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는 중국의 사서에 한보다 먼저 등장하고 조공의 기록도 빠르다. 또 남조의 기록에는 왜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고 남조가 이를 승인하는 관작을 내리는 이야기도 나온다. 북조의 사서에서도 왜가 한국에 대해 우위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吉野ヶ里遺跡(よしのがりいせき)
미생시대 초기에서 중기에 걸쳐 복강 지역에는 죽은 사람을 큰 독널에 넣어 묻는 풍습을 가진 민족이 있었다.
8380
COMMENT
•
吉野ヶ里遺跡(よしのがりいせき)
미생 시대의 마을은 도랑과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를 環濠集落이라 한다. 한국에서는 영남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시기적으로는 청동기시대다.
8381
COMMENT
•
0025~0220 후한(後漢)
전한이 신나라의 왕망에 의하여 멸망한 이후, 한 왕조의 일족인 광무제 유수가 한 왕조를 부흥시킨 나라이다. 수도를 낙양에 두었는데 그 위치가 전한의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기에 동한(東漢)이라고도 한다.
7859
COMMENT
•
0057 후한서(445)
建武中元二年倭奴國奉貢朝賀使人自稱大夫倭國之極南界也光武賜以印綬
왜의 노국이 공물을 바치고 조알하였다. 사신은 대부를 칭했는데, 왜국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나라다. 광무제는 인수를 하사하였다.
▶기록에 나타나는 倭의 최초 조공이다.
3443
COMMENT
•
0082 한서
樂浪海中有倭人分為百餘國以歲時來獻見雲
낙랑의 바다 가운데에는 왜인이 사는데, 100여 개의 나라로 갈라져 있고 해마다 와서 공물을 바친다.
▶한서에서는 조선, 예맥, 구려 그리고 倭까지 거론되었지만 韓은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423
COMMENT
•
0146~0233 高地性集落
미생 시대 중기부터 들과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 마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환호집락이 부락 단위의 전쟁을 대비한 것이었다면 고지성집락은 바다를 건너오는 적들과의 전쟁을 대비한 것이었다. 그래서 고지성집락은 倭國大亂과 연결한 설명이 많이 나오고 있다.
8379
COMMENT
•
0220~0265 위(曹魏)
위(魏)의 조비(曹丕)는 220년에 한(漢)의 마지막 황제로부터 자리를 넘겨받았는데, 이후 촉(蜀) 및 오(吳)와 다툼을 벌였다. 이 시기를 삼국시대라고 한다. 촉(蜀)과 오(吳)는 각각 264년과 280년에 위(魏)와 진(晉)에게 망했다.
7852
COMMENT
•
0220~0265 위략(魏略)
魏略云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 - 唐 顔師古
왜는 대방군 동남 쪽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산이 많은 섬에 의거하여 나라를 이루고 산다. 바다 건너 천리에 또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의 종족이다.
3519
COMMENT
•
0239-12(<238) 삼국지(289)
조서를 내려 倭 여왕에게 말했다. "친위왜왕 비미호에게 제조한다. 대방태수 유하가 관리를 보내 너희 대부 난승미와 차사 도시우리를 호송하게 했고 너희들이 바친 남자노비 4명, 여자노비 6명, 반포 2필 2장이 도착했다. 너는 아주 멀리 있으면서도 사자를 보내 조공하니 이것이 너의 충효로구나. 갸륵하도다. 이제 너를 친위왜왕으로 임명하고 금인, 자수를 내리고 장봉하여 대방태수에게 보내 네게 하사토록 한다."
7819
COMMENT
•
0240 삼국지(289)
(대방)태수 궁준이 건충교위 제준 등을 보내 조서와 인수를 받들어 왜국에 이르게 했다. 왜왕으로 임명하고 아울러 가져온 금(金), 비단, 융단, 칼(刀), 거울(鏡), 채물을 하사했다. 이에 왜왕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은조에 사례했다.
7820
COMMENT
•
0243 삼국지(289)
왜왕은 다시 사신으로 대부 이성기, 액사구 등 8명을 보내 노비, 왜금, 강청겸, 면의, 면포, 단목, 견부, 단궁시를 헌상했다. 액사구 등을 모두 솔선중랑장으로 임명하고 인수를 주었다.
7822
COMMENT
•
0245ᑀ 삼국지(三國志 289) 동이 설명 시점
공손연까지 3대가 계속 요동을 차지하자 천자는 그 지역을 포기하고 해외를 맡겼다. 그 결과 동이와의 관계가 끊어져 중국과 통하지 않게 되었다. 경초 연간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연을 죽이고 또 몰래 바다를 건너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되찾았다. 그러자 해외가 안정되어 동이들이 굴복하였다.
그 뒤 고구려가 배반하므로 다시 약간의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하면서 매우 먼 지방까지 쫓으니 오환과 골도를 넘고 옥저를 거쳐 숙신의 왕정을 짓밟고 동으로 큰 바다에 이르렀다.
7816
COMMENT
•
0245ᑀ 삼국지(三國志 289) 동이 설명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依山島爲國邑 舊百餘國 漢時有朝見者 今使譯所通三十國
왜인은 대방군 동남 쪽 큰 바다 가운데에 사는데,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나라와 마을을 이루었다. 이전에는 100여개 나라였는데, 한(漢) 조정에 알현하는 나라가 있었고, 지금은 사신이 왕래하는 곳이 30개 나라다.
(대마국에서 야마일국까지 8국 15만호가 있고 사마국에서 노국까지 21국이 있는데 여기에 야마일국에 소속되지 않은 구노국까지 합하면 모두 30국이다.)
3603
COMMENT
•
0245ᑀ 삼국지(三國志 289) 동이 설명
南至邪馬壹國 女王之所都 水行十日 陸行一月 官有伊支馬 次曰彌馬升 次曰彌馬獲支 次曰奴佳鞮 可七萬餘戶
남쪽으로 가면 야마일국에 이르는데, 여왕이 도읍한 곳으로 바닷길로 10일 동안 가고 육상으로 1개월 동안 간다. 관리로는 이지마가 있고, 그 다음은 미마승이라 부르며, 그 다음은 미마획지라 부르고, 그 다음은 노가제라 부른다. 7만여 호 정도가 있다.
(邪馬壹國은 邪馬臺國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3616
COMMENT
•
0247 삼국지(289)
정치 8년 태수 왕기가 관부에 도착하였다. 왜(倭) 여왕 비미호와 구노국 남왕 비미궁호는 평소 불화했는데 재사, 오월 등을 (대방)군으로 보내 서로 공격하는 상황을 설명한 적이 있다. 새조연사 장정 등을 파견해 가져간 조서와 황당을 난승미에게 하사하고 격문으로 이를 널리 알렸다.
7824
COMMENT
•
0248ᑅ 삼국지(289)
비미호가 마침내 죽자 새롭게 남자 왕을 세웠으나 국중의 사람들이 승복하지 않아서 비미호 종실의 여자인 일여를 세웠다. 일여는 왜의 대부인 솔선중랑장 액사구 등 20인으로 하여금 장정 등을 송환시켰고 이때 남녀 생구 30인을 헌상하고 백주 5천개, 공청대구주 2매 그리고 이문잡금 20필을 공물로 바쳤다.
7825
COMMENT
•
0265~0317 진(西晋)
진(晉)은 사마염(司馬炎)이 위(魏)의 마지막 황제로부터 자리를 넘겨받아 265년에 세운 왕조인데 오래 가지 못하고 316년 흉노에게 망했다. 이후 북중국에서는 북방계의 다섯 민족이 세운 16개의 나라가 흥망을 거듭했고 남중국에서는 사마예가 317년에 다시 세운 진(晉)이 송(劉宋), 제(蕭齊), 양(梁), 진(陳)으로 차례로 교체되었는데 이 시기를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7857
COMMENT
•
0267 ~ 0412
이 기간에는 중국의 사서에 왜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이전의 비미호 왕조가 이후의 왜5왕으로 그대로 이어졌는지, 아니면 왕조 교체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신무 천황의 동정 이야기가 이 기간에 있었던 일일 수 있다.
신무 천황의 동정은 '구주의 일향에 가라와 동일한 계통의 건국 설화를 가진 집단이 있었고 그들이 동쪽으로 정벌에 나서 내량에 있던 견고한 왕조(비미호 왕조?)를 무너뜨리고 그곳을 차지한다'는 이야기다.
8367
COMMENT
•
0413 ~ 0502ᑀ 왜5왕
왜왕의 왕위계승은 찬(讚,贊)=진(珍,彌)-제(濟)-흥(興)=무(武)로 이어졌는데 찬(讚)=진(珍)과 흥(興)=무(武)는 형제관계이고 진(珍,彌)-제(濟)-흥(興)은 부자관계다.
왜는 438년에 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요구했으나 송(劉宋)은 451년에 백제를 빼고 가라를 넣어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에 대한 것만 인정한다. 왜는 다시 478년에 송(劉宋)이 인정한 것에 백제를 넣어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에 ...
7851
COMMENT
•
0413 양서(636)
晉安帝時有倭王贊 贊死立弟彌 彌死立子濟 濟死立子興 興死立弟武 齊建元中除武持節督倭新羅任那伽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鎮東大將軍 高祖卽位進武號征東將軍
진나라 안제때 왜왕 贊이 있었다.
※진서의 기록을 토대로 시기를 413년으로 특정한다.
7809
COMMENT
•
0420 송(劉宋)
궁중 음모로 세력이 약화된 동진에서는 무장들의 정변 기회가 무르익었다. 처음으로 제위를 찬탈한 것은 환현(桓玄)이었는데, 그는 북조 왕조들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명성을 얻은 유유(劉裕)에게 타도되었다. 유유는 황제를 죽이고 꼭두각시 황제를 세웠다. 그러나 그 역시 죽이고 끝내 스스로 제위에 올라 송(劉宋)을 세웠다.
7854
COMMENT
•
0421 송서(488)
高祖永初二年詔曰倭讚萬里修貢遠誠宜甄可賜除授
고조가 조서를 내렸다. "왜의 讚이 만리 먼 곳에서 공물을 바쳤다. 먼 곳에서 보인 성의를 널리 알리기 위해 벼슬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
7810
COMMENT
•
0438 송서(488)
(元嘉十五年夏四月己巳)
以倭國王珍為安東將軍
왜국왕 珍을 안동장군으로 임명했다.
是歲 武都王 河南國 高麗國 倭國 扶南國 林邑國並遣使獻方物
이해에 무도왕, 하남국, 고려국, 왜국, 부남국, 임읍국이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7814
COMMENT
•
0438 송서(488)
讚이 죽자 아우 珍이 왕이 되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불렀다. 표를 올려 바른 벼슬을 요청해와 조서를 내려 안동장군 왜국왕에 봉했다. 珍이 또 왜수 등 13명에게 평서, 정로, 관군, 보국장군의 이름을 붙여 달라 하므로 모두 들어 주었다.
-- 송서 본기 문제 원가 15년의 기록을 바탕으로 시점을 438년으로 특정하였다.
7828
COMMENT
•
0445 후한서
倭在韓東南大海中依山島為居凡百餘國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國皆稱王世世傳統其大倭王居邪馬臺國
倭는 韓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100여개의 나라로 되어 있다.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킨 후, 漢과 사신의 왕래가 통하는 곳이 30여개 된다. 나라의 수장은 모두 왕을 칭하는데 대대로 왕통이 이어졌다. 그 대왜왕(大倭王)은 야마대국(邪馬臺國 やまたいこく)에 있다.
3628
COMMENT
•
0451 송서(488)
(元嘉)
二十八年加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如故并除所上二十三人軍郡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를 더하고 안동장군은 전과 같이 하고 아울러 올린 23인의 軍과 君을 제수하였다.
-- 왜가 요청한 6개 나라에서 백제를 빼고 가라를 넣어주었다.
7834
COMMENT
•
0462 송서(488)
濟가 죽자 세자인 興이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였다. 조하여 "왜왕의 세자 興은 여러 해 동안 충성을 하고 바깥 바다의 번국이 되어 교화를 받아들여 변경을 편안히 하였고 공손히 공직을 닦았다. 새로이 변경의 왕업을 이었으니 마땅히 작호를 내리되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한다."고 하였다.
-- 송서 효무제 대명 6년의 기록을 바탕으로 시점을 462년으로 특정한다.
7838
COMMENT
•
0462 남사(659)
濟死世子興遣使貢獻孝武大明六年詔授興安東將軍倭國王
濟가 죽자 세자인 興이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였다. 효무제 대명 6년에 조하여 興을 안동장군 왜국왕에 제수하였다.
7839
COMMENT
•
0478 宋書(488), 南史(659)
興이 죽자 아우인 武가 즉위하여 사지절 도독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였다. 武를 사지절 도독 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하였다.
7849
COMMENT
•
0479 제(南齊)
송(劉宋) 말기 소도성은 난릉 출신의 하급병사로 유휴범의 반란을 진압하여 권력자가 된 뒤 황제를 폐위하기로 결정하고 479년 순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南齊)를 건국했다.
7855
COMMENT
•
0479 남제서(537)
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爲鎮東大將軍
건원 원년에 왜 임금에게 새로 벼슬을 내려주어 사지절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으로 삼았다. 왜 임금 武는 호칭을 진동대장군이라 하였다.
7842
COMMENT
•
0502 양(萧梁)
제나라 말기 황제 동혼후는 폭거를 저질러 많은 대신들을 살해하고, 종족인 소의을 살해했다. 옹주자사로써 양양에 주둔하고 있던 동생 소연이 폭군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동혼후를 죽이고, 화제을 옹립한 뒤 502년 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하였다.
7856
COMMENT
•
0526~0539 梁職貢圖
斯羅國本東夷辰韓之小國也魏時曰新羅宋時曰斯羅其實一也或屬韓或屬倭國王不能自通使聘普通二年其王名募秦始使隨百濟奉表献方物 사라국은 본래 동이 진한의 한 소국이었다. 조위 때에는 신라라 했고 유송 때에는 사라라 했지만 사실은 하나다. 때로는 韓에 속했고 때로는 倭에 속했다. 국왕은 스스로 사신을 보내 조빙할 능력이 없었다. 521년에 募秦이라는 왕이 처음으로 백제의 편에 사신을 딸려보내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7848
COMMENT
•
0607 북사(659)
왜왕 다리사북호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아뢰길 "듣자오니 바다 서쪽 보살천자께서 불법을 다시 일으키신다 하니 사신을 보내 조배드립니다. 아울러 중 수십 명이 여기 와 불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하였다. 그 국서에는 '해 뜨는 곳 천자가 해 지는 곳 천자에게 글을 보내오. 별일 없으신가?' 어쩌고 저쩌고 하였다. 황제가 글을 보고 언짢아 홍려경에게 "오랑캐가 보낸 글이 무례하구나. 다시는 이런 말이 들리지 않게 하라." 하였다.
7847
COMMENT
•
0636 수서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多珍物並敬仰之恆通使往來
신라와 백제는 모두 왜(倭)를 대국으로 여기며 진귀한 물건이 많아서 공경하고 우러러보며 항상 사신을 통하고 왕래한다.
7845
COMMENT

-
