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신라민족론 > 1. 우리는 처음부터 한 민족이었나? > (03) 난민 > 성씨
 
 0042 삼국사기(1145)
김유신은 왕경인이다. 12세조 수로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후한 건무 18년 임인 구봉에 올라 가락(駕洛)의 9촌을 보고는 마침내 그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고 하였다가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자손들이 서로 이어져 9세손 구해에 이르렀는데, 혹 구차휴라고도 하며 유신에게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는 신라와 더불어 같은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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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42 삼국유사(1281)
개벽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에 아홉 간(干)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는 추장으로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은 산과 들에 스스로 모여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의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계욕일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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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1 제번공직도(526-539) 사로국
國王不能自通使聘 普通二年 其王姓募名泰 始使隨百濟奉表献方物 신라 국왕은 스스로 사신을 파견할 능력이 없었다. 521년에 성이 모(募)이고 이름이 태(泰)인 왕이 처음으로 백제 사신 편에 사신을 딸려보내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無文字 刻木為範 言語待百濟而後通焉 문자가 없고 나무에 금을 새겨 표시하였다. 신라 사신은 백제 사신이 말한 다음에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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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1 양서(636)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普通二年 王姓募名秦 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신라는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521년에 성은 모(募), 이름은 진(秦)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새겨 신표로 삼는다. 의사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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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1 남사(659)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梁普通二年 王姓募名泰 始使使校隨百濟奉獻方物 신라는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보통 2년에 성은 모(募), 이름은 태(泰)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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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4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牟即智寐錦王 모즉지매금왕 -- 법흥왕은 514년부터 540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양서에 나오는 募秦은 신라 사신이 牟即이라 한 것을 백제 사신의 통역을 거치면서 양나라 측에서 중국식 성과 이름으로 오해하고 발음을 표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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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39 울주천전리각석
另卽知太王 영즉지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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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64 북제서(636)
是歲高麗靺羯新羅並遣使朝貢 고려, 말갈 그리고 신라가 사신을 통해 조공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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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65 북제서(636)
詔以新羅國王金真興為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을 사지절 동위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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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94 수서(636)
傳祚至金眞平 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高祖拜眞平爲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왕위가 김진평에 이른 개황 14년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고조는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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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94 북사(659)
傳世三十 至眞平 (傳世三十至眞平 隋書作 傳祚至金眞平 按通典卷一八五新羅傳云 其王姓金名眞平 並引隋東蕃風俗記云 金姓相承 三十餘葉 這裏 眞平 上當脫 金 字) 以隋 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文帝拜眞平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왕위가 대대로 전하여져 30세인 진평에 이르렀는데, 수나라 개황 14년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문제는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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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0 신당서(新唐書)
王姓金 貴人姓朴 民無氏有名 신라왕의 성은 김(金)씨이고 귀인의 성은 박(朴)씨이며 백성에게는 성은 없고 이름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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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5 삼국사기(三國史記)
논하여 말한다. 신라 고사(古事)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보냈기에 성(姓)을 김씨(金氏)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이 말이 전해 내려온 지 오래되니, 이를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한 듣건대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고 이는 신라 국자박사 설인선이 지은 김유신의 비문과 박거물이 지었고 요극일이 쓴 삼랑사비문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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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씨의 거짓과 진실 - 김성회
신라김씨의 유래에 대해서는 네 가지 주장이 있는데 모두 역사적 사실로 보기 힘들다. 진흥왕 이전에는 신라 왕의 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김씨 성을 쓴 시조는 신라계에선 진흥왕이, 가야계에선 김유신(또는 조부인 김무력이나 아버지인 김서현)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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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씨의 유래 - 김성회
한서와 후한서에 나타나 있는 삼국시대 국왕과 인명기록을 보면 후마(주몽왕)·마와궁(태조왕)·수성(차대왕)·백고(신대왕)로 쓰고 있으며, 삼국지에도 마·궁수성·백고(고국천왕)·유리모(산상왕)·계(고국원왕)·안(광개토왕) 등의 이름만 있을 뿐이다. 그 후 남북조시대 진서에 와서야 장수왕의 이름을 ‘고연’이라고 칭하고 사신들에 대해서도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성과 이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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