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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la > -0057~0290 ❶ 三韓의 形成 |
三韓¹=馬韓+辰韓+弁韓=韓國¹
┆반도의 북부에 朝鮮, 眞番 그리고 濊가 있었는데 漢이 병합하고 樂浪郡을 설치하였다. 남부에는 辰國이 있었는데 樂浪郡에서 떨어져 나온 眞番의 일부와 함께 韓이라 불리게 되었다. 韓에는 馬韓, 辰韓 그리고 弁韓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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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史記(1145) 新羅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고허촌의 우두머리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었으므로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만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거두어서 길렀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였으므로 그를 받들어 존경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
1903#3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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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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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 三國史記(1145)
2월에 호공을 마한에 보내 예를 갖추니 마한 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했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대답했다. “... 이에 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그리고 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좌우가 간하여 그치고 돌아가게 해주었다.
1903#26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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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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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 추모왕 피살
왕망과 맥고려의 갈등은 한서(82), 삼국지(289), 후한서(445)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 실려있다. 그러나 왕망에 의해 죽은 인물이 한서와 후한서에는 고려왕 추(騶), 삼국지에는 고려왕 도(騊)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고려 장수 연비(延丕)로 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414)에는 추모왕(鄒牟王)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되어있어 시신 없이 장사를 지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1903#5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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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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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5~0044 王調, 崔理, 廉斯
왕망 반대 세력이 세운 경시제가 25년에 쫓겨나자 낙랑의 토착인 王調가 군수를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칭했다. 한나라 왕조를 복원한 광무제는 30년에 태수 왕준을 낙랑에 보내 난을 진압하게 하였다.
광무제는 30년에 낙랑군의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縣을 모두 侯國으로 만들었다.
32년에 낙랑왕 崔理는 옥저에서 만난 맥고려 왕자 호동에게 딸을 시집보냈으나 37년에 맥고려의 침공을 받고 병합되었다.
44년에는 한국의 廉斯 사람들이 낙랑에 귀부하였다.
1903#2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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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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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三國史記(1145)
김유신은 왕경인이다. 12세조 수로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후한(後漢) 건무 18년 임인 구봉에 올라 가락(駕洛)의 9촌을 보고는 마침내 그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고 하였다가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자손들이 서로 이어져 9세손 구해에 이르렀는데, 혹 구차휴라고도 하며 유신에게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는 신라와 더불어 같은 성이다.
1903#27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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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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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삼국유사(1281)
개벽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에 아홉 간(干)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는 추장으로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은 산과 들에 스스로 모여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의 세조 광무제 건무(建武) 18년 임인 3월 계욕일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1903#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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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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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史記(1145)
탈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때 나이는 62세였다. 성은 석씨이고 왕비는 아효부인이었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다. 처음에 금관국의 해변에 이르렀는데 금관 사람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남해왕 5년에 그가 어질다고 듣고 딸을 그의 처로 삼았다. 7년에는 등용해 대보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1903#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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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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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5.03 三國史記(1145)
밤에 왕이 金城 서쪽의 始林 나무들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 살펴보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고하니 왕은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게 했다. 작은 남자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자태가 뛰어나게 훌륭했다.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閼智라 했다. 금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金氏라 했다. 시림의 이름을 雞林으로 고치고 국호를 삼았다.
1903#4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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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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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 파사 이사금(23년)
8월에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이 강역을 다투다가, 왕을 찾아와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를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금관국 수로왕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하고, 그를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의논하여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는데, ...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가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왕이 노하여 군사로 음즙벌국을 치니 그 우두머리가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1903#26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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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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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6.125 三國志(289)
상제와 안제 연간에 구려왕 궁(宮)이 자주 요동을 침입하였으므로 다시 현도에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채풍과 현도태수 요광은 궁이 두 군(郡)의 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궁은 몰래 군대를 파견하여 현도군을 공격해 후성을 불사르고 요수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였다. 그 뒤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채풍이 가벼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추격하였다가 패하여 죽었다.
1903#4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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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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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1 後漢書(445)
봄에 유주자사 풍환과 현도태수 요광과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우두머리를 붙잡아서 목베고 병마와 재물을 노획하였다. 궁(宮)은 이에 사자(세자) 수성에게 군사 2천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요광 등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수성은 험요지를 점거하여 대군을 막고는 몰래 3천여명의 군사를 보내어 현도와 요동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명을 살상하였다.
1903#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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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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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8 삼국유사(1281)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 일관(日官)이 나아가 아뢰기를, ... 하면서 이에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자, 그 말대로 제사를 지낸 이후에 해와 달이 그 전과 같이 되었다. 그 비단을 왕의 창고에 잘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였다. 또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하였다.
1903#3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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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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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4.220 三國志(289)
건안 연간에 공손강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加)와 함께 각기 하호 3만명을 이끌고 강(康)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 유역에 옮겨 살았다. 항복했던 호(胡)도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고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건너가고 그 아들은 구려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고추가 교위거가 바로 그 사람이다
1903#40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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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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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동이 설명 시점
공손연까지 3대가 계속 요동을 차지하자 천자는 그 지역을 포기하고 해외를 맡겼다. 그 결과 동이와의 관계가 끊어져 중국과 통하지 않게 되었다. 경초 연간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연을 죽이고 또 몰래 바다를 건너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되찾았다. 그러자 해외가 안정되어 동이들이 굴복하였다.
그 뒤 고구려가 배반하므로 다시 약간의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하면서 매우 먼 지방까지 쫓으니 오환과 골도를 넘고 옥저를 거쳐 숙신의 왕정을 짓밟고 동으로 큰 바다에 이르렀다.
1903#5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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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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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동이 설명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서로 바다가 경계이고 남으로 倭와 접한다.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이 있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伯濟國을 비롯한 54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큰 나라는 만여 집이고 작은 나라는 수 천 집인데 합하면 10여만 집이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는데 斯盧國을 비롯한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변한도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진한과 변한의 큰 나라는 4-5천 집이고 작은 나라는 6-7백 집이어서 합하면 4-5만 집이다.
1903#6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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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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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6 진서(648)
부여후왕 의라는 하감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현재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서 다시 옛 나라를 회복하기를 원하며 원조를 요청하였다. 감은 전열을 정비하고 독우 매침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호송하게 하였다. 모용외 또한 그들을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침이 외와 싸워 크게 깨뜨리니, 외의 군대는 물러가고 라는 나라를 회복하였다.
그 후에도 외는 매번 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팔아 먹었다. 황제는 그것을 가엾게 여기어 부여 사람의 매매를 금지시켰다.
1903#5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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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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