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가 편찬된 이듬해부터 왜가 삼한에 진출하기 전까지로, 중국의 기록에 거의 잡히지 않은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마한이 309년에 백제에 병합되고 낙랑과 대방이 각각 313년과 314년에 고려에 병합되었다. 중국에서는 서진이 316년에 망했는데, 그 이전에 이미 한반도는 재편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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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0-0390 三韓의 재편
중국에서 서진이 망해가면서 요동과 한국은 재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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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5 삼국사기(1145)
왕이 "왜인이 자주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가 없다. 나는 백제와 꾀하여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들어가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라고 묻자 홍권이,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라고 답하였다.
32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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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6-08 삼국사기(1145)
모용외가 침략해왔다. 고국원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다. 파는 사람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있고 또 무덤 안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는가 두려워하여 곧 물러갔다.
-- 모용외는 5호16국시대 선비족 모용부의 수장으로 훗날 연(前燕)을 세운 모용황의 아버지다.
41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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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7 삼국사기(1145)
(신라) 이서국(伊西國)이 금성을 공격해 왔으므로 우리 편에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막았으나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왔는데,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그 사람들은 모두 귀에 대나무 잎을 달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공격하여 깨뜨린 후 어디로 간지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 이서국은 청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2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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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9 우로(于老)
왜가 신라를 침공하여 죽인 인물에 대해 일본서기(720)는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이라 하고 삼국사기(1145)는 신라 장수 우로(于老)라 했다.
가라가 포상8국의 침공을 받았을 때 신라의 원군을 인솔해간 장수를 삼국사기는 태자 우로라 소개해 놓았다.
우로의 아들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 굳이 어린 아이를 왕으로 앉힌 이유로는 왕이 급사했고 그 아이가 태자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우로는 신라왕이었다.
2408#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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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0 삼국사기(1145)
(신라) 흘해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나해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각간 우로(于老)이고 어머니는 명원부인으로 조분왕의 딸이다. 기림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군신들이 의논해 말하기를, “흘해가 어리지만 노련한 덕이 있다.”고 하며 이내 그를 받들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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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3-04 자치통감(1084)
遼東張統據樂浪 帶方二郡 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 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 廆爲之置樂浪郡 以統爲太守 遵參軍事
요동의 장통이 낙랑 대방 2군에 있으면서 고구려왕 을불과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에게 권고하여 그 백성 1,000여 가를 이끌고 외(慕容廆)에게 귀부케 하였다. 외가 이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두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왕준을 낙랑군 참군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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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6 晉(西晉) 멸망
311년 흉노족은 진의 수도인 洛陽을 약탈하고 황제를 죽였다. 진은 고대의 수도였던 長安에 새 황제를 세우고 나라를 재건했지만 이는 이민족의 침입을 잠시 늦추는 것에 불과했다. 316년 사마염의 손자인 민제는 흉노족의 부족장에게 항복하고 퇴위했다가 후에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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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7 연(前燕) 건국
요서 일대에 살던 모용선비는 307년 모용외(慕容廆)가 선비대선우를 자칭하며 자립하고 319년에 진(西晉)의 최비(崔毖)를 물리치며 요동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의 아들 모요황(慕容皝)은 337년에 연왕을 칭하고 단부, 조(後趙), 고려, 우문선비 등과 경쟁하며 성장하였다. 모용준(慕容儁)은 352년에 하북을 점령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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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8 자치통감(1084)
송황(宋晃)은 338년에 후조의 석륵이 모용황을 공격하자 전연의 성주내사 최도(崔燾), 거취령 유홍(游泓), 동이교위 봉추(封抽) 등과 함께 이에 내응하였다. 그러나 석륵이 오히려 패하고 모용황이 반했던 성들을 토멸하자, 최도는 석륵에게로, 송황은 봉추·유홍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해 왔다. 석륵이 같은 해 고구려에 양곡 30만 곡(斛)을 배 300척에 실어 보낸 것도 이러한 사정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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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2 모용황의 고구려 침공
모용외의 아들 황(晃)이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쇠(釗 고국원왕)는 더불어 싸우다 크게 패하여 단신으로 말을 타고 달아났다. 황(晃)은 승리한 기세로 계속 추격하여 환도(丸都)에 이르러 궁실을 불지르고 남자 5만여구를 노략질하여 돌아왔다.
2408#9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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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6 삼국사기(1145)
(신라) 왜의 군사가 갑자기 풍도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또 진군하여 금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하였다. 왕이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니 적은 식량이 떨어져 장차 물러가려 하였다. 강세에게 명하여 날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쫓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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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7-01 삼국사기(1145)
(백제)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내고, 진정(眞淨)을 조정좌평으로 삼았다. 정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질이 흉악하고 어질지 못하였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까다롭고 잔소리가 많았다. 그는 권세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여,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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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3 동리(佟利)
永和九年遼東韓玄菟太守領佟利造
353년에 요동·한·현도군을 관할하는 태수인 동리가 만들었다.
--> 안악3호무덤의 동수(佟壽)처럼 고려의 지배체제로 흡수된 낙랑인으로 추정된다.
4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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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5 삼국사기(1145)
(고려) 겨울 12월에 왕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준이 이것을 허락하고 전중장군 조감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왕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로 삼고, 낙랑공으로 봉하고,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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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7 동수(佟壽)
무덤의 주인은 동수(冬壽)로 진서(晉書)와 자치통감에 나오는 동수(佟壽)로 추정된다. 명문에 있는 ‘永和十三年’는 동진의 연호로서 서기 357년에 해당된다.
使持節 都督 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相 昌黎玄菟帶方太守 都鄕侯
사지절 도독 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창려현토대방태수 도향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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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4-04 삼국사기(1145)
왜의 군사가 대거 이르렀다. 왕이 듣고서 대적할 수 없을까 두려워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 아래에 나란히 세워 두었다. 그리고 용맹한 군사 1천 명을 부현의 동쪽 들판에 숨겨놓았다. 왜인이 자기 무리가 많음을 믿고 곧바로 나아가자 숨어 있던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군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
3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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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6-03-01 일본서기(720)
사마숙니를 탁순국에 보내었다.
사마숙니는 종자 이파이와 탁순인 과고 두 사람을 백제국에 보내어 그 왕을 위로하였다. 이 때 백제 초고왕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고, 다섯가지 빛깔의 채색비단 각 1필과 각궁전 및 철정 40매를 이파이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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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9-09 삼국사기(1145) 백제
고구려 왕 사유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그 사로잡은 적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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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0 연(前燕) 멸망
367년에 모용각이 죽자 모용평(慕容評)이 실권을 잡고 부패한 정치를 하면서 전연의 국력은 쇠퇴하였다. 369년에 동진(東晉)의 환온(桓溫)이 북벌군을 일으켜 연을 공격하였는데 전진(前秦)의 구원군과 모용수(慕容垂)의 활약으로 물리쳤다. 모용평은 모용수의 전공을 두려워하여 모용수를 죽이려고 하였고, 모용수는 전진(前秦)으로 망명하였다. 370년, 전진의 부견(苻堅)의 침입을 받아 항복함으로써 전연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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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75-11 삼국사기(1145) 백제
왕이 사망하였다. 고기(古記)에는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적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때에 와서 박사 고흥이 처음으로 서기(書記)를 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흥이라는 이름이 다른 서적에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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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1 삼국사기(1145)
위두(衛頭)를 보내 부씨(苻氏)의 진(前秦)에 토산물을 바쳤다. 부견(苻堅)이 위두에게 물었다.
“경이 말하는 해동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답해 말했다.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변혁되고 이름이 바뀌었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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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5-06 삼국사기(1145)
(고려) 왕이 병력 4만 명을 내어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왕 모용수가 대방왕 모용좌에게 명하여 용성(龍城)을 지키게 하였다. 모용좌가 아군이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것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을 보내 병력을 이끌고 가서 구하게 하였다. 아군이 이를 쳐서 패배시키고,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빼앗고, 남녀 1만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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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5-11 삼국사기(1145)
연(燕)의 모용농(慕容農)이 병력을 거느리고 침략해 와서 요동·현도 2군을 다시 차지하였다. 처음에 유주와 기주의 유민이 많이 투항해오므로 모용농이 범양 사람 방연을 요동태수로 삼아 이들을 불러 어루만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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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6 魏(北魏) 건국
탁발십익건(拓跋什翼) 때 전진(前秦)의 부견(符堅)과의 싸움에 패하여 전진에게 멸망당했다. 정권이 와해되었지만, 부견이 비수 전투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십익건의 손자 탁발규(拓跋珪: 후의 道武帝)는 386년 대나라 왕을 칭하고 자립했다. 그후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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