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年代記 > -0108 樂浪史

낙랑은 기원전 108년에서 기원후 313년까지 400여년간 대동강 유역에 존속하였다.
 
-0195 漢
-0195 漢
16837
 
-0195 한나라 초기까지의 역사
▐ 연나라는 동호를 몰아낸 후 양평까지 장성을 쌓았다. 그리고 조선과 진번을 침공하여 복속시키고 패수 바깥에 관리를 두어 보루와 요새를 쌓았다. 이때는 요동에서 그랬던 것처럼 장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없다. 진나라는 요동까지 장성을 쌓고 패수 바깥은 요동 외요에 소속시켰다. 한나라는 이곳이 멀어 지키기 어렵다고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까지만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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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8 ~ -0125 蒼海郡
濊는 단단대령 남쪽을 돌아 대동강을 거쳐 중국과 교류하였는데 위만 조선에 의해 이 길이 막히자 濊君 남려 등은 28만 구를 들어 황초령을 넘고 압록강을 지나 요동에 귀속하였다. 한무제는 濊에 蒼海郡을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지하였다. 蒼海는 푸른 바다라는 뜻으로 누런 바다라는 뜻의 黃海와 대조된다. 濊의 위치로 보나 蒼海라는 명칭으로 보나 蒼海郡은 동해에 접한 지역으로 볼 수 있다. 蒼海郡의 설치 경험은 훗날 臨屯郡을 설치하는 바탕이 되었을 듯하다.
8331
 
-0109  漢의 衛滿朝鮮 침공
-0109 漢의 衛滿朝鮮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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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 -0108 漢, 조선 침공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낙랑군, 진번군 그리고 임둔군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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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 ~ -0082 眞番郡
진번은 사기(-91)에서 주로 조선과 묶여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에 접한 나라로 보인다. 조선은 사기에서 연나라의 동쪽에 접해 있다고 되어 있고 삼국지(289)에는 고구려의 남쪽이자 예의 서쪽에 있다고 되어 있으므로, 조선에 접한 진번이 있을 곳은 조선의 남쪽 밖에 없다.
8329
 
-0108 ~ -0082 臨屯郡
임둔군은 과거 蒼海郡이 설치되었던 지역인 듯하다.
15081
 
-0108 ~ -0082 茂陵書
臣瓚曰 茂陵書 臨屯郡 治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十五縣 真番郡 治霅縣 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十五縣 신찬이 말하기를 '무릉서에 임둔군은 치소가 동이현으로 장안에서 6138리고 현이 15개다. 진번군은 치소가 삽현으로 장안에서 7640리고 현이 15개다'라고 하였다.
5869
 
-0108  ~  -0082  茂陵書
-0108 ~ -0082 茂陵書
창해군은 황초령을 넘어 한나라와 연결되며 설치되었으므로 치소는 황초령 아래에 있었을 듯하다. 임둔군은 창해군을 재건하는 의미를 지녔으므로 임둔군의 치소 또한 창해군의 치소를 재건했을 듯하다. 동이가 황초령 아래에 있었고 진번군이 낙랑군 남쪽에 있었으며 진번군의 치소 삽현이 동이보다 1500리 더 먼 곳에 있었다면, 삽현의 위치로는 한성이 유력하다.
21137
 
-0107 玄菟郡
한무제 원봉 2년에 조선을 정벌하여 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4군을 설치하였는데, 옥저성으로 현토군을 삼았다.
2688#242 COMMENT
 
-0082 後漢書(445)
罷臨屯眞番 以幷樂浪玄菟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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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5 현도군 이전, 동부도위 설치
夷貊의 침략을 받자 현도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는 현으로 만들어 낙랑에 소속시켰다. 또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어 단단대령 동쪽의 7현을 갈라 동부도위를 설치하고 불내성에 치소를 두었다.
2688#60 COMMENT
 
-0045 정백동 낙랑호구부
朝鮮 䛁邯 增地 黏蟬 駟望 屯有 帶方 列口 長岑 海冥 昭明 提奚 含資 遂成 鏤方 渾彌 浿水 吞列┆東暆 蠶台 不而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
65
 
-0045 정백동 낙랑호구부
▐ 뒤에 있는 7현을 동부도위 소속으로 추정한다. 沃沮가 낙랑에 소속되었다고 하나 낙랑군 현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夫租를 沃沮로 추정한다. 朝鮮에 樂浪을 설치한 것처럼 沃沮에 夫租를 설치했을 수 있다. 夫租는 이른 시기의 정백동 낙랑호구부(-45)에서부터 보이나 沃沮는 나중에 나온 삼국지(289)에서 처음 나타나기 때문에 夫租가 훗날 沃沮로 개칭되었을 수도 있다.
21002
 
0003 三國史記(1145) 고구려
王遷都於國内 築尉那巖城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14964
 
0008 漢書(82) 遼東郡
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 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 縣十八 襄平 新昌 無慮 望平 房 候城 遼隊 遼陽 險瀆 居就 高顯 安市 武次 平郭 西安平 文 番汗 沓氏
21157
 
0008 漢書(82) 樂浪郡
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 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 縣二十五 朝鮮 䛁邯 浿水 含資 黏蟬 遂成 增地 帶方 駟望 海冥 列口 長岑 屯有 昭明 鏤方 提奚 渾彌 吞列┆東暆 不而 蠶台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 ▐ 뒤에 나오는 7현은 정백동 낙랑호구부(-45)와 거의 같다. 東暆 蠶台 不而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
15134
 
0008 漢書(82) 玄菟郡
戶四萬五千六 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 縣三 高句驪 上殷台 西蓋馬
7339
 
0008 漢書(82)
西蓋馬(馬訾水 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 行一千一百里) 서개마(마자수가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로 들어간다. 서남쪽으로 흘러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2군을 지나 1100리를 흐른다.) ▐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 강은 염난수고 지금의 압록강이다. 마자수는 염난수의 지류인데 서북쪽으로 흐른다고 하니 강계를 지나는 독로강이 유력하다. 그렇다면 2군을 지나 1100리를 흐른다는 설명은 염난수다.
19986
 
0008¦江界郡
독로강(禿魯江, 현 將子江)이 서북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21158
 
0009~0023 新
▐ 전한의 왕망은 고모인 효원 황후의 비호 아래 성장하다 8년에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전국에서 반란이 잇따랐고 23년에는 왕망도 살해되었다. 이때는 유현이 반란 세력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있던 상태였는데, 그가 곧 경시제다.
15772
 
0012 漢書(82)
왕망 초에 고구려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법을 어기고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고구려후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왕망이 고구려를 하구려로 이름을 바꾸고 천하에 알리게 하였다. 이에 맥인이 변경을 더욱 침범하게 되었다.
6946
 
0020~0023 魏略(265±)
20~23년에 廉斯鑡이 辰韓의 右渠帥가 되어 樂浪의 토지가 비옥하다는 말을 듣고 도망가려고 살던 부락을 나오다 漢人 호래를 만났다. 그는 3년 전에 천 5백 명과 함께 나무를 베다 韓의 습격을 받아 노예가 되었다고 하였다. 鑡이 호래를 데리고 含資縣으로 가 郡에 연락하자 郡은 鑡을 통역으로 삼아 수초 사이로 큰 배를 타고 辰韓에 들어가 잡혀간 천여명을 데려갔다. 5백명은 이미 죽은 뒤여서 辰韓이 보상으로 진한인 만 5천명과 弁韓布 만 5천필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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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3~0025 更始帝
▐ 23년에 왕망에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25년에 쫓겨나고 살해당했다. 이때는 유수가 반란 세력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있던 상태였는데, 그가 곧 광무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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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5 後漢書(445)
更始敗 土人王調殺郡守劉憲 自稱大將軍 樂浪太守 경시제가 패하자 토착인 왕조가 군수 유헌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칭했다.
2688#5879
 
0025 後漢書(445) 夫餘
建武中 東夷諸國皆來獻見 二十五年 夫餘王遣使奉貢 光武厚荅報之 於是使命歲通 25~55년에 동이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와서 조헌하고 입견하였다. 25년에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므로 광무제가 후하게 보답하니 이에 사절이 해마다 왕래하였다.
20879
 
0025~0057 광무제
▐ 25년에 경시제에 반대하는 반란 세력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다른 반란 세력을 모두 제압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15771
 
0026 三國史記(1145) 고구려
왕이 친히 개마국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위로하여 편안케 하였다.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고 단지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 압록강 유역은 -75년부터 이미 한나라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244년에 조위의 침공을 받았을 때 동천왕이 도주했다는 鴨渌原이 이곳으로 추정된다.
2688#422
 
0030 後漢書(445)
建武六年 光武遣太守王遵將兵擊之 至遼東 閎與郡決曹史楊邑等共殺調迎遵 광무제가 태수 왕준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게 하였다. 요동에 이르자 왕굉이 결조사 양읍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
2688#9933
 
0030 三國志(289)
변경의 郡을 줄이면서 도위도 폐지하였다. 그 후부터 縣에 있던 우두머리로 모두 縣侯를 삼으니 不耐·華麗·沃沮 등의 제 縣은 전부 侯國이 되었다. ▐ 한나라의 군현에서 빠지는 것은 곧 한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된다. 한나라의 군현에서 빠진 지역은 이때부터 고구려에 흡수되기 시작한다.
2688#385 COMMENT
 
0032 三國史記(1145) 고구려
왕자 好童이 沃沮에 갔다가 樂浪王 崔理를 만났는데 崔理가 北國 神王의 아들이라며 好童을 데려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好童이 돌아가 최씨 딸에게 사람을 보내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나팔을 뽀개게 한 뒤 왕에게 낙랑을 치게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성 밑에 이른 뒤에야 북과 피리가 망가진 것을 알게 된 崔理는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혹은 '낙랑을 멸망시키려고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며느리로 맞은 뒤 돌려보내 무기를 파괴하게 했다'고도 한다.
2688#7301
 
0032 三國志(289)
漢光武帝八年 高句麗王遣使朝貢 始見稱王 32년에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면서 비로소 왕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 한나라와의 관계가 개선된 것도 고구려 팽창의 촉매 역할을 했을 듯하다.
2688#5890
 
0037 三國史記(1145) 신라
髙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고구려 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으므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34924 COMMENT
 
0037 三國史記(1145) 신라
▐ 37년에 고려의 침공을 받아 망하자 그 유민이 신라로 흘러간 낙랑은 36년, 14년 그리고 4년에 신라를 침공한 낙랑이다. 이 낙랑은 -2년에 백제를 침공하고 -8년에 말갈로 하여금 백제를 침공하게 한 낙랑이기도 하다. -6년에 백제는 이 낙랑을 東有樂浪이라 했다. ▐ 26년에 개마국을 정벌하고 28년에 개마대산을 넘어 북옥저를 점령한 것과 비교하면 32년에 황초령을 넘어 최리낙랑을 정벌하고 37년에 동유낙랑을 정벌한 것이 어색하지 않다.
20905
 
0044 後漢書(445)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諟等 詣樂浪貢獻 光武封蘇馬諟 爲漢廉斯邑君使 屬樂浪郡 四時朝謁 한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대하여 한의 염사읍군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하도록 하였다. ▐ 삼국지에 실린 위략의 염사착 이야기와 동일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왕망의 사후 낙랑과 그 주변 나라들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韓의 廉斯는 낙랑에 기대는 방향으로 생존을 모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688#7327
 
0047 後漢書(445) 高句驪
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 구려 잠지락의 대가 재승 등 만여명이 낙랑에 투항하였다.
20887
 
0056 三國史記(1145) 고구려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국경을 넓혀 동쪽으로는 창해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까지 이르렀다.
14781
 
0105 後漢書(445) 高句驪
和帝元興元年春 復入遼東 寇略六縣 太守耿夔擊破之 斬其渠帥 105년 봄에 다시 요동을 침입하여 여섯 현을 노략질하므로 태수 겸기가 격파하고 그 우두머리를 참살하였다.
20888
 
0106 東觀漢紀
安帝即位之年 分高顯·候城·遼陽 屬玄菟 106년에 고현, 후성 그리고 요양을 갈라 현도에 소속시켰다.
21134
 
0106 국사편찬위원회
한나라는 -75±년에 蘇子河 유역에 제2현도군을 두었다가 100±년에 다시 渾河 유역으로 옮겨 제3현도군을 설치하였다. 여러 사료를 종합하면 고구려가 제2현도군을 점령한 것은 1세기 말일 가능성이 높고, 선비의 동향을 고려하면 97년 전후로 추정된다. 106년에는 제2현도군의 속현이었던 고구려⋅서개마⋅상은대 3현을 渾河 방면으로 옮기고 요동군의 속현인 고현⋅후성⋅요양 3현의 소속을 현도군으로 변경하여 제3현도군을 설치한 것이다.
21128
 
0106 현도군 치소
又西迁即为现沈阳市上伯官古城遗址。
14567
 
0111 後漢書(445) 夫餘
至安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殺傷吏民 後復歸附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거느리고 낙랑을 노략질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으나 그 뒤에 다시 귀부하였다. 夫餘夷犯塞 殺傷吏人 부여 오랑캐가 변방을 침략하여 관리를 죽였다. ▐ 이 기록의 낙랑은 현도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
2688#14992
 
0111 三國志(289)
至殤安之間 句麗王宮數寇遼東 更屬玄菟 상제(106)와 안제(106~125) 연간에 구려왕 궁이 자주 요동을 침입하였으므로 다시 현도에 속하게 하였다.
5880 COMMENT
 
0111 後漢書(445) 高句驪
安帝永初五年 宮遣使貢獻 求屬玄菟 111년에 궁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고 현도에 예속되기를 구하였다.
20889
 
0118 後漢書(445) 高句驪
元初五年 復與濊貊寇玄菟 攻華麗城(華麗縣 屬樂浪郡) 118년에는 예맥과 함께 현도를 침략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5882
 
0120 後漢書(445) 夫餘
永寧元年 乃遣嗣子尉仇台詣闕貢獻 天子賜尉仇台印綬金綵 120년에 세자 위구태를 보내어 궁궐에 나아와서 조공을 바치므로 천자가 위구태에게 인수와 금채를 하사하였다.
20880
 
0121 요동과 고려의 공방
봄에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이 고려를 침공했다. 태조왕이 세자 수성에게 2천명을 거느리고 막게 했다. 수성은 험요지에서 대군을 막고 몰래 3천명을 보내 현도와 요동을 침략하고 2천명을 죽였다.┆여름에 고려가 요동 선비 8천명과 함께 요대를 침략하자 채풍이 신창에서 추격하다 죽었다.┆가을에 태조왕이 마한과 예맥 수천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포위하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와 2만명을 보냈다. 한나라 주와 군이 함께 깨뜨리고 5백명을 베었다
2688#20895
 
0122 後漢書(445) 高句驪
明年 遂成還漢生口 詣玄菟降 다음 해에 수성이 한나라의 포로를 송환하고 현도에 이르러 항복하였다.
5884
 
0132 後漢書(445) 高句驪
順帝陽嘉元年 置玄菟郡屯田六部 132년에 현도군에 둔전 6부를 설치하였다.
5886
 
0136 後漢書(445) 夫餘
順帝永和元年 其王來朝京師 帝作黃門鼓吹角抵戲以遣之 136년에 그 왕이 경사에 와서 조회하므로 황제는 황문고취와 각저희를 하게 하여 보내었다.
20881
 
0146 고구려, 서안평 공격
삼국지(289) 攻西安平 於道上殺帶方令 略得樂浪太守妻子┆후한서(445) 質桓之閒 復犯遼東西安平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2688#6446
 
0161 後漢書(445) 夫餘
桓帝延熹四年 遣使朝賀貢獻 161년에 사신을 보내어 조하하고 공물을 바쳤다.
20882
 
0167 後漢書(445) 夫餘
永康元年 王夫台將二萬餘人寇玄菟 玄菟太守公孫域擊破之 斬首千餘級 167년에 왕 부대가 2만여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노략질하므로 현도태수 공손역이 쳐서 깨뜨리고 천여명의 머리를 베었다.
20883
 
0169 三國志(289) 高句麗
靈帝建寧二年 玄菟太守耿臨討之 斬首虜數百級 伯固降 屬遼東 169년에 현도태수 경림이 그들을 토벌하여 수 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으니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5888 COMMENT
 
0169 後漢書(445) 高句驪
建寧二年 玄菟太守耿臨討之 斬首數百級 伯固降服 乞屬玄菟云 169년에 현도태수 경임이 토벌하여 수백명을 죽이니 백고가 항복하여 현도에 속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5878
 
0172~0178 三國志(289) 高句麗
熹平中 伯固乞屬玄菟 公孫度之雄海東也 伯固遣大加優居 主簿然人等助度擊富山賊 破之 172~178년에 백고는 현도군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공손탁의 세력이 요동에 웅거하자, 백고는 대가 우거와 주박 연인 등을 파견하여 탁을 도와 부산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5889 COMMENT
 
0174 後漢書(445) 夫餘
至靈帝熹平三年 復奉章貢獻 174년에 이르러 다시 표장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20884
 
0189- 三國志(289)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환제(146~167)·영제(168~189) 말기에는 한과 예가 강성하여 군·현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7280 COMMENT
 
0189- 後漢書(445)
韓과 濊가 모두 강성해져 군현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난리에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韓으로 도망하여 유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7325 COMMENT
 
0189~0220 後漢書(445) 夫餘
夫餘本屬玄菟 獻帝時 其王求屬遼東云 부여는 본래 현도에 속하였으나 헌제 때에 그 나라의 왕이 요동에 속하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20885
 
0190~0204 三國志(289) 夫餘
부여는 본래 현도에 속하였다. 한나라 말년에 공손탁이 해동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외이들을 위력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는 바꾸어 요동군에 복속하였다. 이 때에 구려와 선비가 강성해지자, 탁(度)은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일족의 딸을 시집보내었다.
5892 COMMENT
 
0204~0220 三國志(289) 高句麗
건안 연간에 공손강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加)와 함께 각기 하호 3만명을 이끌고 강(康)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 유역에 옮겨 살았다. 항복했던 호(胡)도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건너가고 그 아들은 구려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고추가 교위거가 바로 그 사람이다
5893 COMMENT
 
0204~0220 공손강, 대방군 분할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為帶方郡 遣公孫模 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2688#5915
 
0220- 三國志(289)
漢末更屬句麗 예는 한나라 말기에 다시 구려에 복속되었다.
3553 COMMENT
 
0220- 後漢書(445) 군국지
10969
 
0220~0265 曹魏
魏의 曹丕는 漢의 마지막 황제로부터 자리를 넘겨받았는데, 이후 蜀 및 吳와 다툼을 벌였다. 이 시기를 삼국시대라고 한다. 蜀과 吳는 각각 264년과 280년에 魏와 晉에게 망했다.
5917
 
0238  ~  0246 曹魏의 요동 평정
0238 ~ 0246 曹魏의 요동 평정
漢 왕조를 이은 曹魏는 238년에 요동을 차지하고 있는 공손연을 토벌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에 대한 통치도 회복하였다. 이어 曹魏는 244년과 245년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고 낙랑군과 대방군도 고려에 복속했던 濊를 침공하여 다시 복종을 받아냈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韓의 공격을 받자 이도 쳐서 복속시켰다.
5909 COMMENT
 
0238 曹魏, 공손연 토벌
景初二年 太尉司馬宣王 率衆討公孫淵 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 238년에 태위 사마선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공손연을 토벌하니 궁이 주부와 대가를 파견하여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군대를 도왔다.
2688#20897
 
0238~0246 東北亞 古代史 槪念圖
0238~0246 東北亞 古代史 槪念圖
5875
 
0238~0246 東夷
弱水┆鮮卑┆扶餘┆挹婁┆高句麗┆沃沮┆朝鮮┆濊┆馬韓┆辰韓┆弁韓┆倭
15443
 
0239-06(<238) 三國志(289)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求詣天子朝獻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 왜 여왕이 대부 난승미 등을 보내 (대방)군에 이르러 천자에 조헌할 것을 청하니, 태수 유하가 관원과 장수를 보내 경도까지 호송하게 했다.
4262
 
0239_ 진서(648)
宣帝之平公孫氏也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其後貢聘不絕 선제(사마의)가 공손씨를 평정하자 (倭의) 여왕이 사신을 대방에 파견하여 조알하였다. 그 뒤에도 조빙이 끊이지 않았다.
5898 COMMENT
 
0240 三國志(289)
대방 태수 궁준이 건충교위 제준 등을 보내 조서와 인수를 받들어 왜국에 이르게 했다. 왜왕으로 임명하고 아울러 가져온 금, 비단, 융단, 칼, 거울, 채물을 하사했다. 이에 왜왕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은조에 사례했다.
5899 COMMENT
 
0244~0246 曹魏, 고려 정벌
244년에 조위의 유주자사 관구검은 현도에서 나와 비류에서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동천왕은 달아났고 관구검은 환도성을 파괴하였다. 245년에 재차 공격하자 동천왕은 옥저로 달아났고 현도태수 왕기가 그를 쫓아 숙신까지 갔다가 돌아갔다. 247년에 동천왕은 도읍을 옮겼다.
2688#444 COMMENT
 
0245 三國志(289)
조서를 내려 왜의 난승미에게 황당을 하사했는데 군(郡)으로 보내 수여토록 했다.
5901 COMMENT
 
0245 三國志(289)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弓遵 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舉邑降 245년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령 동쪽의 예가 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불내후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21259
 
한국의 어원
ᐥ한국은 중국인의 후손 한씨가 세운 나라라는 뜻이다.ᐥ
 
0245 조위, 한국 정벌
部從事吳林 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二郡遂滅韓
2688#571
 
0245┆東夷
弱水┆鮮卑┆扶餘┆挹婁┆高句麗┆沃沮┆朝鮮┆濊┆馬韓┆辰韓┆弁韓┆倭
7300
 
0247 三國志(289)
예가 조정에 와 조공하므로 불내예왕으로 봉하였다.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계절마다 군에 와서 조알하였다. 2군에 전역이 있어 조세를 거둘 일이 있으면 공급케 하고 사역을 시켜 마치 백성처럼 취급하였다.
5903 COMMENT
 
0247 三國志(289)
태수 왕기가 관부에 도착하였다. 倭 여왕 비미호와 구노국 남왕 비미궁호는 평소 불화했는데 재사, 오월 등을 (대방)군으로 보내 서로 공격하는 상황을 설명한 적이 있다. 새조연사 장정 등을 파견해 가져간 조서와 황당을 난승미에게 하사하고 격문으로 이를 널리 알렸다.
5904 COMMENT
 
0265~0317 西晋
晉은 司馬炎이 魏의 마지막 황제로부터 자리를 넘겨받아 세운 왕조다.
11676
 
0265~0317 新彌
동이 마한의 신미 여러 나라는 산에 기대고 바다를 띠둘렀는데 유주에서 4천여 리 떨어져 있었다. 지난 세월에 귀부하지 않은 나라가 20여 개 있었는데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2688#16534
 
0276 진서(648) 平州
統縣二十六戶一萬八千一百 昌黎郡(昌黎 賓徒) 遼東國(襄平 汶 居就 樂就 安市 西安平 新昌 力城) 樂浪郡(朝鮮 屯有 渾彌 遂城 鏤方 駟望) 玄菟郡(高句麗 望平 高顯) 帶方郡(帶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冥)
10022
 
0276 진서(648) 平州
▐ 후한의 유주는 연나라가 있던 지역인데, 진나라는 유주에서 산해관 동쪽을 갈라 평주를 만들었다. ▐ 낙랑군은 후한서의 유주 낙랑군 18성에서 䛁邯 淇水 占蟬 増地 昭明 樂都가 빠지고 南新이 들어가 13현이 되었는데, 여기서 7현을 대방군으로 분리하여 낙랑군은 6현이 되었다. 요동군은 후한서의 유주 요동군 11성에서 无虑 望平 候城 平郭 番汗 沓氏가 빠지고 居就 樂就 力城이 들어가 8현이 되었다.
11615
 
0280~0290 진서(648)
▐ 마한과 진한의 조공 기록이 나온다.
16538
 
0289 三國志
樂浪 사람을 阿殘이라 하였는데, 東方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阿라 하였으니, 樂浪人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34947 COMMENT
 
0307~0436 鮮卑燕
진서와 위서 사이에 일어난 일들.
2688#9841
 
0313↝ 낙랑, 대방 그리고 조선
기원전 108년에 대동강 유역에 설치된 낙랑군은 서진 때까지 존속하다 313년에 고려에 병합되었다. 그러자 모용 선비가 그 유민을 받아 자신의 영토 내에 낙랑군을 설치하였다. 모용 선비의 연나라를 흡수한 북위 때에는 낙랑군이 요서의 영주에 있었는데 다시 하북의 남영주로 옮겨졌다. 대방은 낙랑과 이동 경로가 같고 조선은 북위 때 산해관 서쪽에 있었다. 313년 이후 옮겨간 낙랑, 대방 그리고 조선의 위치를 가지고 처음 설치된 위치라 주장하는 오류가 있다.
10161
 
0386~0534 拓跋魏(北魏)
0386~0534 拓跋魏(北魏)
선비족 탁발부가 건국한 나라다.
20627
 
0444 위서(554) 營州
營州領郡六縣十四昌黎郡領縣三龍城廣興定荒建德郡領縣三石城廣都陽武遼東郡領縣二襄平新昌樂良郡領縣二永洛帶方冀陽郡領縣二平剛柳城營丘郡領縣二富平永安
3599
 
0490- 위서(554)
文成文明皇后馮氏 長樂信都人也 父朗 秦雍二州刺史西城郡公 母樂浪王氏
20625
 
0494 三國史記(1145) 고려
齊帝䇿王爲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 제(南齊)나라 황제가 왕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영평이주 정동대장군 낙랑공으로 책봉하였다.
34946 COMMENT
 
0500± 주서(636)
德皇帝娶樂浪王氏 是為德皇后 ▐ 북위 시기의 사람인데 북주에 와서 황후로 추존되었다.
20638
 
0508 三國史記(1145) 고려
梁髙祖下詔曰 髙句麗王樂浪郡公某 乃誠款著 貢驛相尋 冝豊秩命 式弘朝典 可撫軍 一作東大將軍開府儀同三司 양(梁)나라 고조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고구려왕 낙랑군공 모는 정성이 두드러지고 조공하는 길이 서로 이어졌으므로, 마땅히 관작을 후하게 주고 조정의 의전을 넓혀 무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삼는다.』
34949 COMMENT
 
0509~0522 王氏 묘지명
○ 樂浪名邦 王氏名宗 낙랑은 이름있는 나라이며 왕씨는 이름 있는 집안이다. ○ 其先出自有殷 周武王剋商 封箕子於朝鮮 子孫因而氏焉 그 선조는 은으로부터 나왔으니 주무왕이 상을 정복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는데, 자손이 이로 인하여 성씨를 삼았다. ○ 殷有三人 周訪九疇 只族王家 藉冑鮮侯 은나라에 세 어진 신하가 있어 주나라가 9주를 물었다. 그 집안이 성을 왕씨라 하고 자손들이 조선후가 되었다.
20623
 
0526~0539  梁職貢圖(唐閻立本王會圖)
0526~0539 梁職貢圖(唐閻立本王會圖)
왼쪽으로부터 신라, 고려 그리고 백제의 사신이고 그 다음이 양나라 황제다. 옷은 신라, 고려 그리고 백제가 거의 동일하고 양나라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비슷한 편이다. 특히 목 아래가 쐐기 모양으로 파여 있는 모양은 그 부분을 둥글게 감싸는 중앙아 사신들의 옷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네 나라의 옷이 비슷해진 이유는 한반도에 400여년이나 존재했던 낙랑군을 통해 중국 문화가 고려와 한국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11523
 
0533 위서(554)
南營州(孝昌中營州陷永熙二年置寄治英雄城 효창 연간에 영주가 무너지자 영희 2년에 영웅성에 임시 치소를 두었다.) 領郡五縣十一昌黎郡領縣龍城廣興定荒遼東郡領縣二太平新昌建德郡領縣石城廣都營丘郡領縣三富平永安帶方樂良郡領縣一永樂 남영주(5군,11현) - 창려군(509호,용성,광흥,정황), 요동군(565호,태평,新昌), 건덕군(178호,석성,광도), 영구군(512호,부평,영안,대방), 낙랑군(49호,영락).
10211
 
0534 北魏의 분열(東魏와 西魏)
위(北魏)의 효무제는 대승상 고환을 제거하는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하자 낙양에서 도망쳐 관중의 장안으로 도망쳐 우문태에게 보호를 받았다. 그러자 고환은 업(鄴)에서 효정제을 옹립하였다. 한편 우문태와 효무제는 서로 사이가 나빠져, 우문태는 효무제를 독살하고 문제를 옹립하였다.
20626
 
0539 樂浪郡朝鮮縣人韓顯度
元象二年四月十七日乐良郡朝鲜县人韩显度铭记
20624
 
0550 ~ 0577  제(高齊)
0550 ~ 0577 제(高齊)
6427 COMMENT
 
0565 三國史記(1145)
봄 2월에 북제의 무성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34926 COMMENT
 
0581 수서(636)
遼西郡(舊置營州 開皇初置總管府 大業初府廢) 統縣一 戶七百五十一 柳城(後魏置營州於和龍城 領建德冀陽昌黎遼東樂浪營丘等郡 龍城大興永樂帶方定荒石城廣都陽武襄平新昌平剛柳城富平等縣 後齊唯留建德冀陽二郡 永樂帶方龍城大興等縣 其餘並廢 開皇元年唯留建德一郡龍城一縣 其餘並廢 尋又廢郡 改縣為龍山 十八年改為柳城 大業初 置遼西郡 有帶方山 禿黎山 雞鳴山 松山 有渝水 白狼水)
20799
 
0581 ~ 0618  수(隋)
0581 ~ 0618 수(隋)
6434 COMMENT
 
0581 수서(636)
上谷郡(開皇元年置易州) 易 淶水 逎 遂城(舊曰武遂 後魏置南營州 准營州置五郡十一縣 龍城廣興定荒屬昌黎郡 石城廣都屬建德郡 襄平新昌屬遼東郡 永樂屬樂浪郡 富平帶方 永安屬營丘郡 後齊唯留昌黎一郡 領永樂 新昌二縣 餘並省 開皇元年州移 三年郡廢 十八年改為遂城) 永樂 飛狐
6447
 
0581 수서(636)
상곡군(581년에 역주를 설치했다.) 역 내수 주 수성(예전에는 무수라 했다. 북위가 남영주를 설치하고 영주에 준하여 5군 11현을 두었다. 창려군「용성 광흥 정황」, 건덕군「석성 광도」, 요동군「양평 신창」, 낙랑군「영락」, 영구군「부평 대방 영안」. 북제가 창려군만 남겨두어 영락과 신창 2현으로 통합하였다. 581년에 주를 옮기고 583년에 군을 폐지했다. 598년에 수성으로 개명하였다.)
10237
 
0586~0605 수서(636)
北平郡(舊置平州) 統縣一 盧龍(舊置北平郡 領新昌朝鮮二縣 後齊省朝鮮入新昌 又省遼西郡並所領海陽縣入肥如 開皇六年又省肥如入新昌 十八年改名盧龍 大業初置北平郡 有長城 有關官 有臨渝宮 有覆舟山 有碣石 有玄水 盧水 溫水 閏水 龍鮮水 巨梁水 有海)
20798
 
0586~0605 수서(636)
북평군(예전 평주가 있던 곳이다). 현이 하나 있다. 노룡(예전 북평군이 있던 곳이다. 조선과 신창 2현을 거느렸다. 북제가 조선인을 신창에 들였다. 또 요서군을 합치고 해양을 비여에 넣었다. 586년에 비여를 신창에 합쳤다. 598년에 노룡으로 개칭했다. 605~618년초에 북평군을 설치했다. 장성, 관관, 임유궁, 부주산, 갈석, 현수, 노수, 온수, 윤수, 용선수, 거량수 그리고 바다가 있다.)
20800
 
0594 三國史記(1145)
수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을 상개부(上開府)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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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8┆遼西┆右北平┆北平
▐ 漢 遼西┆且慮 海陽 新安平 柳城 令支 肥如 賓從 交黎 陽樂 狐蘇 徒河 文成 臨渝 絫 ➔ 後漢 遼西┆陽樂 海陽 令支 肥如 臨渝 ➔ 晉 遼西┆陽樂 肥如 海陽 ➔ 魏 遼西┆肥如 陽樂 海陽 ▐ 漢 右北平┆平剛 無終 石成 廷陵 俊靡 薋 徐無 字 土垠 白狼 夕陽 昌城 驪成 廣成 聚陽 平明 ➔ 後漢 右北平┆土垠 徐無 俊靡 無終 ➔ 晉 北平┆徐無 土垠 俊靡 無終 ➔ 魏 北平┆朝鮮 新昌 ▐ 齊 北平┆新昌 肥如 ➔ 隋 北平┆新昌 ➔ 隋 北平┆盧龍
6426
 
0618 ~ 0907 唐
0618 ~ 0907 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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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0907 구당서(945) 易州
역주(상곡군)에는 易 淶水 永樂 遂城 乃 5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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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0907 신당서(1060) 平州 北平郡
平州北平郡下初治臨渝武德元年徙治盧龍土貢熊郭蔓荊實人戶三千一百一十三口二萬五千八十六縣三有府一曰盧龍有盧龍軍天寶二載置又有柳城軍永泰元年置有溫溝白望西狹石東狹石綠疇米磚長楊黃花紫蒙白狼昌黎遼西等十二戍愛川周夔二鎮城東北有明垤關鶻湖城牛毛城盧龍中本肥如武德二年更名又置撫寧縣七年省石城中本臨渝武德七年省貞觀十五年復置萬歲通天二年更名有臨渝關一名臨閭關有大海關有碣石山有溫昌鎮馬城中古海陽城也開元二十八年置以通水運東北有千金冶城東有茂鄉鎮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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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0907 신당서(1060) 平州 北平郡
평주 북평군은 처음에 임유에 설치했다가 618년에 노룡으로 옮겼다. 특산물에는 곰, 곽, 만형자 그리고 사람이 있다. 3,113호 25,086구 3현이다. 부가 하나 있는데 노룡이라고 한다. 노룡군이 있는데 743년에 설치했다. 또 유성군이 있는데 765년에 설치했다. 온강, 백망, 서협석, 동협석, 녹수, 미박, 장양, 황화, 자몽, 백랑, 창려, 요서 등 12 수자리가 있다. 애천과 주기 두 진성이 있다. 동북쪽에 명질관, 골호성, 우모성이 있다.
6485 COMMENT
 
0618~0907 신당서(1060) 易州 上穀郡
易州上穀郡上土貢綿墨戶四萬四千二百三十口二十五萬八千七百七十九縣六有府九曰遂城安義脩武德行新安古亭武遂長樂龍水有高陽軍易上容城上本遒武德五年以容城及幽州之固安歸義置北義州貞觀元年州廢縣還故屬聖曆二年以拒契丹更名全忠神龍三年復故名天寶元年又更名遂城上淶水上滿城中本永樂天寶元年更名有郎山有永清軍貞元十五年置五回中下開元二十三年析易置並置樓亭板城二縣天寶後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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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9 平州
619 平州 ┆ 臨渝 肥如 ┆ 臨渝 盧龍 ┆ 臨渝 盧龍 撫寧 ┆ 624 盧龍 撫寧 ┆ 641 盧龍 撫寧 臨渝 ┆ 697 盧龍 撫寧 石城 ┆ 740 盧龍 撫寧 石城 馬城 ┆ 742 北平郡 ┆ 758 平州
6428
 
0621~0758 구당서(945) 易州
易州 中 隋上穀郡 武德四年 討平竇建德 改為易州 領易淶水永樂遂城乃五縣 五年 割乃縣置北義州 州廢 以乃來屬 開元二十三年 分置五回樓亭板城三縣 天寶元年 改為上穀郡 復隋舊名 乾元元年 復為易州 舊領縣五 天寶領縣八 今領縣六 易 容城 遂城(漢北新城縣 屬中山國 後魏改為新昌 隋末為遂城) 淶水 滿城
6475
 
0621~0758 구당서(945) 易州
역주. 수나라 상곡군이다. 621년 두건덕의 난을 평정한 뒤 역주로 바꾸고 역, 내수, 영락, 수성 등 5현을 두었다. 예전에 5현이었는데 742~756년에 8현이었다가 지금은 6현이다. 역, 용성, 수성(한나라의 북신성현인데 중산국에 속했다. 북위가 신창으로 바꾸고 수나라말에 수성이 되었다), 내수, 만성.
20797
 
0742 신당서(1060) 永樂
易州 上穀郡 滿城中本永樂天寶元年更名有郎山有永清軍貞元十五年置 역주 상곡군 만성은 본래 永樂이다. 742년에 이름을 고쳤다. 낭산이 있고 영청군이 있는데 799년에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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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2 신당서(1060) 永樂
▐ 진서에는 평주 대방군에 7현이 있었다. 위서의 영주에 와서는 대방이 낙랑군으로 옮겨지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졌다. 낙랑군에서도 기존의 현들이 다 빠지고 永洛이 새로 들어가 대방과 함께 2현이 되었다. 이 永洛은 남영주에 와서 永樂으로 한자가 바뀌었다. 남영주가 폐지될 때 영락은 신창과 함께 남아 창려군에 소속되었다. 이 기록을 볼 때, 창려군이 폐지된 후 영락은 역주 상곡군 소속으로 남아있었던 듯하다.
6514 COMMENT
 
樂浪史
서기전 108년 위만조선을 병합한 漢은 이 지역에 낙랑군, 진번군 그리고 임둔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옥저에 현도군을 설치하고 고구려를 縣으로 만들어 소속시켰다. 서기전 82년 漢은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하고 각각 낙랑군과 현도군에 소속시켰다. 이후 현도군이 지속적인 침공을 받자 고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와 濊는 동부도위로 묶어 낙랑에 예속시켰다. 30년에는 동부도위도 폐지하고 토착세력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복잡한 변천과정을 거쳐갔던 이들 ...
8536 COMMENT
 
참고
2688#2854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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