 다스리는 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처럼 22담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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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8 三國史記(1145)
移都於泗沘(一名所夫里) 國號南扶餘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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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3 日本書紀(720)
"姓是同姓 位是杆率 年廿九矣 성은 (고려 왕실과) 동성이고 관위는 간솔이며 나이는 29세이다." ▐ 위덕왕이 왕자 시절에 고려 장수에게 한 말이다. 당시 백제는 餘씨 성을 사용하였고 고려는 髙씨 성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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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3 日本書紀(720)
5기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어린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와 있다.’고 말하였다. 어찌 예를 갖춰 맞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속히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알고 싶다.”라고 말하였다. 여창이 “姓是同姓 位是杆率 年廿九矣 성은 동성이고 관위는 간솔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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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 魏書 高麗朱蒙說話
高句麗者 出於夫餘 自言先祖朱蒙 朱蒙母河伯女 為夫餘王閉於室中 為日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 既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 夫餘王棄之與犬 犬不食 棄之與豕 豕又不食 棄之於路 牛馬避之 後棄之野 眾鳥以毛茹之 夫餘王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裹之 置於暖處 有一男破殼而出 及其長也 字之曰朱蒙 其俗言朱蒙者 善射也 夫餘人以朱蒙非人所生 將有異志 請除之 王不聽 命之養馬 朱蒙每私試 知有善惡 駿者減食令瘦 駑者善養令肥 夫餘王以肥者自乘 以瘦者給朱蒙 後狩於田 以朱蒙善射 限之一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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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 魏書 高麗朱蒙說話
朱蒙雖矢少 殪獸甚多 夫餘之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 告朱蒙曰 國將害汝 以汝才略 宜遠適四方 朱蒙乃與烏引烏違等二人 棄夫餘 東南走 中道遇一大水 欲濟無梁 夫餘人追之甚急 朱蒙告水曰 我是日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兵垂及 如何得濟 於上魚鱉並浮 為之成橋 朱蒙得渡 魚鱉乃解 追騎不得渡 朱蒙遂至普述水 遇見三人 其一人著麻衣 一人著納衣 一人著水藻衣 與朱蒙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高句麗 因以為氏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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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 魏書 高麗朱蒙說話
朱蒙의 어머니 河伯의 딸은 夫餘왕에 의해 갇혀 있다 햇볕에 감응하여 알을 낳았다. 알을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고 길에 버리니 소와 말이 피해 다녔으며 들에 버리니 새들이 감쌌다. 나중에 돌려주었는데 사내아이가 나왔다. 자라며 활을 잘 쏘니 신하들이 죽이려 하였다. 도망가다 강을 만나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고 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건넜다. 紇升骨城에 정착하여 이름을 高句麗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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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 魏書 高麗朱蒙說話
▐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그 국호에서 왕성을 따왔다(號曰高句麗 因以為氏焉)는 이야기는 광개토왕릉비(414)에 없는 이야기다. 한서(82)에 현도군의 현으로 高句驪가 나타나기 때문에 국호는 거기에서 나왔을 것이고 高氏 왕성은 407년 즈음에 처음 나타나기 때문에 그때쯤 국호에서 따와서 썼을 듯하다.
2735 SHARED
 
0554 魏書
❹ 百濟國其先出自夫餘 백제국은 그 선조가 부여로부터 나왔다. ▐ 472년에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 바탕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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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 魏書
朱蒙이 죽자 閭達이 왕이 되었다. 여달이 죽자 아들 如栗이 왕이 되었고, 여율이 죽자 아들 莫來가 왕이 되어 부여를 정벌하니, 부여는 크게 패하여 마침내 고구려에 통합·복속되었다. 막래의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이어 후손 宮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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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4 魏書
▐ 중국 사서에 최초로 나타나는 고려의 건국 설화와 초기 왕계에 대한 기록이다. 건국 설화는 광개토왕릉비(414)와 비슷하나 초기 왕계는 광개토왕릉비에서 鄒牟-儒留-大朱留로 이어졌다고 되어 있는 것과 달리 여기서는 朱蒙-閭達-如栗-莫來로 이어졌다고 되어 있다. 고려의 건국 설화와 초기 왕계는 후한서(445)까지도 나타나지 않던 것으로, 광개토왕릉비(414) 이후 고려가 북위에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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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梁書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簷魯 如中國之言郡縣也 다스리는 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은 것이다. ▐ 괄지지(642)에 의하면 고마는 웅진이다. 백제는 538년에 도읍을 사비로 옮겼기 때문에 양서가 편찬될 때는 웅진이 도읍이 아니지만 양서는 양직공도(526~538)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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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梁書 夫餘東明說話
東明은 북쪽 오랑캐 櫜離왕의 아들이다. 왕을 모시는 시녀가 임신하자 죽이려 하였는데 "달걀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을 했습니다"고 하니 살려주었다. 낳은 아이를 돼지 우리와 마굿간에 넣어 보았으나 돼지와 말이 보호해 주었다. 커서 활을 잘 쏘니 위기를 느껴 왕이 죽이려 하였다. 달아나 淹滯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건넜다. 夫餘에 이르러 왕이 되었는데 그 후손의 한 갈래가 句驪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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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周書 高麗朱蒙說話
髙麗는 그 선조가 夫餘에서 갈라져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시조는 朱蒙인데 河伯의 딸이 햇빛에 감응되어 잉태하였다’고 한다. 주몽이 장성하여 재주와 지략이 있자 부여 사람들이 미워하여 쫓아버렸다. 紇斗骨城에 살면서 스스로 국호를 髙句麗라 하고, 이어 고씨로 성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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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周書 仇台
百濟者其先蓋馬韓之屬國夫餘之別種 有仇台者始國於帶方故其地界 백제는 그 선대가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인 듯하다. 구태란 사람이 처음으로 대방에 나라를 세웠다. ▐ 馬韓之屬은 양직공도(526~538)에 나오는 舊來夷馬韓之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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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周書 仇台
▐ ② 公孫度 以夫餘王尉仇台 妻以宗女 공손탁은 부여왕 위구태에게 일족의 딸을 시집보냈다. ③ 公孫康 分屯有縣以南荒地 爲帶方郡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들었다. ④ 百濟國 其先出自夫餘 백제국은 그 선조가 부여로부터 나왔다. 이 세 가지 이야기들이 결합하여 ❺ ᐥ百濟 仇台者始國於帶方 구태가 대방에 처음으로 백제를 세웠다ᐥ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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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周書 仇台
治固麻城其外更有五方 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乆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 王姓夫餘氏號於羅瑕民呼為鞬吉支夏言竝王也 妻號於陸夏言妃也 치소는 고마성인데 바깥에 5방이 있다. 중방은 고사성, 동방은 득안성, 남방은 구지하성, 서방은 도선성 그리고 북방은 웅진성이다. 왕성 부여씨는 어라하라 부르고 백성들은 건길지라 하는데 왕이란 뜻이다. 처는 어륙하라 하는데 비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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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周書 仇台
▐ 치소가 고마성이라는 이야기는 양직공도(526~538)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고, 지방에 웅진성 등 5방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도읍을 사비로 옮긴 538년 이후에 알게 된 정보일 것이다. 괄지지(642)에 의하면 고마는 웅진이므로 주서는 고마성 바깥에 고마성이 있다는 모순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는 전후의 기록을 잘못 통합한 결과로 보이는데, 위구태가 왕으로 있던 부여와 그 전에 부여로부터 갈라져 나왔다고 자처하는 백제를 혼동한 것도 같은 맥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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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隋書 夫餘東明說話
百濟之先 出自高麗國 其國王有一侍婢 忽懷孕 王欲殺之 婢云 有物狀如雞子 來感於我 故有娠也 王舍之 後遂生一男 棄之廁溷 久而不死 以為神 命養之 名曰東明 及長 高麗王忌之 東明懼 逃至淹水 夫餘人共奉之
23772 SHARED
 
0636 隋書 夫餘東明說話
백제의 선대는 高麗국에서 나왔다. 왕의 한 시녀가 갑자기 임신을 하게 되어 왕은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다. 시녀가 말하기를 “달걀같이 생긴 물건이 나에게 내려와 닿으면서 임신이 되었습니다.” 고 하자 놓아 주었다. 뒤에 사내 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뒷간에 버렸으나 오래도록 죽지 않았다. 신령스럽게 여겨 기르도록 하고 이름을 東明이라 하였다. 장성하자 왕이 시기를 하므로 동명은 도망가서 淹水에 이르렀는데 夫餘 사람들이 모두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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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隋書 夫餘東明說話
▐ 여기에 나오는 高麗를 高句麗의 후대 국명으로 보면 모순이 생긴다. 수서에는 夫餘에서 高句麗가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高句麗의 후대에서 夫餘가 나오면 모순된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高麗는 위략(265?)에 나오는 高離를 착각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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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隋書 夫餘東明說話
東明之後有仇台者篤於仁信始立其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漸以昌盛爲東夷强國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 동명의 후손에 구태라는 자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대방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가가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해서 백제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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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隋書 仇台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 백제는 그 시조 구태의 사당을 도성 안에 세워 놓고, 해마다 네번씩 제사한다. ▐ 원래의 사료에는 始祖廟라 되어 있던 것을 仇台가 시조라는 이야기에 근거하여 始祖仇台廟로 적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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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隋書 仇台
▐ ①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 名東明 因都王夫餘 북쪽 오랑캐 탁리국의 왕을 모시는 계집종이 임신을 하였다.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 부여를 세웠다. ② 公孫度 以夫餘王尉仇台 妻以宗女 공손탁은 부여왕 위구태에게 일족의 딸을 시집보내었다. ③ 公孫康 分屯有縣以南荒地 爲帶方郡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들었다. ④ 百濟國 其先出自夫餘 백제국은 그 선조가 부여로부터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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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隋書 仇台
이 네 가지 이야기가 결합하여 ❻ ᐥ百濟 夫餘東明之後有仇台者 始立其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부여를 세운 동명의 후손에 구태라는 자가 있었는데 대방의 옛 땅에 백제를 세우자 한나라의 요동태수 공손탁이 그에게 딸을 시집보냈다ᐥ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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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隋書 高麗朱蒙說話
高麗之先 出自夫餘 夫餘王嘗得河伯女 因閉於室內 為日光隨而照之 感而遂孕 生一大卵 有一男子破殼而出 名曰朱蒙 夫餘之臣以朱蒙非人所生 咸請殺之 王不聽 及壯 因從獵 所獲居多 又請殺之 其母以告朱蒙 朱蒙棄夫餘東南走 遇一大水 深不可越 朱蒙曰 我是河伯外孫 日之子也 今有難 而追兵且及 如何得渡 於是魚鼈積而成橋 朱蒙遂渡 追騎不得濟而還 朱蒙建國 自號高句麗 以高為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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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隋書 高麗朱蒙說話
夫餘왕이 河伯의 딸을 방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볕에 감응하여 알을 낳았다.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오자 이름을 朱蒙이라 하였다. 자라서 사냥을 잘 하자 신하들이 죽일 것을 왕에게 권했다. 어머니가 이를 알려주니 주몽은 동남쪽으로 달아나다 강을 만나 '나는 하백의 외손이요 태양의 아들이다'고 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 올라 건너갔다. 스스로 나라를 세워 高句麗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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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隋書 高麗朱蒙說話
▐ 수서에는 高麗가 110회 나오지만 高句麗는 한번 밖에 안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이 기록이다. 수서에는 高麗에서 夫餘가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기 때문에 高麗에서 나온 夫餘에서 다시 高麗가 나온다는 모순된 이야기를 피하기 위해 夫餘에서 나온 高麗는 초기 국호인 高句麗로 표기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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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2 括地志
括地志曰 百濟王城方一里半 北面累石為之 城外可萬餘家即五部之所也 國東北六十里有熊津城 一名固麻城城 웅진성은 일명 고마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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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9 北史 夫餘東明說話
백제국은 대체로 마한의 족속이며 索離國에서 나왔다. 출행 중에 시녀가 임신하자 죽이려고 하였다. 시녀는 “하늘에서 달걀만한 기운이 내려 와 임신하였습니다.” 고 하였다. 아들을 낳으매 돼지 우리와 마굿간에 버렸으나 돼지와 말이 보호해 주었다. 기르도록 하고 東明이라 불렀다. 활을 잘 쏘자 꺼려서 다시 죽이려 하였다. 도망하여 남쪽의 淹滯水에 다다라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夫餘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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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9 北史 夫餘東明說話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始立國于帶方故地 漢 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동명의 후손에 구태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처음으로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漢의 요동태수 공손도는 딸을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百家가 건너 왔다고 해서 百濟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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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9 北史 仇台
立其始祖仇台之廟於國城 歲四祠之 백제는 그 시조 구태의 사당을 도성 안에 건립해 놓고 해마다 네 차례씩 제사지낸다. ▐ 수서(636)에 나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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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9 北史 高麗朱蒙說話
夫餘왕이 河伯의 딸을 방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볕에 감응하여 알을 낳았다.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오자 이름을 朱蒙이라 하였다. 자라서 활을 잘 쏘자 신하들이 죽일 것을 왕에게 권했다. 어머니가 이를 알려주니 주몽은 동남쪽으로 달아나다 강을 만나 '나는 하백의 외손이요 태양의 아들이다'고 하니 물고기가 자라가 떠 올라 건너갔다. 紇升骨城에 나라를 세워 高句麗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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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9 北史 高麗朱蒙說話
▐ 북사에는 高句麗가 15번 나오고 高麗가 197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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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07 安勝 책문 - 中牟
사찬 수미산을 보내어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은 다음과 같다. “...신라 왕은 고구려 상속자 안승에게 명령을 내리노라. 공의 태조 中牟王은 덕을 北山에 쌓고 공을 南海에 세워 위엄있는 풍모가 靑丘에 떨쳤고 어진 가르침이 玄菟를 덮었다.
17099 SHARED
 
0699 高乙德 묘지명
朱蒙
17085 SHARED
 
0702 泉男産 묘지명
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 朱蒙孕日臨浿水 동명이 기를 느끼고 사천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은 해를 품고 패수에 임해 수도를 열었다. ▐ 동명과 주몽이 분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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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日本書紀
대당의 대장군 영공이 고구려를 쳐 멸망시켰다. 고구려의 仲牟王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에 千歲 동안 다스리려고 하였다. 모부인은 “나라를 잘 다스리더라도 불가능하다. 7백 년이 적당하다.”라고 말하였다. 지금 나라를 잃은 것은 그로부터 7백 년 후의 일이었다.
17084 SHARED
 
0790 續日本紀(797)
眞道等本系出自百濟國貴須王貴須王者百濟始興第十六世王也 夫百濟太祖都慕大王者 日神降靈 奄扶餘而開國 天帝授籙 摠諸韓而稱王 백제왕인정, 백제왕원신, 백제왕충신, 진련진도 등이 표를 올렸다. “저희들은 본계가 백제국 귀수왕에서 나왔습니다. 귀수왕은 백제가 처음 일어난 때로부터 제16대 왕입니다. 대저 백제의 태조 도모대왕은 태양신이 몸에 내려온 분으로, 부여에 머물러 나라를 열었습니다. 천제가 녹을 주어 모든 한을 통솔하고 왕을 칭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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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7 續日本紀
皇太后姓和氏 后先出自百濟武寧王之子純陁太子 其百濟遠祖都慕王者 河伯之女感日精而所生 皇太后卽其後也 황태후의 성은 화씨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 태자에서 나왔다. 그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이라는 사람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 ▐ 하백은 고려 주몽설화에만 나오는 이야기이므로 도모는 주몽(추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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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7 續日本紀
▐ 속일본기에 의하면 백제 왕조는 하백의 외손인 도모왕의 후손을 자처하였고 귀수왕을 16대 왕으로 인식했다. 귀수왕은 삼국사기의 근구수왕이다. 광개토왕릉비에도 하백의 외손 추모왕 이야기가 나오는데, 삼국사기에는 그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갈라져 나가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에 정착했다가 비류가 실패해서 죽자 위례성으로 합쳐 백제가 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온조로부터 근구수왕이 14대인데, 온조의 형 비류와 부 추모를 더하면 16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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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通典 夫餘東明說話
夫餘國後漢通焉 初北夷索離國王有子曰東明 長而善射 王忌其猛而欲殺之 東明奔走南渡掩㴲水 因至夫餘而王之 북쪽 오랑캐 索離국의 왕에게 東明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자라며 활을 잘 쏘았다. 왕이 그것을 꺼려하여 죽이려 하자 동명은 남쪽으로 달아나 掩㴲水를 건너 夫餘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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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通典 高麗朱蒙說話
髙句麗後漢朝貢云 本出於夫餘 先祖朱䝉 朱䝉母河伯女為夫餘王妻 為日所照遂有孕而生 及長名曰朱䝉俗言善射也 國人欲殺之 朱䝉棄夫餘東南走 渡普述水 至紇升骨城 遂居焉 號曰句麗 以髙為氏
4443 SHARED
 
0801 通典 高麗朱蒙說話
고구려가 후한에 조공을 바치며 "본래 夫餘에서 나왔는데 선조가 朱䝉이다. 주몽의 어머니는 河伯의 딸인데 부여왕의 부인이 되었다. 햇볕이 비추더니 아이를 배었다. 아이가 자라자 주몽이라 했는데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나라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하자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달아나 普述水를 건넜다. 紇升骨城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나라 이름을 句麗라 하고 高로써 성씨를 삼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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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通典 高麗朱蒙說話
▐ 고려가 後漢에 알려준 이야기라고 하나 고려의 왕성은 407년 즈음에야 처음 나타나고 건국설화 또한 중국에서는 魏書(554)에 처음 나타나기 때문에 後漢은 後魏의 오기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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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通典
후한과 조위의 사서에는 부여국이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고 하고 북위와 수나라의 사서에는 고구려가 부여국의 남쪽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수나라 사서에는 백제가 부여에서 나왔고 부여는 고구려 왕자 동명의 후손이라 한다. 또 색리국은 고려국이라 했으니 부여는 구려의 남쪽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색리는 부여 북쪽에 있는 별도의 나라인 듯한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 수서(636)에 실려 있는 부여동명설화에 나오는 高麗는 高句麗가 아니라 高離다.
4425#5489 SHARED
 
0801 通典 仇台
百濟即後漢末夫餘王尉仇台之後(後魏時百濟王上表云臣與髙麗先出夫餘) 백제는 후한말 부여왕 위구태의 후예다. (북위때 올려진 백제왕의 표문에 자신과 고려의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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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通典 仇台
每祭歲四祠其先祖仇台之廟 ▐ 수서(636)와 북사(659)에 나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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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5 新撰姓氏録
▐ 高麗国主鄒牟王이 2회 나오고 一名朱蒙이 1회 나오며 百済国都慕王이 7회 나온다. 鄒牟는 광개토왕릉비(414)에 나오므로 고려인이 쓰던 표기인 것이 분명하고 신찬성씨록에도 高麗国과 함께 쓰인 것으로 보아 고려인이 알려준 표기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朱蒙은 위서(554)에 나오는 것인데 435년에 고려가 북위와 교류하며 알려준 듯하다. 都慕는 百済国과 함께 쓰인 것으로 보아 백제인이 알려준 표기로 보이며 속일본기(797)에도 그런 듯한 설명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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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 冊府元龜
百濟本夫餘王之後有仇台者複為高麗所破以百家濟海因號百濟┆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歲四祠之(仇台為遼東太守公孫度之婿)┆百濟其先夫餘王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始立國於帶方 ▐ 수서(636), 북사(659) 그리고 통전(801)에 나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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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金蛙
扶餘왕 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다가 큰 돌 아래에서 금색의 개구리 모양 아이를 얻자 金蛙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후에 재상이 자신의 후손으로 하여금 그곳에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 도읍을 동해 물가로 옮기라는 하늘의 뜻을 전하자,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東扶餘라 하였다. 옛 도읍에는 스스로 천제의 아들 解慕漱라 칭하는 자가 도읍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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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金蛙
▐ 부여는 285년에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의려왕은 자살하고 왕자들은 옥저로 달아났다. 북옥저는 -28년에 추모왕에게 복속되었었는데 410년에 광개토왕이 동부여를 복속시킨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부여의 유민에 의해 점유되었던 듯하다. 금와설화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이 투영되어 만들어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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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1) 朱蒙
東扶餘왕 金蛙가 천제의 아들 解慕漱와 정을 통했다는 河伯의 딸을 가두었는데 햇빛이 따라다니며 비추어 알을 낳게 했다. 알에서 나온 朱蒙은 활을 잘 쏘아 왕자들의 시기를 받고 도망가게 되었다. 淹㴲水에 이르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추격자를 따돌리고 건너갔다. 卒本川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高句麗라 했고 성도 高씨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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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2) 沸流·溫祚
北扶餘의 朱蒙이 난을 피하여 卒本扶餘로 와 扶餘왕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沸流와 溫祚 두 아들을 낳았는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두 사람은 남쪽으로 가서 미추홀과 위례성에 각각 나라를 세웠다. 나중에 합쳐서 百濟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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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2) 沸流·溫祚
▐ 백제 비류온조설화는 백제인들의 인식이 담겨있는 것으로 보이는 아래 기록들과 어울린다. ┆夫百濟太祖都慕大王者 日神降靈 奄扶餘而開國 天帝授籙 摠諸韓而稱王┆臣與高句麗源出夫餘┆其百濟遠祖都慕王者河伯之女感日精而所生┆移都於泗沘 國號南扶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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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2) 沸流·溫祚
▐ 백제 비류온조설화는 주몽이 자력으로 왕조를 세운 것이 아니라 비류와 온조의 외가로 장가와서 그 가문을 물려받아 왕조를 세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따라서 그 왕조는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유류보다 비류와 온조에게 물려졌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것이 고려와의 경쟁에서 장자와 서자의 차이가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백제가 주몽을 시조로 내세우는 이유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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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2) 沸流·溫祚
按古典記 東明王第三子温祚 以前漢鴻嘉三年癸卯 自卒夲扶餘 至慰礼城 立都稱王 고전기를 살피건데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 온조가 -18년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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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3) 優台
北扶餘왕 觧扶婁의 서자인 優台는 卒夲 사람 召西奴에게 장가들어 沸流와 温祚 두 아들을 낳았다. 우태가 죽고 나서 소서노는 扶餘에서 도망온 朱蒙에게 시집을 가서 高句麗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낳은 孺留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남쪽의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 해동고기에 나온다는 이 이야기는 비류온조설화를 뼈대로 하고 주서(636)와 수서(636) 등에 나오는 仇台 이야기를 끼워넣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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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4) 仇台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나라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 구태가 백제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주서(636), 수서(636), 북사(659), 통전(801) 그리고 책부원구(1013)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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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4) 仇台
책부원구에 이르기를 백제는 늘 4계절의 중간 월마다 왕이 하늘 및 5제의 신을 제사지낸다. 그 시조 구태의 묘를 국성에 세우고 해마다 4번 제사지낸다. ▐ 구태에 대한 제사 기록은 수서(636), 북사(659), 통전(801) 그리고 책부원구(1013)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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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4) 優台·仇台 부정
1145 三國史記 (4) 優台·仇台 부정
按海東古記 或云始祖東明 或云始祖優台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 有仇台 立國於帶方 此云始祖仇台 然東明爲始祖事迹明白 其餘不可信也 살펴보건데 (백제에 대해서) 해동고기에는 혹은 동명이 시조라 하고 혹은 우태가 시조라 한다. 북사 및 수서에서는 모두 이르기를 “동명의 후예로 구태가 있어 대방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는데, 이에 시조 구태라 이른다. 그러나 동명이 시조임은 사적이 명백하여 그 이외에는 믿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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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5) 東明
按海東古記 或云始祖東明 或云始祖優台 해동고기를 살펴보니, 혹은 동명이 시조라 하고 혹은 우태가 시조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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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5) 東明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歳 葬龍山 號東明聖王 가을 9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그 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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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5) 東明
元年 夏五月 立東明王廟 온조왕 원년 여름 5월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 수서(636)에 백제가 시조 구태의 사당에 제사지낸다고 되어 있는 것과 종합하면, 원래의 기록에는 단순히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낸다고만 되어 있었는데, 그 시조를 누구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구태의 사당으로 기록하기도 하고 동명의 사당으로 기록하기도 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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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5) 東明
多婁王二年春正月 謁始祖東明廟 責稽王二年春正月 汾西王二年春正月 契王二年夏四月 阿莘王二年春正月 腆支王二年春正月 並如上行 (백제) 다루왕 2년 봄 정월에 시조 동명의 묘에 아뢰었다. 책계왕 2년 봄 정월, 분서왕 2년 봄 정월, 계왕 2년 여름 4월, 아신왕 2년 봄 정월, 전지왕 2년 봄 정월에 모두 위와 같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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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5) 東明
▐ 삼국사기가 인용한 사서에는 부여 동명설화와 고려 주몽설화가 별개로 수록되어 있어 혼동의 여지가 없는데도, 삼국사기는 동명과 주몽을 동일인으로 취급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주몽설화가 동명설화를 베낀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둘을 융합시켜 베낀 사실을 가림으로써 고려왕조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 삼국사기는 고려왕이 신나라에 의해 살해된 것을 고려 장수가 살해된 것으로 날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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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고려와 백제의 건국설화
4425#17072 SHARED
 
1278 고려사(1451)
命贊成事元傅等 祀聖容殿東明平壤木覓廟 찬성사 원부 등을 시켜 성용전·동명묘 및 평양의 목멱묘 등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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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7 제왕운기
한 원제 건소 2년 갑신년(신라가 건국한지 21년이 되던 해이다)에, 馬韓의 王儉城(지금의 西京이다. 고구려현의 이름으로 건국하였다. 五代史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다.”라고 하였다.)에서 건국하니, 하늘에서 사람을 보내와 궁궐을 지으니, 산중이 어두워졌는데도 정소리가 들리고, 7일이 되어서야 마치므로 운무가 걷혀, 금벽을 솟구치게 하고 연마하여 새로운 하늘을 열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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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3 고려사(1451)
王至西京 謁聖容殿 分遣人 祭平壤君祠東明王及木覓廟 왕이 서경에 이르러 성용전을 참배한 후 평양군사, 동명왕묘, 목멱묘에 각각 사람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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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고려사
평양의 목멱, 교연, 도지암, 동명왕(東明王) 등의 신에게 훈호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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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고려사
숙종이 사자를 보내 동명성제(東明聖帝)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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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고려사
동명왕묘가 있다. 부의 동남쪽 중화현 경계의 용산(龍山)에 있으며, 민간에서는 진주묘라고 부른다. 또 인리방에 사우가 있는데, 고려 때에 어압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초하루와 보름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지금까지 일이 있으면 자주 소원을 빈다. 세상에 전하기를 동명성제의 사당이라 한다. 을밀대가 있다. 대는 금수산 정상에 있으며, 대의 아래층의 절벽 가까이에 영명사가 있는데, 곧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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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동명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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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Dictionary
Names are also vocabulary.
 
1778 東史綱目
북사와 통전에 모두 “백제가 그 시조 仇台의 사당을 국성에 세우고 해마다 네 차례씩 제사한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우태의 와전이다. ▐ 기록에 나타나는 순서는 구태가 우태보다 앞서니 우태가 구태의 와전일 수는 있어도 구태가 우태의 와전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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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東史綱目
옛 사책(통전 및 책부원구, 북사, 수서 등 사책을 가리킨다)에 분명히 시조 우태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네 차례씩 제사지냈다고 썼으니, 東史에 언급되지 않은 것은 史氏가 기록에 빠뜨린 때문이다. ▐ 수서(636), 북사(659), 통전(801) 그리고 책부원구(1013)에는 구태에게 제사지낸다고 나와 있다. 동사강목은 그 구태가 우태의 와전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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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 我邦疆域考
북부여가 망하자 구려 사람들이 그 거룩하고 상서로운 것을 알고 살짝 그 이야기를 표절하고 아울러 동명의 이름까지도 빼앗아 중국 사람들에게 과시하자, 중국의 역사 찬술자들은 그 말해준 바를 따라서 역사책에다 이를 기재한 것이다. 비록 그 황당한 말에 대해서 충분히 분별할 수는 없지만, 동명이라는 두 글자는 분명히 북부여 시조의 이름이지 주몽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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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
탐사보고, 동명루트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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紇升骨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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鄒牟
鄒牟
┆ 騶(한서,후한서) ┆ 騊(삼국지) ┆ 鄒牟(광개토왕릉비, 모두루묘지명, 신찬성씨록, 삼국사기) ┆ 朱蒙(위서, 주서, 수서, 북사, 고을덕묘지명, 천남산묘지명, 통전, 신찬성씨록, 古記, 삼국사기) ┆ 仲牟(일본서기) ┆ 都慕(속일본기, 신찬성씨록) ┆ 中牟(안승책문) ┆ 衆解(삼국사기) ┆ 東明(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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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고려·百濟 건국설화
부여 동명설화는 부여 북쪽의 어떤 나라에서 왕을 모시는 시녀가 하늘의 정기를 받아 임신을 하고 동명을 낳았는데 그가 활을 잘 쏘자 시기를 받아 쫓기게 되었고 하늘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부여를 세웠다는 이야기다. 하늘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는 지배자의 혈통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그리스의 Perseus설화나 기독교의 Jesus설화에서도 나타난다. 활을 잘 쏜다는 이야기는 지배자로서의 능력을 보증하는 것으로 왕씨고려의 건국설화나 이성계설화에서도 나타난다. 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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