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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la > 貉, 穢, 鮮 그리고 韓의 뿌리를 찾아서 |
① 發(麃) → 貉(鮮) ② 長夷 → 穢 ③ 鳥夷(皮服) → 良夷(在子) → 朝鮮(文皮) → 樂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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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 魏略 韓準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²韓地 自號韓王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주나라로부터 조선에 봉해진 箕子의 후예 韓氏가 韓國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중국이 韓國 내정에도 간섭할 명분을 제공한다.
이 韓國이 기록에 등장하면서 사기와 한서에 나오던 眞番은 기록에서 사라지는데, 있던 땅이 없어지거나 없던 땅이 새로 생기거나 하지는 않을테니 眞番이 韓國으로 불리게 되었을 가능성이 생긴다.
2841#18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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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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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0316 ❸良夷樂浪之夷也
▐ 周 초기에 대동강 유역에 良夷가 있었는데 在子라 불리는 점박이 물범을 바쳤다. 在子는 이후 鮮이라 불리게 되는데 그래서 良夷도 鮮을 조공한다는 뜻으로 朝鮮이라 불리게 되었다. 漢이 이곳을 통치하면서부터는 樂浪이라 불렸다.
┆良夷在子 在子幣身人首 脂其腹炙之藿┆良夷樂浪之夷也 貢奇獸┆發朝鮮之文皮┆樂浪郡 故朝鮮國也┆東綰穢貉·朝鮮·真番之利┆鮮魚名 出貉國
2841#3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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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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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의 변천
韓은 삼국지(289)에 처음 나타날 때 반도 중남부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한에는 馬韓, 辰韓 그리고 弁韓이 있었고 이 셋을 통틀어 三韓이라 불렀다. 이 삼한은 韓國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이 해체되자 한국은 거기에서 나온 백제, 신라 그리고 임나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 되었다. 한편, 삼한은 삼한의 한 축이던 임나가 신라에 병합되자 점차 백제, 신라 그리고 고려를 아울러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2841#8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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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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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0 史記(-91)
帝舜은 하늘에 禹를 천거하여 후계자로 삼았다. 17년 뒤 帝舜이 세상을 떠났다. 3년 상을 마치고 禹는 舜의 아들 商均에게 양보하고 陽城으로 피했다.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商均을 떠나 禹에게 인사를 드렸다. 禹는 그제야 천자 자리에 올라 남면하고 천하에 임했다. 나라 이름을 夏后라 하고 성을 姒씨라 했다.
2841#22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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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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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0 ◾鳥夷
鳥夷皮服을 島夷皮服으로 표기한 기록도 있으나 그것은 揚州의 島夷卉服과 혼동한 때문인 듯하다.
鳥夷는 순임금때의 北山戎發息慎東長鳥夷에 나오는 鳥夷로 발해 동쪽에서 바닷길로 온 듯하다.
발해 바깥에는 큰 섬이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해로로 사신을 보내는 종족의 이름으로는 島夷가 어울리지 않는다.
2841#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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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0 ◾入于河
尚書와 漢書에는 九州의 공물 운송 경로가 모두 강으로 끝나 있다. 그러나 史記의 冀州만 바다로 끝나 있다. 따라서 이것은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 黃河는 冀州를 둘러싸고 흐르는데 공물 운송이 黃河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長夷와 鳥夷가 발해 바깥에서 해로로 사신을 보냈다면 황하로 들어와 하나라까지 거슬러 올라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入于海보다 入于河가 어울린다.
碣石은 당시 황하 하구에 있었을 것인데, 황하의 물길이 계속 변했기 때문에 지금은 알기 힘들다.
2841#3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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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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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0 史記 夏本紀 揚州
淮海維揚州 彭蠡既都 陽鳥所居 三江既入 震澤致定 竹箭既布 其草惟夭 其木惟喬 其土涂泥
회수와 대해 사이에는 양주가 있다. 팽려가 호수가 되자 기러기가 살게 되었다. 세 개의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진택은 잘 정리되었다. 대나무가 곳곳에서 자라고, 들풀은 무성하며, 나무는 크게 자란다. 토질은 습기가 많은 진흙땅이다.
2841#3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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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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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0 史記 夏本紀 揚州
貢金三品 瑤·琨·竹箭 齒·革·羽·旄 島夷卉服 其篚織貝 其包橘·柚錫貢 均江海 通淮·泗
공물은 세 종류의 금속, 옥돌, 대나무, 상아, 가죽, 깃털, 검정소의 꼬리, 도이족이 입는 풀로 짠 옷, 대광주리에 담은 오색 비단이다. 때로는 포장한 귤과 유자도 공물로 바쳤다. 이 공물들은 장강과 대해를 따라서 회수와 사수로 들어온다.
2841#3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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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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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 逸周書
▐ 山戎은 콩, 發人과 稷慎은 사슴류 그리고 穢人과 良夷는 어류를 보냈다.
순임금 때 山戎, 發 그리고 息慎은 육로로 사신을 보내고 長夷와 鳥夷는 해로로 사신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어류를 보낸 穢人과 良夷는 해로를 통해 사신을 보낸 長夷 및 鳥夷에 각각 대응시킬 수 있다.
2841#31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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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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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5 管子 揆度
환공이 관자에게 물었다. “내가 듣기로 해내에 7가지 옥폐가 있다고 하는데, 들어 볼 수 있겠는가?” 관자가 대답하였다. “음산의 연민이 하나요, 연나라 자산의 백금이 하나요, 발조선의 문피가 하나요, 여수와 한수 우구에서 나는 황금이 하나요, 강양의 진주가 하나요, 진나라 명산의 증청이 하나요, 우씨 변산의 옥이 하나입니다.”
2841#3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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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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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5 管子 輕重甲
오과 월이 입조하지 않으면 珠象을 화폐로 사용하고, 발과 조선이 입조하지 않으면 文皮毤로 옷을 해입기를 청하여 그것을 화폐로 사용하고, 옹씨가 입조하지 않으면 白璧을 화폐로 사용하고, 곤륜이 입조하지 않으면 璆琳琅玕을 화폐로 사용하면 됩니다.
손에 쥐고 있으면 보이지 않고 입에 머금고 있어도 보이지 않지만 천금의 값어치가 나가는 것이 珠입니다. 그렇게 하면 8천리 떨어진 오와 월이 입조할 것입니다.
2841#3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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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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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5 管子 輕重甲
一豹之皮容金而金也 然後八千里之發朝鮮可得而朝也 懷而不見於抱 挾而不見於腋 而辟千金者 白璧也 然後八千里之禺氏可得而朝也 簪珥而辟千金者 璆琳琅玕也 然後八千里之崑崙虛可得而朝也 故物無主 事無接 遠近無以相因 則四夷不得而朝矣┆표범의 가죽을 금으로 바꿔야 금이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8천리 밖의 발·조선이 입조할 것입니다.
2841#3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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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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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5 管子 輕重甲
품에 안고 있으면 보이지 않고 옆구리에 끼고 있어도 보이지 않지만, 천금을 물리치는 것이 白璧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8천리 밖의 옹씨가 입조할 것입니다. 비녀나 귀고리로 쓰지만 천금을 물리치는 것이 璆琳琅玕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8천리 밖의 곤륜이 입조할 것입니다. 따라서 물건에 가격이 없고 교환 가치가 없으면 원근의 사람들이 서로 거래하지 않을 것이니, 사이가 입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2841#3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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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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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5 ◾發朝鮮
일주서에 나오던 發人과 良夷가 나오지 않고 發朝鮮이 등장했다. 發朝鮮의 發은 發人일 것이니 朝鮮은 良夷일 가능성이 있다. 穢와 貉을 묶어 穢貉이라 한 것처럼 發과 朝鮮을 묶어 發朝鮮이나 했다는 것이다.
2841#3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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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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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5 ◾文皮
朝鮮이 良夷라면 發朝鮮에서 난다는 文皮 또는 豹之皮는 良夷가 보내던 在子에 대응된다. 앞서 在子는 점박이 물범으로 판단했으므로 여기에 나오는 豹는 海豹란 뜻이 된다. 점박이 물범은 표범처럼 무늬가 있어 바다표범 또는 海豹라고도 불리기 때문이다.
앞서 일주서의 良夷를 순임금 시기의 鳥夷에 대응시킨 바 있는데, 그렇다면 發朝鮮의 文皮는 良夷의 在子를 거쳐 鳥夷의 皮服까지 연결될 수 있다.
284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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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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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5 ◾發과 貉
앞서 순임금 때의 長夷 및 鳥夷를 각각 일주서의 穢人 및 良夷에 대응시킨 바 있다.
관자에서는 朝鮮이 새로 나타나는데, 朝鮮은 훗날 樂浪으로 바뀌고 서진 시기의 주석에서 良夷는 樂浪 오랑캐라고 했으므로, 朝鮮은 良夷다.
순임금 때와 일주서에 나오던 發은 관자에서 朝鮮과 결합하여 發朝鮮으로 나타나는데, 관자에서 새로 보이는 貉일 가능성이 있다.
2841#3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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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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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3 山海經 朝鮮(2)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人 동해안 북해의 귀퉁이에 조선과 천독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 사람들을 좋아한다.
▐ 天毒는 중국 동남부에 있었다. 산해경에는 중국에 없는 西海가 나오는 등 기술이 정확하지 않다.
2841#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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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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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6 竹書紀年
▐ 竹書紀年은 黃帝의 시대로부터 戰國時代 魏 襄王(-318~-296)에 이르기까지의 일이 저술되어 있다. 279년에 魏 襄王의 무덤에서 대나무에 기록된 형태로 발견되었다. 이것을 학자들이 책으로 편찬하였는데 이 책도 점차 분실되어 남송시대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심약의 주가 붙은 今本竹書紀年이 있는데 이는 명나라 때의 위작으로 간주된다. 1917년에 왕국유가 고서에 인용된 기록을 모아 古本竹書紀年을 편찬하였는데, 여기에는 箕子 이야기가 없다.
2841#29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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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3 魏略(265±)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 예(禮)가 말리므로 중지하였다.
2841#18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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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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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9± 三國志(289) 秦
辰韓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기를 “옛날의 망명인으로 秦의 고역을 피해 한국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떼어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달라 秦 사람들과 흡사하니 단지 燕과 齊의 명칭만은 아니었다. 낙랑 사람을 阿殘이라 하였는데 동방 사람들은 나라는 말을 阿라 하였으니 낙랑인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2841#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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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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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5± 史記(-91)
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연왕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인을 모아 몽치 머리에 오랑캐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秦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燕과 齊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에 도읍을 정하였다.
2841#2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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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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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8⁻ 史記
이 때는 마침 효혜·고후(-195 ~ -188)의 시대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는 곧 위만을 외신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오랑캐의 군장이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이로써 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真番과 臨屯 모두 와서 복속하였다.
2841#18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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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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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7 後漢書(445)
왕경은 자가 중통인데 낙랑 남감 사람이다. 8세조 仲은 낭야 불기 사람인데 도술을 좋아하고 천문에 밝았다. 여씨가 횡포를 부리자 유애왕 襄이 군사를 일으키려 여러 차례 仲에게 자문을 구했다. 제북왕 흥거가 반란을 일으켜 병사의 일을 그에게 맡기려하자 화가 미칠까 두려워 바다 건너 낙랑의 산 속으로 도망가 정착해 살았다.
▐ 이때는 낙랑군이 설치되기 전이므로 여기에 나오는 낙랑은 훗날 낙랑이 되는 조선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2841#7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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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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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7⁻ 尙書大傳
武王勝殷 繼公子祿父 釋箕子囚 箕子不忍周之釋 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朝鮮封之
箕子既受周之封 不得無臣禮 故於十三祀來朝
무왕은 은을 이기자 공자 녹부에 이어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석방된 것을 언짢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그 소식을 듣고 조선을 그의 영지로 내려 주었다. 기자는 이제 주나라로부터 영지를 받았으니 신하의 예의를 안 지킬 수 없어 무왕 13년에 조배하러 왔다.
2841#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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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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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7⁻ ◾書→尙書→書經
書는 虞書 5편, 夏書 4편, 商書 17편 그리고 周書 32편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堯舜시대(-2324~-2184), 夏나라(-2070~-1600), 商나라(-1600~-1046) 그리고 周나라(-1046~-0771)의 정사에 관한 문서를 모아 孔子(-551~-479)가 편찬했다고 전해진다.
戰國시대(-403~-221)에는 공문서라는 의미로 書라고 했다가 유학을 숭상하고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漢나라(-202~220) 때에 유학자들이 숭상해야 할 고대의 ...
2841#2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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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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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魏略(265±)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
일찍이 우거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 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조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에 조공하는 번국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2841#5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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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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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 史記(-91)
左將軍이 양군을 합하여 맹렬히 朝鮮을 치니, 朝鮮의 相 路人, 相 韓陰, 尼谿相 參 그리고 將軍 王唊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 樓船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樓船은 지금 잡혀 있고 左將軍 단독으로 장졸을 합하여 전투가 더욱 맹렬하여 맞아서 싸우기 두려운데도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
하고 陰·唊·路人이 모두 도망하여 漢에 항복하였다. 路人은 도중에 죽었다.
2841#4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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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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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 漢書(82)
玄菟郡(武帝元封四年開) 縣三 高句驪 上殷台 西蓋馬
현도군(무제 원봉 4년에 설치했다)
현이 세 개다. 고구려 상은태 서개마
▐ 한서는 고구려가 최초로 나타나는 기록이다.
다른 군과 통합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현의 수는 대체로 군을 설치한 뒤 줄어든다. 그렇다면 고구려현은 -107년에 현도군을 설치할 때 설치된 것이다.
2841#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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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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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 ◾高句麗
산 위에 쌓은 城은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高城이라 할 만하다. 고구려에서는 城을 구루라 했으므로 高城은 高구루가 된다. 구루를 삼국지(289) 시기에는 溝婁라 표기했지만 -107년에는 句驪라 표기했을 수 있다. 이것이 高句麗의 어원인 듯하다. 오녀산성이 이 조건에 부합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로 城 아래 물가에 살았기 때문에 忽本이란 沸流谷의 지명을 사용하였고 高句麗는 한나라에 의해 주로 사용되었을 듯하다.
2841#3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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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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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1 史記 宋微子世家
▐ 殷 帝乙의 큰아들이자 紂王의 배다른 형인 微子 開는 紂王에게 여러 차례 간하다 듣지 않자 떠났다.
紂王의 친척인 箕子도 紂王에게 여러 차례 간하다 듣지 않자 미친 척하며 노예가 되었다.
역시 紂王의 친척인 比干도 箕子가 노예가 되는 것을 보고 간하다 죽임을 당했다.
周 武王이 殷 紂王을 토벌하자 微子는 투항하였다. 武王은 紂王의 아들 武庚祿父에게 殷 왕조의 제사를 잇게 하고 箕子를 방문하여 鴻範九等을 듣고 朝鮮에 봉했으나 신하로 대하지는 않았다.
2841#1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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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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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1 史記 宋微子世家
▐ 尙書에는 箕子가 朝鮮으로 달아나자 朝鮮에 봉했다고 되어 있으나 史記에는 箕子를 방문하여 鴻範九等을 듣고 난 후 朝鮮에 봉했다고 되어 있다.
-1046년경에는 周의 영향력이 대동강은 물론 요하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尙書의 이야기가 더 자연스럽다.
또 箕子로부터 鴻範九等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尙書에 없던 것인데, 箕子가 달아났다는 이야기와 모순되기 때문에 史記에서는 箕子를 방문했다는 이야기로 바뀐 듯하다.
2841#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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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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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 漢書(82)
왕망(9~23) 초에 高句驪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법을 어기고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高句驪侯 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왕망이 高句驪를 下句驪로 이름을 바꾸고 천하에 알리게 하였다. 이에 貉人이 변경을 더욱 침범하게 되었다.
2841#3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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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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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8 ◾發人
朝鮮 洌水는 대동강이다.
燕은 전국 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동쪽으로 영토를 넓혔는데, 첫 번째는 東胡를 내쫓고 산해관에서 천산 산맥까지 넓힌 것이고 두 번째는 真番과 朝鮮을 복속시키고 천산 산맥에서 대동강까지 넓힌 것이다.
순임금 시기에 북으로 山戎, 發 그리고 息慎이 있었다고 하므로 發의 영역으로는 燕이 두 번째로 넓힌 지역이 어울린다.
이 지역이 바로 燕之外郊朝鮮洌水之間인 듯하다.
이는 앞서 發을 貉으로 추정한 것에 부합한다.
2841#3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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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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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 說文解字 ⤵
▐ 說文解字는 중국의 가장 오랜 자전으로 중국 후한의 經學者로 알려진 許愼(58~148)이 필생의 노력을 기울여 저술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설문해자는 30년에 낙랑군에서 빠진 東暆와 邪頭昧가 각각 樂浪과 薉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30년을 전후한 시기의 자료를 바탕으로 쓴 듯하다.
2841#3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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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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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 ◾周成王時 揚州獻鰅
逸周書는 周文王(-1152~-1056)부터 周景王(-0544~-0520)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한 문헌이다. 그러나 王會解에 나오는 「揚州禺 禺 魚名」은 설문해자에 나오는 「周成王時(-1055~-1021) 揚州獻鰅」에 대응되므로 逸周書의 王會解는 기본적으로 周成王時(-1055~-1021)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거기에 들어있는 穢人과 良夷에 대한 이야기에도 적용된다.
2841#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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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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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 ◾貉國
이 당시 貉人이 세운 高句驪가 있었지만 황해에는 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小水貊처럼 貉人의 분포는 高句驪 바깥에도 있었기 때문에 황해에 접한 貉人도 있었을 듯하다. 여기서 말하는 貉國은 그들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管子에서 朝鮮과 함께 發朝鮮으로 언급되며 文皮를 조공했다는 發이나 方言에서 燕之外郊와 朝鮮 洌水 사이에 살았다는 發人이 모두 이들인 듯하다.
2841#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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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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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 ◾貉國
일주서에는 發人이 사슴류인 麃를 보낸다고 되어 있어 發이 貉이라면 貉國에서 어류인 鮮이 난다는 설문해자와 모순되어 보인다.
이 문제는 發 또는 貉이 내륙과 해양 모두에 걸쳐 분포했다는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다.
息慎이 중국에 이르는 경로에 있는 산악 지역의 發은 麃를 보냈고 朝鮮이 중국에 이르는 경로에 있는 해안의 貉에서는 鮮이 많이 났다는 이야기다.
2841#3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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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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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2 漢書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 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谷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은나라 도가 쇠퇴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사람들에게 예의, 농사, 양잠 그리고 길쌈을 가르쳤다. 낙랑조선 사람들이 금8조를 범하면,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고 상처를 입히면 곡식으로써 배상하며 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가노로 삼고 여자는 비로 삼되 속죄받으려면 한 사람당 50만을 내야 했다.
2841#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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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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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2 漢書
傳子至孫右渠所誘漢亡人滋多又未嘗入見真番辰國欲上書見天子又雍閼弗通
(위만조선은)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나라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또 천자에게 배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과 진국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 사기에 眞番旁衆國 또는 眞番旁辰國으로 되어 있는 것이 여기에는 真番辰國으로 고쳐져 있다. 辰國은 사료상으로 韓보다 먼저 나타난다.
2841#6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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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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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2 漢書
여름, 니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험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의 대신 성이가 또 반하여 다시 군리를 공격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長과 항복한 상 로인의 아들 最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성이를 주살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임둔·낙랑·현도의 4군을 설치하였다.
定朝鮮爲眞番臨屯樂浪玄菟四郡
2841#18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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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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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2 漢書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浸多 至六十餘條
처음에는 요동에서 관리를 뽑아왔는데 사람들이 문을 닫아걸지 않는 것을 보고 관리나 상인들이 밤에 도둑질을 하여 풍속이 나빠졌다. 법을 어기는 일이 많아지자 법조문이 60조로 불어났다.
▐ 위만조선때 8조에 불과했던 법률이 한나라의 통치 이후 60조로 늘어났다.
2841#19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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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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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0 前漢紀
朝鮮本秦時屬遼東 漢興以爲其遠難守 故遼水為塞 盧綰之反也 燕人衛滿亡命 聚黨千餘人 在遼居秦故地 稍稍侵屬其東小蠻夷 而王之
조선은 원래 진나라 때 요동에 속했는데 한나라 때는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요수를 요새로 삼았다. 노관이 반란을 일으키자 연나라 사람 위만이 천여명의 무리를 모아 망명했는데 요에 있으면서 진나라의 옛 땅에 거주했다. 점점 그 동쪽의 작은 오랑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었다.
▐ 滿의 성은 나타나나 準에 대한 언급은 없다.
2841#6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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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濊
▐ 삼국지의 濊에 대한 설명 ᐥ其海出班魚皮ᐥ에 나오는 班魚는 설문해자에 ᐥ鰅 魚名 皮有文 出樂浪東暆ᐥ라고 나오는 鰅다. 일주서에는 ᐥ揚州禺 禺 魚名ᐥ으로 나오는 禺였다.
일주서에는 또 ᐥ良夷在子 在子幣身人首 脂其腹炙之藿ᐥ이라고 하여 점박이 물범 在子를 소개하고 있어 禺가 이 점박이 물범일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렇다면 삼국지의 班魚는 斑纹鱼라고도 불리는 斑鱼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지금도 연해주의 원주민들은 물고기 가죽을 만드는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2841#3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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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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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 韓
삼국지(289)에는 秦의 난리때 燕·齊·趙의 유민이 馬韓으로 오자 辰韓에 가서 살게 했다고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馬韓과 辰韓은 각각 사기(-91)와 위략(265)에 나오는 眞番 및 辰國과 어울린다. 사기에는 위만이 燕과 丹의 유민들을 真藩에 모았다고 되어 있고 위략에는 위만의 손자 우거와 사이가 벌어진 역계경이 동쪽의 辰國으로 갔다고 되어 있다. 韓이 한서(82)와 삼국지 사이의 시기에 생겨났다면 眞番이 馬韓이 되고 辰國이 辰韓이 되었을 듯하다.
2841#2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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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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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 韓
한나라는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眞番, 임둔 그리고 현도군을 설치했다가 -82년에 임둔과 함께 眞番을 폐지하고 15현 중 7현만 낙랑에 소속시킨 바 있다. 그 후 204~220년에 공손씨가 낙랑의 둔유현 이남 7개 현을 떼어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이 대방 7현은 낙랑에 편입된 眞番 7현으로 보인다. 眞番의 나머지 8현은 245년의 분쟁에 나오는 馬韓 8국과 연결지을 수 있다.
임진강에서 차현까지의 지역으로 추정된다.
2841#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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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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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 韓
중국은 전쟁 전에 역사를 날조하여 명분을 먼저 만들어놓는 경향이 있다.
漢나라가 위만조선을 치기 전에는 商나라 기자가 조선으로 가자 周나라가 그를 조선에 봉했다는 이야기를 날조했고, 隋나라가 고구려를 치기 전에는 秦나라 장성이 고구려 영토 내에 있는 옛 漢나라 수성현의 갈석에서 시작되었다고 역사를 날조했다.
魏나라가 한국을 치기 전에 기자의 후예가 조선에서 쫓겨나 한국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생겨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2841#15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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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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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 韓
낙랑 주변의 추장들은 낙랑에 와서 인사를 하고 벼슬을 받고 돌아가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는 데 그것을 이용하였다. 벼슬을 줄 때 낙랑의 韓氏들은 韓王 이야기를 眞番과 辰國으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고 나라 이름을 韓으로 바꾸도록 유도했을 수 있다. 그것은 추장들에게 眞番이나 辰國 대신 韓이 들어간 벼슬을 내려주기만 하면 가능하다.
대조영이 처음에 나라를 세워 振國이라 했다가 당나라로부터 渤海郡王으로 책봉되자 국호를 渤海로 바꾼 사례와 비슷하다.
2841#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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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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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 韓
삼국지(289)는 弁辰韓 24개 나라를 소개하며 이 중 12개 나라가 월지국을 통치하는 辰王에게 소속되었다고 했다. 24개 나라 가운데 弁辰이 붙은 나라가 12개고 그렇지 않은 나라가 12개다. 弁辰이 붙지 않은 12개 나라를 辰韓으로 보면 辰王에게 소속된 나라는 이 辰韓 12개 나라가 되어 자연스럽다.
그런데 辰王은 辰韓에 있지 않고 마한인 월지국에 있었다. 이는 월지국의 통치자를 辰王으로 삼아 통합된 辰國을 辰韓으로 관할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2841#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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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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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0316 ◾良夷 → 朝鮮 → 樂浪
왕망이 樂浪을 樂鮮으로 바꾼 사례를 통해 樂浪은 어근 浪에 꾸밈말 樂이 붙어 만들어진 말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周 시기의 良夷가 樂浪 오랑캐였다는 이 주석을 통해서는 漢 시기에 나타난 樂浪의 浪이 良夷의 良을 달리 표기한 말일 가능성이 생긴다.
樂浪은 朝鮮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周 시기에 대동강 유역에 良夷가 있었는데 朝鮮으로도 불리다 漢 시기에는 樂浪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2841#6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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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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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0316 ◾在子와 鮮은 점박이 물범
鮮은 물고기의 한 종류인데, 글자도 그 물고기 모양을 따서 만들었다. 이 鮮은 후한 시기에 貉國에서 많이 났는데, 서주 시기에는 인접한 朝鮮에서 많이 났고 그래서 鮮을 朝貢하는 종족이라는 뜻으로 朝鮮이란 명칭이 생겨났다. 朝鮮은 그 전에 良夷라고 했는데, 그때는 在子로 불리는 점박이 물범을 주나라에 바쳤다.
그렇다면 良夷의 在子는 朝鮮의 鮮이고 오늘날의 점박이 물범이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2841#15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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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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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 魏略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가 약해지고 연이 스스로를 높여 왕을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 하자 조선후도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역공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대부 례가 말리므로 중지하였다.
2841#7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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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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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 ◾箕子
箕子는 殷 紂王의 폭정에 반대하다 노비가 되었다. 殷은 商이라고도 하는데, 결국 周의 武王에 의해 -1046년경에 멸망당했다. 이때 箕子의 행방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없었는데, -195년경에 燕의 滿이 朝鮮으로 가 왕이 되자, 이에 영향을 받아 箕子 또한 朝鮮으로 달아났고 그러자 武王이 朝鮮에 봉했다는 이야기가 漢 文帝(-180~-157) 시기에 만들어져 尙書大傳에 수록되었다.
今本竹書紀年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尙書大傳 이후에 추가된 듯하다.
2841#22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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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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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 ◾箕子
이후 유학을 숭상하는 漢의 분위기 속에서 箕子가 鴻範九等을 만들어 武王에게 전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져 史記(-91)에 수록되었고, 漢이 滿朝鮮을 병합한 -108년 이후에는 滿朝鮮의 犯禁八條도 箕子가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져 漢書(82)에 수록되었다. 이어서 滿에 의해 멸망당한 朝鮮의 왕조가 箕子의 후손이었다는 이야기까지 만들어져 魏略(265)에 수록되었다.
2841#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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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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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 ◾韓
한나라는 -108년에 위만조선을 정벌하고 낙랑, 眞番, 임둔 그리고 현도군을 설치했다. -82년에는 임둔과 함께 眞番을 폐지하고 眞番 15현 중 7현만 낙랑에 소속시켰다.
낙랑은 眞番의 나머지 8현을 되찾기 위해 '원래 조선은 기자의 후예인 韓氏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연나라에서 망명해온 위만에게 쫓겨 바다 건너 韓王이 되었고 그래서 그곳을 韓이라 부른다'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이어 眞番 남쪽에 있던 辰國도 韓으로 묶어 辰韓이라 했다.
2841#16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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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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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서로 바다가 경계이고 남으로 倭와 접한다.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이 있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伯濟國을 비롯한 54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큰 나라는 만여 집이고 작은 나라는 수 천 집인데 합하면 10여만 집이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는데 斯盧國을 비롯한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변한도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진한과 변한의 큰 나라는 4-5천 집이고 작은 나라는 6-7백 집이어서 합하면 4-5만 집이다.
2841#2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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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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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9 三國志(魏略)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준왕은 그의 근신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건너가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였다.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不改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준의 아들과 친척 중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한씨 성을 바꾸지 않았다. 준은 해외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왕래하지 않았다.)
2841#18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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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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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0522 樂浪 遂城人 王氏 墓誌銘
樂浪名邦 王氏名宗 낙랑은 이름있는 나라이며 왕씨는 이름 있는 집안이다.┆其先出自有殷 周武王剋商 封箕子於朝鮮 子孫因而氏焉 그 선조는 은으로부터 나왔으니 주무왕이 상을 정복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는데, 자손이 이로 인하여 성씨를 삼았다.┆殷有三人 周訪九疇 只族王家 藉冑鮮侯 은나라에 세 어진 신하가 있어 주나라가 9주를 물었다. 그 집안이 성을 왕씨라 하고 자손들이 조선후가 되었다.
2841#22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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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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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1 三韓³
(백제 의자왕에게 보내는 당 고종의 조서) 해동의 세 나라는 개국한지 오래이며, 국토가 나란히 있어 실로 개의 이빨처럼 국경이 들쭉날쭉 서로 닿아 있소. 근래에 와서 드디어 국경을 다투고 침공을 하여 조금도 편안할 해가 없었소. 마침내 삼한의 백성(三韓³之氓)으로 하여금 목숨이 도마 위에 놓이게 하고, 창을 찾아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거듭되니, 짐이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림에 있어 깊이 안타까워하는 바이오.
2841#37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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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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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0320 三韓³
이 때 고려와 백제의 두 나라 국왕이 신라가 도적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군세를 살피도록 하였다.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군영 밖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서약하여 “지금 이후로는 길이 서쪽 번국이 되어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내관가둔창으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한(三韓³)이다. 황후가 신라로부터 돌아왔다.
2841#4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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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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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0463 韓國₂
천황이 전협신의 아들 제군과 길비해부직적미에게 명하여 “너희들은 마땅히 가서 신라를 징벌하라”고 하였다. 이 때 서한 재기 환인지리가 옆에 있다가 나아가 “저희들보다 뛰어난 자가 한국(韓國₂)에 많이 있으니 불러서 부릴만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여러 신하들에게 “그러면 마땅히 환인지리를 제군 등에게 딸려 보내 백제 길을 취하고 아울러 칙서를 내려 재주가 뛰어난 자를 바치게 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2841#35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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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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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0530 韓國²
目頰子 初到任那時 在彼鄕家等 贈歌曰 柯羅屨儞嗚 以柯儞輔居等所 梅豆羅古枳馱樓 武哿左屨樓 以祇能和馱唎嗚 梅豆羅古枳馱樓
목협자가 처음 임나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에 있는 일본인들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가라구이(柯羅屨儞 からくに)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목협자는 왔는가. 저 멀리 일기로부터 목협자가 왔네."
2841#8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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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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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0556 韓人₂
소아대신도목숙녜 등을 왜국의 고시군에 보내어 韓人₂대신협둔창(여기에서 韓人이란 백제를 이른다), 高麗人소신협둔창을 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기국에 해부둔창을 두도록 하였다. (어떤 책에서는 '각지의 韓人₂을 대신협둔창의 전부로 삼았다. 高麗人을 소신협둔창의 전부로 삼았다. 韓人₂, 高麗人을 전부로 삼은 것을 가지고 둔창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2841#4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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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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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3 高麗史(1451)
(왕건이 후당으로부터 받은 조서)
踵朱蒙啓土之禎 爲彼君長 履箕子作蕃之跡 宣乃惠和
주몽의 계토지정을 따라 군장이 되었고 기자의 작번지적을 밟아 사랑과 평화를 펼쳤다.
▐ 왕조가 신라에서 왕씨고려로 바뀌며 국조도 고려의 국조였던 朱蒙으로 바뀌었다. 이때 箕子도 국조로 숭배되었는데, 이는 고려의 箕子숭배를 계승한 듯하다.
2841#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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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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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壇君朝鮮
고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라 모두 건국설화를 가지고 있다. 건국설화는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고대 왕조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도구다. 위만조선도 건국설화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위만조선을 내쫓고 세워진 낙랑군의 철저한 탄압을 받았을 듯하다. 그래서인지 위만조선의 건국설화는 역사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민속으로는 계속 전승되고 있었고 천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되어 왕씨고려 때에는 우리가 아는 단군설화가 된 것이 아닐까?
2841#1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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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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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7 帝王韻紀
漢元立昭二甲申 (羅之□□一年也) 開國馬韓王儉城 (今西京也 以高句麗縣名立國)
한 원제 건소 2년 갑신년(신라가 건국한지 21년이 되던 해)에 마한의 왕검성(지금의 서경. 고구려현의 이름으로 건국하였다.)에서 건국하였다.
▐ 마한이 고려가 되었다는 최치원의 인식과 같다.
2841#8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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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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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 高麗史
좌우도통사가 상언하기를,
“以小事大 保國之道 我國家統三以來 事大以勤 작은 것으로서 큰 것을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존하는 방도이니, 우리나라는 삼한을 통합한 이래 부지런히 사대하여 왔습니다. 伏惟 殿下特命班師 以答三韓之望 원컨대 전하께서 특별히 회군을 명하시어 삼한의 기대에 답하시옵소서.”
라고 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이 듣지 아니하였다.
2841#5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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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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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 太祖實錄(1413)
(이성계는 조선과 화령이라는 두 가지 명칭을 명나라에 보내어 조선을 국호로 쓰라는 허락을 받았는데, 이에 대해 표문을 올렸다.)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옛날 기자의 시대에 있어서도 이미 조선이란 칭호가 있었으므로, 이에 아뢰어 진술하여 감히 천자께서 들어주시기를 청했는데, 천자의 대답이 곧 내리시니 특별한 은혜가 더욱 치우쳤습니다.”
▐ 箕子를 국조로 인식하는 흐름은 이씨조선 말까지 지속되었다.
2841#13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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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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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의 변천
韓은 삼국지(289)에 처음 나타날 때 반도 중남부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한에는 馬韓, 辰韓 그리고 弁韓이 있었고 이 셋을 통틀어 三韓이라 불렀다. 이 삼한은 韓國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이 해체되자 한국은 거기에서 나온 백제, 신라 그리고 임나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 되었다. 한편, 삼한은 삼한의 한 축이던 임나가 신라에 병합되자 점차 백제, 신라 그리고 고려를 아울러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2841#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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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의 변천
1897년 이조가 선포한 大韓帝國의 어원은 三韓이다. 1919년 임시정부는 이것을 이어 大韓民國이라 했고 1948년 반도 남부에 수립된 국가도 이 국호를 계승하였다. 대한민국은 간단히 韓國이라 부른다.
이후 한국과 반도 북부에 수립된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 정통성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韓은 한국에서 우리를 지칭하는 유일한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전에는 스스로를 朝鮮人이라 불렀는데 민족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남북은 각각 韓民族과 朝鮮民族이라 한다.
2841#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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