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성씨의 특징은 본관이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영남 지역에서 출발한 신라가 반도를 통일했던 역사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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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까역사 新羅
(朝鮮→)燕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是爲辰韓六部
연나라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육촌을 이루었다. 이것이 진한 육부가 되었다.
첫째는 閼川 楊山村, 둘째는 突山 高墟村, 셋째는 觜山 珍支村(干珍村), 넷째는 茂山 大樹村, 다섯째는 金山 加利村, 여섯째는 明活山 高耶村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 육부가 되었다.
1720#3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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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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閼川 楊山村
蘿井은 楊山의 산기슭에 있었으므로 楊山은 남산이다. 閼川에 관한 기록은 형산강에 어울리므로 閼川 楊山村은 형산강을 건너는 나루 인근의 남산 기슭일 것이다.
이곳은 외부의 문물이 서라벌로 들어오는 관문이므로 신라의 시조가 이곳에서 났다는 이야기와도 어울린다.
한편, 蘿井은 楊山의 기슭에 있었지만 이 楊山은 月城에서 보았을 때 남쪽에 있기 때문에 훗날 南山이라 불린 듯하다.
172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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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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突山 高墟村
삼국사기에는 서라벌 주변의 明活山, 吐含山, 北兄山, 西兄山 등이 제사를 지낸 곳으로 나와 있다. 남산만 빠졌을 리는 없을 테니, 제사 기록에 있는 髙墟(沙梁)를 남산에 제사지낸 곳으로 추정한다. 고려사에도 沙梁을 南山部로 바꾸었다고 되어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남산은 남북으로 결이 나 있어 금오봉에 오르는 길 또한 이 결을 따라 났을 것이므로 그 입구인 포석정 일대를 突山 高墟村으로 추정한다.
이곳은 蘿井과 가까워 혁거세 설화와도 어울린다.
1720#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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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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茂山 大樹村
삼국유사(1281)에는 仙桃聖母가 西述聖母라고도 되어 있어 仙桃山은 삼국사기(1145)의 제사 기록에서 西述로도 표기된 牟梁에 있었던 듯하다. 牟梁은 원래 茂山 大樹村이었다고 하므로 茂山은 仙桃山이 된다.
이곳은 蘿井에서 멀지 않아 仙桃聖母가 혁거세왕을 낳고 仙桃山에 들어가 살았다는 삼국유사의 이야기와도 어울린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西兄山도 이 仙桃山으로 비정된다.
1720#3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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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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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솔까역사」 新羅
始祖姓朴氏✘ 諱赫居世 前漢 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即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囯號徐那伐
시조의 이름은 혁거세이다. -57년 4월 병진(또는 정월 15일이라고도 하였다)에 즉위하여 거서간이라 일컬었다. 이때 나이는 13세였고 나라 이름을 서나벌이라 하였다.
┆신라왕의 성은 521년의 기록에 募로 처음 나온다.
1720#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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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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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朴赫居世
▐ 삼국사기는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이라 하여 朴이 박의 음차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에 身生光彩 因名赫居世王 或作弗矩内王 言光明理世也라 하여 赫이 밝-의 훈차라 하였으므로, 朴도 밝-의 음차일 가능성이 있다. 밝-의 음차와 훈차를 붙인 朴□와 赫□가 별도로 존재하다 후대에 朴이 성이 되면서 赫은 이름으로 인식되었다는 이야기다.
居世는 居西干의 居西를 이름으로 오인해서 붙인 듯하다.
그렇다면 朴赫居世의 원래 명칭은 '밝은 임금' 정도였다.
1720#27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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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0 三國遺事(1281)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를 가는데 始林의 가운데 크고 밝은 빛이 있으며 자색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쳐 내려온 것을 보았다. 구름 속에 황금 상자가 있는데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빛은 상자로부터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탈해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친히 숲에 나가서 그 상자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워있던 아이가 바로 일어났다. 이것은 혁거세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아이 이름을 閼智라 하였다. 알지는 우리 말로 아이를 일컫는 말이다
1720#3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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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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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5 三國史記(1145)
왕이 밤에 金城의 서쪽 始林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瓠公을 보내 살피게 하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니 왕이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다가 열어보았다. 작은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모습이 뛰어나고 훌륭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좋은 후계를 보낸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거두어 길렀다.
1720#28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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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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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5 三國史記(1145)
밤에 왕이 金城 서쪽의 始林 나무들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 살펴보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고하니 왕은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게 했다. 작은 남자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자태가 뛰어나게 훌륭했다.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閼智라 했다. 금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金氏라 했다. 시림의 이름을 雞林으로 고치고 국호를 삼았다.
1720#3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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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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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6~0369
達과 喙은 발음이 같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연관성을 상상해 볼 수 있다.
達伐은 236~261년에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보이며 서라벌의 喙, 沙喙 그리고 牟喙은 달구벌에서 서라벌로 넘어올 때 처음 닿는 곳으로 원래 지명은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그리고 무산 대수촌이었다.
따라서 닭을 숭배하는 달구벌 사람들이 서라벌로 많이 이주하였고 그들이 서라벌을 장악하면서 지명도 바꾸고 김씨 왕도 배출하였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1720#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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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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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2.01 ❰❰¹ 0262 솔까역사
味鄒이사금(味照라고도 하였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선조 알지가 계림에서 태어나 탈해왕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러 나중에 대보로 삼았다. 閼智는 세한을 낳았고, 勢漢은 아도를 낳았고, 阿道는 수류를 낳았고, 首留는 욱보를 낳았고, 郁甫는 구도를 낳았는데, 仇道가 곧 味鄒의 아버지이다. 첨해가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
▐ 미추왕이 즉위하면서 알지 설화가 만들어지고 6부의 이름이 개칭된 듯하다.
1720#22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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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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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2.01 ❰❰¹ 0262 ◾味鄒
閼智(65) →⁴³ 勢漢 →⁴³ 阿道 →⁴³ 首留 →⁴³ 郁甫 →⁴³ 仇道 ➔⁴³ 味鄒(322)+末仇 →³⁴ 奈勿(356) →⁴⁸ 巴胡 →⁴⁸ 習寶 →⁴⁸ 智證(500) →²⁰ 立宗 →²⁰ 眞興(540) →³⁶ 眞智(576) →³⁹ 龍樹 →³⁹ 武烈(654) →⁷ 文武(661)
┆味鄒+末仇와 奈勿 사이의 간격이 비정상적으로 길어 味鄒의 연대를 60년 뒤로 물렸다.
1720#15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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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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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6 廣開土王陵碑(414)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1720#14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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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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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 宋書(488)
高句驪王 高璉 晋安帝 義熙九年 遣長史高翼奉表獻赭白馬 以璉爲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驪王·樂浪公
고구려왕 고연이 진나라 안제 의희 9년에 장사 고익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자백마를 바쳤다. 안제는 고연을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 고려의 高씨 왕성이 고려에 의해 나타나는 최초의 기록이다.
1720#6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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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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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廣開土王陵碑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 夫餘의 엄리대수를 거쳐가게 되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라고 하였다.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건너가서 비류곡 홀본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1720#15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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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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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廣開土王陵碑
▐ 이 설화는 고려 왕조의 공식적인 이야기다.
고려의 高씨가 顓頊高陽의 후예라는 이야기는 이 설화와 모순되고 또 고려 왕조에 의해 언급된 적도 없으므로, 북연의 고운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백제 餘씨가 夫餘에서 따온 것처럼 고려 高씨도 高麗라는 나라 이름에서 따왔다고 보아야 한다.
1720#15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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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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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4 㖨國·喙地-達伐·達句伐
倭는 新羅에 침입한 高麗와 전투를 치렀는데, 그곳은 이듬해에 倭가 다시 新羅와 전투를 치른 㖨일 가능성이 높다. 倭가 高麗를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자 新羅가 되찾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加羅를 고령으로 비정하는 것은 비교적 근거가 충분한데, 㖨己呑은 加羅와 新羅의 경계에 있었다고 하므로 달구벌에 어울린다. 이곳은 倭가 新羅를 치러 왔다가 나루에서 방향을 바꾸어 加羅를 쳤다는 이야기의 무대로도 어울린다.
1720#3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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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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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9 南齊書(537)
加羅국은 삼한의 한 종족이다. 건원 원년에 국왕 荷知가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바쳤다. 이에 조서를 내렸다. “널리 헤아려 비로소 올라오니, 멀리 있는 오랑캐가 두루 덕에 감화됨이라. 가라왕 하지는 먼 동쪽 바다 밖에서 폐백을 받들고 관문을 두드렸으니, 보국장군 본국왕의 벼슬을 제수함이 합당하다.”
1720#4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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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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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梁書(636) 募秦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普通二年 王姓募名秦 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신라는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521년에 성은 모, 이름은 진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새겨 신표로 삼는다. 의사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 신라는 백제(372), 고려(413) 그리고 가라(479)에 비해 늦게 중국에 조공을 시작했다.
1720#4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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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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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2 三國史記(1145)
금관국(金官國)의 왕인 김구해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 아들인 노종, 둘째 아들인 무덕, 막내 아들인 무력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 이때까지도 신라왕이 김씨 성을 사용한 흔적이 없다. 따라서 왕건이 망명해 온 발해 왕자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내려준 것처럼 신라왕이 남가라 왕에게 김씨 성을 내려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720#15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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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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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1± 단양신라비
喙部 伊史夫智 伊干▨ 달부의 이사부지 이간□┆喙部 西夫叱智 大阿干▨ 달부의 서부질지 대아간□┆喙部 比次夫智 阿干支 달부 비차부지 아간지┆沙喙部 武力智 阿干支 사달부 무력지 아간지┆鄒文村 幢主 沙喙部 噵設智及 干支 추문촌 당주 사달부 도설지 급간지┆勿思伐▨▨▨喙部 助黑夫智 及干支 물사벌□□□달부 조흑부지 급간지┆書人 喙部 ▨▨▨▨▨▨▨▨▨人 서인 달부 □□□□□□□□□인
1720#26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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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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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 日本書紀(720)
신라가 임나관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국,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찬국, 염례국 등 모두 열 나라이다.
1720#1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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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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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5 北齊書(636)
詔以新羅國王金真興為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을 사지절 동위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 전해에 있었던 조공에 대한 답례로 보인다. 그렇다면 김진흥이란 명칭도 전해에 신라가 제공한 정보였을 것이다.
백제 餘씨는 夫餘란 국호에서 따왔고 고려 高씨는 高麗란 국호에서 따왔으므로 신라 金씨도 도읍 金城에서 따왔고 가라 金씨도 金官國이란 국호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있다.
1720#4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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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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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5 北齊書(636)
▐ 백제의 餘씨 왕성은 근초고왕이 고려의 평양성을 침공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이듬해의 기록에 처음 나타나고, 고려의 高씨 왕성은 광개토왕이 백제를 침공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신라에 침입한 왜를 내쫓은 지 7년 후의 기록에 처음 나타나며, 신라의 金씨 왕성도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임나를 병합한 지 3년 후의 기록에 처음 나타났다. 패권을 장악했을 때 왕성이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다.
1720#7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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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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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8 磨雲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
太昌 원년 세차 무자 ▨▨ 21일 ▨▨ ▨興太王이 ▨▨를 순수하여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무릇 순풍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상의 도리가 참되지 않고, 그윽한 덕화가 펴지지 않으면 사악한 것이 서로 경쟁하게 된다. 그러므로 帝王이 建号함에 있어서 자신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나 朕은 왕위에 오르는 운수가 자신에 이르러, 위로는 太祖의 기틀을 이어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몸을 조심하며 스스로 삼가나 하늘의 도리를 어길까 두렵다.
以帝王
1720#7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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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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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8 黃草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
8월 21일 계미에 眞興太王이 영토를 ▨▨하고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세상의 도리가 참되지 않고, 그윽한 덕화가 펴지지 않으면 사악한 것이 서로 경쟁하게 된다.
그러므로 帝王이 建号함에 있어서 자신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나 朕은 … 太祖의 기틀을 이어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몸을 조심하며 스스로 삼가나 ▨▨▨까 두렵다.
▐ 以帝王建号莫不修己以安百姓 이 부분은 마운령비와 똑같다.
1720#15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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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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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梁書
其俗呼城曰健牟羅 其邑在內曰啄評 在外曰邑勒 亦中國之言郡縣也 國有六啄評 五十二邑勒┆왕성을 건모라라 부르며 그 읍이 안에 있는 것은 탁평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읍륵이라 하니, 이것은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나라 안에는 6군데의 탁평과 52군데의 읍륵이 있다.
❸ 喙評(501 중성리 신라비) = 啄評(636 양서)
1720#26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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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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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周書
髙麗者 其先出於夫餘 自言始祖曰 朱蒙 河伯女感日影所孕也 朱蒙長而有材 畧夫餘人惡 而逐之土 于紇斗骨城 自號曰髙句麗 仍以髙為氏
고려는 그 선조가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시조는 주몽인데 하백의 딸이 햇빛에 감응되어 잉태하였다’고 한다. 주몽이 장성하여 재주와 지략이 있자 부여 사람들이 미워하여 쫓아버렸다. 흘두골성에 살면서 스스로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어 고씨로 성을 삼았다.
1720#1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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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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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9.24 日本書紀(720)
▐ 삼한시대에는 왕족과 귀족들만 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당나라는 660년에 백제왕조를 무너뜨리고 도성에 있던 왕족과 귀족들을 당나라로 데려갔다. 지방에 있던 왕족과 귀족들은 주류성에 모여 왕조의 재건을 시도하였으나 663년에 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것이 한국에 백제계 성씨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다.
1720#4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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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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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81 文武王陵碑
焉⎵⎵十五代祖星漢王降質圓穹誕靈仙岳肇臨 … 以對玉欄始蔭祥林如觀石紐坐金輿而 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혼이 선악에서 나와, ▨▨을 개창하여 옥란을 대하였다. 비로소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석뉴를 보고 금수레에 앉아 … 하는 것 같았다.
1720#4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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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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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81 秺侯┆星漢王
신라 金氏가 金日磾의 후손을 자처한 최초의 기록이다. 문무왕의 15대조는 閼智의 아들 勢漢이니, 여기서 말하는 星漢王은 바로 그다.┆閼智(65) →⁴³ 勢漢 →⁴³ 阿道 →⁴³ 首留 →⁴³ 郁甫 →⁴³ 仇道 →⁴³ 味鄒(322)+末仇 →³⁴ 奈勿(356) →⁴⁸ 巴胡 →⁴⁸ 習寶 →⁴⁸ 智證(500) →²⁰ 立宗 →²⁰ 眞興(540) →³⁶ 眞智(576) →³⁹ 龍樹 →³⁹ 武烈(654) ➔⁷ 文武(661)
1720#30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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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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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5 少皥金天┆太祖漢王
少昊 昊又作皞 皓 顥 又稱青陽氏 金天氏 窮桑氏 雲陽氏 或稱朱宣 신라와 가라 金씨가 少昊金天의 후예를 자처한 것은 북연의 고운이 顓頊高陽의 후예를 자처한 것처럼 성씨가 만들어지고 난 후에 가미된 이야기다.
1720#15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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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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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0~0711 솔까역사 大唐西域求法高僧傳
雞貴者梵云矩矩咤㗨說羅 矩矩咤是雞 㗨說羅是貴 卽(高麗→)新羅國也 相傳云 彼國敬雞神 (而取尊故戴翎羽而表飾矣✘) 那爛陀有池名曰龍泉 西方喚(高麗→)新羅爲矩矩咤㗨說羅也 계귀는 범어로 구구타예설라이다. 구구타는 닭이고 예설라는 귀하다는 뜻이니, 즉 신라국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나라에서는 닭신을 받들어 모신다고 한다. 나란타사에 못이 있는데, 이를 용천이라고 부른다. 서역에서는 신라를 구구타예설라라고 부른다.
1720#28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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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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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黑齒俊墓誌銘
方冀七葉貽慶 以享西漢之榮
바야흐로 7대에 걸쳐 경사스러움을 전하여 서한의 김일제와 같은 영광을 향유하고자 하였으나
秺侯入仕 西戎孤□ 東夷之子 求如不及
김일제가 벼슬을 얻었으니 서융의 외로운... 동이의 자손으로서 구하기를 마치 미치지 못하는 듯이 끝없이 하였으니
▐ 흑치준은 흑치상지의 아들이다.
1720#7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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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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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金日磾
문무왕릉비(681), 흑치상지묘지명(699)이
그리고 흑치준묘지명(706)에서 보는 것처럼 秺侯와 그 후손이 七葉에 걸쳐 西漢에 참여한 것은 흔히 회자되던 이야기였다. 문무왕릉비의 다른 점은 秺侯를 자신들의 조상이라 주장했다는 점이다.
신라김씨가 閼智 대신 秺侯를 뿌리로 내세운 것은 당시 秺侯에 대한 국제적 평가가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1720#15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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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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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 通典
城曰健牟羅 其邑在內曰喙評(喙呼穢反) 在外曰邑勒 亦中國之言郡縣也 國有六喙評 五十二邑勒 성을 건모라라 부르며 그 읍이 안에 있는 것은 달평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읍륵이라 한다. 달평은 6군데, 읍륵은 52군데 있다.
❸ 喙評(501 중성리 신라비) = 啄評(636 양서) = 喙評(801 통전)
1720#26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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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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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6 興德王陵碑片
太祖星漢
▐ 황초령비(568)와 마운령비(568)에 나오는 太祖와 문무왕릉비(681)에 나오는 星漢王 그리고 김인문묘비(695)에 나오는 太祖漢王 모두가 이 太祖星漢이라는 명문에 의해 동일인이 되었다.
요약하면, 322년에 閼智가 시조라는 이야기를 하다, 568년에는 그의 아들 勢漢을 太祖로 이야기하였고, 681년에는 秺侯를 太祖의 앞에 올려 놓더니, 695년에는 또 다시 秺侯의 앞에 少皥金天을 올려 놓은 것이다.
1720#15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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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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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4 大唐故金氏夫人墓銘
太上天子有國泰宗陽號少昊氏金天卽吾宗受氏世祖厥後派疏枝分有昌有徽蔓衍四天下亦已多已
태상천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1720#7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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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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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4 大唐故金氏夫人墓銘
及漢不見德 亂離瘼矣 握粟去國 避時屆遠 故吾宗違異於遼東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에 숨어 살게 되었다.
▐ 이 부분은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로 金日磾와 신라 金씨를 연결시켜 주는 핵심 이야기다. 시대적 배경은 왕망의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요동은 요하 동쪽이라는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신라까지 포함할 수 있다.
1720#15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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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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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三國史記
▐ 일본서기(720)는 6세기 신라의 금석문에 나오는 沙喙部를 沙㖨部로 표기하고 喙己呑을 㖨己呑으로도 쓰는 것으로 보아, 喙과 㖨을 구별하지 않은 듯하다. 이는 일본서기에 별개로 나오는 㖨國과 喙地가 같은 곳일 가능성을 열어준다. 실제로 두 지역을 같은 곳으로 간주해도 이야기가 어색하지 않다.
또 㖨國과 喙地는 삼국사기의 達伐과도 잘 어울린다. 만약 喙地가 達伐이라면 喙는 '달'로 발음되었을 듯하다. 喙는 '부리 달'이란 뜻도 있기 때문이다.
1720#2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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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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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赫居世
조선의 유민이 진한에 6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말이 낳은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오자 성을 朴으로 하고 이름을 혁거세라 하여 왕으로 삼았다. 이어서 용이 우물가에서 여자아이를 낳자 왕비로 삼았다.
삼국유사는 중국 황실의 딸 신모가 진한에 와서 혁거세를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1720#15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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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三國遺事
최치원이 말하기를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도피해 온 자들이므로 涿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고을과 동리 이름을 沙涿·漸涿 등으로 불렀다.” 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涿 자를 읽을 때 발음을 道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혹 沙梁이라 쓰고 梁을 또한 道라고도 읽는다.
❶ 沙喙(524 봉평신라비) = 沙㖨(720 일본서기) = 沙涿(최치원) = 沙梁(1145 삼국사기)
1720#26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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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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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인국통계조사 - 본관
경북 경주 482만,
경남 김해 449만,
경남 밀양 340만,
전북 전주 321만,
경남 진주 137만,
경북 안동 126만
▶본관이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경주 김씨, 경주 이씨 등이 있고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전주 이씨, 전주 김씨 등이 있다. 전주 김씨는 김알지의 후손인데 몽골침입 때 그 시조가 경주에서 전주로 이주하여 전주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1720#7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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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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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인국통계조사 - 성씨
김해 김씨 412만,
밀양 박씨 303만,
전주 이씨 261만,
경주 김씨 174만,
경주 이씨 142만
▶성씨가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해 김씨는 남가라 수로왕의 후손이고 밀양 박씨는 신라 박혁거세의 후손이다. 전주 이씨는 이성계의 조선 건국 후 크게 번창하였고 경주 김씨는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다. 경주 이씨는 신라의 건국에 참여한 양산촌장의 후손.
1720#7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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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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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인국통계조사 - 성씨 분포
왼쪽으로부터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경주 김씨 그리고 경주 이씨.
❶ 김해 김씨는 남가라 김수로왕의 후손인데 왜 서남 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하는가?
❸ 전주 이씨는 전주에서 기원하지만 이조의 건국 이후 한양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그런데 왜 영남 지방에만 드물게 분포할까?
❺ 경주 이씨는 경주에서 기원하니 이러한 분포가 자연스럽다.
○ 서남 지역의 김해 김씨와 경기와 영남 이외의 전주 이씨는 자연스러운 분포가 아니다.
1720#1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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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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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新羅김씨
2010년 신라김씨총연합 대종원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신라계 김씨 본관은 총 356개이며, 다른 성씨를 쓰고 있는 성관은 9개(감천문씨, 강릉왕씨, 곡산연씨, 광주이씨, 수성최씨, 안동권씨, 영양남씨, 철원궁씨, 태안사씨)이다.
1720#37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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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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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김성회
김씨의 시조에 대해서는 네 가지 주장이 있다.
① 소호금천씨의 후예 - 김유신비문(673), 김인문비문(695), 대당고김씨부인묘비(864), 삼국사기(1245)
② 김일제의 후예 - 문무왕비문(681), 대당고김씨부인묘비(864)
③ 알지와 수로의 후예 - 삼국사기(1145), 삼국유사(1281)
④ 신라가 고대국가로 왕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씨족을 표시하는 한자식 성으로 김씨 성을 쓰게 되었다.
①과 ③은 비과학적이고 ②는 근거가 부족하다.
1720#1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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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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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irth Myth of Gim Alji
One early spring morning of the 9th year of reign of Suk Talhaih (AD 60), Hogong, the premier, awoke at the sound of a rooster crowing. When he looked out the window, he saw a mysterious bright light from the sky shine on the Original Forest, located to t ...
1720#4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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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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喙┆達┆㖨┆梁┆啄┆涿
沙喙(524 봉평신라비)-沙㖨(720 일본서기)-沙涿(최치원)-沙梁(1145 삼국사기)┆㖨己呑·喙己呑·㖨國·喙地(720 일본서기)-達伐·達句伐(1145 삼국사기)┆啄評(636 양서)-喙評(801 통전)
▐ 달구벌과 서라벌의 지명에 나오는 喙·達·㖨·梁·啄·涿은 모두 같은 발음을 표기한 듯하다. 최치원은 신라인들이 연나라에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북중국의 涿水에서 지명을 땄다고 했다.
1720#22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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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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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왕조는 초원에서 오지 않았다.
낙동강 유역에서 성장한 가라와 신라는 고고학적 양상이 백제나 고려과는 다르고 초원과 닮은 점이 있다. 금동관, 적석목곽분 그리고 순장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래서 이들 두 나라를 초원에서 흘러온 세력이 세운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기록에는 중국에서 대동강 유역을 거쳐 낙동강 유역으로 유민이 흘러왔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초원에서 흘러왔다는 이야기는 없다. 따라서 고고학적 양상은 문화의 전파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합당하다.
1720#1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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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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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金氏 흉노유래설
훗날 金氏 성을 쓰게 되는 斯盧의 한 가문은 마한이 망한 뒤 처음으로 왕을 배출하였는데, 가문을 신성화하기 위해 閼智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퍼뜨리고 국명을 雞林으로 바꾸었다. 이 가문은 원래 성이 없었는데, 임나를 병합한 뒤 金氏 성을 쓰고 閼智의 아들 勢漢을 太祖로 숭상하기 시작했다. 반도를 통일한 뒤에는 閼智 대신 匈奴 왕자 金日磾와 삼황오제의 少皥金天을 먼 조상이라 주장했는데, 이는 중국의 명문가에 기대어 가문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
1720#6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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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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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建
왕건이 918년에 건국한 이후 여러 설화들이 만들어졌는데, 1146~1170년에 편찬된 編年通錄은 그것을 모아놓은 것이다.
김일제의 후손을 자처하는 신라 김씨의 공식 기록과 알지 설화가 모순되는 것처럼 왕씨고려의 공식 기록인 太祖實錄과 왕건 설화도 모순되는 부분이 있다.
1720#4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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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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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의 후손
가평김씨, 감천김씨, 강릉김씨, 강서김씨, 광산김씨, 강화김씨, 개성김씨, 결성김씨, 경주김씨, 계림김씨, 고령김씨, 고양김씨, 공주김씨, 광양김씨, 광주김씨, 괴산김씨, 교하김씨, 구례김씨, 금산김씨, 김녕김씨, 김제김씨, 김천김씨, 김화김씨, 나주김씨, 낙안김씨, 대구김씨, 도강김씨, 문화김씨, 밀양김씨, 배천김씨, 부안김씨, 삼척김씨, 상산김씨, 서흥김씨, 선산김씨, 설성김씨, 수안김씨, 수원김씨, 순천김씨, 신천김씨, 안로김씨, 안동김씨, 안산김 ...
1720#7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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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의 어원
달은 닭의 경상도 사투리 발음이다. 달구는 다른 말과 연음될 때 발음의 편의상 묵음 ㄱ이 되살아나는 현상이다. 닭똥을 달구똥이라 발음하는 것은 그 사례다.┆일본서기에 나오는 卓國의 卓도 닭을 가리킨다고 한다.┆신라의 왕궁 터를 月城이라 부르고 그 내부의 연못도 月池라 부른 것도 모두 같은 연유로 본다. 月은 달(닭)을 훈독한데서 나온 표기이다.
1720#26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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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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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씨의 역사
원래 고대에는 왕족과 몇몇 귀족가문만 성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의 왕족은 여, 부여 등의 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8족을 비롯하여 흑치, 사마 등 20여 가지 성을 사용하였다. 고려의 왕족은 고씨 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연, 을지 등 20여종의 성을 사용한 것이 역사기록에서 확인된다. 신라는 왕족이 박/석/김 3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이, 최, 정, 손, 배, 설 등 10여 가지 성을 사용하였다. 이들 중 중국식 한자성은 후대에 들어왔으나 선대까지 ...
1720#7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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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씨의 의미
성씨의 역사를 살펴볼 때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씨는 생물학적인 부계혈통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의 통계청 자료가 보여주는 우리나라 성씨의 경향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첫째, 남의 성씨를 빌려 쓴 게 아니라 원래부터 그 성씨를 썼던 사람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
1720#7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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