箕子는 상나라가 주나라에 망하던 시기(-1046)의 인물이다.
논어(-479)에는 단순히 상나라 주왕이 箕子를 가두었다고만 되어 있는데 상서대전(-157-)에는 주나라 무왕이 그를 풀어주자 조선으로 달아나므로 조선을 봉지로 인정해 주니 조공을 왔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한서(82)에는 箕子가 조선에서 예의를 가르쳐 8조범금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졌고 위략(265±)에는 조선왕이 箕子의 후손인데 위만에게 쫓겨나 韓王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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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6 죽서기년(竹書紀年)
▐ 죽서기년은 황제의 시대로부터 전국시대 魏양왕에 이르기까지의 일이 저술되어 있다. 279년에 魏양왕의 무덤에서 대나무에 기록된 형태로 발견되었다. 이것을 학자들이 정리하고 교정하여 책으로 편찬하였는데 이 책도 점차 흩어지고 분실되어 남송시대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심약의 주가 붙은 금본죽서기년이 있는데 이는 명나라 때의 위작으로 간주된다. 1917년에 왕국유가 고서에 인용된 기록을 모아 고본죽서기년을 편찬하였는데, 여기에는 기자 이야기가 없다.
1939#4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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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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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7- 상서대전(尙書大傳)
武王勝殷 繼公子祿父 ❷釋箕子囚 箕子不忍周之釋 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朝鮮封之
箕子既受周之封 不得無臣禮 故於十三祀來朝
무왕은 은을 이기자 공자 녹부에 이어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석방된 것을 언짢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그 소식을 듣고 조선을 그의 영지로 내려 주었다. 기자는 이제 주나라로부터 영지를 받았으니 신하의 예의를 안 지킬 수 없어 무왕 13년에 배알하러 왔다.
1939#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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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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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7- 상서대전(尙書大傳)
▐ 尙書는 요순시대, 하나라, 상나라 그리고 주나라의 정사에 관한 문서를 모아 공자가 편찬하였다. 진나라때 분서갱유로 불타 없어졌던 것을 한나라 문제(-180 ~ -157)가 복생의 구술을 받아 29편을 복원하였는데, 이것이 今文尙書다. 공자의 옛 집을 헐다가 벽 속에서 발견했다는 古文尙書도 있다. 그러나 古文尙書는 한나라 이후 모두 사라졌다가 동진의 매색이 찾아 복구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가짜로 인식되고 있다.
1939#4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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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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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 단군설화
▐ 고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라 모두 건국설화를 가지고 있다. 건국설화는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고대 왕조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도구다. 위만조선도 건국설화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위만조선을 내쫓고 세워진 낙랑군의 철저한 탄압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위만조선의 건국설화는 역사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민속으로는 계속 전승되고 있었고 천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되어 왕씨고려 때에는 우리가 아는 단군설화가 된 것이 아닐까?
1939#1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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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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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2 한서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❸敎其民以禮義 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谷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은나라 도가 쇠퇴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사람들에게 예의, 농사, 양잠 그리고 길쌈을 가르쳤다. 낙랑조선 사람들이 금8조를 범하면,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고 상처를 입히면 곡식으로써 배상하며 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가노로 삼고 여자는 비로 삼되 속죄받으려면 한 사람당 50만을 내야 했다.
1939#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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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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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2 한서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浸多 至六十餘條
처음에는 요동에서 관리를 뽑아왔는데 사람들이 문을 닫아걸지 않는 것을 보고 관리나 상인들이 밤에 도둑질을 하여 풍속이 나빠졌다. 법을 어기는 일이 많아지자 법조문이 60조로 불어났다.
▐ 위만조선때 8조에 불과했던 법률이 한나라의 통치 이후 60조로 늘어났다.
1939#19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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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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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 위략
❹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가 약해지고 연이 스스로를 높여 왕을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 하자 조선후도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역공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대부 례가 말리므로 중지하였다.
1939#7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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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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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 위략
▐ 한나라는 -108년에 위만조선을 정벌하고 낙랑, 眞番, 임둔 그리고 현도군을 설치했다. -82년에는 임둔과 함께 眞番을 폐지하고 眞番 15현 중 7현만 낙랑에 소속시켰다.
낙랑은 眞番의 나머지 8현을 되찾기 위해 '원래 조선은 기자의 후예인 韓氏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연나라에서 망명해온 위만에게 쫓겨 바다 건너 韓王이 되었고 그래서 그곳을 韓이라 부른다'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이어 眞番 남쪽에 있던 辰國도 韓으로 묶어 辰韓이라 했다.
1939#16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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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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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3 고려사(1451)
(왕건이 후당으로부터 받은 조서)
踵朱蒙啓土之禎 爲彼君長 履箕子作蕃之跡 宣乃惠和
주몽의 계토지정을 따라 군장이 되었고 기자의 작번지적을 밟아 사랑과 평화를 펼쳤다.
▐ 왕조가 신라에서 왕씨고려로 바뀌며 국조도 고려의 국조였던 朱蒙으로 바뀌었다. 이때 箕子도 국조로 숭배되었는데, 이는 고려의 箕子숭배를 계승한 듯하다.
1939#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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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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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 조선왕조실록
(이성계는 조선과 화령이라는 두 가지 명칭을 명나라에 보내어 조선을 국호로 쓰라는 허락을 받았는데, 이에 대해 표문을 올렸다.)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옛날 기자의 시대에 있어서도 이미 조선이란 칭호가 있었으므로, 이에 아뢰어 진술하여 감히 천자께서 들어주시기를 청했는데, 천자의 대답이 곧 내리시니 특별한 은혜가 더욱 치우쳤습니다.”
▐ 箕子를 국조로 인식하는 흐름은 이씨조선 말까지 지속되었다.
1939#13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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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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