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新羅民族論 > 0676 新羅 > (2) 다종족 상태 > 姓氏

한국 성씨의 특징은 본관이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영남 지역에서 출발한 신라가 한국을 통일했던 역사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여진다.
 
-0057 朴赫居世
▐ 삼국사기는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이라 하여 朴이 박의 음차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에 身生光彩 因名赫居世王 或作弗矩内王 言光明理世也라 하여 赫이 밝-의 훈차라 하였으므로, 朴도 밝-의 음차일 가능성이 있다. 밝-의 음차와 훈차를 붙인 朴□와 赫□가 별도로 존재하다 후대에 朴이 성이 되면서 赫은 이름으로 인식되었다는 이야기다. 居世는 居西干의 居西를 이름으로 오인해서 붙인 듯하다. 그렇다면 朴赫居世의 원래 명칭은 '밝은 임금' 정도였다.
1720#27823 SHARED
 
0371.10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가 힘을 다해 싸워 막았으나 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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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2- ❰❰ -0018 「三國誤記」 百濟
與髙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백제의 왕성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372년의 사건이다.
8221 SHARED
 
0372.01 晉書(648)
二年春正月辛醜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 백제와 임읍이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14903 SHARED
 
0372.06 晉書(648)
六月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백제왕 여구를 진동장군 낙랑태수로 봉했다. ▐ 백제 餘씨 왕성이 최초로 나타나는 기록이다. 이 백제 餘씨는 夫餘에서 따왔다. 餘句란 이름은 5달 전에 백제가 보낸 사신이 제공한 정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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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6 廣開土王陵碑(414)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14904 SHARED
 
0400 廣開土王陵碑(414)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14905 SHARED
 
0400 晉書(648)
高句驪王安遣使貢方物 有雀素身綠首 集于端門 棲翔東園 二旬而去 改東園為白雀園
7380 SHARED
 
0407 晉書(648)
慕容雲 字子雨 寶之養子也 祖父和 高句驪之支庶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為氏焉 모용운은 자가 자우인데 모용보의 양자다. 할아버지 화는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고양씨의 먼 후손을 자처하여 씨를 고라 했다.
14906 SHARED
 
0407 晉書(648)
雲遂即天王位 復姓高氏 大赦境內殊死以下 改元曰正始 國號大燕 모용운이 천왕의 자리에 올라 高씨로 성을 되돌리고 사형수 이하를 크게 사면하였다. 그리고 연호를 정시라 하고 국호를 대연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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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7- ❰❰ -0037 「三國誤記」 高句麗
姓髙氏 성은 고씨다.┆고씨 성은 407의 기록에 처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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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8 資治通鑑(1084)
高句麗遣使聘北燕 且敍宗族 北燕王雲遣侍御史李拔報之 고려가 사신을 북연에 보내 종족으로서 예를 베푸니 북연왕 운이 시어사 이발을 보내 답례하였다.
14933 SHARED
 
0413 宋書(488)
高句驪王 高璉 晋安帝 義熙九年 遣長史高翼奉表獻赭白馬 以璉爲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驪王·樂浪公 고구려왕 고연이 진나라 안제 의희 9년에 장사 고익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자백마를 바쳤다. 안제는 고연을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 고려의 高씨 왕성이 고려에 의해 나타나는 최초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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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廣開土王陵碑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 夫餘의 엄리대수를 거쳐가게 되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라고 하였다.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건너가서 비류곡 홀본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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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廣開土王陵碑
▐ 이 설화는 고려 왕조의 공식적인 이야기다. 고려의 高씨가 顓頊高陽의 후예라는 이야기는 이 설화와 모순되고 또 고려 왕조에 의해 언급된 적도 없으므로, 북연의 고운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백제 餘씨가 夫餘에서 따온 것처럼 고려 高씨도 高麗라는 나라 이름에서 따왔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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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9 南齊書(537)
加羅국은 삼한의 한 종족이다. 건원 원년에 국왕 荷知가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바쳤다. 이에 조서를 내렸다. “널리 헤아려 비로소 올라오니, 멀리 있는 오랑캐가 두루 덕에 감화됨이라. 가라왕 하지는 먼 동쪽 바다 밖에서 폐백을 받들고 관문을 두드렸으니, 보국장군 본국왕의 벼슬을 제수함이 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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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梁書(636)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普通二年 王姓募名秦 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신라는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521년에 성은 모, 이름은 진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새겨 신표로 삼는다. 의사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 신라는 백제(372), 고려(413) 그리고 가라(479)에 비해 늦게 중국에 조공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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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 -0057 「三國誤記」 新羅
始祖姓朴氏┆신라왕의 성이 처음 나타난 것은 521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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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南史(659)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梁普通二年 王姓募名泰 始使使校隨百濟奉獻方物 신라는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보통 2년에 성은 모, 이름은 태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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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제번공직도(1914) 사라국
國王不能自通使聘 普通二年 其王姓募名泰 始使隨百濟奉表献方物 신라 국왕은 스스로 사신을 파견할 능력이 없었다. 521년에 성이 모이고 이름이 태인 왕이 처음으로 백제 사신 편에 사신을 딸려보내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無文字 刻木為範 言語待百濟而後通焉 문자가 없고 나무에 금을 새겨 표시하였다. 신라 사신은 백제 사신이 말한 다음에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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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울진봉평新羅비
牟即智寐錦王 모즉지매금왕 ▐ 법흥왕은 514년부터 540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양서에 나오는 募秦은 신라 사신이 牟即이라 한 것을 백제 사신의 통역을 거치면서 양나라 측에서 중국식 성과 이름으로 오해하고 발음을 표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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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2 三國史記(1145)
금관국(金官國)의 왕인 김구해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 아들인 노종, 둘째 아들인 무덕, 막내 아들인 무력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 이때까지도 신라왕이 김씨 성을 사용한 흔적이 없다. 따라서 왕건이 망명해 온 발해 왕자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내려준 것처럼 신라왕이 남가라 왕에게 김씨 성을 내려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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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9 울주천전리각석
另卽知太王 영즉지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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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1 三國史記(1145) 新羅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입케 하였는데, 이긴 기세를 타서 10개의 군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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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2 日本書紀(720)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과 니미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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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2 日本書紀(720)
신라가 임나관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국,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찬국, 염례국 등 모두 열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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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4 北齊書(636)
고려, 말갈 그리고 신라가 사신을 통해 조공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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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5 北齊書(636)
詔以新羅國王金真興為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을 사지절 동위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 전해에 있었던 조공에 대한 답례로 보인다. 그렇다면 김진흥이란 명칭도 전해에 신라가 제공한 정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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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5 北齊書(636)
▐ 백제의 餘씨 왕성은 근초고왕이 고려의 평양성을 침공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이듬해의 기록에 처음 나타나고, 고려의 高씨 왕성은 광개토왕이 백제를 침공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신라에 침입한 왜를 내쫓은 지 7년 후의 기록에 처음 나타나며, 신라의 金씨 왕성도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임나를 병합한 지 3년 후의 기록에 처음 나타났다. 패권을 장악했을 때 왕성이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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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5 北齊書(636)
▐ 백제 餘씨는 夫餘에서 따왔고 고려 高씨는 高麗에서 따왔는데 신라 金씨는 新羅와 상관없는 이름이라 특이하다. 진짜 金日磾의 후손이라 그럴 수도 있고 국명 대신 도읍 金城에서 따왔을 가능성도 있다. 가라 金씨도 백제나 고려처럼 金官國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있으나, 신라에 병합된 이후 신라가 金씨 왕성을 도입할 때 같이 편입되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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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4 隋書(636)
傳祚至金眞平 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高祖拜眞平爲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왕위가 김진평에 이른 개황 14년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고조는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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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4 北史(659)
傳世三十至眞平以隋開皇十四年遣使貢方物文帝拜眞平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왕위가 대대로 전하여져 30세인 진평에 이르렀는데, 수나라 개황 14년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문제는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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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周書
髙麗者 其先出於夫餘 自言始祖曰 朱蒙 河伯女感日影所孕也 朱蒙長而有材 畧夫餘人惡 而逐之土 于紇斗骨城 自號曰髙句麗 仍以髙為氏 고려는 그 선조가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시조는 주몽인데 하백의 딸이 햇빛에 감응되어 잉태하였다’고 한다. 주몽이 장성하여 재주와 지략이 있자 부여 사람들이 미워하여 쫓아버렸다. 흘두골성에 살면서 스스로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어 고씨로 성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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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周書
▐ 고려 왕성이 국호에서 비롯되었다는 최초의 기록이다. 중국 기록으로서는 위서(554)에 고려의 건국 설화와 초기 왕계가 최초로 나타나지만 왕성의 유래에 대해서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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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2 括地志
新羅治金城 신라의 치소는 금성이다. ▐ 백제餘씨는 夫餘에서 따왔고 고려高씨는 高句麗에서 따왔듯이 신라金씨 또한 金城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신라 왕성 金씨에서 金城이 나왔을 수도 있다.
1720#15629 SHARED
 
0660.09 三國史記(1145)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孝, 왕자 泰, 隆, 演 및 대신과 장사 88명과 주민 1만 2천 8백 7명을 당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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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0.11.01 日本書紀(720)
장군 소정방 등이 사로잡은 백제왕 이하 태자 융(隆) 등 여러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국변성 이하 37명, 모두 50여 명을 조당에 바쳤다. 급히 인도하여 천자에게 나아가니, 천자는 은혜로운 칙명으로 보자마자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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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9.24 日本書紀(720)
일본의 수군 및 좌평 여자신,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와 국민들이 호례성에 이르렀다. 다음날 배를 띄워 비로소 일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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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3.09.24 日本書紀(720)
▐ 삼한시대에는 왕족과 귀족들만 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당나라는 660년에 백제왕조를 무너뜨리고 도성에 있던 왕족과 귀족들을 당나라로 데려갔다. 지방에 있던 왕족과 귀족들은 주류성에 모여 왕조의 재건을 시도하였으나 663년에 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것이 한국에 백제계 성씨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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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8.09.21 三國史記(1145)
당군과 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에 이르러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 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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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6  한국통일과 新羅 9주5소경
0676 한국통일과 新羅 9주5소경
▐ 당나라는 668년에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족과 귀족들을 당나라로 데려갔다. 그리고 676년까지도 신라의 북쪽 국경은 임진강이었는데 이것은 고려왕조가 망하기 전과 같았다. 한국에 고려계 성씨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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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6+ 한민족의 북방 이주
한국통일이 완성될 676년 당시만 해도 신라의 북쪽 경계는 임진강이었지만 이후 신라 말에 대동강까지 영역을 확장했고 왕씨고려는 압록강까지, 그리고 이씨조선은 두만강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새로 취득한 영역에는 남부 지역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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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81 星漢王·閼智·金日磾·少昊金天
▐ 신라 金씨는 북제서(636)의 565년 기록에 처음 나타난다. 太祖는 마운령비(568)와 황초령비(568)에 나타는데, 이즈음 太祖 星漢王에 대한 추존이 이루어진 듯하다. 星漢王의 아버지 閼智에 관한 설화는 그 이후 생겨났을 것이다. 문무왕릉비(681)에는 金日磾의 후손을 자처하는 이야기가 나타나고 김인문 묘지석(695)에는 少昊金天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은 모두 신라 김씨의 공식 기록이라 할 수 있는데, 閼智 설화와는 모순된다.
1720#15580 SHARED
 
0925 高麗史節要(1452)
세자 대광현 등이 그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전후로 도망쳐 온 자들이 수만호였다. 왕이 그들을 매우 후하게 대우하여, 대광현에게 王繼라는 성과 이름을 내려주면서 그를 왕실의 적에 붙이고, 제사를 받들도록 허락하였다.
7374 SHARED
 
1060 新唐書
王姓金 貴人姓朴 民無氏有名 신라왕의 성은 김씨이고 귀인의 성은 박씨이며 백성에게는 성은 없고 이름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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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4 資治通鑑
寶以高雲為建威將軍 封夕陽公 養以為子 雲 高句麗之支屬也 (高句麗自云高陽氏之後裔 故以高為氏 句 如字 又音駒 麗 力知翻) 燕王皝破高句麗 徙於青山 (破高句麗見九十七卷成帝咸康八年(342) 青山 遼西徒河縣之青山也) 由是世為燕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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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 赫居世
조선의 유민이 진한에 6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말이 낳은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오자 성을 朴으로 하고 이름을 혁거세라 하여 왕으로 삼았다. 이어서 용이 우물가에서 여자아이를 낳자 왕비로 삼았다. 삼국유사는 중국 황실의 딸 신모가 진한에 와서 혁거세를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1720#15602 SHARED
 
1145 首露
혁거세 설화, 알지 설화 그리고 탈해 설화 모두 득성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수로 설화에는 없다. 백제餘씨는 夫餘에서 따왔고 고려高씨는 高句麗에서 따왔듯이 가라金씨는 金官國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있다.
1720#15601 SHARED
 
1394 왕씨멸족
왕씨왕조와 이씨왕조는 존속기간이 비슷한데도 전주이씨는 우리 나라 성씨 중 세 번째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는 반면, 개성왕씨의 수는 많지 않다. 이것은 이씨왕조가 전조의 왕족이었던 왕씨를 멸족시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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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창씨개명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하여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씨(氏)를 정해서 제출하도록 하였는데, 창씨신고 가구수는 80%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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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인국통계조사 - 본관
경북 경주 482만, 경남 김해 449만, 경남 밀양 340만, 전북 전주 321만, 경남 진주 137만, 경북 안동 126만 ▶본관이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경주 김씨, 경주 이씨 등이 있고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전주 이씨, 전주 김씨 등이 있다. 전주 김씨는 김알지의 후손인데 몽골침입 때 그 시조가 경주에서 전주로 이주하여 전주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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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인국통계조사 - 성씨
김해 김씨 412만, 밀양 박씨 303만, 전주 이씨 261만, 경주 김씨 174만, 경주 이씨 142만 ▶성씨가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해 김씨는 남가라 수로왕의 후손이고 밀양 박씨는 신라 박혁거세의 후손이다. 전주 이씨는 이성계의 조선 건국 후 크게 번창하였고 경주 김씨는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다. 경주 이씨는 신라의 건국에 참여한 양산촌장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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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인국통계조사 - 성씨  분포
2000년 인국통계조사 - 성씨 분포
왼쪽으로부터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경주 김씨 그리고 경주 이씨. ❶ 김해 김씨는 남가라 김수로왕의 후손인데 왜 서남 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하는가? ❸ 전주 이씨는 전주에서 기원하지만 이조의 건국 이후 한양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그런데 왜 영남 지방에만 드물게 분포할까? ❺ 경주 이씨는 경주에서 기원하니 이러한 분포가 자연스럽다. ○ 서남 지역의 김해 김씨와 경기와 영남 이외의 전주 이씨는 자연스러운 분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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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2 김성회
대한민국의 성관(姓貫)은 286개 성씨와 4179개 본관으로 파악되고 있으며(2000년 인구센서스·통계청), 그중 김씨는 전체 인구의 5분의 1인 992만600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김수로왕계의 김해김씨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김알지계의 신라김씨 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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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김성회
김씨의 시조에 대해서는 네 가지 주장이 있다. ❶ 소호금천씨의 후예 - 김유신비문(673), 김인문비문(695), 대당고김씨부인묘비(864), 삼국사기(1245) ❷ 김일제의 후예 - 문무왕비문(681), 대당고김씨부인묘비(864) ❸ 알지와 수로의 후예 - 삼국사기(1145), 삼국유사(1281) ❹ 신라가 고대국가로 왕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씨족을 표시하는 한자식 성으로 김씨 성을 쓰게 되었다. ❶과 ❸은 비과학적이고 ❷는 근거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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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왕조는 초원에서 오지 않았다.
낙동강 유역에서 성장한 가라와 신라는 고고학적 양상이 백제나 고려과는 다르고 초원과 닮은 점이 있다. 금동관, 적석목곽분 그리고 순장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래서 이들 두 나라를 초원에서 흘러온 세력이 세운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기록에는 중국에서 대동강 유역을 거쳐 낙동강 유역으로 유민이 흘러왔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초원에서 흘러왔다는 이야기는 없다. 따라서 고고학적 양상은 문화의 전파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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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開城王氏
신라와 가라 金씨가 少昊金天의 후예를 자처하고 북연의 고운이 顓頊高陽의 후예를 자처한 것처럼 왕고의 王氏 또한 顓頊高陽의 후손을 자처하였다.
15236 SHARED
 
참고
2003 조선일보: 日帝의 창씨개명 강요문서 발견2010 조선일보: 몽골 김씨, 태국 태씨문무왕 비문의 비밀문무왕 비문의 비밀
 
한국 성씨의 역사
원래 고대에는 왕족과 몇몇 귀족가문만 성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의 왕족은 여, 부여 등의 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8족을 비롯하여 흑치, 사마 등 20여 가지 성을 사용하였다. 고려의 왕족은 고씨 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연, 을지 등 20여종의 성을 사용한 것이 역사기록에서 확인된다. 신라는 왕족이 박/석/김 3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이, 최, 정, 손, 배, 설 등 10여 가지 성을 사용하였다. 이들 중 중국식 한자성은 후대에 들어왔으나 선대까지 ...
7345 SHARED COMMENT
 
한국 성씨의 의미
성씨의 역사를 살펴볼 때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씨는 생물학적인 부계혈통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의 통계청 자료가 보여주는 우리나라 성씨의 경향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첫째, 남의 성씨를 빌려 쓴 게 아니라 원래부터 그 성씨를 썼던 사람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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