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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史記(1145) 新羅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고허촌의 우두머리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었으므로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만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거두어서 길렀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였으므로 그를 받들어 존경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
3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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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8.07 日本書紀(720)
임나인 소나갈질지가 자기 나라에 돌아가고자 청하였다. 선황의 시대에 조공하러 왔다가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나갈질지에게 많은 상을 주고 붉은 비단 1백 필을 가지고 가 임나왕에게 주게 하였다. 그러나 신라인이 길을 막고 그것을 빼앗았다. 그 두 나라의 원한은 이 때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26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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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8 三國史記(1145) 新羅
4월 그믐 기해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려다가 밤에도 집의 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를 들에 그대로 쌓아둔 것을 보고는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가 있는 나라라 할 만하다. 우리들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한다면 도둑과 다름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26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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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 三國史記(1145)
2월에 호공을 마한에 보내 예를 갖추니 마한 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했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대답했다. “... 이에 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그리고 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좌우가 간하여 그치고 돌아가게 해주었다.
26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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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9 三國史記(1145) 新羅
마한왕이 죽었다. 어떤 사람이 임금을 달래어 말하였다. "서한의 왕이 지난번에 우리의 사신을 욕보였는데 지금 상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고는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26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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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 남해 차차웅(1년)
7월에 낙랑의 군사가 와서 금성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 좌우의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적이 우리가 국상을 당하였음을 다행으로 여겨서 망령되게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적이 잠시 후에 물러갔다.
14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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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 추모왕 피살
왕망과 맥고려의 갈등은 한서(82), 삼국지(289), 후한서(445) 그리고 삼국사기(1145)에 실려있다. 그러나 왕망에 의해 죽은 인물이 한서와 후한서에는 고려왕 추(騶), 삼국지에는 고려왕 도(騊)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고려 장수 연비(延丕)로 되어 있다. 광개토왕릉비(414)에는 추모왕(鄒牟王)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되어있어 시신 없이 장사를 지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5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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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5~0044 王調, 崔理, 廉斯
왕망 반대 세력이 세운 경시제가 25년에 쫓겨나자 낙랑의 토착인 王調가 군수를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칭했다. 한나라 왕조를 복원한 광무제는 30년에 태수 왕준을 낙랑에 보내 난을 진압하게 하였다.
광무제는 30년에 낙랑군의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縣을 모두 侯國으로 만들었다.
32년에 낙랑왕 崔理는 옥저에서 만난 맥고려 왕자 호동에게 딸을 시집보냈으나 37년에 맥고려의 침공을 받고 병합되었다.
44년에는 한국의 廉斯 사람들이 낙랑에 귀부하였다.
2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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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三國史記(1145)
김유신은 왕경인이다. 12세조 수로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후한(後漢) 건무 18년 임인 구봉에 올라 가락(駕洛)의 9촌을 보고는 마침내 그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고 하였다가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자손들이 서로 이어져 9세손 구해에 이르렀는데, 혹 구차휴라고도 하며 유신에게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는 신라와 더불어 같은 성이다.
27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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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2 삼국유사(1281)
개벽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에 아홉 간(干)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는 추장으로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은 산과 들에 스스로 모여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의 세조 광무제 건무(建武) 18년 임인 3월 계욕일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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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7 三國史記(1145)
탈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때 나이는 62세였다. 성은 석씨이고 왕비는 아효부인이었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다. 처음에 금관국의 해변에 이르렀는데 금관 사람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남해왕 5년에 그가 어질다고 듣고 딸을 그의 처로 삼았다. 7년에는 등용해 대보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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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9.07 日本書紀(720) 수인천황 88년
(왜) 가을 7월 己酉 초하루 戊午 여러 신하들에게 조를 내려, “짐이 듣자하니 신라 왕자 天日槍이 처음 올 때에 가지고 온 보물이 但馬에 있다고 한다. 처음에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귀하다고 여겨 神寶로 삼았는데, 짐이 그 보물을 보고자 한다”라 하고, 그 날 사자를 보내 天日槍의 증손 淸彦에게 조를 내려 바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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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5.03 三國史記(1145)
밤에 왕이 金城 서쪽의 始林 나무들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 살펴보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고하니 왕은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게 했다. 작은 남자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자태가 뛰어나게 훌륭했다.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閼智라 했다. 금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金氏라 했다. 시림의 이름을 雞林으로 고치고 국호를 삼았다.
4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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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2 漢書(漢 班固)
漢의 高祖 元年(-206)부터 新의 地皇 四年(23)까지 229년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紀12편, 表8편, 志10편, 傳70편 그리고 共10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23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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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6 파사 이사금(17년)
9월에 가야인이 남쪽 변경을 습격하였으므로 가성주(加城主) 장세(長世)를 보내 막게 하였으나 적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왕이 분노하여 용맹한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나가서 싸워 그들을 깨뜨렸는데, 사로잡거나 죽인 자가 매우 많았다.
26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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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 파사 이사금(23년)
8월에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이 강역을 다투다가, 왕을 찾아와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를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금관국 수로왕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하고, 그를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의논하여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는데, ...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가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왕이 노하여 군사로 음즙벌국을 치니 그 우두머리가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26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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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6.125 三國志(289)
상제와 안제 연간에 구려왕 궁(宮)이 자주 요동을 침입하였으므로 다시 현도에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채풍과 현도태수 요광은 궁이 두 군(郡)의 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궁은 몰래 군대를 파견하여 현도군을 공격해 후성을 불사르고 요수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였다. 그 뒤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채풍이 가벼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추격하였다가 패하여 죽었다.
4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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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5 지마 이사금(4년)
2월에 가야가 남쪽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에 몸소 가야를 정벌하였는데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를 건넜다. 가야인이 군사를 수풀 속에 숨겨두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왕이 깨닫지 못하고 똑바로 나아가니 복병이 일어나 몇 겹으로 에워쌌다. 왕이 군사를 지휘하여 분발하여 싸워 포위를 뚫고 퇴각하였다.
26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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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1 後漢書(445)
봄에 유주자사 풍환과 현도태수 요광과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우두머리를 붙잡아서 목베고 병마와 재물을 노획하였다. 궁(宮)은 이에 사자(세자) 수성에게 군사 2천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요광 등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수성은 험요지를 점거하여 대군을 막고는 몰래 3천여명의 군사를 보내어 현도와 요동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명을 살상하였다.
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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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1 後漢書(445)
여름에 다시 요동의 선비 8천여명과 함께 요수을 침공하여 관리와 민간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채풍 등이 신창에서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공조인 경모와 병조연인 용서와 병마연인 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가리다가 모두 진중에서 죽으니 죽은 사람이 백여명이나 되었다.
4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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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5 지마 이사금(14년)
정월에 말갈(靺鞨)이 북쪽 변경에 대거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에 또 대령책(大嶺柵)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를 지났으므로 왕이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백제가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도우니 적병이 듣고서 물러갔다.
26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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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8 삼국유사(1281)
동해의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닷가에 나가 해초를 따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 연오를 태우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일본국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 “이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다.” 하고 이에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32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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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8 삼국유사(1281)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 일관(日官)이 나아가 아뢰기를, ... 하면서 이에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자, 그 말대로 제사를 지낸 이후에 해와 달이 그 전과 같이 되었다. 그 비단을 왕의 창고에 잘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였다. 또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하였다.
3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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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9 三國志(289)
현도태수 경림이 그들(고려)을 토벌하여 수 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으니 백고(신대왕)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후한서(後漢書 445): 현도태수 경림이 (고려를) 토벌하여 수백명을 죽이니 백고(신대왕)가 항복하여 현도에 예속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4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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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0.204 三國志(289)
부여는 본래 현도에 속하였다. 한나라 말년에 공손탁이 해동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외이들을 위력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는 바꾸어 요동군에 복속하였다. 이 때에 구려와 선비가 강성해지자, 탁(度)은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일족의 딸을 시집보내었다.
40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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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4.220 三國志(289)
건안 연간에 공손강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加)와 함께 각기 하호 3만명을 이끌고 강(康)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 유역에 옮겨 살았다. 항복했던 호(胡)도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고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건너가고 그 아들은 구려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고추가 교위거가 바로 그 사람이다
40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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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4.220 三國志(289)
건안 연간에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장창 등을 파견하여 한(漢)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40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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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0.226 三國志(289)
읍루는 한대 이래로 부여에 신속되었는데 부여가 세금과 부역을 무겁게 물리자 황초 연간에 반란을 일으켰다. 부여에서 여러 번 정벌하였으나 그 무리가 비록 수는 적지만 험한 산 속에 거주하는데다가 이웃 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활과 화살을 두려워하여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40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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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0.265 위략(魏略)
魏略云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 - 唐 顔師古
왜(倭)는 대방군 동남 쪽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산이 많은 섬에 의거하여 나라를 이루고 산다. 바다 건너 천리에 또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倭)의 종족이다.
40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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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7 三國史記(1145)
(고려) 왕(동천왕)은 성품이 관대하고 인자하였다. 왕후가 왕의 마음을 시험해보려고 왕이 다른 곳으로 나가 놀기를 기다려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게 하였다. 왕이 돌아와 말하기를 “말이 갈기가 없어 어여쁘구나.”라고 하였다. 또 시중드는 사람을 시켜 식사를 올릴 때 왕의 옷에 국을 엎질렀으나 역시 화를 내지 않았다.
2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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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9.12(<238) 三國志(289)
조서를 내려 倭 여왕에게 말했다. "친위왜왕 비미호에게 제조한다. 대방태수 유하가 관리를 보내 너희 대부 난승미와 차사 도시우리를 호송하게 했고 너희들이 바친 남자노비 4명, 여자노비 6명, 반포 2필 2장이 도착했다. 너는 아주 멀리 있으면서도 사자를 보내 조공하니 이것이 너의 충효로구나. 갸륵하도다. 이제 너를 친위왜왕으로 임명하고 금인, 자수를 내리고 장봉하여 대방태수에게 보내 네게 하사토록 한다."
3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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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0 三國志(289)
(대방)태수 궁준이 건충교위 제준 등을 보내 조서와 인수를 받들어 왜국에 이르게 했다. 왜왕으로 임명하고 아울러 가져온 금(金), 비단, 융단, 칼(刀), 거울(鏡), 채물을 하사했다. 이에 왜왕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은조에 사례했다.
3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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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擧邑降
정시 6년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령(領, 단단대령) 동쪽의 예(濊)가 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불내후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4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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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辰韓八國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신지와 한인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2군은 마침내 韓을 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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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동이 설명 시점
공손연까지 3대가 계속 요동을 차지하자 천자는 그 지역을 포기하고 해외를 맡겼다. 그 결과 동이와의 관계가 끊어져 중국과 통하지 않게 되었다. 경초 연간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연을 죽이고 또 몰래 바다를 건너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되찾았다. 그러자 해외가 안정되어 동이들이 굴복하였다.
그 뒤 고구려가 배반하므로 다시 약간의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하면서 매우 먼 지방까지 쫓으니 오환과 골도를 넘고 옥저를 거쳐 숙신의 왕정을 짓밟고 동으로 큰 바다에 이르렀다.
5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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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동이 설명 시점
▐ 위서 동이전의 서문에는 曹魏가 245년에 高句麗를 토벌하고 난 뒤 수집한 자료로 동이전을 썼다고 되어 있다. 遂周觀諸國 采其法俗 小大區別 各有名號 可得詳紀 (드디어 여러 나라를 두루 관찰하고 그들 나라의 법령과 습속을 수집하여 나라의 크고 작음의 구별과 각국의 명칭을 상세하게 기록할 수가 있었다.)
이 동이전에는 伯濟國이 마한 54국의 하나로 나오고 斯盧國이 변진 24국의 하나로 나온다.
5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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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 三國志(289) 동이 설명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서로 바다가 경계이고 남으로 倭와 접한다.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이 있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伯濟國을 비롯한 54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큰 나라는 만여 집이고 작은 나라는 수 천 집인데 합하면 10여만 집이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는데 斯盧國을 비롯한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변한도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진한과 변한의 큰 나라는 4-5천 집이고 작은 나라는 6-7백 집이어서 합하면 4-5만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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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7 三國志(289)
(예가) 조정에 와 조공하므로 불내예왕으로 봉하였다.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계절마다 군(郡)에 와서 조알하였다. 2군에 전역이 있어 조세를 거둘 일이 있으면 공급케 하고 사역을 시켜 마치 백성처럼 취급하였다.
4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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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7 三國志(289)
정치 8년 태수 왕기가 관부에 도착하였다. 왜(倭) 여왕 비미호와 구노국 남왕 비미궁호는 평소 불화했는데 재사, 오월 등을 (대방)군으로 보내 서로 공격하는 상황을 설명한 적이 있다. 새조연사 장정 등을 파견해 가져간 조서와 황당을 난승미에게 하사하고 격문으로 이를 널리 알렸다.
4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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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8 이전 三國志(289)
비미호가 마침내 죽자 새롭게 남자 왕을 세웠으나 국중의 사람들이 승복하지 않아서 비미호 종실의 여자인 일여를 세웠다. 일여는 왜의 대부인 솔선중랑장 액사구 등 20인으로 하여금 장정 등을 송환시켰고 이때 남녀 생구 30인을 헌상하고 백주 5천개, 공청대구주 2매 그리고 이문잡금 20필을 공물로 바쳤다.
41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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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5 진(司馬晋 西晋 265-317) 건국
진(晉)은 사마염이 위(魏)의 마지막 황제로부터 자리를 넘겨받아 265년에 세운 왕조인데 오래 가지 못하고 316년 흉노에게 망했다. 이후 북중국에서는 북방계의 다섯 민족이 세운 16개의 나라가 흥망을 거듭했고 남중국에서는 사마예가 317년에 다시 세운 진(晉)이 송(劉宋), 제(蕭齊), 양(梁), 진(陳)으로 차례로 교체되었는데 이 시기를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41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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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9 ❰❰ 0209 「三國誤記」 新羅
7월에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가라(加羅)를 침범하려고 하였으므로 가라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6부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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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6 진서(648)
부여후왕 의라는 하감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현재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서 다시 옛 나라를 회복하기를 원하며 원조를 요청하였다. 감은 전열을 정비하고 독우 매침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호송하게 하였다. 모용외 또한 그들을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침이 외와 싸워 크게 깨뜨리니, 외의 군대는 물러가고 라는 나라를 회복하였다.
그 후에도 외는 매번 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팔아 먹었다. 황제는 그것을 가엾게 여기어 부여 사람의 매매를 금지시켰다.
5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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