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백제의 한성을 차지한 때부터 신라가 임나를 병합하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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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5 위서(魏書554)
안(安) 등으로 하여금 동래로부터 바다를 건너가 여경(개로왕)에게 새서를 내려 그의 정성을 포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安) 등은 바닷가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 끝내 도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4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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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7-03 일본서기(720)
천황이 백제가 고려에게 패배했음을 듣고 구마나리를 문주왕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백제국은 비록 거의 망해 창하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이다. 일본구기에서는 “구마나리를 말다왕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의 하치호리(下哆呼唎)현의 별읍이다.
26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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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9 남제서(537)
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爲鎮東大將軍
건원 원년(479)에 왜(倭) 임금에게 새로 벼슬을 내려주어 사지절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으로 삼았다. 왜(倭) 임금 무(武)는 호칭을 진동대장군이라 하였다.
4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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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9-04 일본서기(720)
백제의 문근왕(文斤王)이 죽었다. 천왕이 곤지왕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末多王)이 어린 나이에 총명하므로 칙명으로 궁궐에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조심하도록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병기를 주고 아울러 축자국 군사 500인을 보내 자기 나라로 호위해 보냈는데, 이 사람이 동성왕이 되었다.
1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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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0-04 삼국사기(1145)
장수왕이 사신 여노 등을 보내 남제와 통교하게 하였다. 위(北魏)의 광주인이 바다 가운데서 여노 등을 잡아 대궐로 보냈다. 위 고조가 조서를 보내 왕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경이 우리의 경역을 넘어 외교를 하여 찬탈한 도적과 멀리 통하려 하니, 어찌 이것이 번신이 절개를 지키는 의리이겠는가?”고 하였다.
4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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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1-03 삼국사기(1145)
(신라)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 등 7성을 빼앗았고, 또한 미질부에 진군해 왔다. 우리 군사와 백제· 가야의 구원병이 길을 나누어 막으니 적이 패해 물러갔다. 이하 서쪽까지 추격해 그들을 물리쳤는데 1천여 명을 목베었다.
39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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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4-10 삼국사기(1145)
(고려) 사신을 위(北魏)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인(魏人)이 우리 나라가 강하다고 여겨,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南齊 479-502)의 사신을 첫 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에 두었다.
40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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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6-01 삼국사기(1145)
(신라)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삼았다. 일선계(一善界) 장정 3천 명을 징발해서 삼년(三年)과 굴산(屈山) 두 성을 고쳐 쌓았다.
-- 일선은 지금의 선산이고 굴산은 삼년산성 아래 옥천 청산으로 추정된다.
4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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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0 남제서(537)
위(北魏)가 또 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경에 들어가니,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그리고 목간나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 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35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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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1 위서(554)
연(璉 장수왕)이 죽은 나이가 100여세였다. 고조는 동쪽 교외에 나가 거애하고, 알자복야 이안상을 보내 차기대장군 태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에 추증하고 시호를 강(康)이라 하였다. 또 대홍려를 보내 연(璉)의 손자 운(雲 문자왕)을 사지절 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에 배하고, 의관과 복장·기물 및 수레·깃발 따위의 물건들을 하사하였다.
40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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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5 남제서(537)
"지난 490년에는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39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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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9 삼국사기(1145)
(백제)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서, 도적이 많이 생기자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자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한산 사람들 중에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2천 명이나 되었다.
漢山人亡入髙句麗者二千
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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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01 삼국사기(1145)
(백제) 왕이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에서 묵었다.이전에 왕이 백가로 하여금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핑계로 퇴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백가는 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러서 12월에 이르러 왕이 사망하니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
25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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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11 삼국사기(1145)
(백제)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斯摩, 혹은 隆이라고도 한다)이니 모대의 둘째 아들이다. 신장이 8척이오,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이 그를 따랐다. 모대왕이 재위 23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25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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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제(南齊)-양(萧梁) 왕조교체
제나라 말기 황제 동혼후는 폭거를 저질러 많은 대신들을 살해하고, 종족인 소의을 살해했다. 옹주자사로써 양양에 주둔하고 있던 동생 소연이 폭군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동혼후를 죽이고, 화제을 옹립한 뒤 502년 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하였다.
40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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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양서(梁書 636 唐·姚思廉)
진(東晉) 안제(397-419)때 왜왕 찬(贊)이 있었다. 찬(贊)이 죽자 동생 미(彌)를 왕으로 세웠다. 미(彌)가 죽자 아들 제(濟)를 왕으로 세웠다. 제(濟)가 죽자 아들 흥(興)을 왕으로 세웠다. 흥(興)이 죽자 동생 무(武)를 왕으로 세웠다. 제(南齊) 건원(479-482)때 무(武)에게 지절독 倭新羅任那伽羅秦韓慕韓 육국제군사 진동대장군의 벼슬을 내렸다. 고조(502-549)가 즉위하자 무(武)를 정동장군 직함으로 올려 주었다.
4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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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우전팔번 신사 인물화상경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계미년 8월 10일 대왕의 연간에 남제왕이 의자사가(おしさか)궁에 있을 때 사마가 장수를 염원하며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보내어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다.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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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507 위서(554)
세종이 동당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실불이 말하기를,
"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 여러 대에 걸쳐 충성하여 땅에서 나거나 거두어들이는 것을 조공에 빠뜨리지 않았었습니다. 오직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珂는 섭라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 國의 王인 臣 雲은 끊어진 나라를 잇는 의리를 생각하여 모두 저희 나라로 옮겨 살게 하였습니다."
40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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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04 일본서기(720)
백제왕이 사아군을 보내어 조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전에 조를 바친 사신 마나는 백제국주의 골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가 사아를 보내어 조정을 섬깁니다”라 하였다. 드디어 아들이 있어 법사군이라 하였는데 곧 왜군의 선조다.
25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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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02 일본서기(720)
백제에 사신을 보냈다[백제본기에 구라마치지미가 일본으로부터 왔다고 하였으나 자세하지 않다. ] 임나의 일본 현읍(日本 縣邑)에 있는 백제의 백성으로 도망하여 호적에서 빠진 지 3·4대(代) 되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백제로 옮기고 호적에 넣었다.
3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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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09 삼국사기(1145)
(백제) 고구려가 가불성을 습격하여 빼앗고, 다시 군사를 옮겨 원산성을 격파하니 죽이거나 약탈하여 간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용감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위천 북쪽에 나가 싸우니 고구려 병사들이 왕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가벼이 여겨 진을 치지 않았으므로 왕이 기발한 작전을 써서 기습을 하여 크게 무찔렀다.
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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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12 일본서기(720)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임나국의 상치리(上哆唎)·하다리(下多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4현을 청했다. ... 이로 말미암아 사신을 바꾸어 칙을 선포하고 내리는 물건과 제지를 붙여서 표에 따라 임나의 4현을 주었다.
33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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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06 일본서기(720)
백제가 저미문귀 장군과 주리즉이 장군을 수적신압산에 딸려 보내어 오경박사 단양이를 바쳤다. 따로 아뢰기를 “반파국이 저희 나라 기문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엎드려 청하옵건대 천은으로 본래 속했던 곳으로 되돌려 주게 해주십시오.”라 하였다.
32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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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4-03 일본서기(720)
반파(伴跛)가 자탄과 대사(帶沙)에 성을 쌓아 만해와 이어서 봉수와 군창을 설치하여 일본에 대비했다. 또 이열비와 마수비에 성을 쌓아 마차해와 추봉에 걸치게 했다. 사졸과 병기를 모아 신라를 핍박하여 백성을 약탈하고 촌읍을 노략질하였으니 흉악한 세력이 가해진 곳은 남겨진 것이 거의 없었다. 포학하고 사치하였으며 괴롭혀 해를 끼치고 침략하여 죽인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이루 다 실을 수 없다.
24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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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5-02 일본서기(720)
이 달 사도도에 이르러 반파(伴跛)인이 한을 품고 독을 머금었으며 강성함을 믿고 사납기 이를 데 없음을 전해 들었다. 물부련은 수병 5백 명을 이끌고 곧바로 대사(帶沙)강으로 나아갔으며 문귀장군은 신라로부터 갔다.
25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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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5-04 일본서기(720)
물부련이 대사(帶沙)에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반파(伴跛)가 군사를 일으켜 가서 정벌했다. 옷을 벗기고 가지고 간 물건들을 빼앗고 막사를 모두 불태우자, 물부련 등이 두려워 도망해 숨어서 겨우 목숨을 보존하여 문모라(섬 이름이다)에 머물렀다.
25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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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05 일본서기(720)
백제가 전부의 목리부마갑배를 보내어 물부련 등을 기문(己汶)에서 맞이하여 위로하고 이끌어서 나라로 들어왔다. 여러 신하들이 각각 옷과 부월·옷감을 내어 국물에 더하여 조정에 쌓아놓고 은근하게 위로했으며 상과 녹이 매우 많았다.
25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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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11 삼국사기(1145)
(백제) 사신을 양(梁 502-557)에 보내 조공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에게 격파당하여 쇠약해진지가 여러 해였다. 이 때에 이르러 표를 올려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드려 비로소 우호를 통하였으며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일컬었다.
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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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12 삼국사기(1145)
(백제) 양(梁 502-557) 고조가 조서를 보내 왕을 책명하여 말하기를 "행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여륭은 해외에서 번방을 지키며 멀리 와서 조공을 바치니 그의 정성이 지극하여 나는 이를 가상히 여긴다. 마땅히 옛 법에 따라 이 영광스러운 책명을 보내는 바,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으로 봉함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25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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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이전 (<532) 삼국사기(1145)
(신라) 금관국(金官國)의 왕인 김구해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아들인 노종, 둘째 아들인 무덕, 막내 아들인 무력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인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25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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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06 일본서기(720)
근강모야신이 군사 6만을 이끌고 임나에 가서 신라에게 멸망당한 남가라·녹기탄을 다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 이 때 축자국조 반정이 몰래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꾸물거리다가 해를 넘겼다. ... 이 때문에 모야신은 길이 막혀서 중도에서 지체했다. 천황은 大伴大連金村과 物部大連麤鹿火·許勢大臣男人 등에게 “축자의 반정이 반란을 일으켜 西戎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 누가 장수가 될 만한가”라고 조를 내렸다.
26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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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04 일본서기(720)
임나왕 기능말다한기가 와서 조회하였다(기능말다란 대개 아리사등이다). 대반대련금촌에게 아뢰기를 “바다 밖의 여러 번국들은 태중천황이 내관가를 두었을 때부터 본토를 저버리지 않았으므로 그 땅을 봉하였는데 그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라는 원래 내려주었던 경계를 어기고 자주 경계를 넘어 침략해 오니 청컨대 천황께 아뢰어 신의 나라를 구해 주십시오”라 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임나왕은 가라왕을 뜻한다.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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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04 일본서기(720)
신라는 그 상신 이질부례지간기로 바꾸어 보냈는데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칙을 듣기를 청했다. 모야신이 멀리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고 무리가 수천 명인 것을 보고, 웅천(熊川)으로부터 임나의 기질기리성으로 들어갔다. 상신은 4개의 촌(金官·背伐·安多·委陀가 4개 촌이다. 어떤 책에는 多多羅·須那羅·和多·費智를 4개 촌이라 하였다)을 노략질하여 빼앗고 사람과 물건을 다 가지고 본국에 들어갔다.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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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10 삼국사기(1145)
(백제) 고구려왕 흥안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쪽 변경 혈성을 함락시켰다. 왕이 좌평 연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 벌판에서 항전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사망자가 2천여 명이었다.
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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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09 일본서기(720)
(아리사등은) 구례사기모를 보내어 신라에 가서 청병하고 노수구리를 백제에 보내어 청병했다. 모야신이 백제병이 온다는 것을 듣고 배평(背評은 지명인데 또한 능비기부리라고도 한다)에서 맞아 토벌했는데 부상하거나 죽은 자가 반이었다. 백제는 신라와 함께 성을 에워쌌다. 두 나라는 편리한 곳을 찾아 한 달을 머물다가 성을 쌓고 돌아갔는데 구례모라성이라 한다. 돌아올 때 길목의 騰利枳牟羅·布那牟羅·牟雌枳牟羅·阿夫羅·久知波多枳의 다섯 성을 쳐부수었다.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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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10 일본서기(720)
조길사가 임나로부터 와서 “모야신은 사람됨이 거만하고 거칠며 다스리는 것을 익히지 않아 끝내 화해시키지 않고 가라를 소란하게 했습니다. 거침이 없고 마음대로 하여 환난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라 아뢰었다. 그리하여 목협자를 보내어 불러 들였다.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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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10 이후 일본서기(720)
모야신이 부름을 받아 대마에 이르러 병에 걸려 죽었다. 장송을 위한 배는 강을 거슬러 올라 근강에 이르렀다. 그 처가 노래하였다. "매방을 거쳐 피리를 불며 배가 올라오네. 근강의 모야라는 젊은 서방님이 피리를 불며 올라오네." 한편 목협자가 처음 임나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에 있는 일본인들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가라구이(柯羅屨儞 からくに)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목협자는 왔는가. 저 멀리 일기로부터 목협자가 왔네."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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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0-09 일본서기(720)
천황이 여러 신하에게, “어느 정도의 군사가 있으면 신라를 칠 수 있겠는가”하고 물었다. 물부대련미여 등이, “적은 군사로는 쉽게 칠 수 없습니다. 지난 번 남대적천황 6년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임나의 상치리(上哆唎)·하치리(下哆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네 현을 청하였는데, 대반대련금촌이 표에서 청하는 대로 구하는 곳을 내려 주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의 원망이 여러 해 동안 쌓여 갔으니 가볍게 칠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26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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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4 일본서기(720)
안라의 차한기 이탄해, 대불손, 구취유리 등과 가라의 상수위 고전해, 졸마의 한기, 산반해의 한기의 아들, 다라의 하한기 이타, 사이기의 한기의 아들, 자타의 한기 등이 임나 일본부의 길비신과 더불어 백제에 가서 함께 조칙을 들었다. 백제의 성왕이 임나의 한기들에게,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더불어 힘을 다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천황에게 의지하면 임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기뻐하며 돌아갔다.
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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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7 일본서기(720)
백제는 안라의 일본부가 신라와 더불어 계책을 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 나솔 비리막고, 나솔 선문, 중부 나솔 목리미순, 기신 나솔 미마사 등을 보내 안라에 가서 신라에 온 임나의 집사를 불러 임나를 세울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 따로 안라 일본부의 하내직이 신라와 공모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 그리고 왕은 임나에게, “경(卿) 등이 번번이 감언을 믿고 경솔하게 거짓말에 속아서 임나국을 멸하고 천황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라고 말하였다.
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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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3-11 일본서기(720)
진수련을 보내어 백제에 명령하기를 “임나의 하한에 있는 백제의 군령과 성주는 일본부에 귀속시켜야 한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조서를 가지고 가서 선포하여 “그대가 여러 번 표를 올려 꼭 임나를 세우겠다고 말한 것이 10여 년이 되었다. 표에서 아뢴 바는 이와 같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하였다. 대저 임나는 그대 나라의 동량이다. 만일 동량이 부러지면 어떻게 집을 짓겠는가. 짐의 걱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대는 모름지기 빨리 세우도록 하라.”라고 말하였다.
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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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4-11 일본서기(720)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일본부 신하와 임나 집사를 불러 “천황에게 조알하기 위하여 보낸 나솔 득문, 허세의 나솔 기마, 물부의 나솔 기비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이제 일본부 신하와 임나국 집사는 마땅히 와서 칙을 듣고 함께 임나의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의 길비신, 안라의 하한기 대불손과 구취유리, 가라의 상수위 고전해, 졸마군, 사이기군, 산반해군의 아이, 다라의 이수위 흘건지, 자타한기, 구차한기가 이에 백제에 나아갔다.
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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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5 일본서기(720)5
이 해 고려가 크게 어지러워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다. 백제본기에는 “12월 갑오에 고려국 세군과 추군이 궁문에서 싸웠는데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세군이 패하고 군사를 해산하지 않은 지 사흘이 되자 세군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무술에 박국(狛國)의 향강상왕(안원왕)이 죽었다”라고 하였다.
40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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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8-06-02 일본서기(720)
백제에 사신을 보내 조를 내려, “덕솔 선문이 돌아간 후에 잘 도착하였는가. 또한 소식은 어떠한가. 짐이 듣건대 너희 나라는 박적(狛賊 고려)의 침해를 받았다고 하는데, 마땅히 임나와 함께 힘써 도모하여 전과 같이 막도록 하라”고 하였다.
4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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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9-10 삼국사기(1145)
(백제) 왕이 양나라 서울에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사신이 그곳에 이르러 성과 대궐이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모두들 대궐 단문 밖에서 소리내어 울었는데, 행인들이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경(侯景)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들을 투옥하였다. 그 후 그들은 후경의 난이 평정된 뒤에야 비로소 귀국하였다.
25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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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6-01 일본서기(720)
(왜) 백제 왕자 혜가 돌아가기를 청하자 병기와 좋은 말을 매우 많이 주었다. 또한 빈번히 상으로 물품을 내려 주었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찬탄하는 바가 되었다. 이에 아재신, 좌백련, 파마직을 보내어 축자국의 수군을 이끌고 그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하여 보내 주었다.
35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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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1 일본서기(720)
이 해 다시 奴氐 大舍를 보내어 지난 번의 調賦를 바쳤다. 難波의 大郡에서 여러 蕃國들의 서열을 매겼는데, 掌客 額田部連과 葛城直 등이 백제의 아래쪽 열에 서게 하여 인도했다. 大舍가 화를 내고 돌아가 館舍에 들지 않고 배를 타고 돌아가 穴門에 이르렀다.
35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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