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新羅民族論 > 0245 韓

한나라는 -108년에 위만조선을 정벌하고 낙랑, 眞番, 임둔 그리고 현도군을 설치했다. -82년에는 임둔과 함께 眞番을 폐지하고 眞番 15현 중 7현만 낙랑에 소속시켰다. 훗날 낙랑은 眞番의 나머지 8현을 되찾기 위해 '원래 조선은 기자의 후예인 韓氏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연나라에서 온 위만에게 쫓겨 바다를 거쳐 韓王이 되었고 그래서 그곳을 韓이라 부른다'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이어 眞番 남쪽에 있던 辰國도 韓으로 묶어 辰韓이라 했다.
 
韓의 기원
❶ 사기(-91)에는 穢, 貉, 朝鮮, 眞番 그리고 臨屯이 나오지만 韓은 나오지 않는다. 한서(82)에도 朝鮮, 眞番, 辰國, 濊貉, 句驪 그리고 倭까지 나오지만 韓은 나오지 않는다. 韓은 삼국지(289)에 가서야 비로소 나타난다. 따라서 韓은 한서와 삼국지 사이의 시기에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다. 眞番은 반대로 사기와 한서에서 자주 거론되다 삼국지부터는 나타나지 않는다. 있던 땅이 없어지거나 없던 땅이 새로 생겨나지는 않을테니 眞番이 韓으로 불리게 ...
18203
 
      眞番 → 帶方郡 + 韓八國
眞番 → 帶方郡 + 韓八國
7239
 
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眞番
진번은 사기(-91)에서 주로 조선과 묶여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에 접한 나라로 보인다. 조선은 사기에서 연나라의 동쪽에 접해 있다고 되어 있고 삼국지(289)에는 고구려의 남쪽이자 예의 서쪽에 있다고 되어 있으므로, 조선에 접한 진번이 있을 곳은 조선의 남쪽 밖에 없다. 사기에는 진번이 맥과 동시에 거론되고 있어 맥인의 나라 고구려가 진번의 후신일 가능성도 배제된다.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이곳에 진번군을 설치하였다.
15438
 
帶方郡
진번군은 이내 폐지되고 낙랑군에 합쳐졌는데, 이후 진번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한편, 전한의 낙랑 25현은 영동 7현이 갈라져 나가 후한의 낙랑 18성이 되었고 이 중에서 7성이 갈라져 나와 서진의 대방 7현이 되었다. 이 대방 7현이 진번이 폐지될 때 낙랑으로 합쳐진 진번의 7현으로 추정된다. 대방 7현은 자비령에서 임진강 사이로 추정되므로 낙랑에 합쳐지지 않은 진번 8현도 임진강 남쪽에 그만한 크기의 지역이 되어야 한다. 차현까지가 유력하다.
7238
 
韓八國
삼국지(289)에는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8국은 대방에 접한 지역으로 묘사되는데, 삼한에 대한 삼국지의 설명에 의하면 그런 지역은 진한이 아니라 마한이다. 한편, 진번군 15개 현 가운데 7현은 낙랑군에 합쳐졌다 나중에 대방군으로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데 나머지 8개 현의 향방은 알 수 없다. 이 진번 8현이 훗날 위나라가 낙랑에 넣으려한 진한 8국이 아닐까?
6631
 
-0091 史記 -0311
北鄰烏桓夫餘東綰穢貉朝鮮真番之利 연나라는 북으로 오환 및 부여와 이웃하고 동으로 예맥, 조선 그리고 진번과 교류하여 이익을 얻었다.
18263
 
-0091 史記 -0283
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爲置吏築鄣塞 연나라가 그 전성기 때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보루과 요새를 쌓았다.
18272
 
-0091 史記 -0195±
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연왕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인을 모아 몽치 머리에 오랑캐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秦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燕과 齊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에 도읍을 정하였다.
18276
 
-0091 史記 -0195+
燕丹散亂遼間 蒲收其亡民 厥聚海東 以集真藩 葆塞為外臣 연과 단의 무리가 요를 어지럽힐 때 만은 유민을 거두어 해동에 모아 眞番에 집결시키고 변방의 외신이 되었다.
18291
 
-0091 史記 -0188-
이 때는 마침 효혜·고후(-195 ~ -188)의 시대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는 곧 위만을 외신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오랑캐의 군장이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이로써 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真番과 臨屯 모두 와서 복속하였다.
18282
 
-0091 史記 -0109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眾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위만조선은)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나라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또 천자에게 배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 교감본(校勘本)에는 眞番旁衆國이라고 되어 있으나 송판본(宋板本)에는 眞番旁辰國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6791 COMMENT
 
-0091 史記 -0109
眾 무리 중 衆의 本字.
6793 COMMENT
 
-0091 史記 -0108
좌장군이 이미 양군을 합하여 맹렬히 조선을 치니, 조선의 相 로인과 相 韓陰과 니계상 參 ·장군 왕겹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 누선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누선은 지금 잡혀 있고 좌장군 단독으로 장졸을 합하여 전투가 더욱 맹렬하여 맞아서 싸우기 두려운데도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 하고 陰·唊·로인이 모두 도망하여 漢에 항복하였다. 로인은 도중에 죽었다.
5936
 
-0091  ❶ 史記(-91)에는 穢, 貉, 朝鮮, 眞番 그리고 臨屯이 나오지만 韓은 나오지 않는다.
-0091 ❶ 史記(-91)에는 穢, 貉, 朝鮮, 眞番 그리고 臨屯이 나오지만 韓은 나오지 않는다.
6792
 
0082 漢書 -1046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教其民以禮義 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殷이 쇠퇴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가서 그 사람들에게 예의, 농사, 양잠 그리고 길쌈을 가르쳤다. 낙랑조선 사람들이 금지된 8가지 조항을 어기면,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고, 상처를 입히면 곡식으로 배상해야 하며,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데 죄를 면하려면 50만을 내야 했다.
18014
 
0082 漢書 -0109
傳子至孫右渠所誘漢亡人滋多又未嘗入見真番辰國欲上書見天子又雍閼弗通 (위만조선은)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나라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또 천자에게 배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과 진국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 사기에 眞番旁衆國 또는 眞番旁辰國으로 되어 있는 것이 여기에는 真番辰國으로 고쳐져 있다. 辰國은 사료상으로 韓보다 먼저 나타난다.
6794 COMMENT
 
0082 漢書 -0108
여름, 니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험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의 대신 성이가 또 반하여 다시 군리를 공격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長과 항복한 상 로인의 아들 最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성이를 주살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임둔·낙랑·현도의 4군을 설치하였다. 定朝鮮爲眞番臨屯樂浪玄菟四郡
18293
 
0082 漢書
樂浪海中有倭人分為百餘國以歲時來獻見雲 낙랑의 바다 가운데에는 왜인이 사는데, 100여 개의 나라로 갈라져 있고 해마다 와서 공물을 바친다.
8251 COMMENT
 
0082 ❶ 漢書(82)에도 朝鮮, 眞番, 辰國, 濊貉, 句驪 그리고 倭까지 나오지만 韓은 나오지 않는다.
0082 ❶ 漢書(82)에도 朝鮮, 眞番, 辰國, 濊貉, 句驪 그리고 倭까지 나오지만 韓은 나오지 않는다.
18292
 
0163- 潛夫論
其後韓西亦姓韓爲衛滿所伐遷居海中 그후 한서도 역시 韓씨 성을 사용하였는데, 위만의 침공을 받아 바다 가운데로 옮겨갔다. ▐ 위만의 침공을 받기 전부터 韓氏 성을 사용하였다는 이야기다. 滿의 성이 나타나는 기록으로는 현재까지 이 기록이 가장 이르다.
8356
 
0265± 魏略 -0323-
옛 箕子의 후예인 朝鮮侯는 周나라가 쇠약해지고 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자신도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燕나라를 역공하여 周 왕실을 받들려 하였다.
18015
 
0265± 魏略 -0209±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그 뒤 20여년이 지나 진승과 항우가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燕·齊·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차츰 準에게 망명하므로 準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5763
 
0265± 魏略 -0195±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準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韓氏라는 姓을 사칭하였다. 準은 해외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 왕조가 교체되었기 때문에 이전의 왕족들이 韓氏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로 잠부론(163-)과는 다르다.
18303
 
0265± 魏略 -0109-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 일찍이 우거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 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조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에 조공하는 번국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18304
 
0265± 魏略 -0109-
▐ 準이 衛滿에게 쫓겨나 韓으로 갔다면, 右渠와 틀어진 歷谿卿도 韓으로 갔을 법한데 辰國으로 간 것을 보면, 韓이 樂浪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가설에 힘이 실린다.
14887
 
0265± ❷ 위만조선과 낙랑에는 韓氏가 있었는데 그 韓氏와 韓을 연결하는 이야기가 魏略(265±)에 등장한다.
0265± ❷ 위만조선과 낙랑에는 韓氏가 있었는데 그 韓氏와 韓을 연결하는 이야기가 魏略(265±)에 등장한다.
원래 조선은 기자의 후예인 韓氏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연나라에서 망명해온 위만에게 쫓겨나 바다를 건너 韓王이 되었고 그래서 그곳을 韓이라 부른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195-년의 이야기인데 사기(-91)와 한서(82)에는 나오지 않고 300여년이나 지난 잠부론(163-)에서 처음 나타난다.
18375
 
0265± ❸ 한나라는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韓王 이야기에 의하면 한나라가 위만 왕조를 정벌한 것은 기자의 후손으로부터 왕위를 탈취한 것을 응징하는 일이 되고 한사군을 설치한 것은 옛 주나라의 봉지를 회복하는 것이 된다. 이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라면, 한나라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8309
 
0289 三國志 -0209±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 진승 등이 일어나 온 천하가 秦에 반기를 드니, 燕·齊·趙의 백성 수만인이 조선으로 피난하였다.
5948
 
0289 三國志 -0209±
辰韓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기를 “옛날의 망명인으로 秦의 고역을 피해 한국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떼어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달라 秦 사람들과 흡사하니 단지 燕과 齊의 명칭만은 아니었다. 낙랑 사람을 阿殘이라 하였는데 동방 사람들은 나라는 말을 阿라 하였으니 낙랑인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5802#5803
 
0289 三國志 -0209±
❺ 삼국지(289)에는 秦의 난리때 燕·齊·趙의 유민이 馬韓으로 오자 辰韓에 가서 살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韓이 한서(82)와 삼국지 사이의 시기에 생겨났다면 이 삼국지의 이야기에 나오는 馬韓과 辰韓은 사기(-91)와 한서에 나오는 眞番과 辰國으로 바꾸어야 어울린다. 여기서 眞番은 馬韓이 되고 辰國은 辰韓이 되었을 가능성이 생긴다.
18365
 
0289 三國志 -0195±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그의 가까운 신하와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韓王이라 칭하였다.
18378
 
0289 三國志 -0195±
▐ 이 기록은 위만의 침공을 받기 전부터 韓氏 성을 사용하였다는 잠부론(163-)의 이야기나 조선의 왕조가 교체되었기 때문에 남아 있던 이전의 왕족들이 韓氏 성을 사용하였다는 위략(265±)의 이야기와 모두 어울리지 않는다. 韓氏가 도망가 나라를 세운 곳이 마침 韓이라거나 쫓겨난 왕이 세운 나라 이름을 남은 왕족들이 성씨로 사용한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韓氏가 도망가 韓王을 칭하면서 그곳이 韓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해야 자연스럽다.
18379
 
0289 三國志 -0195±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그 뒤 準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 왕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는 부분에서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생긴다.
18388
 
0289 三國志 0245+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신지와 한인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2군은 마침내 韓을 멸하였다.
18368
 
0289    三國志 0245+
0289 三國志 0245+
❻ 한나라는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하고 낙랑, 眞番, 임둔 그리고 현도군을 설치했다가 -82년에 임둔과 함께 眞番을 폐지하고 眞番 15현 중 7현만 낙랑에 소속시킨 바 있다. 그 후 204~220년에 공손씨가 낙랑의 둔유현 이남 7개 현을 떼어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이 대방 7현은 낙랑에 편입된 眞番 7현으로 보인다. 眞番의 나머지 8현은 245년의 분쟁에 나오는 辰韓(馬韓) 8국과 연결지을 수 있다. 임진강에서 차현까지의 지역이다.
11364
 
0289 三國志 0245+
❼ 마침내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낙랑에 합쳐지지 않고 빠진 眞番 8현을 되찾기 위해 낙랑은 韓王 이야기를 만들어 이곳을 韓이라 주입했다. 韓은 낙랑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세력이 커져 辰國을 통합하고 辰韓이라 했다. 기존의 韓은 馬韓이라 하여 이 辰韓과 구별했다.'
6965
 
0289 三國志
其北方近郡諸國差曉禮俗 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 그 나라 북방의 군에 가까운 여러 나라들은 그런대로 약간의 예속이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은 흡사 죄수와 노비가 모여 사는 곳과 같다. ▐ 낙랑의 문물에 접한 북부 지역부터 정치적 성장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것으로 옛 眞番 지역이 남쪽의 辰國을 통합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6764
 
0289 三國志
각각 장수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 하였다. 여러 韓國의 신지에게는 읍군의 인수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을 주었다. 풍속은 의책을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들도 郡에 가서 조알할 적에는 모두 의책를 빌려 입으며 자신의 인수를 차고 의책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명이나 된다.
5802#18323
 
0289 三國志
❹ 낙랑 주변의 추장들은 낙랑에 와서 인사를 하고 벼슬을 받고 돌아가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는 데 썼다. 그것을 이용해 낙랑의 韓氏들이 韓王 이야기를 眞番과 辰國으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고 나라 이름을 韓으로 바꾸도록 유도했을 수 있다. 그러려면 추장들에게 眞番이나 辰國 대신 韓이 들어간 벼슬을 내려주기만 하면 된다. 대조영이 처음에 나라를 세워 振國이라 했다가 당나라로부터 渤海郡王으로 책봉되자 국호를 渤海로 바꾼 사례와 비슷하다.
18372
 
0289 三國志 辰國 1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 둘째는 辰韓, 세째는 弁韓인데, 辰韓은 옛 辰國이다.
5762 COMMENT
 
0289 三國志 辰國 2
辰王治月支國 진왕은 월지국을 통치한다.
5939 COMMENT
 
0289 三國志 辰國 3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진한과 변한 중에서 12국은 진왕에게 신속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왕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5802#5804 COMMENT
 
0289 三國志 辰國 4
❽ 삼국지(289)는 弁辰韓合 24개 나라를 소개하며 이 중 12개 나라가 월지국을 통치하는 辰王에게 소속되었다고 한다. 24개 나라 가운데 弁辰이 붙은 나라가 12개고 그렇지 않은 나라가 12개다. 弁辰이 붙지 않은 12개 나라를 辰韓으로 보면 辰王에게 소속된 나라는 이 辰韓 12개 나라가 되어 자연스럽다. 그런데 辰王은 辰韓에 있지 않고 마한인 월지국에 있다. 이는 월지국의 통치자를 辰王으로 삼아 통합된 辰國을 辰韓으로 관할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6762
 
0289 ❶ 韓은 三國志(289)에 가서야 비로소 나타난다.
0289 ❶ 韓은 三國志(289)에 가서야 비로소 나타난다.
따라서 韓은 한서와 삼국지 사이의 시기에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다. 眞番은 반대로 사기와 한서에서 자주 거론되다 삼국지부터는 나타나지 않는다. 있던 땅이 없어지거나 없던 땅이 새로 생겨나지는 않을테니 眞番이 韓으로 불리게 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5937
 
0289 三國志(289) 요약 1
0289 三國志(289) 요약 1
扶餘의 북쪽에는 弱水가 있고 서쪽에는 鮮卑가 있으며 동쪽에는 挹婁가 있고 남쪽에는 高句麗가 있다. 高句麗의 북쪽에는 扶餘가 있고 동쪽에는 沃沮가 있으며 남쪽에는 朝鮮과 濊가 있다. 朝鮮의 동쪽이 다 濊다. 沃沮의 북쪽에는 扶餘와 挹婁가 있고 서쪽에는 高句麗가 있으며 남쪽에는 濊가 있다. 濊의 북쪽에는 高句麗와 沃沮가 있고 남쪽에는 辰韓이 있다.
7102 COMMENT
 
0289 三國志(289) 요약 2
朝鮮을 멸하고 樂浪郡, 真藩郡 그리고 臨屯郡을 설치하였다. 이듬해에는 沃沮에 玄菟郡을 설치하였다. 얼마 후 真藩과 臨屯을 폐하여 樂浪과 玄菟에 합쳤다. 玄菟는 高句麗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沃沮는 樂浪에 소속시켰다. 다시 樂浪의 단단대령 동쪽을 갈라 동부도위를 설치하였다가 濊人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樂浪郡의 남쪽은 분할하여 帶方郡을 설치하였다.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馬韓, 辰韓 그리고 弁韓으로 이루어져 있다. 馬韓은 서쪽이고 辰韓은 馬韓의 동쪽이다.
5813 COMMENT
 
0445 後漢書 -0195±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 과거에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자 남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가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韓王이 되었다. ▐ 삼국지와는 이러한 차이가 있다. 其左右宮人➔其餘衆數千人┆居韓地➔攻馬韓破之┆自號韓王➔自立爲韓王
5940 COMMENT
 
0445 後漢書 -0195+
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 준의 후손이 절멸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辰王이 되었다. ▐ 삼국지와는 이런 차이가 있다.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馬韓人復自立爲辰王
6797 COMMENT
 
0445 後漢書 -0082
罷臨屯眞番 以幷樂浪玄菟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18423
 
0445 後漢書
地合方四千餘里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전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辰國이다. ▐ 삼국지와는 이러한 차이가 있다. 辰韓者古之辰國也➔東西以海爲限皆古之辰國也 ▐ 명칭상 辰國이 韓으로 통합되어 辰韓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1923 COMMENT
 
0445 後漢書
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辰王으로 삼아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는데, 여러 나라 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 진왕에 대해 삼국지와는 이런 차이가 있다. 治月支國➔都目支國┆其十二國屬辰王➔盡王三韓之地 ▐ 辰韓이 韓의 일부분이니 辰王도 韓의 일부분을 다스리는 게 자연스럽다.
6034 COMMENT
 
0509~0522 王氏 묘지명
○ 樂浪名邦 王氏名宗 낙랑은 이름있는 나라이며 왕씨는 이름 있는 집안이다. ○ 其先出自有殷 周武王剋商 封箕子於朝鮮 子孫因而氏焉 그 선조는 은으로부터 나왔으니 주무왕이 상을 정복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는데, 자손이 이로 인하여 성씨를 삼았다. ○ 殷有三人 周訪九疇 只族王家 藉冑鮮侯 은나라에 세 어진 신하가 있어 주나라가 9주를 물었다. 그 집안이 성을 왕씨라 하고 자손들이 조선후가 되었다. ▐ 準의 가문이 韓氏 성을 썼다는 위략의 이야기와 어긋난다.
18485
 
0539 樂浪郡朝鮮縣人韓顯度
元象二年四月十七日乐良郡朝鲜县人韩显度铭记 ▐ 準의 가문이 썼다는 韓氏와 위만조선의 韓陰 그리고 낙랑의 韓氏는 어떤 관계일까?
6796
 
1145 三國史記 295-07
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慰禮城의 민호들을 옮겼다.
16839
 
1145 三國史記 295-08
馬韓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遂畫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으니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 마한의 도읍은 금강 남쪽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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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308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馬韓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國邑을 병합하였다. ▐ 마한의 도읍으로는 물길과 벌이 만나는 강경 일대가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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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의  변천
韓의 변천
❶ 넓은 의미의 韓 : 三韓¹=馬韓+辰韓+弁韓=韓國¹ ➔ 三韓²=百濟+新羅+任那=韓國² ➔ 三韓³=百濟+新羅+髙麗 ❷ 좁은 의미의 韓 : 韓國₁=馬韓 ➔ 韓國₂=百濟 ➔ 韓國₃=大韓民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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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의 변천
韓은 삼국지(289)에 처음 나타날 때 반도 중남부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한에는 馬韓, 辰韓 그리고 弁韓이 있었고 이 셋을 통틀어 三韓이라 불렀다. 이 삼한은 韓國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이 해체되자 한국은 거기에서 나온 백제, 신라 그리고 임나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 되었다. 한편, 삼한은 삼한의 한 축이던 임나가 신라에 병합되자 점차 백제, 신라 그리고 고려를 아울러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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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의 변천
1897년 이조가 선포한 大韓帝國의 어원은 三韓이다. 1919년 임시정부는 이것을 이어 大韓民國이라 했고 1948년 반도 남부에 수립된 국가도 이 국호를 계승하였다. 대한민국은 간단히 韓國이라 부른다. 이후 한국과 반도 북부에 수립된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 정통성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韓은 한국에서 우리를 지칭하는 유일한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전에는 스스로를 朝鮮人이라 불렀는데 민족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남북은 각각 韓民族과 朝鮮民族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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