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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la > -0195~0313 朝鮮·樂浪史 |
-283년에 朝鮮은 燕에 복속되었다. -221년에 秦이 燕을 포함한 중국을 통일하자 조선은 秦에 소속되었다. -209년에 진승이 난을 일으키자 燕·齊·趙 지역의 난민 수만명이 조선, 진번 그리고 진국으로 들어왔다. -202년에 漢이 다시 중국을 통일했을 때 조선은 漢의 영역에서 빠졌다. 그러자 -195±년에 漢의 제후국이던 燕의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했다가 유민과 토착민을 규합하여 왕이 되었다. -108년에 漢이 조선을 멸망시키고 樂浪郡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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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BC91) 요약
❶ 기원전 334년에 燕의 동쪽에는 조선 및 요동이 있었다. 東有朝鮮遼東
❷ 기원전 300년 이후 燕은 동호를 쳐서 1천여리 물러나게 하고 東胡卻千餘里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은 뒤 築長城自造陽至襄平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그리고 요동군을 설치하여 오랑캐를 막았다.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이는 천산 산맥까지 영토를 넓힌 것으로 볼 수 있다.
2688#7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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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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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BC91) 요약
❸ 기원전 279년 이전에 燕은 동호를 공격하여 쫓아내고 천리의 땅을 개척한 뒤 요동을 지나 조선을 공격했다.
襲走東胡辟地千裏度遼東而攻朝鮮
진번과 조선을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보루과 요새를 쌓았다.
略屬眞番朝鮮爲置吏築鄣塞
따라서 조선과 진번은 천산 산맥 동쪽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❹ 기원전 222년에 秦은 燕을 멸망시키고 이곳을 요동 외요에 소속시켰다. 屬遼東外徼
2688#13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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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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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BC91) 요약
❺ 기원전 202년에 중국을 통일한 漢은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렵다며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爲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屬燕
❻ 기원전 109년에 漢의 좌장군은 패수 위의 군사를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험성 아래에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다.
左將軍破浿水上軍乃前至城下圍其西北
이는 패수와 왕험성 사이에 큰 강이 없었다는 정황이므로 패수와 왕험성을 각각 청천강과 평양성으로 설정하면 자연스러워진다.
2688#13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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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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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3 三國志·魏略(265)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為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為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가 약해지고 연이 스스로를 높여 왕을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 하자 조선후도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역공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대부 례가 말리므로 중지하였다. 그래서 례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을 설득하니 연도 전쟁을 멈추고 침공하지 않았다.
2688#2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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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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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0 ⁺ 史記(-91) 匈奴列傳
其後燕有賢將秦開 為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 燕亦筑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연나라의 명장 진개가 오랑캐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연나라로 돌아온 후,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해 패주시켰다. 이때 동호는 1천여 리나 물러갔다. 연나라 역시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에 군을 설치하여 오랑캐를 방어했다.
2688#2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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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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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0 ⁺ ◾東胡 朝鮮
사기(-91)에는 진개가 동호를 밀어내고 요동을 차지한 사건과 연나라가 진번과 조선을 복속시킨 사건이 별개로 취급되어 있다.
염철론(-81)에서도 비슷한 내용이지만 동호를 밀어내고 차지한 땅이 천리라는 거리가 더해져 있다.
위략(265)에서는 두 사건이 진개 한 사람이 한 일로 합쳐져 있고 차지한 땅도 2천리의 조선 땅으로 되어 있다.
사기와 위략의 이야기가 충돌하는데, 기록의 연대를 볼 때, 사기를 역사적 사실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2688#3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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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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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5 史記(-91) 朝鮮列傳
燕王盧綰反入匈奴 滿亡命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연왕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인을 모아 몽치 머리에 오랑캐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과 제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험에 도읍을 정하였다.
2688#6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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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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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5 三國志·魏略(265)
한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으로 연왕을 삼으니,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간 뒤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항복하였다.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준을 설득하였다. 준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에 임명하고 규를 하사하며 백리의 땅을 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2688#14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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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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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5 三國志·魏略(265)
한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으로 연왕을 삼으니,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간 뒤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항복하였다.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준을 설득하였다. 준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에 임명하고 규를 하사하며 백리의 땅을 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2688#3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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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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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5 ~ -0188 史記(-91) 朝鮮列傳
이 때는 마침 효혜·고후(-195~-188)의 시대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는 곧 위만을 외신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오랑캐의 군장이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이로써 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2688#1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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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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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8 ~ -0125 蒼海郡
濊는 단단대령 남쪽을 돌아 대동강을 거쳐 중국과 교류하였는데 위만 조선에 의해 이 길이 막히자 濊君 남려 등은 28만 구를 들어 황초령을 넘고 압록강을 지나 요동에 귀속하였다. 한무제는 濊에 蒼海郡을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지하였다.
蒼海는 푸른 바다라는 뜻으로 누런 바다라는 뜻의 黃海와 대조된다. 濊의 위치로 보나 蒼海라는 명칭으로 보나 蒼海郡은 동해에 접한 지역으로 볼 수 있다.
蒼海郡의 설치 경험은 훗날 臨屯郡을 설치하는 바탕이 되었을 듯하다.
2688#8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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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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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1 史記(-91)
누선장군은 정예부대를 이끌고 먼저 심협을 함락시키고 석문을 깨뜨려 월나라의 배와 양식을 노획했다. 이틈에 밀고 나가 월나라의 선봉을 꺽고 수만 명을 거느리고는 복파장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복파장군은 죄수들을 인솔한 데다 길까지 멀어 약속한 날짜에 늦었고 누선장군과 만났을 때는 1000여 명뿐이었다. 두 군대는 함께 나아갔는데 누선장군이 앞장서서 먼저 번옹에 도착했다.
2688#5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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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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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1 ◾
위만조선을 침공하기 전에 있었던 월남 침공의 기록이다. 죄수를 동원했다는 점과 육로와 해로로 나누어 공격했다는 점에서 조선 침공과 방식이 같다. 월남 침공에서는 육로로 간 부대가 실패했지만 조선 침공에서는 해로로 간 부대가 패배했다.
한나라가 육로와 해로로 나누어 조선을 공격한 방식은 700여년 후 수나라가 고려를 공격한 방식과도 같다.
2688#5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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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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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史記(-91) 朝鮮列傳
원봉 2년에 한나라는 사신 섭하를 보내어 우거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끝내 천자의 명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며 국경인 패수에 이르르자 마부를 시켜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 장을 찔러 죽이고 바로 건너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천자가 꾸짖지 않고 하에게 요동동부도위의 벼슬을 내렸다. 이에 조선은 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기습공격해 하를 죽이니, 천자는 죄인을 모집하여 조선을 치게 하였다.
2688#14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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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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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
齊의 중심지는 발해만 안쪽에 있었다. 齊 병력을 모아 출발시켰다면 당연히 이곳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발해 해안선은 내륙으로 더 깊이 들어가 있었다. 이곳에서 배를 띄우면 발해에 배를 띄우는 것이 된다. 당시의 항해는 가능한 한 해안선을 따라갔다. 조선을 향해 요동 반도로 건너가든 한반도로 바로 건너가든, 발해만 안쪽에서 띄운 배는 일단 齊의 해안을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2688#5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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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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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史記(-91) 朝鮮列傳
좌장군의 졸정인 다가 요동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진하였으나 패하여 군사는 흩어지고 다도 도망하여 돌아오므로 법에 따라 참형을 당하였다. 누선은 제나라 병사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험에 이르렀는데 우거가 성을 지키며 누선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성을 나와 누선을 치니 누선군은 패해 흩어졌다. 양복은 군사를 잃고 10여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았다.
左將軍도 朝鮮의 浿水 西軍을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가 없었다.
2688#1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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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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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
한나라 양복의 진군 수나라 내호아의 행보와 비슷하다.
"좌익위대장군 내호아가 배의 뒷부분과 앞부분이 수백 리에 이르게 바다에 떠올라 먼저 패수로 들어와서 평양에서 60리 떨어진 곳에서 아군과 서로 만났는데 이를 대파하였다. 숨은 병력이 나가니 내호아가 크게 패하여 겨우 붙잡히는 것을 면하였고 사졸로서 돌아간 자는 수천인에 불과하였다."
2688#1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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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史記(-91) 朝鮮列傳
천자는 양 장군의 전세가 유리하지 않다고 여기고, 위산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를 달래게 하였다. 우거는 사자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항복하기를 원하였으나 양 장군이 신을 속여서 죽일까 두려워했는데, 이제 신절을 보았으니 항복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태자를 보내 들어가 사죄하게 하고, 말 5천필을 바침과 아울러 군량미를 내주었다.
2688#17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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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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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史記(-91) 朝鮮列傳
무리 만여인이 무기를 지니고 막 패수를 건너려 할 때 사자와 좌장군은 그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에게 말하기를,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병기를 버리라고 명하시오.”
라고 하였다. 태자도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속이고 죽일까 의심하여 끝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가버렸다. 산이 돌아와 천자께 보고하니 천자는 산을 주살하였다.
2688#1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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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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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
한나라 좌장군의 행보는 수나라 우문술의 행보와 비슷하다.
"既恃驟勝 又逼群議 遂進東 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우문술은 이미 잦은 승리를 거둔데다 여러 의견도 있어 마침내 동쪽으로 진격하여 살수를 건너 평양성으로부터 30리 떨어진 곳에다가 산에 의지하여 군영을 세웠다."
2688#1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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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史記(-91) 朝鮮列傳
좌장군은 본시 시중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고 있는 데다가 燕과 代지방의 군사를 거느렸으므로 굳세었는데, 싸움에 이긴 기세를 타고 군사들이 더욱 교만해졌다. 누선은 齊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로 출병하였으나, 이미 여러번 싸움에 패하고 군사를 잃었으며, 앞서 우거와의 싸움에서 곤욕을 치른 패잔한 군사들이라 군사들은 모두 두려워 하고 장군은 부끄럽게 여겨 우거를 포위하고도 항상 화평을 유지했다.
2688#17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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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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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史記(-91) 朝鮮列傳
좌장군이 맹렬히 성을 공격하니, 조선 대신들은 몰래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누선에게 항복을 약속했으나, 말만 오고 갈 뿐 아직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좌장군은 여러 차례 누선과 싸울 시기를 정하였으나 누선은 약속을 급히 이루려고 싸움에 나가지 않았다. 좌장군 또한 사람을 보내 조선이 항복해 올 때를 탐문하였으나, 조선은 이를 반기지 않고 누선 쪽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로 인해 양 장군은 서로 반목하게 되였다.
2688#17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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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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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史記(-91) 朝鮮列傳
천자는,
“장수들이 이룰 수 없으므로 전에 위산으로 하여금 우거를 달래 항복하도록 하여 우거가 태자까지 보냈는데도 산이 이를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좌장군과 서로 계교가 틀려 마침내 약속이 깨어지고 말았다. 지금도 양 장군이 성을 포위하고도 역시 어긋나고 달라서 오래도록 결판이 나지 못하고 있다.”
고 말하고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어 이를 바로잡고 상황에 맞게 처하도록 하였다
2688#1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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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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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史記(-91) 朝鮮列傳
수가 도착하니 좌장군이 말했다.
“조선이 항복할 형편에 이른 지 오래되었는데도 항복하지 않는 것은 사정이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누선이 여러 차례 싸우러 나오지 않은 것과 평소의 뜻하는 바를 수에게 낱낱이 고하였다.
“지금 이와 같으니 체포하지 않으면 크게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누선 혼자만이 아니고 조선과 함께 우리 군사를 멸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수도 이를 옳게 여기고 누선장군을 체포하고 군사를 합친 뒤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수를 죽였다.
2688#17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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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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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三國誤記」 漢書
遂至 左將軍曰 朝鮮當下久矣 不下者 樓船數期不會 具以素所意告遂曰 今如此不取 恐為大害 非獨樓船 又且與朝鮮共滅吾軍 遂亦以為然 而以節召樓船將軍入左將軍軍計事 即今左將軍戲下執縛樓船將軍 并其軍 以報 天子(許→)誅遂
▐ 사기에는 天子誅遂라 되어 있으나 한서에는 天子許遂라 되어 있다. 좌장군 순체를 주살한 이유가 坐争功相嫉乖計인데 공손수도 거기에 가담하였으므로 天子誅遂가 맞다. 사기 조선열전의 끝에도 荀彘爭勞 與遂皆誅라고 되어 있다.
2688#3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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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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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史記(-91) 朝鮮列傳
좌장군이 이미 양군을 합하여 맹렬히 조선을 치니, 조선의 상 노인과 상 한음과 니계상 삼 ·장군 왕협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 누선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누선은 지금 잡혀 있고 좌장군 단독으로 장졸을 합하여 전투가 더욱 맹렬하여 맞아서 싸우기 두려운데도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
하고 음·협·노인이 모두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2688#16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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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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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 ~ -0082 茂陵書
창해군은 황초령을 넘어 한나라와 연결되며 설치되었으므로 치소는 황초령 아래에 있었을 듯하다. 임둔군은 창해군을 재건하는 의미를 지녔으므로 임둔군의 치소 또한 창해군의 치소를 재건했을 듯하다.
동이가 황초령 아래에 있었고 진번군이 낙랑군 남쪽에 있었으며 진번군의 치소 삽현이 동이보다 1500리 더 먼 곳에 있었다면, 삽현의 위치로는 한성이 유력하다.
2688#2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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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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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 史記(-91) 朝鮮列傳
左將軍徵至 坐争功相嫉 乖計 弃市 樓船將軍亦坐兵至列口 當待左將軍 擅先縱 失亡多 當誅 贖為庶人
좌장군을 불러 들여 오자 공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긋나게 한 죄로 처형하였다. 누선장군도 병사를 거느리고 열구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할 것인데도 제멋대로 먼저 군사를 풀어 많은 병사들을 잃어버렸으므로 주살함이 마땅하나 속전을 받고 서인으로 삼았다.
2688#17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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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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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5 정백동 낙랑호구부
▐ 뒤에 있는 7현을 동부도위 소속으로 추정한다. 沃沮가 낙랑에 소속되었다고 하나 낙랑군 현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夫租를 沃沮로 추정한다. 朝鮮에 樂浪을 설치한 것처럼 沃沮에 夫租를 설치했을 수 있다. 夫租는 이른 시기의 정백동 낙랑호구부(-45)에서부터 보이나 沃沮는 나중에 나온 삼국지(289)에서 처음 나타나기 때문에 夫租가 훗날 沃沮로 개칭되었을 수도 있다.
2688#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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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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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漢書(82)
西蓋馬(馬訾水 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 行一千一百里)
서개마(마자수가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로 들어간다. 서남쪽으로 흘러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2군을 지나 1100리를 흐른다.)
▐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 강은 염난수고 지금의 압록강이다. 마자수는 염난수의 지류인데 서북쪽으로 흐른다고 하니 강계를 지나는 독로강이 유력하다. 그렇다면 2군을 지나 1100리를 흐른다는 설명은 염난수다.
2688#19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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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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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 漢書(82)
왕망 초에 고구려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법을 어기고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고구려후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왕망이 고구려를 하구려로 이름을 바꾸고 천하에 알리게 하였다. 이에 맥인이 변경을 더욱 침범하게 되었다.
2688#6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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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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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023 魏略(265±)
20~23년에 廉斯鑡이 辰韓의 右渠帥가 되어 樂浪의 토지가 비옥하다는 말을 듣고 도망가려고 살던 부락을 나오다 漢人 호래를 만났다. 그는 3년 전에 천 5백 명과 함께 나무를 베다 韓의 습격을 받아 노예가 되었다고 하였다. 鑡이 호래를 데리고 含資縣으로 가 郡에 연락하자 郡은 鑡을 통역으로 삼아 수초 사이로 큰 배를 타고 辰韓에 들어가 잡혀간 천여명을 데려갔다. 5백명은 이미 죽은 뒤여서 辰韓이 보상으로 진한인 만 5천명과 弁韓布 만 5천필을 내놓았다.
2688#7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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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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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三國史記(1145) 新羅
▐ 37년에 고려의 침공을 받아 망하자 그 유민이 신라로 흘러간 낙랑은 36년, 14년 그리고 4년에 신라를 침공한 낙랑이다. 이 낙랑은 -2년에 백제를 침공하고 -8년에 말갈로 하여금 백제를 침공하게 한 낙랑이기도 하다. -6년에 백제는 이 낙랑을 東有樂浪이라 했다.
▐ 26년에 개마국을 정벌하고 28년에 개마대산을 넘어 북옥저를 점령한 것과 비교하면 32년에 황초령을 넘어 최리낙랑을 정벌하고 37년에 동유낙랑을 정벌한 것이 어색하지 않다.
2688#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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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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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後漢書(445)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諟等 詣樂浪貢獻 光武封蘇馬諟 爲漢廉斯邑君使 屬樂浪郡 四時朝謁 한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대하여 한의 염사읍군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하도록 하였다.
▐ 삼국지에 실린 위략의 염사착 이야기와 동일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왕망의 사후 낙랑과 그 주변 나라들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韓의 廉斯는 낙랑에 기대는 방향으로 생존을 모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688#7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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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6 국사편찬위원회
한나라는 -75±년에 蘇子河 유역에 제2현도군을 두었다가 100±년에 다시 渾河 유역으로 옮겨 제3현도군을 설치하였다. 여러 사료를 종합하면 고구려가 제2현도군을 점령한 것은 1세기 말일 가능성이 높고, 선비의 동향을 고려하면 97년 전후로 추정된다. 106년에는 제2현도군의 속현이었던 고구려⋅서개마⋅상은대 3현을 渾河 방면으로 옮기고 요동군의 속현인 고현⋅후성⋅요양 3현의 소속을 현도군으로 변경하여 제3현도군을 설치한 것이다.
2688#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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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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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1 요동과 고려의 공방
봄에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이 고려를 침공했다. 태조왕이 세자 수성에게 2천명을 거느리고 막게 했다. 수성은 험요지에서 대군을 막고 몰래 3천명을 보내 현도와 요동을 침략하고 2천명을 죽였다.┆여름에 고려가 요동 선비 8천명과 함께 요대를 침략하자 채풍이 신창에서 추격하다 죽었다.┆가을에 태조왕이 마한과 예맥 수천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포위하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와 2만명을 보냈다. 한나라 주와 군이 함께 깨뜨리고 5백명을 베었다
2688#20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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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4~0220 三國志(289) 高句麗
건안 연간에 공손강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加)와 함께 각기 하호 3만명을 이끌고 강(康)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 유역에 옮겨 살았다. 항복했던 호(胡)도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건너가고 그 아들은 구려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고추가 교위거가 바로 그 사람이다
2688#5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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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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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6 진서(648) 平州
▐ 후한의 유주는 연나라가 있던 지역인데, 진나라는 유주에서 산해관 동쪽을 갈라 평주를 만들었다.
▐ 낙랑군은 후한서의 유주 낙랑군 18성에서 䛁邯 淇水 占蟬 増地 昭明 樂都가 빠지고 南新이 들어가 13현이 되었는데, 여기서 7현을 대방군으로 분리하여 낙랑군은 6현이 되었다.
요동군은 후한서의 유주 요동군 11성에서 无虑 望平 候城 平郭 番汗 沓氏가 빠지고 居就 樂就 力城이 들어가 8현이 되었다.
2688#1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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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 낙랑, 대방 그리고 조선
기원전 108년에 대동강 유역에 설치된 낙랑군은 서진 때까지 존속하다 313년에 고려에 병합되었다. 그러자 모용 선비가 그 유민을 받아 자신의 영토 내에 낙랑군을 설치하였다. 모용 선비의 연나라를 흡수한 북위 때에는 낙랑군이 요서의 영주에 있었는데 다시 하북의 남영주로 옮겨졌다.
대방은 낙랑과 이동 경로가 같고 조선은 북위 때 산해관 서쪽에 있었다.
313년 이후 옮겨간 낙랑, 대방 그리고 조선의 위치를 가지고 처음 설치된 위치라 주장하는 오류가 있다.
2688#1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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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2 ❰❰ 0032 三國誤記 高句麗
왕자 好童이 沃沮에 갔다가 樂浪王 崔理를 만났는데 崔理가 北國 神王의 아들이라며 好童을 데려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好童이 돌아가 최씨 딸에게 사람을 보내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나팔을 뽀개게 한 뒤 왕에게 낙랑을 치게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성 밑에 이른 뒤에야 북과 피리가 망가진 것을 알게 된 崔理는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혹은 '낙랑을 멸망시키려고 혼인을 청하여 그 딸을 며느리로 맞은 뒤 돌려보내 무기를 파괴하게 했다'고도 한다.
2688#7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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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0522 王氏 묘지명
○ 樂浪名邦 王氏名宗 낙랑은 이름있는 나라이며 왕씨는 이름 있는 집안이다.
○ 其先出自有殷 周武王剋商 封箕子於朝鮮 子孫因而氏焉 그 선조는 은으로부터 나왔으니 주무왕이 상을 정복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는데, 자손이 이로 인하여 성씨를 삼았다.
○ 殷有三人 周訪九疇 只族王家 藉冑鮮侯 은나라에 세 어진 신하가 있어 주나라가 9주를 물었다. 그 집안이 성을 왕씨라 하고 자손들이 조선후가 되었다.
2688#2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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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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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0539 梁職貢圖(唐閻立本王會圖)
왼쪽으로부터 신라, 고려 그리고 백제의 사신이고 그 다음이 양나라 황제다.
옷은 신라, 고려 그리고 백제가 거의 동일하고 양나라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비슷한 편이다.
특히 목 아래가 쐐기 모양으로 파여 있는 모양은 그 부분을 둥글게 감싸는 중앙아 사신들의 옷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네 나라의 옷이 비슷해진 이유는 한반도에 400여년이나 존재했던 낙랑군을 통해 중국 문화가 고려와 한국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2688#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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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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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3 위서(554)
南營州(孝昌中營州陷永熙二年置寄治英雄城 효창 연간에 영주가 무너지자 영희 2년에 영웅성에 임시 치소를 두었다.)
領郡五縣十一昌黎郡領縣龍城廣興定荒遼東郡領縣二太平新昌建德郡領縣石城廣都營丘郡領縣三富平永安帶方樂良郡領縣一永樂
남영주(5군,11현) - 창려군(509호,용성,광흥,정황), 요동군(565호,태평,新昌), 건덕군(178호,석성,광도), 영구군(512호,부평,영안,대방), 낙랑군(49호,영락).
2688#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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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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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1 수서(636)
遼西郡(舊置營州 開皇初置總管府 大業初府廢) 統縣一 戶七百五十一 柳城(後魏置營州於和龍城 領建德冀陽昌黎遼東樂浪營丘等郡 龍城大興永樂帶方定荒石城廣都陽武襄平新昌平剛柳城富平等縣 後齊唯留建德冀陽二郡 永樂帶方龍城大興等縣 其餘並廢 開皇元年唯留建德一郡龍城一縣 其餘並廢 尋又廢郡 改縣為龍山 十八年改為柳城 大業初 置遼西郡 有帶方山 禿黎山 雞鳴山 松山 有渝水 白狼水)
2688#20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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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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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1 수서(636)
상곡군(581년에 역주를 설치했다.) 역 내수 주 수성(예전에는 무수라 했다. 북위가 남영주를 설치하고 영주에 준하여 5군 11현을 두었다. 창려군「용성 광흥 정황」, 건덕군「석성 광도」, 요동군「양평 신창」, 낙랑군「영락」, 영구군「부평 대방 영안」. 북제가 창려군만 남겨두어 영락과 신창 2현으로 통합하였다. 581년에 주를 옮기고 583년에 군을 폐지했다. 598년에 수성으로 개명하였다.)
2688#1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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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6~0605 수서(636)
북평군(예전 평주가 있던 곳이다). 현이 하나 있다. 노룡(예전 북평군이 있던 곳이다. 조선과 신창 2현을 거느렸다. 북제가 조선인을 신창에 들였다. 또 요서군을 합치고 해양을 비여에 넣었다. 586년에 비여를 신창에 합쳤다.
598년에 노룡으로 개칭했다. 605~618년초에 북평군을 설치했다. 장성, 관관, 임유궁, 부주산, 갈석, 현수, 노수, 온수, 윤수, 용선수, 거량수 그리고 바다가 있다.)
2688#2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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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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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8┆遼西┆右北平┆北平
▐ 漢 遼西┆且慮 海陽 新安平 柳城 令支 肥如 賓從 交黎 陽樂 狐蘇 徒河 文成 臨渝 絫 ➔ 後漢 遼西┆陽樂 海陽 令支 肥如 臨渝 ➔ 晉 遼西┆陽樂 肥如 海陽 ➔ 魏 遼西┆肥如 陽樂 海陽
▐ 漢 右北平┆平剛 無終 石成 廷陵 俊靡 薋 徐無 字 土垠 白狼 夕陽 昌城 驪成 廣成 聚陽 平明 ➔ 後漢 右北平┆土垠 徐無 俊靡 無終 ➔ 晉 北平┆徐無 土垠 俊靡 無終 ➔ 魏 北平┆朝鮮 新昌
▐ 齊 北平┆新昌 肥如 ➔ 隋 北平┆新昌 ➔ 隋 北平┆盧龍
2688#6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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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0907 신당서(1060) 平州 北平郡
평주 북평군은 처음에 임유에 설치했다가 618년에 노룡으로 옮겼다.
특산물에는 곰, 곽, 만형자 그리고 사람이 있다.
3,113호 25,086구 3현이다.
부가 하나 있는데 노룡이라고 한다. 노룡군이 있는데 743년에 설치했다. 또 유성군이 있는데 765년에 설치했다. 온강, 백망, 서협석, 동협석, 녹수, 미박, 장양, 황화, 자몽, 백랑, 창려, 요서 등 12 수자리가 있다.
애천과 주기 두 진성이 있다.
동북쪽에 명질관, 골호성, 우모성이 있다.
2688#6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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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2 신당서(1060) 永樂
▐ 진서에는 평주 대방군에 7현이 있었다. 위서의 영주에 와서는 대방이 낙랑군으로 옮겨지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졌다. 낙랑군에서도 기존의 현들이 다 빠지고 永洛이 새로 들어가 대방과 함께 2현이 되었다. 이 永洛은 남영주에 와서 永樂으로 한자가 바뀌었다. 남영주가 폐지될 때 영락은 신창과 함께 남아 창려군에 소속되었다. 이 기록을 볼 때, 창려군이 폐지된 후 영락은 역주 상곡군 소속으로 남아있었던 듯하다.
2688#6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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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浪史
서기전 108년 위만조선을 병합한 漢은 이 지역에 낙랑군, 진번군 그리고 임둔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옥저에 현도군을 설치하고 고구려를 縣으로 만들어 소속시켰다.
서기전 82년 漢은 진번군과 임둔군을 폐지하고 각각 낙랑군과 현도군에 소속시켰다. 이후 현도군이 지속적인 침공을 받자 고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와 濊는 동부도위로 묶어 낙랑에 예속시켰다. 30년에는 동부도위도 폐지하고 토착세력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복잡한 변천과정을 거쳐갔던 이들 ...
2688#8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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