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0676 ⏍ 新羅民族論 > (2) 多種族 상태 > 姓氏

한국 성씨의 특징은 본관이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영남 지역에서 출발한 신라가 반도를 통일했던 역사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여진다.
 
0322 ❶ 三國史記(1145)┆閼智┆雞林
1720#30964 SIBLINGS CHILDREN 30964
 
0372 百濟王 餘句
1720#30972 SIBLINGS CHILDREN 30972
 
0413 高句驪王 高璉
1720#30973 SIBLINGS CHILDREN 30973
 
0501 부리 훼(달)
喙部(달부)┆沙喙(사달)┆喙評(달평) ➔ 닭부┆사닭┆닭평
1720#7533 SIBLINGS CHILDREN 7533
 
0565 ❷ 新羅國王 金真興
0568 磨雲嶺·黃草嶺碑 太祖
1720#30974 SIBLINGS CHILDREN 30974
 
0636 쫄 탁(たく)┆부리 주
啄評(탁평) ➔ 닭평
1720#7546 SIBLINGS CHILDREN 7546
 
0681 ❸ 文武王陵碑(681) 秺侯
1720#30965 SIBLINGS CHILDREN 30965
 
0695 ❹ 金仁問墓碑(695) 少皥金天
1720#30967 SIBLINGS CHILDREN 30967
 
0720 喙地(달지)┆喙己呑(달기탄) ➔ 닭지┆닭기탄
1720#30916 SIBLINGS CHILDREN 30916
 
0720 잠깐 웃을 록(とく)
㖨國(とくこく)┆㖨己呑(とくこてむ)┆沙㖨部(さとくふ) ➔ 닭국┆닭기탄┆사닭부
1720#26820 SIBLINGS CHILDREN 26820
 
0801 喙評(달평) ➔ 닭평
1720#30924 SIBLINGS CHILDREN 30924
 
0836 興德王陵碑片┆太祖星漢
1720#30970 SIBLINGS CHILDREN 30970
 
0864 大唐故金氏夫人墓銘(864)
少昊氏金天┆日磾·秺亭侯
1720#30968 SIBLINGS CHILDREN 30968
 
0900± 쫄 탁
沙涿(사도)┆漸涿(점도) ➔ 사닭·점닭
1720#30926 SIBLINGS CHILDREN 30926
 
1145 들보 량
梁部(도부)┆沙梁部(사도부)┆漸梁部·牟梁部(점도부·모도부) ➔ 닭부┆사닭부┆점닭부·모닭부
1720#30921 SIBLINGS CHILDREN 30921
 
1145 통달할 달
達伐(달벌)┆達句伐(달구벌) ➔ 닭벌
1720#30917 SIBLINGS CHILDREN 30917
 
   姓氏
姓氏
1720#28695 SIBLINGS CHILDREN 28695
 
솔까역사 新羅
(朝鮮→)燕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是爲辰韓六部 연나라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육촌을 이루었다. 이것이 진한 육부가 되었다. 첫째는 閼川 楊山村, 둘째는 突山 高墟村, 셋째는 觜山 珍支村(干珍村), 넷째는 茂山 大樹村, 다섯째는 金山 加利村, 여섯째는 明活山 高耶村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 육부가 되었다.
1720#31518 SIBLINGS CHILDREN 31518
 
閼川 楊山村
蘿井은 楊山의 산기슭에 있었으므로 楊山은 남산이다. 閼川에 관한 기록은 형산강에 어울리므로 閼川 楊山村은 형산강을 건너는 나루 인근의 남산 기슭일 것이다. 이곳은 외부의 문물이 서라벌로 들어오는 관문이므로 신라의 시조가 이곳에서 났다는 이야기와도 어울린다. 한편, 蘿井은 楊山의 기슭에 있었지만 이 楊山은 月城에서 보았을 때 남쪽에 있기 때문에 훗날 南山이라 불린 듯하다.
1720#30908 SIBLINGS CHILDREN 30908
 
突山 高墟村
삼국사기에는 서라벌 주변의 明活山, 吐含山, 北兄山, 西兄山 등이 제사를 지낸 곳으로 나와 있다. 남산만 빠졌을 리는 없을 테니, 제사 기록에 있는 髙墟(沙梁)를 남산에 제사지낸 곳으로 추정한다. 고려사에도 沙梁을 南山部로 바꾸었다고 되어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남산은 남북으로 결이 나 있어 금오봉에 오르는 길 또한 이 결을 따라 났을 것이므로 그 입구인 포석정 일대를 突山 高墟村으로 추정한다. 이곳은 蘿井과 가까워 혁거세 설화와도 어울린다.
1720#30909 SIBLINGS CHILDREN 30909
 
茂山 大樹村
삼국유사(1281)에는 仙桃聖母가 西述聖母라고도 되어 있어 仙桃山은 삼국사기(1145)의 제사 기록에서 西述로도 표기된 牟梁에 있었던 듯하다. 牟梁은 원래 茂山 大樹村이었다고 하므로 茂山은 仙桃山이 된다. 이곳은 蘿井에서 멀지 않아 仙桃聖母가 혁거세왕을 낳고 仙桃山에 들어가 살았다는 삼국유사의 이야기와도 어울린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西兄山도 이 仙桃山으로 비정된다.
1720#30907 SIBLINGS CHILDREN 30907
 
-0134~-0086 漢書(82) 金日磾
1720#22056 SIBLINGS CHILDREN 22056
 
-0134 ~ -0086 秺县
秺县 亦作㢉县 西汉置秺县金日磾封侯国 其址在今山东菏泽市成武县伯乐集镇
1720#15612 SIBLINGS CHILDREN 15612
 
-0057 「솔까역사」 新羅
始祖姓朴氏✘ 諱赫居世 前漢 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即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囯號徐那伐 시조의 이름은 혁거세이다. -57년 4월 병진(또는 정월 15일이라고도 하였다)에 즉위하여 거서간이라 일컬었다. 이때 나이는 13세였고 나라 이름을 서나벌이라 하였다. ┆신라왕의 성은 521년의 기록에 募로 처음 나온다.
1720#8219 SIBLINGS CHILDREN 8219
 
-0057 朴赫居世
▐ 삼국사기는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이라 하여 朴이 박의 음차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에 身生光彩 因名赫居世王 或作弗矩内王 言光明理世也라 하여 赫이 밝-의 훈차라 하였으므로, 朴도 밝-의 음차일 가능성이 있다. 밝-의 음차와 훈차를 붙인 朴□와 赫□가 별도로 존재하다 후대에 朴이 성이 되면서 赫은 이름으로 인식되었다는 이야기다. 居世는 居西干의 居西를 이름으로 오인해서 붙인 듯하다. 그렇다면 朴赫居世의 원래 명칭은 '밝은 임금' 정도였다.
1720#27823 SIBLINGS CHILDREN OPEN
 
-0045 ~ 0023 王莽
김일제의 증손인 김당의 어머니는 남인데 왕망의 어머니 공현군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왕망의 이모)이다.
1720#15525 SIBLINGS CHILDREN OPEN
 
-0037 「솔까역사」 高句麗
始祖(東明聖王→)鄒牟王 姓髙氏✘ 시조는 추모왕이다. 國號髙句麗 因以髙爲氏✘ ┆동명은 부여의 시조고 고구려의 시조는 광개토왕릉비(414)에 추모왕으로 나온다. 고씨 성은 407년 이전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1720#1297 SIBLINGS CHILDREN 1297
 
0060 三國遺事(1281)
永平三年庚申(一云中元六年誤矣 中元盡二年而已)八月四日瓠公夜行月城西里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鳩林 有紫雲從天垂地 雲中有黃金樻掛於樹枝光自樻岀 亦有白雞鳴於樹下 以状聞於王 駕幸其林開樻 有童男卧而即起 如赫居世之故事故因其言以閼智名之 閼智即郷言小兒之稱也 抱載還闕烏獸相隨喜躍蹌蹌 土擇吉日冊位太子 後讓故 婆娑不即王位
1720#2251 SIBLINGS CHILDREN COMMENT 2251
 
0060 三國遺事(1281)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를 가는데 始林의 가운데 크고 밝은 빛이 있으며 자색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쳐 내려온 것을 보았다. 구름 속에 황금 상자가 있는데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빛은 상자로부터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탈해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친히 숲에 나가서 그 상자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워있던 아이가 바로 일어났다. 이것은 혁거세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아이 이름을 閼智라 하였다. 알지는 우리 말로 아이를 일컫는 말이다
1720#30952 SIBLINGS CHILDREN 30952
 
0060 三國遺事(1281)
금상자에서 나왔으므로 金씨를 성으로 삼았다. 閼智는 열한을 낳았고 熱漢은 아도를 낳고 阿都는 수류를, 首留는 욱부를 낳고 郁部는 俱道(仇刀라고도 한다)를 낳고 구도는 未鄒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즉위하니 신라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 閼智→熱漢→阿都→首留→郁部→俱道(仇刀)→未鄒
1720#4398 SIBLINGS CHILDREN COMMENT 4398
 
0065 三國史記(1145)
王夜聞金城西始林樹間有鷄鳴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掛樹枝 白雞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櫝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竒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 聦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櫝 姓金氏 改始林名雞林 因以爲國號
1720#5815 SIBLINGS CHILDREN COMMENT 5815
 
0065 三國史記(1145)
王夜聞金城西始林樹間有鷄鳴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掛樹枝 白雞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櫝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竒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1720#28713 SIBLINGS CHILDREN 28713
 
0065 三國史記(1145)
왕이 밤에 金城의 서쪽 始林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瓠公을 보내 살피게 하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니 왕이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다가 열어보았다. 작은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모습이 뛰어나고 훌륭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좋은 후계를 보낸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거두어 길렀다.
1720#28697 SIBLINGS CHILDREN 28697
 
0065 三國史記(1145)
밤에 왕이 金城 서쪽의 始林 나무들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 살펴보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고하니 왕은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게 했다. 작은 남자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자태가 뛰어나게 훌륭했다.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閼智라 했다. 금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金氏라 했다. 시림의 이름을 雞林으로 고치고 국호를 삼았다.
1720#30945 SIBLINGS CHILDREN 30945
 
0065 ◾雞林
이때 改始林名雞林因以爲國號(시림을 계림으로 개칭하고 국호로 삼았다)고 하나 閼智의 후손이 왕이 되면서 국호를 바꾸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1720#15410 SIBLINGS CHILDREN 15410
 
0065 三國史記(1145)
▐ 閼智→勢漢→阿道→首留→郁甫→仇道→末仇→奈勿→巴胡→習寶→智證→立宗→眞興→眞智→龍樹→武烈→文武
1720#15522 SIBLINGS CHILDREN 15522
 
0065 솔까역사 三國史記 閼智
及長聦明多智略乃名閼智(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알지라 했다.)✘ 以其出於金櫝(姓金氏→)名閼智(금궤에서 나왔다고 해서 이름을 알지라 했다.)
1720#28715 SIBLINGS CHILDREN 28715
 
0082 漢書 金日磾傳
當母南即莽母功顯君同產弟也 김당의 어머니 남은 곧 왕망의 어머니 공현군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이다. ▐ 김당은 김일제의 증손이다. 그가 서한을 멸망시킨 왕망의 이종사촌이니, 서한 시기에 金日磾(-134~-86)의 후손이 7대까지 내려올 수 없다.
1720#15574 SIBLINGS CHILDREN 15574
 
0236 三國史記(1145)
骨伐國王 아음부가 휘하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해 왔으므로, 그에게 집과 토지를 하사하여 안치하고 골벌국 지역을 郡으로 하였다.
1720#25929 SIBLINGS CHILDREN 25929
 
0236~0369
0236~0369
達과 喙은 발음이 같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연관성을 상상해 볼 수 있다. 達伐은 236~261년에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보이며 서라벌의 喙, 沙喙 그리고 牟喙은 달구벌에서 서라벌로 넘어올 때 처음 닿는 곳으로 원래 지명은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그리고 무산 대수촌이었다. 따라서 닭을 숭배하는 달구벌 사람들이 서라벌로 많이 이주하였고 그들이 서라벌을 장악하면서 지명도 바꾸고 김씨 왕도 배출하였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1720#30913 SIBLINGS CHILDREN 30913
 
0261 三國史記(1145)
達伐城을 쌓고 나마 극종을 성주로 삼았다.
1720#28712 SIBLINGS CHILDREN 28712
 
0322.01 ❰❰¹ 0262 솔까역사
味鄒이사금(味照라고도 하였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선조 알지가 계림에서 태어나 탈해왕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러 나중에 대보로 삼았다. 閼智는 세한을 낳았고, 勢漢은 아도를 낳았고, 阿道는 수류를 낳았고, 首留는 욱보를 낳았고, 郁甫는 구도를 낳았는데, 仇道가 곧 味鄒의 아버지이다. 첨해가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 ▐ 미추왕이 즉위하면서 알지 설화가 만들어지고 6부의 이름이 개칭된 듯하다.
1720#22569 SIBLINGS CHILDREN 22569
 
0322.01 ❰❰¹ 0262 ◾味鄒
閼智(65) →⁴³ 勢漢 →⁴³ 阿道 →⁴³ 首留 →⁴³ 郁甫 →⁴³ 仇道 ➔⁴³ 味鄒(322)+末仇 →³⁴ 奈勿(356) →⁴⁸ 巴胡 →⁴⁸ 習寶 →⁴⁸ 智證(500) →²⁰ 立宗 →²⁰ 眞興(540) →³⁶ 眞智(576) →³⁹ 龍樹 →³⁹ 武烈(654) →⁷ 文武(661) ┆味鄒+末仇와 奈勿 사이의 간격이 비정상적으로 길어 味鄒의 연대를 60년 뒤로 물렸다.
1720#15564 SIBLINGS CHILDREN 15564
 
0322⁺ ❰❰ 0065 「솔까역사」 ❶ 閼智┆雞林
0322⁺ ❰❰ 0065 「솔까역사」 ❶ 閼智┆雞林
改始林名雞林 因以爲國號 시림을 계림으로 개칭하고 국호로 삼았다. ┆ 閼智부터 味鄒까지 7대인데, 7대는 3천궁녀나 100만대군처럼 한 집안의 유래가 오래된 것을 표현하는 상투적인 어구다. 이것은 閼智 설화가 味鄒 시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김씨로서 처음 왕이 된 味鄒에게 자신의 혈통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일은 꼭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호를 閼智 설화에 나오는 雞林으로 바꾼 것도 味鄒 시기가 어울린다.
1720#7549 SIBLINGS CHILDREN COMMENT 7549
 
0328 ❰❰ -0033 「솔까역사」 日本書紀
任那國 遣蘇那曷叱知 令朝貢也 任那者 去筑紫國二千餘里北 阻海 以在鶏林之西南 임나국이 소나갈질지를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리 북쪽으로 가야 하는데 바다로 막혀있다.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 ▐ 신라가 국호를 雞林으로 바꾼 것이 322년 이후라면 이 기록의 사건도 그 이후가 되어야 한다. -33년의 간지가 戊子이니 328년이나 그 이후의 戊子年이 어울린다.
1720#30932 SIBLINGS CHILDREN 30932
 
0328 ❰❰ -0033 ◾雞林
일본서기(720)에서는 新羅가 435회 언급되고 斯羅가 8회 언급되는데 비해 雞林은 1회 밖에 언급이 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기록의 雞林은 사료에 나오는 그대로일 것이다. 雞林과 함께 이 기록에 나오는 任那는 562년에 신라에 병합되었으므로 雞林이란 국호도 562년 이전에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20#30971 SIBLINGS CHILDREN 30971
 
0332 ❰❰⁵ 0032 「솔까역사」 新羅
攺六部之名 楊山部為(梁部→)喙部 髙墟部為(沙梁部→)沙喙部 大樹部爲(漸梁部→)漸喙部一云(牟梁→)牟喙 于校珍部為夲彼部 加利部為漢祇部 明活部為習比部 6부의 이름을 바꾸었다. 양산부는 닭부라고 하고 고허부는 사닭부라고 하였으며 대수부는 점닭부(모닭부라고도 한다)라고 하고 간진부는 본피부라고 하였으며 가리부는 한기부라고 하고 명활부는 습비부라고 하였다.
1720#31519 SIBLINGS CHILDREN 31519
 
0332 喙(달) 啄(たく) 㖨(とく) 涿(도) 梁(도) 達(달)
0332 喙(달) 啄(たく) 㖨(とく) 涿(도) 梁(도) 達(달)
▐ 달구벌과 서라벌의 지명에 나오는 喙·達·㖨·梁·啄·涿은 모두 같은 발음을 표기한 듯하다. 최치원은 신라인들이 연나라에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북중국의 涿水에서 지명을 땄다고 했다. 그러나 뜻이 '부리'나 '쪼다'가 많고 발음은 '닭'으로 모두 품을 수 있어 닭의 음차일 가능성도 있다.
1720#30927 SIBLINGS CHILDREN 30927
 
0371.10 三國史記(1145) 百濟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가 힘을 다해 싸워 막았으나 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1720#14902 SIBLINGS CHILDREN 14902
 
0372- ❰❰ -0018 「三國誤記」 百濟
與髙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백제의 왕성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372년의 사건이다.
1720#8221 SIBLINGS CHILDREN 8221
 
0372.01 晉書(648)
二年春正月辛醜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 백제와 임읍이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1720#14903 SIBLINGS CHILDREN 14903
 
0372.06 晉書(648)
六月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백제왕 여구를 진동장군 낙랑태수로 봉했다. ▐ 백제 餘씨 왕성이 최초로 나타나는 기록이다. 이 백제 餘씨는 夫餘에서 따왔다. 餘句란 이름은 5달 전에 백제가 보낸 사신이 제공한 정보일 것이다.
1720#6890 SIBLINGS CHILDREN 6890
 
0396 廣開土王陵碑(414)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1720#14904 SIBLINGS CHILDREN 14904
 
0400 廣開土王陵碑(414)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1720#14905 SIBLINGS CHILDREN 14905
 
0400 晉書(648)
高句驪王安遣使貢方物 有雀素身綠首 集于端門 棲翔東園 二旬而去 改東園為白雀園
1720#7380 SIBLINGS CHILDREN 7380
 
0407 晉書(648)
慕容雲 字子雨 寶之養子也 祖父和 高句驪之支庶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為氏焉 모용운은 자가 자우인데 모용보의 양자다. 할아버지 화는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고양씨의 먼 후손을 자처하여 씨를 고라 했다.
1720#14906 SIBLINGS CHILDREN 14906
 
0407 晉書(648)
雲遂即天王位 復姓高氏 大赦境內殊死以下 改元曰正始 國號大燕 모용운이 천왕의 자리에 올라 高씨로 성을 되돌리고 사형수 이하를 크게 사면하였다. 그리고 연호를 정시라 하고 국호를 대연이라 했다.
1720#6893 SIBLINGS CHILDREN 6893
 
0408 資治通鑑(1084)
高句麗遣使聘北燕 且敍宗族 北燕王雲遣侍御史李拔報之 고려가 사신을 북연에 보내 종족으로서 예를 베푸니 북연왕 운이 시어사 이발을 보내 답례하였다.
1720#14933 SIBLINGS CHILDREN 14933
 
0413 宋書(488)
高句驪王 高璉 晋安帝 義熙九年 遣長史高翼奉表獻赭白馬 以璉爲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驪王·樂浪公 고구려왕 고연이 진나라 안제 의희 9년에 장사 고익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자백마를 바쳤다. 안제는 고연을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 고려의 高씨 왕성이 고려에 의해 나타나는 최초의 기록이다.
1720#6957 SIBLINGS CHILDREN COMMENT 6957
 
0414 廣開土王陵碑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 夫餘의 엄리대수를 거쳐가게 되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라고 하였다.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건너가서 비류곡 홀본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1720#15234 SIBLINGS CHILDREN 15234
 
0414 廣開土王陵碑
▐ 이 설화는 고려 왕조의 공식적인 이야기다. 고려의 高씨가 顓頊高陽의 후예라는 이야기는 이 설화와 모순되고 또 고려 왕조에 의해 언급된 적도 없으므로, 북연의 고운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백제 餘씨가 夫餘에서 따온 것처럼 고려 高씨도 高麗라는 나라 이름에서 따왔다고 보아야 한다.
1720#15235 SIBLINGS CHILDREN 15235
 
0464 㖨國·喙地-達伐·達句伐
倭는 新羅에 침입한 高麗와 전투를 치렀는데, 그곳은 이듬해에 倭가 다시 新羅와 전투를 치른 㖨일 가능성이 높다. 倭가 高麗를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자 新羅가 되찾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加羅를 고령으로 비정하는 것은 비교적 근거가 충분한데, 㖨己呑은 加羅와 新羅의 경계에 있었다고 하므로 달구벌에 어울린다. 이곳은 倭가 新羅를 치러 왔다가 나루에서 방향을 바꾸어 加羅를 쳤다는 이야기의 무대로도 어울린다.
1720#30910 SIBLINGS CHILDREN 30910
 
0479 南齊書(537)
加羅국은 삼한의 한 종족이다. 건원 원년에 국왕 荷知가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바쳤다. 이에 조서를 내렸다. “널리 헤아려 비로소 올라오니, 멀리 있는 오랑캐가 두루 덕에 감화됨이라. 가라왕 하지는 먼 동쪽 바다 밖에서 폐백을 받들고 관문을 두드렸으니, 보국장군 본국왕의 벼슬을 제수함이 합당하다.”
1720#4397 SIBLINGS CHILDREN 4397
 
0501 포항 중성리 신라비
喙部習智阿干支┆沙喙斯德智阿干支敎┆爭人喙評公斯弥
1720#28694 SIBLINGS CHILDREN 28694
 
0501 喙 부리 훼/괴로워할 훼, 부리 달
뜻을 나타내는 口(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을 나타내는 글자 彖(단→달)이 합하여 이루어졌다. 彖은 멧돼지의 상형이다.
1720#26819 SIBLINGS CHILDREN 26819
 
0501 喙┆鸟兽的嘴
1720#26818 SIBLINGS CHILDREN 26818
 
0501 彖
1720#215 SIBLINGS CHILDREN 215
 
0501 彖 판단할 단
1720#26834 SIBLINGS CHILDREN 26834
 
0503 포항 냉수리 신라비
斯羅喙斯夫智王 사라의 달부 소속인 사부지왕┆沙喙至都盧葛文王 사달의 지도로 갈문왕┆喙尒夫智壹干支 달의 이부지 일간지┆沙喙壹夫智奈麻 사달의 일부지 내마┆喙眈須道使心訾公 달의 탐수도사 심자공┆喙沙夫那·斯利 달의 사부나와 사리┆沙喙蘇那支 사달의 소나지
1720#26835 SIBLINGS CHILDREN 26835
 
0521 梁書(636) 募秦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普通二年 王姓募名秦 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신라는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521년에 성은 모, 이름은 진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새겨 신표로 삼는다. 의사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 신라는 백제(372), 고려(413) 그리고 가라(479)에 비해 늦게 중국에 조공을 시작했다.
1720#4322 SIBLINGS CHILDREN COMMENT 4322
 
0521 南史(659) 募泰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梁普通二年 王姓募名泰 始使使校隨百濟奉獻方物 신라는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보통 2년에 성은 모, 이름은 태인 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1720#4411 SIBLINGS CHILDREN COMMENT 4411
 
0521 제번공직도(1914) 사라국 募泰
國王不能自通使聘 普通二年 其王姓募名泰 始使隨百濟奉表献方物 신라 국왕은 스스로 사신을 파견할 능력이 없었다. 521년에 성이 모이고 이름이 태인 왕이 처음으로 백제 사신 편에 사신을 딸려보내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無文字 刻木為範 言語待百濟而後通焉 문자가 없고 나무에 금을 새겨 표시하였다. 신라 사신은 백제 사신이 말한 다음에 통한다.
1720#4394 SIBLINGS CHILDREN COMMENT 4394
 
0524 울진 봉평 신라비
喙部 牟卽智 寐錦王 달부 모즉지 매금왕┆沙喙部 徙夫智 葛文王 사달부 사부지 갈문왕┆岑喙部 昕智 干支 잠달부 흔지 간지┆沙喙部 而粘智 太阿干支 사달부 이점지 태아간지┆沙喙部 十斯智 奈麻 사달부 십사지 내마
1720#26837 SIBLINGS CHILDREN 26837
 
0524 울진봉평新羅비 牟即
牟即智寐錦王 모즉지매금왕 ▐ 법흥왕은 514년부터 540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양서에 나오는 募秦은 신라 사신이 牟即이라 한 것을 백제 사신의 통역을 거치면서 양나라 측에서 중국식 성과 이름으로 오해하고 발음을 표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720#4416 SIBLINGS CHILDREN COMMENT 4416
 
0532 三國史記(1145)
금관국(金官國)의 왕인 김구해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 아들인 노종, 둘째 아들인 무덕, 막내 아들인 무력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 이때까지도 신라왕이 김씨 성을 사용한 흔적이 없다. 따라서 왕건이 망명해 온 발해 왕자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내려준 것처럼 신라왕이 남가라 왕에게 김씨 성을 내려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720#15626 SIBLINGS CHILDREN 15626
 
0539 울주천전리각석
另卽知太王 영즉지태왕
1720#4417 SIBLINGS CHILDREN COMMENT 4417
 
0540 三國史記(1145)
眞興王이 왕위에 올랐다. ┆閼智(65) →⁴³ 勢漢 →⁴³ 阿道 →⁴³ 首留 →⁴³ 郁甫 →⁴³ 仇道 →⁴³ 味鄒(322)+末仇 →³⁴ 奈勿(356) →⁴⁸ 巴胡 →⁴⁸ 習寶 →⁴⁸ 智證(500) →²⁰ 立宗 ➔²⁰ 眞興(540) →³⁶ 眞智(576) →³⁹ 龍樹 →³⁹ 武烈(654) →⁷ 文武(661)
1720#15523 SIBLINGS CHILDREN 15523
 
0551 三國史記(1145)
연호를 開國으로 바꾸었다.
1720#15446 SIBLINGS CHILDREN 15446
 
0551 三國史記(1145) 新羅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입케 하였는데, 이긴 기세를 타서 10개의 군을 빼앗았다.
1720#15638 SIBLINGS CHILDREN 15638
 
0551± 단양신라비
喙部 伊史夫智 伊干▨ 달부의 이사부지 이간□┆喙部 西夫叱智 大阿干▨ 달부의 서부질지 대아간□┆喙部 比次夫智 阿干支 달부 비차부지 아간지┆沙喙部 武力智 阿干支 사달부 무력지 아간지┆鄒文村 幢主 沙喙部 噵設智及 干支 추문촌 당주 사달부 도설지 급간지┆勿思伐▨▨▨喙部 助黑夫智 及干支 물사벌□□□달부 조흑부지 급간지┆書人 喙部 ▨▨▨▨▨▨▨▨▨人 서인 달부 □□□□□□□□□인
1720#26867 SIBLINGS CHILDREN 26867
 
0552 日本書紀(720)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과 니미방이다.
1720#15640 SIBLINGS CHILDREN 15640
 
0562 日本書紀(720)
신라가 임나관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국, 안라국, 사이기국, 다라국, 졸마국, 고차국, 자타국, 산반하국, 걸찬국, 염례국 등 모두 열 나라이다.
1720#15627 SIBLINGS CHILDREN 15627
 
0564 北齊書(636)
고려, 말갈 그리고 신라가 사신을 통해 조공을 보내왔다.
1720#4415 SIBLINGS CHILDREN COMMENT 4415
 
0565 北齊書(636)
詔以新羅國王金真興為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을 사지절 동위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 전해에 있었던 조공에 대한 답례로 보인다. 그렇다면 김진흥이란 명칭도 전해에 신라가 제공한 정보였을 것이다. 백제 餘씨는 夫餘란 국호에서 따왔고 고려 高씨는 高麗란 국호에서 따왔으므로 신라 金씨도 도읍 金城에서 따왔고 가라 金씨도 金官國이란 국호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있다.
1720#4414 SIBLINGS CHILDREN COMMENT 4414
 
0565 北齊書(636)
▐ 백제의 餘씨 왕성은 근초고왕이 고려의 평양성을 침공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이듬해의 기록에 처음 나타나고, 고려의 高씨 왕성은 광개토왕이 백제를 침공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신라에 침입한 왜를 내쫓은 지 7년 후의 기록에 처음 나타나며, 신라의 金씨 왕성도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임나를 병합한 지 3년 후의 기록에 처음 나타났다. 패권을 장악했을 때 왕성이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다.
1720#7386 SIBLINGS CHILDREN 7386
 
0565⁻ ❰❰ 0065 「솔까역사」 新羅
姓金氏 성을 김씨로 하였다.
1720#30959 SIBLINGS CHILDREN 30959
 
0568 磨雲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
太昌 원년 세차 무자 ▨▨ 21일 ▨▨ ▨興太王이 ▨▨를 순수하여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무릇 순풍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상의 도리가 참되지 않고, 그윽한 덕화가 펴지지 않으면 사악한 것이 서로 경쟁하게 된다. 그러므로 帝王이 建号함에 있어서 자신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나 朕은 왕위에 오르는 운수가 자신에 이르러, 위로는 太祖의 기틀을 이어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몸을 조심하며 스스로 삼가나 하늘의 도리를 어길까 두렵다. 以帝王
1720#7373 SIBLINGS CHILDREN 7373
 
0568 黃草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
8월 21일 계미에 眞興太王이 영토를 ▨▨하고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세상의 도리가 참되지 않고, 그윽한 덕화가 펴지지 않으면 사악한 것이 서로 경쟁하게 된다. 그러므로 帝王이 建号함에 있어서 자신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나 朕은 … 太祖의 기틀을 이어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몸을 조심하며 스스로 삼가나 ▨▨▨까 두렵다. ▐ 以帝王建号莫不修己以安百姓 이 부분은 마운령비와 똑같다.
1720#15633 SIBLINGS CHILDREN 15633
 
0568 金氏┆建号┆朕┆太祖
建号는 551년에 開國 연호를 만든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朕이라는 호칭과 함께 제국을 자처한 것이다. 太祖도 이즈음에 추존된 듯한데, 金氏 왕성도 이즈음에 나타난다.
1720#15520 SIBLINGS CHILDREN 15520
 
0594 隋書(636)
傳祚至金眞平 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 高祖拜眞平爲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왕위가 김진평에 이른 개황 14년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고조는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1720#4338 SIBLINGS CHILDREN COMMENT 4338
 
0594 北史(659)
傳世三十至眞平以隋開皇十四年遣使貢方物文帝拜眞平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왕위가 대대로 전하여져 30세인 진평에 이르렀는데, 수나라 개황 14년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문제는 진평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봉하였다.
1720#4410 SIBLINGS CHILDREN COMMENT 4410
 
0636 梁書
其俗呼城曰健牟羅 其邑在內曰啄評 在外曰邑勒 亦中國之言郡縣也 國有六啄評 五十二邑勒┆왕성을 건모라라 부르며 그 읍이 안에 있는 것은 탁평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읍륵이라 하니, 이것은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나라 안에는 6군데의 탁평과 52군데의 읍륵이 있다. ❸ 喙評(501 중성리 신라비) = 啄評(636 양서)
1720#26828 SIBLINGS CHILDREN 26828
 
0636 周書
髙麗者 其先出於夫餘 自言始祖曰 朱蒙 河伯女感日影所孕也 朱蒙長而有材 畧夫餘人惡 而逐之土 于紇斗骨城 自號曰髙句麗 仍以髙為氏 고려는 그 선조가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시조는 주몽인데 하백의 딸이 햇빛에 감응되어 잉태하였다’고 한다. 주몽이 장성하여 재주와 지략이 있자 부여 사람들이 미워하여 쫓아버렸다. 흘두골성에 살면서 스스로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어 고씨로 성을 삼았다.
1720#14900 SIBLINGS CHILDREN 14900
 
0636 周書
▐ 고려 왕성이 국호에서 비롯되었다는 최초의 기록이다. 중국 기록으로서는 위서(554)에 고려의 건국 설화와 초기 왕계가 최초로 나타나지만 왕성의 유래에 대해서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1720#14907 SIBLINGS CHILDREN 14907
 
0636 啄┆鸟类用嘴叩击并夹住东西
啄는 일본서기(720)와 삼국사기(1145)에서 사용된 예가 없다.
1720#26815 SIBLINGS CHILDREN 26815
 
0636 啄┆쫄 탁┆부리 주
1720#30905 SIBLINGS CHILDREN 30905
 
0636 釋日本紀(1300⁻) 啄 → たく
1720#26816 SIBLINGS CHILDREN 26816
 
0642 括地志
新羅治金城 신라의 치소는 금성이다. ▐ 백제餘씨는 夫餘에서 따왔고 고려高씨는 高句麗에서 따왔듯이 신라金씨 또한 金城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신라 왕성 金씨에서 金城이 나왔을 수도 있다.
1720#15629 SIBLINGS CHILDREN OPEN
 
0660.09 三國史記(1145)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孝, 왕자 泰, 隆, 演 및 대신과 장사 88명과 주민 1만 2천 8백 7명을 당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1720#7376 SIBLINGS CHILDREN COMMENT 7376
 
0660.11.01 日本書紀(720)
장군 소정방 등이 사로잡은 백제왕 이하 태자 융(隆) 등 여러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국변성 이하 37명, 모두 50여 명을 조당에 바쳤다. 급히 인도하여 천자에게 나아가니, 천자는 은혜로운 칙명으로 보자마자 풀어주었다.
1720#7375 SIBLINGS CHILDREN COMMENT 7375
 
0661 三國史記(1145)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武烈이라 하고 영경사의 북쪽에 장사를 지냈으며 太宗이라는 묘호를 올렸다.
1720#15420 SIBLINGS CHILDREN 15420
 
0663.09.24 日本書紀(720)
일본의 수군 및 좌평 여자신,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와 국민들이 호례성에 이르렀다. 다음날 배를 띄워 비로소 일본으로 향했다.
1720#7377 SIBLINGS CHILDREN COMMENT 7377
 
0663.09.24 日本書紀(720)
▐ 삼한시대에는 왕족과 귀족들만 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당나라는 660년에 백제왕조를 무너뜨리고 도성에 있던 왕족과 귀족들을 당나라로 데려갔다. 지방에 있던 왕족과 귀족들은 주류성에 모여 왕조의 재건을 시도하였으나 663년에 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것이 한국에 백제계 성씨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다.
1720#4418 SIBLINGS CHILDREN 4418
 
0668.09.21 三國史記(1145)
당군과 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에 이르러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 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1720#7379 SIBLINGS CHILDREN COMMENT 7379
 
0673 三國史記(1145)
又聞 新羅人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見新羅國子愽士薛因宣撰金庾信碑及朴居勿撰婔克一書三郎寺碑文) 듣건대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이는 신라 국자박사 설인선이 지은 김유신의 비문과 박거물이 지었고 요극일이 쓴 삼랑사비문에 보인다.)
1720#2254 SIBLINGS CHILDREN COMMENT 2254
 
0676  한국통일과 新羅 9주5소경
0676 한국통일과 新羅 9주5소경
▐ 당나라는 668년에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족과 귀족들을 당나라로 데려갔다. 그리고 676년까지도 신라의 북쪽 국경은 임진강이었는데 이것은 고려왕조가 망하기 전과 같았다. 한국에 고려계 성씨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1720#7378 SIBLINGS CHILDREN COMMENT 7378
 
0676+ 한민족의 북방 이주
한국통일이 완성될 676년 당시만 해도 신라의 북쪽 경계는 임진강이었지만 이후 신라 말에 대동강까지 영역을 확장했고 왕씨고려는 압록강까지, 그리고 이씨조선은 두만강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새로 취득한 영역에는 남부 지역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1720#7371 SIBLINGS CHILDREN COMMENT 7371
 
0681 文武王陵碑
君靈源自敻繼昌基於火官之后峻構方隆由是克 枝載生英異(秺)侯祭天之胤傳七葉以 …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 제천지윤이 7대를 전하여 …
1720#2260 SIBLINGS CHILDREN COMMENT 2260
 
0681 文武王陵碑
焉⎵⎵十五代祖星漢王降質圓穹誕靈仙岳肇臨 … 以對玉欄始蔭祥林如觀石紐坐金輿而 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혼이 선악에서 나와, ▨▨을 개창하여 옥란을 대하였다. 비로소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석뉴를 보고 금수레에 앉아 … 하는 것 같았다.
1720#4407 SIBLINGS CHILDREN 4407
 
0681 秺侯┆星漢王
신라 金氏가 金日磾의 후손을 자처한 최초의 기록이다. 문무왕의 15대조는 閼智의 아들 勢漢이니, 여기서 말하는 星漢王은 바로 그다.┆閼智(65) →⁴³ 勢漢 →⁴³ 阿道 →⁴³ 首留 →⁴³ 郁甫 →⁴³ 仇道 →⁴³ 味鄒(322)+末仇 →³⁴ 奈勿(356) →⁴⁸ 巴胡 →⁴⁸ 習寶 →⁴⁸ 智證(500) →²⁰ 立宗 →²⁰ 眞興(540) →³⁶ 眞智(576) →³⁹ 龍樹 →³⁹ 武烈(654) ➔⁷ 文武(661)
1720#30963 SIBLINGS CHILDREN 30963
 
0695 金仁問墓碑
×五之君少皥▨墟分星于而超碧海金天命× ×▨太祖漢王啓千齡之⎵⎵聖臨百谷之× ▨오지군이라 소호는 ▨허하여 별빛을 나누고 시퍼런 바다를 뛰어 넘었으며 금천은 … 태조 한왕은 천년의 ▨을 열고, ▨성은 백곡의 ▨▨에 임하셨다.
1720#15594 SIBLINGS CHILDREN 15594
 
0695 少皥金天┆太祖漢王
少昊 昊又作皞 皓 顥 又稱青陽氏 金天氏 窮桑氏 雲陽氏 或稱朱宣 신라와 가라 金씨가 少昊金天의 후예를 자처한 것은 북연의 고운이 顓頊高陽의 후예를 자처한 것처럼 성씨가 만들어지고 난 후에 가미된 이야기다.
1720#15412 SIBLINGS CHILDREN 15412
 
0699 黑齒常之墓誌銘
恭聞日磾爲漢之鞞 삼가 듣건대 김일제는 한나라의 칼집이 되었다. ▐ 한나라에 포로로 잡혔다가 한나라의 충신으로 변신한 흉노 왕자 金日磾는 흑치상지와 같이 중국에 봉사하는 외국 출신들에게 모범 사례였다.
1720#15581 SIBLINGS CHILDREN 15581
 
0700~0711 솔까역사 大唐西域求法高僧傳
雞貴者梵云矩矩咤㗨說羅 矩矩咤是雞 㗨說羅是貴 卽(高麗→)新羅國也 相傳云 彼國敬雞神 (而取尊故戴翎羽而表飾矣✘) 那爛陀有池名曰龍泉 西方喚(高麗→)新羅爲矩矩咤㗨說羅也 계귀는 범어로 구구타예설라이다. 구구타는 닭이고 예설라는 귀하다는 뜻이니, 즉 신라국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나라에서는 닭신을 받들어 모신다고 한다. 나란타사에 못이 있는데, 이를 용천이라고 부른다. 서역에서는 신라를 구구타예설라라고 부른다.
1720#28711 SIBLINGS CHILDREN 28711
 
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0706 黑齒俊墓誌銘
方冀七葉貽慶 以享西漢之榮 바야흐로 7대에 걸쳐 경사스러움을 전하여 서한의 김일제와 같은 영광을 향유하고자 하였으나 秺侯入仕 西戎孤□ 東夷之子 求如不及 김일제가 벼슬을 얻었으니 서융의 외로운... 동이의 자손으로서 구하기를 마치 미치지 못하는 듯이 끝없이 하였으니 ▐ 흑치준은 흑치상지의 아들이다.
1720#7383 SIBLINGS CHILDREN 7383
 
0706 ◾金日磾
문무왕릉비(681), 흑치상지묘지명(699)이 그리고 흑치준묘지명(706)에서 보는 것처럼 秺侯와 그 후손이 七葉에 걸쳐 西漢에 참여한 것은 흔히 회자되던 이야기였다. 문무왕릉비의 다른 점은 秺侯를 자신들의 조상이라 주장했다는 점이다. 신라김씨가 閼智 대신 秺侯를 뿌리로 내세운 것은 당시 秺侯에 대한 국제적 평가가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1720#15233 SIBLINGS CHILDREN 15233
 
0720 日本書紀
㖨國(4)┆㖨己呑(4)┆沙㖨(6) ❶ 沙喙部(524 봉평신라비) = 沙㖨部(720 일본서기)
1720#26840 SIBLINGS CHILDREN OPEN
 
0720 㖨
1720#26814 SIBLINGS CHILDREN 26814
 
0720 㖨 잠깐 웃을 록(녹)
1720#30117 SIBLINGS CHILDREN 30117
 
0720 釋日本紀(1300⁻) 㖨 → とく
1720#26817 SIBLINGS CHILDREN 26817
 
0720 日本書紀
喙地(2)┆喙己呑(2) ❷ 喙己呑(720 일본서기) = 㖨己呑(720 일본서기)
1720#317 SIBLINGS CHILDREN 317
 
0801 通典
城曰健牟羅 其邑在內曰喙評(喙呼穢反) 在外曰邑勒 亦中國之言郡縣也 國有六喙評 五十二邑勒 성을 건모라라 부르며 그 읍이 안에 있는 것은 달평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읍륵이라 한다. 달평은 6군데, 읍륵은 52군데 있다. ❸ 喙評(501 중성리 신라비) = 啄評(636 양서) = 喙評(801 통전)
1720#26830 SIBLINGS CHILDREN 26830
 
0812 元和姓纂
1720#31521 SIBLINGS CHILDREN 31521
 
0812⁺ ❰❰ 0032 「三國誤記」 新羅
6부에 성씨를 사여하였다. 喙部의 성은 李로 하고 沙喙部의 성은 崔로 하였으며 漸喙部(牟喙部라고도 한다)의 성은 孫으로 하고 本彼部의 성은 鄭으로 하였으며 漢祇部 성은 裵로 하고 習比部의 성을 薛로 하였다.
1720#30928 SIBLINGS CHILDREN 30928
 
0836 興德王陵碑片
太祖星漢 ▐ 황초령비(568)와 마운령비(568)에 나오는 太祖와 문무왕릉비(681)에 나오는 星漢王 그리고 김인문묘비(695)에 나오는 太祖漢王 모두가 이 太祖星漢이라는 명문에 의해 동일인이 되었다. 요약하면, 322년에 閼智가 시조라는 이야기를 하다, 568년에는 그의 아들 勢漢을 太祖로 이야기하였고, 681년에는 秺侯를 太祖의 앞에 올려 놓더니, 695년에는 또 다시 秺侯의 앞에 少皥金天을 올려 놓은 것이다.
1720#15595 SIBLINGS CHILDREN 15595
 
0864 大唐故金氏夫人墓銘
太上天子有國泰宗陽號少昊氏金天卽吾宗受氏世祖厥後派疏枝分有昌有徽蔓衍四天下亦已多已 태상천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1720#7382 SIBLINGS CHILDREN 7382
 
0864 大唐故金氏夫人墓銘
遠祖諱日磾自龍庭歸命西漢仕武帝愼名節陟拜侍中常侍封秺亭侯自秺亭已降七葉軒紱燉煌繇是望係京兆郡史籍敍載莫之與京必世後仁徵驗斯在
1720#15583 SIBLINGS CHILDREN 15583
 
0864 大唐故金氏夫人墓銘
먼 조상 이름은 일제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1720#4405 SIBLINGS CHILDREN COMMENT 4405
 
0864 ❺ 少昊氏金天┆日磾·秺亭侯
封秺亭侯自秺亭已降七葉은 문무왕릉비(681)에 나오는 (秺)侯祭天之胤傳七葉과 내용이 일치하므로 신라 金씨 왕조가 金日磾의 후손을 자처한 것은 더욱 확실해졌다.
1720#4406 SIBLINGS CHILDREN 4406
 
0864 大唐故金氏夫人墓銘
及漢不見德 亂離瘼矣 握粟去國 避時屆遠 故吾宗違異於遼東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에 숨어 살게 되었다. ▐ 이 부분은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로 金日磾와 신라 金씨를 연결시켜 주는 핵심 이야기다. 시대적 배경은 왕망의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요동은 요하 동쪽이라는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신라까지 포함할 수 있다.
1720#15591 SIBLINGS CHILDREN 15591
 
0864 ◾流民
고대 동북아 난민의 가장 큰 흐름은 중국, 특히 연나라에서 조선으로 난민이 흘러가고 또 조선에서 진한으로 난민이 흘러가는 경향이다. 조선이 낙랑이 된 이후에도, 그리고 진한이 신라가 된 이후에도, 이러한 경향은 계속 이어졌다.
1720#15635 SIBLINGS CHILDREN 15635
 
0925 高麗史節要(1452)
세자 대광현 등이 그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전후로 도망쳐 온 자들이 수만호였다. 왕이 그들을 매우 후하게 대우하여, 대광현에게 王繼라는 성과 이름을 내려주면서 그를 왕실의 적에 붙이고, 제사를 받들도록 허락하였다.
1720#7374 SIBLINGS CHILDREN 7374
 
0937 광조사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
大師法諱利巖 俗姓金氏 其先?林人也 考其國史 實星漢之苗 대사의 법명은 이엄이고, 속성은 김씨이니, 그 선조는 계림인이다. 그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니 실로 성한의 묘예이다.
1720#15596 SIBLINGS CHILDREN 15596
 
0939 비로암진공대사보법탑비
□運 俗姓金氏 鷄林人也 其先降自聖韓 興於那勿 □운은 속성이 김씨이니, 계림인이다. 그 선조는 성한으로부터 내려와 나물에서 크게 일어났다.
1720#15597 SIBLINGS CHILDREN 15597
 
1060 新唐書
王姓金 貴人姓朴 民無氏有名 신라왕의 성은 김씨이고 귀인의 성은 박씨이며 백성에게는 성은 없고 이름만 있다.
1720#4412 SIBLINGS CHILDREN COMMENT 4412
 
1060 「솔까역사」 新唐書
謂城為(侵→)健牟羅 邑在內曰喙評 外曰邑勒 有喙評六 邑勒五十二┆성을 건모라라 부르며 그 읍이 안에 있는 것은 달평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읍륵이라 한다. 달평은 6군데, 읍륵은 52군데 있다. ▐ 양서(636)와 통전(801)에 健牟羅라 되어 있으므로 侵牟羅는 오기로 판단한다.
1720#26829 SIBLINGS CHILDREN 26829
 
1084 資治通鑑
寶以高雲為建威將軍 封夕陽公 養以為子 雲 高句麗之支屬也 (高句麗自云高陽氏之後裔 故以高為氏 句 如字 又音駒 麗 力知翻) 燕王皝破高句麗 徙於青山 (破高句麗見九十七卷成帝咸康八年(342) 青山 遼西徒河縣之青山也) 由是世為燕臣
1720#15133 SIBLINGS CHILDREN 15133
 
1145 三國史記
沙梁(18) ❶ 沙喙部(524 봉평신라비) = 沙㖨部(720 일본서기) = 沙梁部(1145 삼국사기)
1720#26838 SIBLINGS CHILDREN 26838
 
1145 梁
1720#26822 SIBLINGS CHILDREN 26822
 
1145 梁 들보 량(양)
1720#26823 SIBLINGS CHILDREN 26823
 
1145 三國史記
達伐城을 쌓고 나마 극종을 성주로 삼았다. ❷ 㖨己呑·喙己呑·㖨國·喙地(720 일본서기) = 達伐(1145 삼국사기)
1720#26860 SIBLINGS CHILDREN 26860
 
1145 三國史記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유신비에 또한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자손이다.”라고 하였으니, 곧 남가야의 시조 수로는 신라와 더불어 같은 성이다.
1720#7385 SIBLINGS CHILDREN COMMENT 7385
 
1145 三國史記
▐ 일본서기(720)는 6세기 신라의 금석문에 나오는 沙喙部를 沙㖨部로 표기하고 喙己呑을 㖨己呑으로도 쓰는 것으로 보아, 喙과 㖨을 구별하지 않은 듯하다. 이는 일본서기에 별개로 나오는 㖨國과 喙地가 같은 곳일 가능성을 열어준다. 실제로 두 지역을 같은 곳으로 간주해도 이야기가 어색하지 않다. 또 㖨國과 喙地는 삼국사기의 達伐과도 잘 어울린다. 만약 喙地가 達伐이라면 喙는 '달'로 발음되었을 듯하다. 喙는 '부리 달'이란 뜻도 있기 때문이다.
1720#2742 SIBLINGS CHILDREN 2742
 
1145 三國史記
왕이 達句伐로 도읍을 옮기려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1720#26826 SIBLINGS CHILDREN 26826
 
1145 赫居世
조선의 유민이 진한에 6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말이 낳은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오자 성을 朴으로 하고 이름을 혁거세라 하여 왕으로 삼았다. 이어서 용이 우물가에서 여자아이를 낳자 왕비로 삼았다. 삼국유사는 중국 황실의 딸 신모가 진한에 와서 혁거세를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1720#15602 SIBLINGS CHILDREN OPEN
 
1145 達
1720#26831 SIBLINGS CHILDREN 26831
 
1145 達 통달할 달
1720#26832 SIBLINGS CHILDREN 26832
 
1145 首露
혁거세 설화, 알지 설화 그리고 탈해 설화 모두 득성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수로 설화에는 없다. 백제餘씨는 夫餘에서 따왔고 고려高씨는 高句麗에서 따왔듯이 가라金씨는 金官國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있다.
1720#15601 SIBLINGS CHILDREN OPEN
 
1145 김부식
신라 古事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보냈기에 姓을 金氏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이 말이 전해 내려온 지 오래되니, 이를 없앨 수가 없었다.
1720#7387 SIBLINGS CHILDREN COMMENT 7387
 
1281 三國遺事
최치원이 말하기를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도피해 온 자들이므로 涿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고을과 동리 이름을 沙涿·漸涿 등으로 불렀다.” 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涿 자를 읽을 때 발음을 道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혹 沙梁이라 쓰고 梁을 또한 道라고도 읽는다. ❶ 沙喙(524 봉평신라비) = 沙㖨(720 일본서기) = 沙涿(최치원) = 沙梁(1145 삼국사기)
1720#26862 SIBLINGS CHILDREN 26862
 
1281 涿
1720#26865 SIBLINGS CHILDREN 26865
 
1281 涿┆쫄 탁
1720#26866 SIBLINGS CHILDREN 26866
 
1281 拒馬河
涿水
1720#26863 SIBLINGS CHILDREN 26863
 
1281 涿鹿县
1720#26864 SIBLINGS CHILDREN 26864
 
1394 왕씨멸족
왕씨왕조와 이씨왕조는 존속기간이 비슷한데도 전주이씨는 우리 나라 성씨 중 세 번째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는 반면, 개성왕씨의 수는 많지 않다. 이것은 이씨왕조가 전조의 왕족이었던 왕씨를 멸족시켰기 때문이다.
1720#7381 SIBLINGS CHILDREN COMMENT 7381
 
1656 금궤도
1656 금궤도
1720#7547 SIBLINGS CHILDREN COMMENT 7547
 
1701 池北偶談
文登叢大司空蘭 本漢□宅侯金日□之後 相傳日□四十五代孫永 遷縣之叢家峴家焉 遂以為姓 至今科名甚盛 江西多淦氏 舊傳亦日□後 有金賦者 為制置使 宋高宗為加點水 遂有淦姓 詳載予 皇華紀聞 ▐ 산동성의 叢씨와 강서성의 淦씨는 모두 김일제의 후손이다.
1720#15577 SIBLINGS CHILDREN 15577
 
1701 文登市
산동 반도는 요동과 함께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오는 주요 경로다.
1720#15578 SIBLINGS CHILDREN 15578
 
1940 창씨개명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하여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씨(氏)를 정해서 제출하도록 하였는데, 창씨신고 가구수는 80%에 달했다.
1720#24743 SIBLINGS CHILDREN COMMENT 24743
 
2000년 인국통계조사 - 본관
경북 경주 482만, 경남 김해 449만, 경남 밀양 340만, 전북 전주 321만, 경남 진주 137만, 경북 안동 126만 ▶본관이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경주 김씨, 경주 이씨 등이 있고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전주 이씨, 전주 김씨 등이 있다. 전주 김씨는 김알지의 후손인데 몽골침입 때 그 시조가 경주에서 전주로 이주하여 전주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1720#7343 SIBLINGS CHILDREN COMMENT 7343
 
2000년 인국통계조사 - 성씨
김해 김씨 412만, 밀양 박씨 303만, 전주 이씨 261만, 경주 김씨 174만, 경주 이씨 142만 ▶성씨가 영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해 김씨는 남가라 수로왕의 후손이고 밀양 박씨는 신라 박혁거세의 후손이다. 전주 이씨는 이성계의 조선 건국 후 크게 번창하였고 경주 김씨는 신라 김알지의 후손이다. 경주 이씨는 신라의 건국에 참여한 양산촌장의 후손.
1720#7342 SIBLINGS CHILDREN COMMENT 7342
 
2000년 인국통계조사 - 성씨  분포
2000년 인국통계조사 - 성씨 분포
왼쪽으로부터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경주 김씨 그리고 경주 이씨. ❶ 김해 김씨는 남가라 김수로왕의 후손인데 왜 서남 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하는가? ❸ 전주 이씨는 전주에서 기원하지만 이조의 건국 이후 한양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그런데 왜 영남 지방에만 드물게 분포할까? ❺ 경주 이씨는 경주에서 기원하니 이러한 분포가 자연스럽다. ○ 서남 지역의 김해 김씨와 경기와 영남 이외의 전주 이씨는 자연스러운 분포가 아니다.
1720#11271 SIBLINGS CHILDREN 11271
 
2010 新羅김씨
2010년 신라김씨총연합 대종원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신라계 김씨 본관은 총 356개이며, 다른 성씨를 쓰고 있는 성관은 9개(감천문씨, 강릉왕씨, 곡산연씨, 광주이씨, 수성최씨, 안동권씨, 영양남씨, 철원궁씨, 태안사씨)이다.
1720#37800 SIBLINGS CHILDREN COMMENT 37800
 
2011.04.12 김성회
대한민국의 성관(姓貫)은 286개 성씨와 4179개 본관으로 파악되고 있으며(2000년 인구센서스·통계청), 그중 김씨는 전체 인구의 5분의 1인 992만600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김수로왕계의 김해김씨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김알지계의 신라김씨 계통이다.
1720#7384 SIBLINGS CHILDREN COMMENT 7384
 
2011.05.10 김성회
김씨의 시조에 대해서는 네 가지 주장이 있다. ① 소호금천씨의 후예 - 김유신비문(673), 김인문비문(695), 대당고김씨부인묘비(864), 삼국사기(1245) ② 김일제의 후예 - 문무왕비문(681), 대당고김씨부인묘비(864) ③ 알지와 수로의 후예 - 삼국사기(1145), 삼국유사(1281) ④ 신라가 고대국가로 왕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씨족을 표시하는 한자식 성으로 김씨 성을 쓰게 되었다. ①과 ③은 비과학적이고 ②는 근거가 부족하다.
1720#15611 SIBLINGS CHILDREN 15611
 
The Birth Myth of Gim Alji
One early spring morning of the 9th year of reign of Suk Talhaih (AD 60), Hogong, the premier, awoke at the sound of a rooster crowing. When he looked out the window, he saw a mysterious bright light from the sky shine on the Original Forest, located to t ...
1720#4691 SIBLINGS CHILDREN COMMENT 4691
 
喙┆達┆㖨┆梁┆啄┆涿
沙喙(524 봉평신라비)-沙㖨(720 일본서기)-沙涿(최치원)-沙梁(1145 삼국사기)┆㖨己呑·喙己呑·㖨國·喙地(720 일본서기)-達伐·達句伐(1145 삼국사기)┆啄評(636 양서)-喙評(801 통전) ▐ 달구벌과 서라벌의 지명에 나오는 喙·達·㖨·梁·啄·涿은 모두 같은 발음을 표기한 듯하다. 최치원은 신라인들이 연나라에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북중국의 涿水에서 지명을 땄다고 했다.
1720#22570 SIBLINGS CHILDREN 22570
 
新羅 왕조는 초원에서 오지 않았다.
낙동강 유역에서 성장한 가라와 신라는 고고학적 양상이 백제나 고려과는 다르고 초원과 닮은 점이 있다. 금동관, 적석목곽분 그리고 순장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래서 이들 두 나라를 초원에서 흘러온 세력이 세운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기록에는 중국에서 대동강 유역을 거쳐 낙동강 유역으로 유민이 흘러왔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초원에서 흘러왔다는 이야기는 없다. 따라서 고고학적 양상은 문화의 전파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합당하다.
1720#10558 SIBLINGS CHILDREN 10558
 
新羅金氏 흉노유래설
훗날 金氏 성을 쓰게 되는 斯盧의 한 가문은 마한이 망한 뒤 처음으로 왕을 배출하였는데, 가문을 신성화하기 위해 閼智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퍼뜨리고 국명을 雞林으로 바꾸었다. 이 가문은 원래 성이 없었는데, 임나를 병합한 뒤 金氏 성을 쓰고 閼智의 아들 勢漢을 太祖로 숭상하기 시작했다. 반도를 통일한 뒤에는 閼智 대신 匈奴 왕자 金日磾와 삼황오제의 少皥金天을 먼 조상이라 주장했는데, 이는 중국의 명문가에 기대어 가문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
1720#6891 SIBLINGS CHILDREN COMMENT 6891
 
王建
왕건이 918년에 건국한 이후 여러 설화들이 만들어졌는데, 1146~1170년에 편찬된 編年通錄은 그것을 모아놓은 것이다. 김일제의 후손을 자처하는 신라 김씨의 공식 기록과 알지 설화가 모순되는 것처럼 왕씨고려의 공식 기록인 太祖實錄과 왕건 설화도 모순되는 부분이 있다.
1720#4401 SIBLINGS CHILDREN 4401
 
金城·月城
-0037 三國史記(1145)-0032.01 三國史記(1145)0003.09 三國史記(1145)0056.04 三國史記(1145)0065 三國史記(1145)0096.07 三國史記(1145)0101.02 三國史記(1145)0101.07 三國史記(1145)0123.05 三國史記(1145)0138.02 三國史記(1145)0160.04 三國史記(1145)0196.04 三國史記(1145)0205.08 三國史記(1145)0232.04 三國史記(1145)0304.07 ❰❰⁵ 0004.07 솔까역사 新羅0314 ❰❰⁵ 0014 솔까역사 新羅1145 三國史記1145 三國史記 月城(23)1145 三國史記 金城(32)이강근
 
開城王氏
신라와 가라 金씨가 少昊金天의 후예를 자처하고 북연의 고운이 顓頊高陽의 후예를 자처한 것처럼 왕고의 王氏 또한 顓頊高陽의 후손을 자처하였다.
1720#15236 SIBLINGS CHILDREN 15236
 
김알지의 후손
가평김씨, 감천김씨, 강릉김씨, 강서김씨, 광산김씨, 강화김씨, 개성김씨, 결성김씨, 경주김씨, 계림김씨, 고령김씨, 고양김씨, 공주김씨, 광양김씨, 광주김씨, 괴산김씨, 교하김씨, 구례김씨, 금산김씨, 김녕김씨, 김제김씨, 김천김씨, 김화김씨, 나주김씨, 낙안김씨, 대구김씨, 도강김씨, 문화김씨, 밀양김씨, 배천김씨, 부안김씨, 삼척김씨, 상산김씨, 서흥김씨, 선산김씨, 설성김씨, 수안김씨, 수원김씨, 순천김씨, 신천김씨, 안로김씨, 안동김씨, 안산김 ...
1720#7344 SIBLINGS CHILDREN COMMENT 7344
 
달구벌의 어원
달은 닭의 경상도 사투리 발음이다. 달구는 다른 말과 연음될 때 발음의 편의상 묵음 ㄱ이 되살아나는 현상이다. 닭똥을 달구똥이라 발음하는 것은 그 사례다.┆일본서기에 나오는 卓國의 卓도 닭을 가리킨다고 한다.┆신라의 왕궁 터를 月城이라 부르고 그 내부의 연못도 月池라 부른 것도 모두 같은 연유로 본다. 月은 달(닭)을 훈독한데서 나온 표기이다.
1720#26813 SIBLINGS CHILDREN 26813
 
참고
2003 조선일보: 日帝의 창씨개명 강요문서 발견2010 조선일보: 몽골 김씨, 태국 태씨문무왕 비문의 비밀문무왕 비문의 비밀
 
한국 성씨의 역사
원래 고대에는 왕족과 몇몇 귀족가문만 성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의 왕족은 여, 부여 등의 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8족을 비롯하여 흑치, 사마 등 20여 가지 성을 사용하였다. 고려의 왕족은 고씨 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연, 을지 등 20여종의 성을 사용한 것이 역사기록에서 확인된다. 신라는 왕족이 박/석/김 3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이, 최, 정, 손, 배, 설 등 10여 가지 성을 사용하였다. 이들 중 중국식 한자성은 후대에 들어왔으나 선대까지 ...
1720#7345 SIBLINGS CHILDREN COMMENT 7345
 
한국 성씨의 의미
성씨의 역사를 살펴볼 때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씨는 생물학적인 부계혈통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의 통계청 자료가 보여주는 우리나라 성씨의 경향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첫째, 남의 성씨를 빌려 쓴 게 아니라 원래부터 그 성씨를 썼던 사람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 다른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
1720#7346 SIBLINGS CHILDREN COMMENT 7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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